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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의 '광기'와 분노의 표적 찾기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29. 06:22

[경향의 눈]통치자의 ‘광기’와 분노의 표적 찾기

강진구 논설위원

 

프랑스 사회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정부의 집행권을 맡은 사람들은 결코 주인이 아니라 공복(公僕)인 만큼 주권자는 필요할 때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루소의 지적은 스스로를 공화국이라 부르는 나라의 기본철학이자 상식이기도 하다.

[경향의 눈]통치자의 ‘광기’와 분노의 표적 찾기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를 통과한 장관 해임건의안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부하는 장면을 보면서 새삼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해임 사유가 없다고 하지만 장관직은 ‘앞으로 잘하겠다’는 통치자에 대한 맹세만을 가지고 일하는 자리가 아니다. 신임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이미 주권자의 일반의지를 대변할 자질이 없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 장관은 재해를 당한 농민들에게 적용될 우대금리로 농협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개인 부동산을 구입한 것도 모자라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 시절 회삿돈으로 자신이 장로로 있는 교회에 헌금을 냈다. 그렇게 공직을 온갖 단물을 빠는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14조원의 예산을 관장하는 부처를 책임지게 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어디 그뿐인가. 박근혜 정부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 국민의 생명이 아니라 통치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대책 없는 쌀값 폭락에 절망해 서울로 올라간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 317일 만에 사망했는데도 대통령을 포함해 이 정권 어느 누구도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면서 두개골이 5㎝나 들어간 망자의 사인을 가리겠다며 유족의 반대에도 두 번씩이나 부검영장을 신청한 경찰의 뻔뻔함에는 말문이 막힐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껏 시민의 대표자로 뽑아놓은 여당 대표는 주권자가 아닌 대통령을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은 주권자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통치자의 ‘광기’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통치자의 개별의지는 끊임없이 주권자의 일반의지와 충돌한다. 이때 정부 관료들이 주권자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통치자의 개별의지를 따르면서 정부의 타락이 일어난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등장한 장관 후보들이 하나같이 타락한 인사들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권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아간 통치자들에게 반드시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루소는 잘 운영되고 있는 국가는 누구든지 집회에 자진하여 참석하지만 나쁜 정부 아래서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이 나랏일에 관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 국가는 망한 것이라고까지 했다. 반대로 시민들이 집회에 나가 스스로 대표가 되는 순간이 통치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순간이 된다.

루소의 통찰을 빌리자면 현 정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역시 선거를 통한 심판보다 주권자들이 집회를 통해 분노를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미 조직화돼 있는 노동자집단이 길거리로 나와 분노한 시민들과 결합하는 것은 정부 입장에서는 정권안보를 위협하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 백남기 농민의 사망은 일방적인 성과연봉제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파업과 겹쳐 일어났다. 정권의 위기관리 측면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것이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시민의 죽음과 공공부문의 불법적인 성과연봉제 도입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행정독재의 결과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백남기 농민 사태와 달리 당장 지하철과 철도 파업으로 출근길에 불편을 겪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분노의 표적을 멀리서 찾는 건 쉽지 않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이 공공부문 파업을 ‘시민을 볼모로 한 기득권 지키기’로 비난하고 있는 것은 분노의 표적을 바꿔치기하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4·13 총선 직후 박 대통령의 지시로 120개 공공기관에서 노동자의 동의 없이 이사회 의결만으로 도입된 불법적인 성과연봉제는 단순한 ‘밥그릇 싸움’을 넘어선다. 일방적인 성과연봉제가 정착되면 사용자는 노동자 동의 없이도 임금체계의 변경과 저성과자 해고 도입이 가능해진다. 성과연봉제 반대파업은 모든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프랑스의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세상이 복잡해져 분노의 이유가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 있지만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통치자의 광기에 주권자의 무서움을 보여주려면 집회에 참여해 분노를 표출하라. 집회에 참여할 기회가 나지 않는다면 파업에 박수를 보내라. 에셀에 따르면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82055025&code=990503#csidx46caf921e181095a2c777f58db0915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