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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자유에서, 자유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키려는 의지에서라는 페리클레스의 말은 헛소리? / 경향신문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0. 22:43

[정동칼럼]“평화운동을 일으키자”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

 

2016년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미국 일각에서 대북 선제타격을 공론화할 즈음, 한 더미의 바닥에서 함석헌의 <평화운동을 일으키자>란 책을 우연히 찾았다. 언젠가 한반도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 평화운동은 탈냉전과 민주화의 산물”이라 했던 나의 말에 대한 반성으로 읽고자 했던 책이었다. 함석헌은 냉전의 절정기인 1950년대 후반에 “누구보다도 세계 평화를 부르짖어야 할 우리나라에 평화운동이 도무지 없는 것은 놀랄 일이다”라고 일갈하고 있다. 1972년 5월에 발표한 글에서는 “평화운동이 가능하냐 하고 문제를 내놓는 그 태도부터가 잘못이라고 본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 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정동칼럼]“평화운동을 일으키자”

2016년 10월 현재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선제행동이 미국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질문될 정도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배치할 수 있을 정도로 핵능력을 제고하기 전에, 북한이 군사적 공격을 받았을 때 보복할 수 있는 핵능력을 가지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서 북한의 핵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담긴 질문이다. 즉 북한의 핵무기가 미국에 실질적 위협이 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 지휘부에 대한 선제타격까지 언급되고 있다. 김정은 제거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생각의 소산이다. 그러나 외교적 타협이 아닌 선제공격만이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란 유혹의 실행은 전쟁을 결과하곤 한다. 전쟁터는 한반도다.

한국정부는 미국발 선제타격론에 대해 찬반을 유보했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선제타격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선제타격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북한의 의도를 한국에 “핵을 사용하겠다고까지 공언하고 있고”, 앞으로도 핵능력의 강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읽고 있는 한국정부의 공식 대응은 북한붕괴의 유도와 군비증강이다.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는 방식의 북한적 체제전환이 없다면, 핵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다. 북한 주민에 대한 탈북권유는 그 전초다. “한·미동맹의 확장억제능력을 토대로”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 대량응징 보복능력으로 북핵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정책도 공식화된 상태다.

선제타격론과 북한붕괴론 그리고 역사상 최강의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행동변화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선제타격에 대해 선제타격으로 맞서겠다고 한다. 정부의 탈북 권유와 북한 정권의 인권유린과 공포정치 언급에 대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쏟아내며 “정밀핵타격이 청와대에 가해질 때”를 운운하고 있다. 억제이론에 따르면, 북한은 핵능력의 고도화와 더불어 국지적 도발이란 결의를 통해 자신의 억제력을 인정받고자 할 것이다.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과 무력시위는 상수에 가깝다. 서로 폭주하며 충돌할 수 있는 치킨게임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상대방의 의도를 자기방식으로 해석해서 전쟁이 발생하는 절멸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전쟁이란 극단적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시민들이다. 함석헌은 1972년의 글에서 평화운동이 불가능하다는 “망상”을 만들어내는 요인으로 “남북의 긴장”, “주위 강대국들의 야심”, “인간의 본성”, “민중의 도덕수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평화의 정말 방해자는 국가지상주의”라고 촌철한다. “무력국가로는 안된다”는 함석헌의 잠언을 나는 ‘평화국가’ 만들기로 읽는다. 본질적으로 비도덕적 존재인 국가의 형태변환을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함석헌은 “평화는 이 긴장, 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만 가능하다. 평화의 나라에 평화운동은 있을 수 없다. 평화는 전쟁의 불꽃 속에서만 피는 꽃이다. 삶은 죽음 속에서만 나오고, 기쁨은 근심걱정 속에서만 나오고, 사랑은 미움과 싸움 끝에만 나온다. 생명이 가는 길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러했다. 늘 불가능의 가능이다”라고 울림의 말을 한다.

지금 여기서 평화운동은 ‘반전’ ‘반핵’운동이어야 한다. 어느 한편이 비겁자가 되어야만 출구가 생기는 치킨게임의 소망적 종착지가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고 그 정도면 만족하려는 순간, 함석헌은 세력균형과 같은 “가짜 평화라도 있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바라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켜가지 못하게 한다. 핵무기와 핵억제가 아니라 반핵운동이 핵전쟁을 예방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평화운동은 함석헌의 말처럼 적과 친구를 가르는 인간본성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한반도 전쟁위기를 예방하는, 시민들 자유의지의 연대로서 평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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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092106035&code=990308#csidxe734b63ecdc53e8a341e7a6b9c9cd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