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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사모님”과 “아주머니”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2. 22:25

[문화비평]“사모님”과 “아주머니”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입력 : 2016.10.11 20:52:00 수정 : 2016.10.11 20:52:36

내 아들은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당연한 일이다. 내 처는 나를 “자기야!”라고 부른다. 어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학생들은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교수를 교수라 부르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일상의 배경이 하나의 무대이고 인간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라 정의했던 고프먼의 말을 빌려오자면, 나는 늘 같은 사람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배역을 맡고, 맡은 배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문화비평]“사모님”과 “아주머니”

내 자아는 무대 뒤에 독립적으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연극적 과정을 거쳐 지속적으로 (재)구성된다.

개그맨 김제동은 15개월 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군 시절의 경험담 하나를 얘기했고,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이 발언이 군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면서 김제동을 국정감사에 출석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왜 개그를 국정감사의 쟁점으로 삼는지, 왜 1년도 지난 일을 지금 문제로 삼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더 이상한 것은 사령관의 부인을 “사모님”이 아닌 “아주머니”라고 부른 일이 불경스럽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백승주 의원은 “저 정도의 ‘실수’로 영창을 보내지는 않을 걸로 사료된다”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실수라면, “사모님”이 옳은 호칭이었을까?

다 큰 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며 야단을 치는 어르신도 있다. 반세기 전에는 “자기”라는 호칭이 흉측한 호칭이라 비난받았다. “교수”는 직책명이기 때문에 존경이 담긴 호칭인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쉽지 않다.

젊은 여성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결례인가, 아닌가? 왜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을 “이모!”라 부르는 남성들이 많은가? 자기보다 손아래인 손님도 무조건 “언니”라 부르는 옷가게 점원들도 많이 봤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길 가다가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달라며 말을 걸 때 어떤 호칭이 제일 편한지.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모두 “저기요~”라는 답을 내놨다. 곰곰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서로가 익명인 채 어떤 고정적 관계도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을 갑자기 형이나 누나라 부를 이유는 없다. 신분증을 목에 걸고 다니지도 않으니 “학생!”이라 부를 수도 없다. 미국에서 길을 물을 때도 굳이 “써어~”라 하는 것보다 “익스큐스미”로 말을 거는 것이 제일 자연스럽다.

한국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호칭의 미묘함이라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내 배역에 걸맞은 이름으로 불리면 되는 것은 어느 언어건 다르지 않다. 고프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집 안에서 한 아이의 아빠 배역을 맡을 때 “아빠”로 불린다. 내 아들이지만, 만약 그가 내 수업을 듣고 있다면 나를 “교수님”이라 부를 것이다. 반대로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를 때 “아버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불편하다. 미용사는 내 자식도 내 아이의 친구도 아니란 말이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간 사람은 ‘손님(고객)’의 배역을 수행 중인 셈인데, 왜 “손님!” 대신 “어머님!”이라고 불려야 하는가. 만약 그가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다면 결례일 텐데 말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공연에 관객으로 간다면 교수로 불릴 이유가 없다. 사령관의 부인도 사모님이라 불릴 이유가 없다.

호칭은 관계를 함축한다. 그런데 어느 특정 상황에서의 호칭을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사용한다면, 그 관계는 부당하게 연장된다. 동문이라는 이유로 공적 회의에서도 “선배님”이라 부르는 순간 학연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사회인 야구단에서 누군가를 “장로님!”이라 부르는 순간 동료들 간에 위계가 설정되고 누군가는 소외된다. 자원봉사나 시민운동으로 모인 자리에서, 고등학생 참여자들에게 반말을 하고 지시를 하고 훈계를 하는 어른들이 있다. “학생!”이나 “얘야!”라는 호칭이 나오는 순간 나이나 성 권력이 동지의식을 해체한다.

불과 몇 년 장성이나 국회의원 배역을 수행했던 이들이 죽을 때까지 장군님, 의원님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경우를 자주 봤다. 호칭이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좋았던 시절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발버둥이다. 마찬가지다. 장군의 부인은 어느 자리에서건 “사모님”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알량한 호칭권력을 뺏기지 않으려는 오만함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그 오만함을 잘 안다. 그래서 김제동의 개그를 “충분히 있었음직한 에피소드”로 받아들여 웃는 것이다. 장군님 몇몇은 여전히 잘 모르는 듯싶지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10112052005#csidx873b4a858fb0ca2a28cac7a57b5eb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