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진시황 시대의 ‘개그콘서트’와 김제동
이기환 논설위원
입력 : 2016.10.19 20:24:00 수정 : 2016.10.19 20:25:28
춘추시대 초 장왕(재위 기원전 614~591)에게 끔찍이도 좋아한 말(馬)이 있었다. 어느 날 그 말이 비만으로 죽자 슬픔에 빠진 장왕은 “대부(고관대작)의 예로 장사지내라”고 명했다. 신하들은 기가 막혔지만 “반대하는 자는 죽인다”는 서슬에 누구도 꼼짝 못했다. 이때 ‘골계가’ 우맹이 임금 앞에 나서 하늘을 우러러 곡을 했다. “임금의 예로 장사지내야 합니다. 옥으로 관곽을 짜고 천하 병사들을 동원해서 초호화 무덤을 만드소서. 그런 뒤 1만호의 집에서 말의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장왕은 머리가 띵했다. 아무리 사랑한 말이지만 ‘임금의 예’는 좀 과공이 아닌가. 우맹이 이때 돌직구를 날린다. “그렇게 하셔야 다른 제후들이 ‘대왕(장왕)은 말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고 생각할 겁니다.” 장왕이 “그럼 어찌 장사지내면 좋겠느냐”고 묻자 우맹이 매조지했다.
“부뚜막과 구리솥으로 관곽을 삼고 생강과 대추를 섞어 불(火)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십시오.” 우맹의 뜻은 분명했다. ‘대부의 예’도, ‘임금의 예’도 아닌 ‘가축의 예로 장사지내라’고 풍자한 것이다. 장왕은 군말 없이 말을 수라간에 넘겼다.
‘난쟁이’ 우전은 진시황(재위 기원전 246~210) 시대의 골계가다. 어느 날 진시황이 억수 같은 소나기를 바라보며 연회를 벌였다. 바깥의 호위군사들은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우전이 군사들에게 속삭였다. “여러분, 쉬고 싶죠.” “예.” “내가 좀 있다가 당신들을 부를 테니 대답하세요.” “예.” 우전은 시쳇말로 군사들과 ‘개그 한 편’을 짠 것이다. 연회가 한창일 때 우전이 난간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호위병들아!” “예.” “너희는 키만 컸지 가련한 신세로구나. 난 키가 작아도 이렇게 방 안에서 쉬고 있는데…. 이 빗속에 무슨 꼴이냐.” 우전의 ‘개그콘서트’를 본 진시황도 호위군사들의 몰골이 불쌍했던지 “너희도 반씩 교대로 쉬라”는 명을 내렸다.
사마천의 <사기> ‘골계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놀랍지 않은가. 사마천은 이미 2000년 전에 개그맨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골계(滑稽)’란 무엇인가. 사마천은 “은미(隱微·드러나지 않는)한 말 속에서 이치에 맞아 사물의 얽힌 것을 막힘없이 푸는 것”이라 했다. ‘막힘없다’ ‘익살스럽다’는 ‘골(滑)’과 ‘헤아려보다’ ‘견주다’는 뜻의 ‘계(稽)’가 합친 말이다.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기지와 해학, 반어법을 동원한 풍자개그란 소리다.
필자는 김제동씨 이야기를 하려고 다소 장황하게 <사기>를 인용했다. 국방부 차관을 지낸 여당 국회의원과 국회 국방위원장, 여기에 국방부 장관까지 김제동씨의, 그것도 1년3개월 전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혹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등 사사건건 입바른 소리를 계속해왔던 김제동씨에게 흠집을 내겠다는 의도였을까. 아닌 게 아니라 소셜테이너로서 김제동씨의 한마디는 이제 장삼이사의 농담이 아니다. 중천금이 됐다. 만약 20여년 전 군복무 시절의 이야기 가운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그래서 몇몇이 정색하고 문제 삼으면 ‘쿨’하게 사과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김제동 발언’의 본질은 무엇인가. 풍자다. 필자가 얼마 전 무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개그맨들에게 ‘고생 많다’는 말을 건넸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니에요. 개그맨들은 천성적으로 진지한 거 못 참아서….” 개그맨들은 에피소드를 지어내기도, 과장하기도 한다. 웃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팩트가 아닌 것 같다고 놀릴지언정, 어느 누구도 정색해서 꾸짖거나 단죄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월남 스키부대 출신’ 같은 과장이 통하는 군대이야기랴.
게다가 ‘김제동 발언’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최근 정의당 김종대 의원이 공개한 군장성 부인들의 파티 동영상을 보라. 현역병이 동원돼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뿐인가. 갖가지 구타 및 성추행, 방산 및 군납 비리는 대체 어디서 발생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말을 했다고 ‘진짜냐. 언제 그랬냐. 사과하라. 법적인 책임을 지라’고 정색하고 닦달한다? 오히려 군대를 다녀온 경험을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로 여기고, 그 흑역사의 경험을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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