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현실]‘분단’의 정치적 이용, 이제 그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현대사지난 25년간 한국현대사 강의를 하면서 항상 그 시작은 ‘분단’이었다. 우리는 왜 분단됐는가? 왜 우리가 분단됐어야 했는가? 우리는 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 세 질문은 한국현대사 강의의 시작부터 끝을 관통하는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가 분단되거나 분할 점령되었다.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벌칙이었다. 아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전범국은커녕 오히려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전범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분단되었다. 게다가 얼어붙은 냉전의 시대에 열전을 겪어야 했다.한반도는 분단이라는 숙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분할 점령 이후 70년이 지났고, 오스트리아도, 베트남도, 독일도 분단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뿐만 아니라 분단이라는 구조는 한반도의 내부 정치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니 한반도의 정치인들은 이 구조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객관적 판단을 어렵게 하려고 한다. 그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북한이다.
북한 정권은 지난 70년간 분단과 전쟁, 정전체제 아래에서의 위기를 통해 유지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전역은 전쟁과 위기에 대한 구호로 가득 차 있으며, 분단과 불안정한 정전체제로 인한 위기는 불만에 찬 주민들을 통제하는 가장 큰 무기가 돼왔다. 상황이 이러니 밖으로부터의 위기나 제재가 내부적으로 불안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의 균열을 막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한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전의 독재정권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안보위기였다. “북한이 군사력을 강화했다” “북한이 도발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 또는 북한과 연결된 내부 세력들이 체포되었다” 등이 단골 메뉴로 오른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설마 사건을 왜곡이야 했겠는가? 이상하게도 이런 사건들은 꼭 특정한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터졌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면, 그런 시위는 내부적 안보를 약화시켜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보도됐다. 선거 직전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이상하게도 안보 관련 이슈들이 터져 나왔다.
불안정한 정전체제의 분단 이슈는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40년 전 남베트남 정부가 몰락했을 때 국민들은 우리도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꼈던 반면, 정부는 분열되면 남베트남 꼴 난다면서 긴급조치를 선언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파병돼 죽은 장병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견 표명조차 없었다.
그러다 급기야는 ‘총풍’ 사건이 터졌다. 선거에서 특정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하도록 남쪽의 요원들이 북한 측에 요청한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서로가 비난을 멈추지 않는 남과 북이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대적 공존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제대로 된 수사도 못하고,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에도 분단은 남북의 정치에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어려울 때마다 논란이 되는 햇볕정책과 북핵문제는 정치권의 단골 메뉴다. 이 메뉴들은 토네이도처럼 모든 정치적 이슈를 다 흡수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남한의 정치적 실상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남북정상회담도, 천안함 사건도, 중국 내 북한식당에서의 집단 탈북사건도 선거 결과를 바꿔 놓지 못했다. 풍선 날리기에 대한 누리꾼들의 비판적 대응은 안보 이슈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을 잘 보여주었다. 지난 4·13 총선에서 국민들은 어떠한 정치세력도 안보위기로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10192022005#csidx80848c2f971d65aa5657ef4d4553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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