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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줄기차게 문민화를 요구했다 / 남재희 칼럼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12. 21:10

사설.칼럼칼럼

[남재희 칼럼] 속칭 ‘사쿠라’를 위한 해명

등록 :2016-08-11 18:09수정 :2016-08-11 20:01

 

남재희
언론인

온건 타협노선을 택한 우리 정치사의 여러 정치인들을 그냥 ‘사쿠라’라고만 폄하할 수 있을까? 강경 대결노선을 따른 용감한 정치인들을 찬양하는 한편으로, 그들 타협노선의 정치인들에게도 우리 정치사의 구석이나마 일정한 평가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싶은 것이다.

내가 경험한 한국 정치의 단면 이야기. 5·16 쿠데타가 나고 정치활동이 재개된 후 어느 날이다. 거물급 정치인 유진산씨는 체면에 다방을 드나들기가 무엇하니까 종로 쪽에 있는 정운근씨의 응접실을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다. 고향의 면 이름을 따서 아호로 한 것이라지만 진산(珍山)이 아호에서 아예 아호 겸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기자 5~6명을 앞에 둔 진산은 말하자면 정치활동을 재개하는 마당에서의 정치소신이랄까 정치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인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일어났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광목을 몇 필이고 계속 풀어야지. 그 광목으로 시퍼런 칼을 감고 감아서 무디게 하여야 하는 거야. 그게 우리가 할 정치의 방향이지.”

그 후 진산은 야당의 지도자로 계속 타협의 정치만 해왔기에 많은 사람들한테 ‘사쿠라’(일본말의 ‘말고기’에서 유래. 야합파란 뜻)란 눈총을 받았었다. 군부에 대한 태도로 당시의 야당 인사들을 유연 타협파와 강경 대결파로 분류해보자. 진산에 가까웠던 이철승, 이민우, 유치송씨 등이 타협파였고, 윤보선,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씨 등이 대결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

그들과 별도로 얼마만큼 앞서서 계산(桂山) 소선규씨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계산은 쿠데타 후 첫 야당인 민정당(民政黨)의 김도연, 서민호씨 등과 함께 당초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추진하던 이른바 범국민정당, 속칭 ‘범탕’에 가담했다가 여의치 않자 떨어져 나와 자민당을 만들어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 하였다. 대통령감이 하향식으로 정당을 만드는 선례에 비교해 당원들이 대통령감을 상향식으로 영입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산의 기도는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진산이 야당 타협파의 본류를 이루어 오래 계속된다.

그 흐름의 이철승씨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며 끈질기게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추구했다. 분명한 방향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른바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같은 것도 한때 추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작은 흐름이지만 일본에서 통일일보를 발행하던 이영근씨도 그런 타협파였다. 그는 박 대통령 말기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이원집정부제 비슷한 것을 추진하려 하였다. 마침 주일대사관의 중앙정보부 파견 공사로 김재규씨의 처남인 권세현 고려대 교수가 오자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 김 부장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하여 이영근씨는 서울에 와서 대기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짐작된 바로는 김 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의 박 대통령 정치경호망을 뚫지 못한 것 같다.

그런 타협파의 흐름을 거부하고 대결노선을 택한 쪽이 윤보선씨 등이다. 그들은 참 용감히 싸웠다. 윤보선씨를 “윈체스터 총을 가진 백인에 대항하여 도끼로 싸운 아파치 추장”이라고 비유하던 어느 야당 원로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러한 용감한 투쟁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군사통치의 종말은 결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극한수단을 통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당시 청와대 박정희-차지철의 철옹성은 난공불락이었다. “만약에 우리들의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자결(自決)” - 박정희 소장이 거사 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사후승인요청 편지다. 박 소장은 일본육사를 나오기도 했지만 ‘자결’ 운운은 일본의 철저한 ‘사무라이’ 정신과도 통한다. 무서운 정신력이다. 게다가 차지철 경호실장은 어떤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인물이다. 국민이 저항하면 탱크들을 동원하여 싹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하던 프랑켄슈타인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종당에는 호가호위(狐假虎威)임이 드러났지만 말이다.

차 실장 관계로 나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둔 바 있다.

“박 대통령이 변을 당한 지 오래되지 않아 국회 로비에서 김종필씨를 마주치니 점심 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끌었다. 국회 귀빈식당에 가니 박준규 마지막 공화당 의장이 기다리고 있다. 박 대통령 국장 때 만났겠지만 서로가 정말 오랜만에 의견을 나누는 자리 같았다.

김종필씨의 말 ‘박 의장, 나 박 의장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박 의장이 청와대에 박 대통령을 만나러 가면 차 실장이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정치문제건 인사문제건 미리 알고 있으면서 자기가 각하께 이리저리 말씀드린 바 있는데 알아서 하시오 했다면서요. 그러니 박 의장인들 어쩌겠어요. 다 이해합니다.’ 듣고 보니 둘 사이에 그동안의 오해를 푸는 자리에 내가 운이 좋게 동석한 셈이었다. 박 대통령 말기에 차지철의 전횡이 그 정도가 아니었음을 그 후 국민들은 대충 알게 되었다. 수문장이 마왕이 된 것이다. 박 대통령에 보고되는 거의 모든 사안을 체크하였으니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은 그의 포로가 된 셈이다.”

차 실장은 공화당 의원들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가 차 실장의 직계였는지 당시의 의원들은 대충 알고 있다. 차지철 직계는 안하무인이었다. 차 실장이 40대 언저리 이하의 의원들을 거의 모두 포섭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회식도 하고 용돈도 주었다는 이야기다. 순차적인 포섭작전인데 중도에 중단된 것이다.

차 실장이 유정회에 손댄 것은 물론이다. 특히 백두진 회장이 차 실장 사람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우스개 같은 일화가 떠돌았었다. 차 실장의 군 장악 기도는 그때 보도된 대로, 청와대에서 그가 주재한 하기식에 군 지휘관들을 연속 참여시킨 일 등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때는 정치가 참 아슬아슬하였다. 칼날 위에서 춤추는 듯한 참으로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요인은 미국이 그 당시 줄기차게 문민화를 압박했다는 사실이다. 오죽 강조했으면 ‘시빌리어나이제이션’이라는 희귀한 영어 단어까지 동원하며 압박했을까.

카터 대통령 때 국무부 동북아담당 차관보가 된 홀브룩은 차관보가 되기 전 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자기도 동감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사태 해결 방식으로 박 대통령의 제거를 암시하기까지 하였었다. 나는 김재규 부장의 그 후의 행동이 그 홀브룩의 글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악화만 되어가던 청와대 쪽을 향하여 정면대결 전략을 구사하던 정치인들은 참 용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정치논리상 정정당당한 것이고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명분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던 다른 나라의 경우를 비교하여 생각해보자. 미얀마는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한 후 군부통치가 몇십년 계속되었다. 제2차대전 때 당시 버마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는 참으로 줄기차게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얼마 전 선거를 통해 민주화의 큰 진전이 있었다. 아웅산 수치의 정당이 압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민주화는 군과 민과의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의회의 일정 부문 의석을 군부에게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었고, 중요 사항에 대한 군부의 거부권을 인정한 것이다. 역시 미얀마에도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후진적 상황에서 정치진행의 양상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다. ‘구절양장’이란 표현을 굽이굽이의 고갯길을 표현하는 데 쓰는데 참으로 구절양장 같은 고비고비를 겪으면서 진행되는 정치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예를 들어 유진산씨류의 온건 타협노선을 택한 우리 정치사의 여러 정치인들을 그냥 ‘사쿠라’라고만 폄하할 수 있을까? 강경 대결노선을 따른 용감한 정치인들을 찬양하는 한편으로, 그들 타협노선의 정치인들에게도 우리 정치사의 구석이나마 일정한 평가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