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루스벨트의
전략적 고민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를린의 벙커에서는 낙관적인 희망이 솟았다. 히틀러는 두 가지 믿음에 의하여 전쟁의 마지막 해 동안 자신의 기분을 유지했다: 자신의 비밀 병기가 영국인들을 의지를 꺾을 것; 그리고 타락한 자본주의적 공화국과 빈사 상태의 제국 및 마르크스주의적 독재체제 사이의 연합이라는 모순들이 틀림없이 불가피하게 저 연합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 1945년 3월경 자신의 V-2가, 영국이 타격될 수 있는 마지막 기지들 너머로 발사되었을 때 자신의 비밀 병기들이 실패했음을 그는 알았다. 그 후 그는 한층 더 연합국들 사이의 불화를 희망하며 그 불화에 매달렸다. 히틀러 궁정의 정치철학가인 괴벨스는 4월 초에 그런 불화가 혹시 어떻게 발생할지를 몇몇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 설명했다.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에 따르면, 괴벨스는 ‘역사적인 필연성과 정의(Justice)라는 이유들 때문에 7년 전쟁에서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과 같이 행운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했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7년 전쟁에서 패배에 직면했을 때,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스가 예기치 않게 사망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을 찬양하던 남자 황제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다음에 연합은 붕괴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러시아는 살아남았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고 괴벨스는 ‘러시아 여제가 죽었다’고 소리치고 ‘흥분 상태로’ 히틀러에게 ‘축하하기’ 위하여 전화를 걸었다. ‘전환점입니다, 운명적으로 반드시 일어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히틀러 자신은 잠깐 감동되어 괴벨스의 희열을 공감했다. 전쟁 후반기를 통하여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밀접하게 동일시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행운 진화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행운을 반영할 것이라고 기꺼이 믿었다. 그는 특히 루스벨트의 죽음이, 자신이 예언한 연합국들의 갈등으로 무능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꺼이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의 근본적인 몰이해들 가운데 한 가지가, 미국민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들의 대통령의 책동에 의하여 전쟁에 끌려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 대한 최고의 범인은 루스벨트인데 그의 프리메이슨 단원들(freemasons)과 유태인들 및 일반적인 유태인들의 볼쉐비즘이 함께 한다’고 그는 1941년 8월에 어느 스페인 외교관에게 말했다. 그가 믿었든 믿지 않았든 자신이 루스벨트의 ‘유태인 혈통’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그는 말했다. 그는 미재무성 장관 헨리 모겐다우(Henry Morgenthau)를 포함하여 미국 정부 내의 유태인 숫자에 대하여 틀림없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는데 패배한 독일을 경작자들과 목축민들의 국가로 환원시키려는 모겐다우의 계획이 1944년 9월 독일 언론에 누출되어 재발표되어 ‘총력전’ 독려를 위한 괴벨스의 선전에 그게 이바지했다.
미국이 전쟁에 헌신하는 것에 대한 히틀러의 이해는 거의 정확하게 사실과 반대였다. 고립주의는 틀림없이 1941년 12월 이전에 미국 정치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데 반면 미국의 부모들은 진주만 기습 순간까지 외국의 전쟁으로 자신들의 아들들이 떠나는 것을 보기를 자연히 주저했다. 그러나 1940년에 법제화된 재무장 조치들에 반대한 미국인들은 없었는데 그 조치들로 인하여 함대의 규모가 배로 증가하였고 7800대의 전투기를 갖춘 ㅡ 독일 공군 규모의 3배 ㅡ 공군을 위하여 기금이 적립되었고 징병제에 의하여 20만 명의 육군이 100만 명 규모로 증가하였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열정적으로 대응했다. 전격작전과 대서양 전투의 18개월 동안에 미국에서 ‘고립적’이 되는 감정은 강력하게 증가했다; 미국 문명이 반대하던 모든 것의 전형으로서의 히틀러에 대한 적개심 또한 그랬다. 1914년 유럽에서와같이, 전쟁 발발은 궁극적으로 거의 위안이었는데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우유부단과 무기력에 억압되었고 패배에 대한 공포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역시 히틀러를 독재자와 악인으로서 보았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자신의 국민을 주저하며 전쟁으로 끌고 갔다는 히틀러의 믿음은 사실과 다르다; 더 정확하게, 진주만 기습 이전 몇 달 동안 루스벨트의 전쟁 정책에 관한 사실들은,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정리되지 않는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루스벨트의 태도는, 자신이 미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행동한 3년 반 동안 자신의 전쟁 목표들이 그러한 바와 같이, 아주 모호하다.
루스벨트는 1939-45년 동안 주요 인물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방법에서 교활하고 기만적이고 배신적이었지만 아주 제한된 목표들을 굳건히 추구했다: 정부와 당 그리고 군대의 우두머리로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는 데 확고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누구든 추방하거나 심지어 살해했지만, 그는 먼저 소련을 패배로부터 구하고 두 번째는 소련 영토에서 독일군을 추방하고 세 번째는 붉은 군대의 최종적인 승리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ㅡ 영토적, 외교적, 군사적 및 경제적 ㅡ 얻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심리 작용이 아무리 비밀스러웠지만 극도로 지나치게 야심적인 전략일지라도 분명한 전략을 또한 고수했다: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그다음에 유럽대륙에 대한 독일의 장악과 이어서 러시아를 복속시키는 것과 최종적으로 앵글로-색슨 권력을 유럽의 사건들에 대한 영향으로부터 배제하기를 원했다. 처칠은 분명히 애국자이고 낭만주의자였으며 제국주의자였다: 승리는 그의 근본적인 소망이었다; 단지 두 번째로 그는, 유럽에서 영국의 이익을 그리고 해외에서 영국제국의 생존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승리가 어떻게 획득될지를 고심했다. 그의 아내가 기술하는 바와 같이, 그의 ‘자연스럽게 개방적이고 의심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하여 전쟁 동안 그를 만난 모든 사람에게 그의 동기들이 자동적으로 밝혀졌다. 그는 자주 비판적이고 반대 의견을 내세웠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능력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아량의 모습을 기꺼이 보였으며 자신의 연설의 힘과 고귀함에 의하여 자기 청중들만큼 강력하게 만족했다.
루스벨트 역시 탁월한 연설가였다; 그의 연설 범위는, 정말로, 처칠의 연설 범위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 이유인즉 그가 화려하고 정교한 연설뿐만 ㅡ 예를 들어 1941년 1월의 의회에서 행한 ‘네 가지 자유’ 선언이나 진주만 기습 이후 ‘치욕의 날’ 연설 ㅡ 아니라 자기 자신이 창안한 정치 대화의 매체인 자신이 만든 ‘노변한담(爐邊閑談: fireside chats)’에서 가족들과 개인들에게 친숙한 라디오 방송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노변한담은 정치 유세와 관련된 인신공격성 정치 연설이었는데 장소와 청중에 따라서 미묘하게 변했고 부정직하면서 솔직한 뉴스 토론이었고 개인적인 전화통화였는데 무엇보다도, 말의 흐름에 의하여 최면상태로 앉아있는 대화 상대자에게 과찬하고, 웃기고, 대화가 산만하고, 현혹적이면서 궁극적으로 거의 전체적으로 당혹스러웠다. 루스벨트는 말의 마술사였다. 그의 전기작가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James McGregor Burns)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광대함, 개방성, 다정함’에 의하여 매혹당한 방문객들을 대통령 집무실에서 작별했다; 그러나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문제들이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유인즉 루스벨트는 아마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경험들과 회상에서 관련성과 연계성 발견하도록’ 말을 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수십 가지의 태도들과 몇 가지 깊이 간직한 가치들을 지녔는데 그것들은 정확하게 당시 그의 계층들의 태도들과 가치들이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경제적 기회와 정치적 타협을 신뢰했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깊은 감정을 느꼈고 그는 폭력 사용을 혐오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전쟁 자체를 극도로 혐오스럽게 알았던 반면, 평화를 위해서든 전쟁을 위해서든 정책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참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아주 모호했다. 처칠은 가장 암울했던 1940년과 1941년의 시간들을, 미국은 결국 구대륙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하여 나설 것이라는 믿음에 의하여 자신의 기분을 유지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충분한 이유를 처칠에게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거의 히틀러가 전쟁을 개시하는 순간부터 독일에게는 틀림없이 거부된 무기들을 영국과 프랑스에 판매하고 그다음에 무제한으로 ‘현금 판매’ 무기 적재를 허용함과 대서양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들을 미국이 보호함을 꾸준히 확대하며 추축국들에 대항하는 미국의 중립성을 세웠다. 그는 먼저, 미국 수역에 독일 잠수함들이 접근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는 중립지역을 정리했고 그다음에 1941년 4월 그 수역을 대서양 중간선까지 확대하여 미국 전함들이 호송선들로서 활약하는 것을 허용했고 반면 7월에는 그가 미국 해병들을 파견하여 아이슬란드를 수비하던 영국군과 교체시켰는데 아이슬란드는 1940년에 덴마크가 히틀러에게 함락되자 영국이 급작스럽게 점령했다. 1941년 3월 11일 그의 설득으로 의회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을 통과시켰는데 그 법으로 인하여 영국은 후불을 약속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수품들을 빌릴 수 있었다; 2월에는 실제로 12월 이후에 수행될 ‘독일 먼저 손보기’를 포함하여 전략적 근본 사항들 대부분에 합의한 워싱턴에서 열린 영미 참모 회담을 그는 후원했다.
그리하여 모든 표면적인 징표에 의하여 미국 대통령이 미국을 영국 편에서 개입시키고 있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처칠에게 있었다; 틀림없이 히틀러는 그 위험을 날카롭게 인식했고 어떤 정도로도 미국인들을 도발하지 않도록 ㅡ 심지어 1941년 6월에 루스벨트가 미국에서 독일의 자산 모두를 동결하도록 재가한 이후에도 ㅡ 자신의 잠수함 사령관들에게 엄격한 명령을 하달했다. 처칠은 대서양 비상 전화에서 (독일인들에 의하여 불규칙적으로 차단된) 루스벨트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통화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따뜻한 약속을 훨씬 더 강하게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고, 반면 1941년 8월의 플라센티아만(Placentia Bay) 회담으로부터 미국 함정 한 척을 포함하는 호송선으로 미해군이 모든 선박을 보호할 것이라는 합의를 가져왔는데 그 합의는 사실상 미국 전함을 침몰시키려는 되니츠(Dönitz) 독일해군 제독에게 대항하는 방식이었다. 플라센티아만으로부터 귀국하자 처칠은, 루스벨트가 ‘자신들을 분명히 참전할 것으로 결심했다; 자신의 결론적인 메시지는 루스벨트가 전쟁을 수행하지만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루스벨트는 점점 더 도발적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전쟁 내각에게 알렸다. 독일인들은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미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루스벨트는 말했다.
처칠의 참모총장들은 더 의심해서 다른 인상을 받았다. 참모장교인 이안 제이콥(Ian Jacob)은 자신의 일기에서, 미해군은 ‘우리가 바다에서 패하지 않기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고 그리고 육군은 ‘1~2년 동안에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전망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한 명의 미군 장교도 우리 편에서 전쟁에 참전하려는 최소한의 열망도 보이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매력적이었지만 우리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그는 비평했다. 게다가 10월 31일 독일군이 대서양에서 미국 구축함 루벤 제임스(Reuben James)호를 격침시켜 115명의 미군이 전사하는 궁극적인 도발을 저질렀을 때 루스벨트는 그 사건을 개전 이유로서 ㅡ 그 사건이, 예를 들어 1944년 베트남에서 존슨 대통령에 의하여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재가하도록 이용된 ‘통킹만’ 사건보다 훨씬 더 악랄한 행위였을지라도 ㅡ 간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의 전기작가 제임스 맥그리거가 루스벨트를 규정했던 바와 같이, 루벤 제임스 호에 격침에 관한 루스벨트의 무대응은 1941년 동안에 그가 보인 ‘전략적 수수께끼’에 대한 실마리로서 간주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간단한 정책을 따르고 있었다; 전쟁을 제외한 영국에 대한 모든 원조. 이 정책은 영-미 우정의 오랜 유산의 한 부분이었다; 이 정책은 서양에서 히틀러의 야망을 차단하는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이 정책은 서로 협력하는 데 익숙한 두 국가에 의하여 쉽게 수행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루스벨트의 기질에 맞았고, 영국의 요구와 압력을 충족시켰으며 자체의 동력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탁월한 전략은 아니었다... 이 정책은 정치적 및 군사적 대안들을 명백하게 대조한 것으로부터 출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전략은,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참전하도록 추축국들이 행동을 취한다는 조건으로만 완벽한 효과를 ㅡ 다시 말해서, 영국과의 합동 군사적 및 정치적 행동 ㅡ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전략이었다. 그 전략은 전쟁의 전략도 평화의 전략도 아니었고 전쟁의 경우에만 효과를 내는 (영국에 대한 전쟁물자 공급과 대서양에서의 몇 가지 방어적 행동들과 별도로) 전략이었다... [루스벨트는] 히틀러로부터의 주요 도발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런 도발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루스벨트는 운에 맡기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시험된 그의 시간 맞추기 재능에 맡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계획이 없었다. ‘나는 상황에 끌려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5월 모겐다우 재무성 장관에게 말했다 ㅡ 그리고 분명히 그 상황은 강력한 떠밀기여야 했다.
운에 맡기는 것과 떠밀기를 기다리는 것은,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거의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최고 사령관으로서 루스벨트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었다.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과 그 후 몇 년 동안 모두 것에서 루스벨트가 심오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고립과 어떤 조건으로도 무기를 구하려는 필사적인 욕구에서, 영국의 해외 자산을 처분하는 수단을 (그리고 정말로 그 자산은 ‘현금 판매’에 의하여 처분되었다) 그리하여 세계 최대 제국의 ㅡ 루스벨트가 자국 내의 기업합병과 금융계의 기업연합만큼 강력하게 혐오한 제국 ㅡ 주인으로부터 식민지들을 처분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축소할 수단을 루스벨트는 보았다. 이로 인하여 루스벨트에게는 자신의 갖고 있지 않던 마키아벨리즘이 확실하게 생겼다. 전쟁은 군주에게 유일하게 합당한 공부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자신의 많은 업무를 궁정 총신인 해리 호프킨스(Harry Hopkins)를 통하여 수행하고 심지어 까다로운 마셜(Marshall) 참모총장을 포함하여 어떤 관리도 자신에게 불가피한 존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귀족적인 후의를 보이며 매력을 드러내고 공허한 찬사를 내뱉었고,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사람은 정치적으로 봉쇄하고, 개인 소유 시골 궁궐을 워싱턴의 열기과 지루함으로부터의 도피처로 (루스벨트에게는 캠프 데이비드가 아니었다) 삼았고, 심지어 백악관 안에 정부(情婦)를 두고 30살 자리 사촌의 아내를 왕조적인 정략결혼의 명예 반려자로서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전략에서 마키아벨리적은 아니었는데 간단한 이유는, 미국의 부유함과 힘 그리고 기질로 인하여 은닉하고 모략하는 유럽의 편협한 필요성으로부터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미국은, ‘얽매이는 동맹 불가(no entangling alliances)’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세워졌다; 미국은, 약한 국가들을 상대로 값싸고 일시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불필요한 풍요로움으로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루스벨트는,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은 행동인 전쟁을 지시하는 업무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런 초탈은 다른 지도자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처칠은 물론 최고 사령부에서 즐기고 자신의 일정을 전쟁 수행에 바쳤고, 밤낮을 전쟁 수행으로 보냈고, 방이나 심지어 가옥들 전체를 개조하도록 전시 수상으로서 시켰으며, 다른 의복보다 자신의 ‘사이렌 수트(siren suit [공습 시 대피용 위아래 일체형 의복: 역주])’를 선호했으며 (비록 그가 자신의 명예 공군 준장 제복들과 서식스 5연대의 명예 대령 제복을 가까이 두었을지라도), 울트라(Ultra [독일군의 통신을 염탐하던 영국군의 비밀통신 해독 장비: 역주])를 통하여 가로챈 정보를 끊임없이 요구했으며, 자신의 군사 보좌관들과 시간 단위로 친밀하게 지냈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Barbarossa [독일의 러시아 침공작전: 역주]) 작전 개시 이후 군사적으로 은둔자로 변했는데 장군들과 만나면 삐걱거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장군들을 제외하고 만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전시 일정은 기묘하게도 형태에서 히틀러의 일정에 ㅡ 비밀스럽고, 야행성이고, 벙커에 머무는 ㅡ 부합했다.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 이후 자신의 생활 형태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공습의 위협이 있어도 그는 계속해서 백악관에서 생활했으며 때때로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꼼꼼하고 결심이 굳은 자신을 당혹시킨 일정표를 따랐다. 마샬의 일정은 분 단위에 맞춰졌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자신의 공관에서 점심을 먹기 위하여 아내를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점심은 전용차로부터 그가 베란다에 올라서면 차려졌다. 루스벨트는 집무실로 배달된 식판에서 점심을 들었고 아침 10시까지 집무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밤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번스(Burns)에 따르면 그의 일주일 일정에는 몇 가지 고정된 일정들이 있었다:
그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의회의 거물 네 명을 ㅡ 부통령, 하원의장과
상하원의 다수당 대표들 ㅡ 만났다. 화요일 오후와 금요일 오전에는
언론과 회견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는 각료회의를 주재했다.
[그 외에는] 루스벨트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형식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때때로 그는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약속들을
서둘러 마쳤고 덜 중요한 약속들에는 빈둥거렸다. 그는 편지 대부분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많은 전화를 받았고 다른 전화들을 거부했으며
하찮고 무미건조한 사람들 만났고 분명히 정치적으로나 지성적으로 더
더 중요한 다른 사람들을 ㅡ 모두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어떤 신비로운 우선순위의 구조에 따라서 ㅡ 무시했다.
이 형태에 따른 일정이나 이 형태를 무시한 일정은 1941년 12월 7일부터 1945년 4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ㅡ 파리로 (프랑스 함락 전에), 카이로로, 모스크바로, 아테네로 (영국군 부대와 ELAS [그리스 인민해방군: 역주] 반군들 사이의 포격소리가 아테네를 뒤흔드는 동안 그는 1944년 크리스마스를 보낸 곳), 로마, 나폴리, 노르망디, 라인강으로 ㅡ 처칠과 달리, 루스벨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이동성은 물론 그의 신체장애에 의하여 제한되었는데 그 신체장애는 소아마비 후유증이었고 신중한 언론이 독자들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감추었다. 그러나 그는 선택하면 움직였는데 전쟁 기간에 그는 1943년 1월에 카사블랑카에 갔고 퀘벡에 두 번 (1943년 8월과 1944년 9월) 갔고, 여름에 하와이와 알래스카에 갔고, 1944년 말에 카이로와 테헤란에 갔으며 1945년 2월에 러시아 영토인 크리미아반도의 얄타에 갔다. 그는 전쟁, 공습을 받은 도시들, 전선에 배치된 부대들, 포로들, 전투의 후속 결과들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했고 아마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뉴딜 정책을 지휘했듯이 미국의 전략을 지휘했다 ㅡ 고상한 연설에 의하여 그리고 권력의 결집을 드물지만 결정적으로 타격하며.
모두 효과적으로 네 가지인 결정적인 행동들이 있었다. 첫 번째 행동은, 해군작전 사령관인 스타크(Stark) 제독에 의하여 1940년 11월에 개진되어 8월의 플라센티아만 회담에서 처칠의 동의를 받고 1941년 2~3월 영국과 미국의 ABC-1 회의에 의하여 채택된 ‘독일 먼저 손보기’ 결정에 대한 그의 지지였지만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국가 정책으로서 정해졌다. 당시 루스벨트는 아마도 그의 정치적인 심장으로써 그렇게 쉽게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보복 요구에 승복했는데 작은 적에 앞서서 큰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자신의 전략적 두뇌를 풀어놓았다. 두 번째 행동은, 북아프리카에서 횃불 상륙작전(Torch landing)을 재가하는 조건들에 관하여 1942년 7월에 런던에서 열린 마셜과 영국군 사이의 논쟁을 루스벨트가 해결한 것인데 그 작전에서 유래한 모든 의심스러운 결과들이 뒤따랐다. 세 번째 행동은 1943년 1월에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무조건 항복’ 선언을 그가 고집한 것인데, 미국이 남부 연합에 대항하여 수행한 남북전쟁에서 요구한 조건들을 고상하게 재천명한 것이었다. 마지막 행동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처칠로부터 거리를 두고 유럽의 미래에 관하여 스탈린을 직접 다루려던 그의 결정이었다.
처칠이 대서양 헌장의 더 자유주의적인 조항들을 ㅡ 그 조항들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대영제국은 식민지들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된다 ㅡ 주저하면서 수용한 때인 플라센티아만 회담에서와, 장개석에 대한 전형적인 ‘중국 로비’인 지나친 친절함을 루스벨트가 보인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얄타 조치에 대하여 예상들이 있었다. 카이로에서 영국인들은, 장개석의 지도력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도력들과 명분상으로 동일하다는 영국인들의 믿음에 대한 약속의 징표로서, 중국에서 영국인들의 역사적인 치외법권을 포기하라는 설득을 받았다.
장개석은 루스벨트를 실망시킬 수 있었다. 루스벨트의 기대와 반대로, 장개석은 중국의 정치구조 및 경제구조를 개혁하라는 조치들을 검토하지 않았고 ㅡ 더 생산성이 높은 중국의 절반을 장개석의 적 손아귀에 두고서 장개석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현실론자는 아마도 질문했을 터이다 ㅡ 처음에는 스틸웰(Stilwell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중화민국 군대를 지휘한 미군 장성: 역주])에 의하여 장개석이 스틸웰의 강의에 지친 다음에는 위드마이어(Wedemeyer [당시 미육군 참모총장: 역주])에 의하여 중국의 전투력을 극대화하라고 그렇게 여러 번 제시된 미국의 원조와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얄타회담 때 루스벨트는 비밀리에 장개석을 무시했다; 형식적으로 중국은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 격상되었고 그 제도와 구조는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지만, 장개석에게는 승리에 기여한 바가 없어서 그 과실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카이로회담에서 그에게 제의된 인도차이나 합병도 물론 주어지지 않았다. 폴란드 역시, 1939년 11월 이래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영국군에 이어 네 번째 규모로 독일군과 싸웠던 망명 군대를 유지하면서 매일 전쟁에 참전했지만, 얄타회담에서 무시당했다; 폴란드의 동부 지방들은 1920년에 너무 혜택을 입고 국경선이 정해졌는데, 붉은 군대가 이미 폴란드 영토 전체를 점령했기 때문에 루스벨트-스탈린의 이 거래가 정치적 실재성을 띤 행위보다는 정치적으로 덜 배신적인 행위였지만 얄타회담에서 영구적으로 러시아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취해진 모든 결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직접적으로 합의되었는데 태평양에서 전쟁의 미래 수행과 관련되었다. 폴란드의 미래를 팔아버리고 소련에게 너무 많은 점령지를 준 독일 분할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루스벨트의 의도는 결국, 일본을 패퇴시키려는 전투에 붉은 군대를 참전시키려는 그의 고민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얄타회담 당시 미국은, 미국의 핵 연구프로그램이 원자폭탄의 성공적인 시험 폭발로 이어질 것이라고 아직 확신하지도 못했고 미국의 군사력인 일본 본토에 대한 육상 침공을 감당할 정도로 발전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유황도(Iwo Jima)에 대한 수륙 양면 공격은 준비되었지만 시행되지는 않았다; 일본에 대한 파멸적인 소이탄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의 붉은 군대의 전투는 분명히 거의 끝났고 서부 러시아에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만주 국경까지 직접 연결되었는데 1904-5년에 차르 2세의 군대는 만주에서 모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패배를 설욕하려는 기회는 스탈린의 전시 우선순위에서 높았다. 그러나 스탈린이 언제 그 기회를 잡을지에 미국 대통령은 신경을 썼다. 스탈린이 더 빨리 그렇게 하기를 보장하기 위하여 얄타에서 루스벨트는 거의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결국 루스벨트가 치른 대가는 동맹인 폴란드인들 앞에서 처칠의 명예를 훼손하고, 미국에게 권한이 없는 주권국 중국에서 영토에 대한 권리를 러시아에 양도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태평양에서 일본 점령한 지역을 미군의 희생만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되찾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ㅡ 존 키건(John Keegan), ‘제2차대전사(The Second World War)’, 536~543쪽 ㅡ
The news of Roosevelt’s death on 12 April 1945 had stirred a flicker of optimism in the Berlin bunker. Hitler had sustained his spirits during the last year of the war by two beliefs: that his secret weapons would break the will of the British; and that the contradictions of an alliance between a decadent capitalist republic, a moribund empire and a Marxist dictatorship must inevitably lead to the disintegration of that alliance. By March 1945, when his V-2 had been driven beyond the last sites from which Britain could be hit, he knew that his secret weapons had failed. Thereafter he clung all the more desperately to the hope of dissension among the Allies. Goebbels, the political philosopher of his court, had explained to some intimates in early April how such a fallingㅡout might occur. According to the historian Hugh TrevorㅡRoper, he had ‘developed his thesis that, for reasons of Historical Necessity and Justice, a change of fortune was inevitable, like Miracle of the House of Brandenburg in the Seven Years War.’ When Frederick the Great of Prussia faced defeat by the combined armies of Russia, Austria and France in the Seven Years war, the tsarina Elisabeth had unexpectedly died, to be succeeded by a tsar who was Frederick’s admirer; the alliance then collapsed and Frederick’s Prussia survived. In April 1945, on hearing the news of the President’s passing, Goebbels exclaimed, ‘the tsarina is dead’, and telephoned Hitler ‘in an ecstasy’ to ‘congratulate’ him. ‘It is the turningㅡpoint,’ he said, ‘it is written in the stars.’
Hitler himself was briefly moved to share Goebbels’s euphoria. Throughout the latter period of the war he had come to identify closely with Frederick the Great and was even ready to believe that the evolution of his fortunes might mirror those of the Prussian king. He was particularly ready to believe that Roosevelt’s death would produce the disabling crack in the alliance that he predicted, since one of his fundamental misappreciations was that the American people were unwarlike and had been drawn in the conflict by the machinations of their President. ‘The archㅡculprit for this war’, he told a Spanish diplomat in August 1941, ‘is Roosevelt, with his freemasons, Jews and general JewishㅡBolshevism.’ He said, whether he believed it or not, that he had proof of Roosevelt’s ‘Jewish ancestry’. He was certainly obsessed by the number of Jews in American government, including Henry Morgenthau, the Secretary of the Treasury, whose plan to reduce defeated Germany to a nation of cultivators and pastoralists had been leaked and republished in the German press in September 1944, to the great benefit of Goebbels’s propaganda for a ‘total war’ effort.
Hitler’s understanding of America’s commitment to the war was almost exactly contrary to the truth. Isolationism was certainly a powerful force in American politics before December 1941, while America’s parents remained naturally reluctant to see their sons depart to a foreign war up to the moment of Pearl Harbor. Few Americans, however, objected to the measures of rearmament enacted in 1940, which doubled the size of the fleet, allocated funds for an air force of 7800 combat aircraft – three times the size of the Luftwaffe – and increased the size of the army from 200,000 to one million men, to be raised by conscription. When war came, moreover, the nation reacted enthusiastically. The sense of being ‘out of things’ had waxed powerfully in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eighteen months of the Blitz and the Battle of the Atlantic; so too had hostility to Hitler, as a paradigm of everything against which American civilisation stood. As in Europe in 1914, the coming of war was ultimately almost a relief, since Americans had been oppressed by indecision and inactivity and were untainted by any fear of defeat.
Roosevelt too saw Hitler as tyrant and a malefactor. However, Hitler’s belief that Roosevelt dragged his people to war reluctantly behind him is at variance with the facts; more accurately, the facts of Roosevelt’s war policy, in the months before Pearly Harbor, defy objective arrangement of analysis. Roosevelt’s attitude to United States entry into the Second World War remains profoundly ambiguous, as do the aims and objectives of his warㅡmaking in the three and a half years in which he acted as commanderㅡinㅡchief of the United States forces.
Roosevelt is by far the most enigmatic of the major figures of 1939ㅡ45. Stalin, though devious, doubleㅡdealing and treacherous in his methods, steadfastly pursued a quite a limited set of aims: while determined to sustain his position as head of government, party and army, whoever he had to dismiss or even kill to maintain his power, he wanted, first, to save the Soviet Union from defeat, second, to expel the Wehrmacht from Soviet territory and, third, to extract the largest possible benefit – territorial, diplomatic, military and economic – from the Red Arm’s eventual victory. Hitler, however mysterious the working of his psyche, also held to a clearㅡcut if wildly overㅡambitious strategy: he wanted revenge for Versailles, then German mastery of the continent, followed by the subjugation of Russia and the eventual exclusion of the AngloㅡSaxon powers from any influence in European affairs. Churchill was transparently a patriot, a romantic and an imperialist: victory was his first and last desire; only secondarily did he consider how did victory might be gained in a way that secured British interests in Europe and the survival of British Empire overseas. His ‘naturally open and unsuspicious nature’, as his wife described it, automatically revealed his motives to all who treated with him during the war. Captious and contrary though he often was, he had no capacity for sustained dissimulation, grasped eagerly at the semblance of generosity in the statements of others and was as powerfully swayed as his listeners by the force and nobility of his own oratory.
Roosevelt too was magnificent speaker; his range, indeed, was far greater than Churchill’s, for he was the master of not only the highㅡflown setㅡpiece – his proclamation of the ‘Four Freedoms’ to Congress in January 1941, for example, or his ‘Day of Infamy’ speech after Pearl Harbor – but also the intimate radio appeal to families and individuals in his ‘fireside chats’, a medium of political communication which he himself invented, the ad hominem stump speech of the political campaign, subtly varied from place to place and audience to audience, the disingenuously frank news conference, the personal telephone call, above all the faceㅡtoㅡface conversation, flattering, funny, discursive, beguiling and ultimately almost wholly baffling to the interlocutor who sat mesmerised by the flow of words. Roosevelt was a magician with words. According to his biographer Jame McGregor Burns, he sent visitors away from the Oval Office entranced by his ‘expansiveness, openness, geniality’; but they rarely took back with them any answer to the problems or questions they had brought. For Roosevelt talked perhaps above all ‘to find bearings and moorings in his own experiences and recollections’. Roosevelt had dozens of attitudes and a few deeply held values, which were precisely those of Americans of his class and time: he believed in human dignity and freedom, in economic opportunity, in political compromise, he felt deeply for the hardships of the poor, and he detested recourse to violence; but he had few policies, either for peace or for war, while war itself he found utterly distasteful.
Hence his profoundly ambiguous attitude towards American involvement. Churchill had sustained his own spirits during the darkest hours of 1940 and 1941 by the belief that the New World would eventually come forth to redress the balance of the Old. Roosevelt had given him every reason to believe that such would be the outcome. He had erected an American neutrality against the Axis almost from the moment of Hitler’s opening of the war, selling arms to Britain and France which would certainly have been refused to Germany, then authorising unrestricted ‘cash and carry’ arms shipments and progressively extending American protection to Britainㅡbound convoys in the Atlantic. He first defined a neutrality zone which effectively denies the Uㅡboats access to American waters, then in April 1941 extended the zone to the midㅡocean line and allowed American warships to act as convoy escorts, while in July he dispatched American Marines to replace British troops in the garrison of Iceland, which Britain had summarily occupied after the fall of Denmark in 1940. On 11 March 1941 Congress, at his persuasion, passed the LendㅡLease Act, which effectively allowed Britain to borrow war supplies from the United States against the promise of later repayment; in February he had sponsored AngloㅡAmerican staff talks in Washington (the ABCㅡ1 conference) which agreed on most of the strategic fundamentals, including ‘Germany First’, which would in practice be implemented after December.
By every outward sign, therefore, Churchill had reason to believe that the President was leading his nation to intervention on Britain’s side; certainly Hitler was acutely aware of that danger and laid his Uㅡboats commanders under strict orders not to provoke the Americans in any way at all – even after Roosevelt authorised the freezing of all German assets in the United States in June 1941. Churchill, in his private conversations with the President on the transatlantic scrambler telephone (erratically intercepted by the Germans), was given even more strongly to understand the warmth of the President’s commitment, while from the Placentia Bay meeting of August 1941 he brought back the agreement that the United States Navy would protect all ships in a convoy which included one American ship, in effect a means of defying Dönitz to sink an American warship. On his return from Placentia Bay, Churchill told the war cabinet that Roosevelt was ‘obviously determined that they should come in; his concluding message had been that ‘he would wage war but not declare it, and that he would become more and more provocative’. If the Germans ‘did not like it’, Roosevelt said, ‘they could attack American forces.’
Churchill’s Chiefs of Staff were more suspicious and formed a different impression. A staff officer, Ian Jacob, noted in his diary that the United States Navy ‘seem to think that the war can be won by our simply not losing it at sea’, and that the army ‘sees no prospect of being able to do anything for a year or two’. He observed that not ‘a single American officer had shown the slightest keenness to be in the war on our side. They are a charming lot of individuals but they appear to be living in a different world from ourselves.’ Moreover, when on 31 October the Germans committed the ultimate provocation by sinking the destroyer USS Reuben James in the Atlantic with the loss of 115 American lives, Roosevelt chose not to regard it as a casus belli – though it was a far more flagrant act of aggression than, for example, the ‘Gulf of Tonkin’ incident used by President Johnson to authorise American military intervention in Vietnam in 1944.
Roosevelt’s inaction over the sinking of the Reuben James may be taken as the key to the ‘strategic enigma’ he remained during 1941, as his biographer James McGregor Burns had characterised him.
Roosevelt was following a simple policy; all aid to Britain short of war. This policy was part of a long heritage of AngloㅡAmerican friendship; it was a practical way of blocking Hitler’s aspirations in the west; it could be easily implemented by two nations used to working with one another; it suited Roosevelt’s temperament, met the needs and pressures of the British, and was achieving a momentum of its own. But it was not a grand strategy... it did not emerge from clearㅡcut confrontation of political and military alternatives.... Above all this strategy was a negative one in that it could achieve its full effect – that is, joint military and political action with Britain – only if the Axis took action that would force the United States into war. It was a strategy neither of war nor of peace, but a strategy to take effect (aside from war supply to Britain and a few defensive actions in the Atlantic) only in the event of war.... [Roosevelt] was still waiting for a major provocation from Hitler even while recognising that it might not come at all. Above all, he was trusting to luck, to his longㅡtested flair for timing... He had no plan. ‘I am waiting to be pushed into the situation,’ he told Morgenthau in May – and clearly it had to be a strong shove.
Trusting to luck and waiting to be shoved were to characterise Roosevelt’s conduct as commanderㅡinㅡchief from Pearl Harbor almost to the very end of his life. Revisionist historians have argued that he was playing a deep game both before the United States entry into the war and during the years thereafter: that he saw in Britain’s isolation and desperate need for arms on any terms a means of liquidating her overseas investments (as they were indeed liquidated by ‘cash and carry’ sales), and thus of reducing the mistress of the world’s greatest empire – an institution he disliked as strongly as he did industrial trusts and financial cartels within his own country – to a state where she could not resist American pressure to divest herself of her colonies. This is surely to endow Roosevelt with a Machiavellianism he did not possess. War, Machiavelli said, is the only proper study for a prince; and Roosevelt was indeed princely in a distinctively Renaissance style, transacting much of his business through a court favourite, Harry Hopkins, permitting no official – not even the implacable Marshall – to establish himself as indispensable to him, dispensing charm and empty flattery with lordly largesse, operating a political oubliette for those who incurred his displeasure, maintaining a private country palace as a refuge from the heats and longueurs of Washington (no Camp David for FDR), even formally maintaining a mistress in the White House and treating his cousinㅡwife of thirty years as the honoured spouse of a dynastic marriage of convenience. None the less Roosevelt was not Machiavellian in strategy, for the simple reason that the wealth, power and ethos of the New World had liberated its rulers from the Old World’s narrow needs to dissemble and traduce. The United States had been founded on the principle of ‘no entangling alliances’; it had grown up to riches which absolved it from the temptation to pursue cheap and temporary advantages over weaker states.
As a result, Roosevelt was able to hold aloof from the business of directing war, an activity alien to his temperament. Such an aloofness was not granted to any of the other leaders. Churchill, of course, revelled in high command, dedicated his days (and nights) to warㅡmaking, had rooms, suites, even whole houses adapted to his needs as a wartime Prime Minister, preferred his ‘siren suit’ to any other garb (though he also kept handy his uniforms of an honorary air commodore and an honorary colonel of the Cinque Ports Battalion), demanded a constant diet of Ultra intelligence intercepts and lived in hourㅡtoㅡhour intimacy with his military advisers. Hitler turned himself into a military hermit after the opening of Barbarossa, seeing few but his generals, even though he found their company grating. Stalin’s wartime routine conformed strangely in pattern to Hitler’s – secretive, nocturnal, troglodyte. Roosevelt scarcely altered his pattern of life at all after Pearl Harbor. Unthreatened by air attack, he continued to live at the White House, occasionally vacationing at Hyde Park, and there pursued a timetable that drove the methodical and purposeful almost to distraction. Marshall’s day was measured to the minute: his only relaxation was to visit his wife in his official quarters for lunch, which was served as he stepped on to the veranda from his staff car.
Roosevelt lunched off a tray brought into the Oval Office, did not begin work until ten in the morning and took few telephone calls at night. According to Burns, there were a few fixed points in his week:
He saw the congressional Big Four – the ViceㅡPresident, the Speaker and the majority leader of each chamber – on Monday or Tuesday; met with the press on Tuesday afternoons and
Friday mornings; and presided over a Cabinet meeting on Friday afternoons. [Otherwise] there seemed to be no pattern at all in the way that Roosevelt did his work. Sometimes he hurried through appointments on crucial matters and dawdled during lesser ones. He ignored most letters altogether. . . . He took many phone calls, refused others, saw inconsequential and dull people, and ignored others of apparently greater political or intellectual weight – all according to some mystifying structure of priorities known to no one, perhaps not even to himself.
This pattern, or lack of it, persisted from 7 December 1941 to 12 April 1945. Unlike Churchill, who was constantly on the move – to Paris (before the fall of France), to Cairo, to Moscow, to Athens (where he spent Christmas Day 1944 while the sound of gunfire between British troops and ELAS rebels rocked the city), to Rome, Naples, Normandy, the Rhine – Roosevelt travelled little. His mobility was, of course, limited by his physical disability, which was the result of poliomyelitis and which a discreet press disguised from its readership almost completely. Nevertheless he travelled when he chose, but during the war his travels took him only to Casablanca in January 1943, Quebec twice (August 1943 and September 1944), Hawaii and Alaska in the summer and Cairo and Tehran at the end of 1944 and Yalta, in the Russian Crimea, in February 1945. He saw nothing of the war at first hand, no bombed cities, no troops at the front, no prisoners, no afterㅡeffects of battle, and probably did not choose to; he directed American strategy as he had directed the New Deal – by lofty rhetoric and by rare but decisive strikes at the conjunctions of power.
There were effectively four decisive actions in all. The first was his endorsement of the ‘Germany First’ decision, advanced by Admiral Stark, Chief of Naval Operations, in November 1940, adopted by the AngloㅡAmerican ABCㅡ1 conference of FebruaryㅡMarch 1941, agreed with Churchill at Placentia Bay in August, but enshrined as national policy only after Pearl Harbor, when Roosevelt, who might with his political heart so easily have yielded to the popular demand for vengeance on Japan, let his strategic head dictate that the greater should be beaten before the lesser enemy. The second was his settlement of the dispute between Marshall and the British in London in July 1942 on terms which authorised the Torch landing in North Africa, with all the dubious consequences that flowed from that expedition. The third was his insistence on the proclamation of ‘unconditional surrender’ at Casablanca in January 1943, a highㅡminded reㅡechoing of the terms on which the United States had conducted its war against the Confederacy. The last was his decision to distance himself from Churchill at the Yalta conference in February 1945 and deal directly with Stalin on the future of Europe.
There had been anticipations of Roosevelt’s Yalta initiative both at Placentia Bay, when Churchill had reluctantly accepted the more liberalising provisions of the Atlantic Charter – which in effect committed the British Empire to granting independence to its colonies – and at the Cairo conference, where Roosevelt had shown a typically ‘China lobby’ overㅡtenderness to Chiang Kaiㅡshek. At Cairo the British had been persuaded to surrender their historic rights of extraterritoriality in China as a token of commitment to their belief in the nominal equality of Chiang’s leadership with that of the Western democracies.
Chiang Kaiㅡshek was to let Roosevelt down. Contrary to the President’s expectations, he neither went through the motions to reform China’s political and economic structures – how could he have done, a realist might have asked, with the more productive half of his country in the hands of the enemy? – nor utilised American aid and American advice, supplied so liberally first by Stilwell and then, after Chiang had tired of Stilwell’s lecturing, by Wedemeyer, to maximise China’s fighting power.
By the time of Yalta, therefore, Roosevelt had privately written off Chiang; for form’s sake, China was elevated to permanent membership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Organisation, whose institution and structure was decided at Yalta, but Chiang was accorded no fruits of the victory he had done so little to advance, certainly not the annexation of IndoㅡChina he had been offered at Cairo. Poland too was written off at Yalta, though it had fought every day of the war since 1 September 1939, maintaining an army in exile which stood fourth in size among those opposed to the Wehrmacht, after the Russian, American and British; its eastern provinces, overㅡgenerously delimited in 1920, were permanently transferred to Russia at Yalta, though this RooseveltㅡStalin deal was an act less of political treachery than of political reality, since the Red Army already occupied the whole of Poland’s territory.
However, the most important of all decisions taken at Yalta, agreed directly between Roosevelt and Stalin, concerned the future conduct of the war in the Pacific. Roosevelt’s willingness to barter away the future of Poland and to finalise a division of Germany which accorded the Soviet Union an overㅡgenerous allocation of occupation territory was ultimately determined by his anxiety to engage the Red Army in the battle to defeat Japan. At the time of Yalta, the United States had neither yet assured itself that its nuclearㅡresearch programme would result in the successful test explosion of an atomic bomb nor advanced its forces to a point from which the land invasion of Japan might be undertaken. The amphibious assault on Iwo Jima was in preparation but had not been launched; the devastating fireㅡbombing of Japan had not begun. The Red Army’s commitment in Europe, on the other hand, was clearly almost at an end, and from western Russian the TransㅡSiberian railway led directly to the border of Manchuria, where in 1904ㅡ5 Tsar Nicholas II’s army had suffered a humiliating defeat. The opportunity to avenge it stood high on the list of Stalin’s wartime priorities. When he might take the opportunity, however, was what preoccupied the American President. To ensure that he did so sooner rather than later motivated almost all Roosevelt’s initiatives at Yalta. The price he paid in the end was to discredit Churchill in the eyes of their joint Polish allies, to concede Russia rights over territory in sovereign China which were not America’s to grant, but ultimately to assure that the repossession of Japan’s conquests in the Pacific would not be bought at the cost of American lives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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