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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8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5. 5. 1. 10:23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8 (번역 수정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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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8 (번역 수정본)

 

선사시대의 자아 발견에 관한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심신에 관한 언급

 

 

1 우주에 대한 우리 그림의 역사

일반적인 인간의 사상과 특히 과학은 인간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많은 우연한 사건들에 의존한다: 우리의 역사가 달랐더라면 우리의 현재 사고와 우리의 현재 과학이 (만약 있다면) 또한 다를 터이다.

이와 같은 논증들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상대주의적이거나 회의론적인 결론들로 경도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다. 우리의 사고에 우연한 (그래서 물론 비합리적) 요소들이 있음을 사실로서 우리가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론적 결론들을 자멸적이고 패배주의적으로서 배척할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고 때때로 정말로 배운다는 것과 이것이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지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발점들이 아무리 잘못되었을지라도 그 출발점들은 교정될 수 있어서 초월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과학에서 수행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비판에 의하여 우리의 실수를 집어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그 출발점들은 교정될 수 있어서 초월될 수 있다. 그리하여 과학적 사고는, 그 사고의 다소 우연적 출발점과 관계없이 진보적일 (합리적 관점에서)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판에 의하여 과학적 사고에 능동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진리에 더 접근할 수 있다. 그 순간의 과학이론들은 우리의 다소 우연적인 (혹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결정된) 편견과 동시에 비판적 오류 제거의 공동 산물이다. 비판과 오류 제거의 자극을 받아서 과학이론들의 진리유사성이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아마도 나는 경향을 띤다(tends)’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진리와 더 유사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이론들이나 가설들에 내재하는 경향이 아니 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설이 이전 가설에 대한 개선으로 보인다는 조건으로만

 

이 논문은 K. R. 포퍼와 J. C. 에클스(Eccles)의 공저 자아와 자아의 두뇌: 상호작용론에 대한 논증 (The Self and Its Brain: An Argument for Interactionism) (1977), 3, 런던, 1990, 1, 5, 43-7절을 재인쇄한 것이다. (참고자료들 포함하는 사소한 수정과 주석으로 인하여 현재 원본이 원래 원본과 구별된다.)

 

새로운 가설을 수용하는 것은 더 정확하게 우리 자신의 비판적 태도의 결과이다. 새로운 가설이 이전 가설을 대신하는 것을 허용하기에 앞서 우리가 새로운 가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가설은, 이전 가설이 해결했던 문제들을 적어도 이전 가설만큼 잘 해결해야 한다.

(2) 새로운 가설은 낡은 이론으로부터 귀결되지 않는 예측들의 연역을 허용해야 한다; 낡은 이론을 부인하는 예측들은 선호하여 다시 말해서, 결정적 실험들을 허용해야 한다. 새로운 이론이 (1)(2)를 만족시킨다면, 그 이론은 가능한 진보를 의미한다. 결정적 실험에 의하여 새로운 이론이 선호되어 결정되면, 그 진보는 실현될 것이다.

요점 (1)은 필수적 요건이고 보수적 요건이다. 그 요점에 의하여 퇴보가 예방된다. 요점 (2)는 선택적이면서 바람직하다. 요점 (2)는 혁명적이다. 과학에서 중요한 모든 돌파가 혁명적일지라도, 과학에서 모든 진보가 혁명적 특징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요건은 함께 과학적 진보의 합리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증가를 담보한다.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 견해는 상대론과 심지어 회의론의 대부분 형태에 엄격하게 반대가 된다고 나는 본다. 이 견해로 인하여 우리가 과학을 이념으로부터 구분하게 되고, 과학이 내놓는 흔한 현란한 결과를 과장하거나 독단화하지도 않고 과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과학이 낳는 결과 중 몇 가지 결과는 현란할 뿐 아니라 생소하고 아주 기대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들에 의하여 거의 전체적으로 물질이 없고 방사선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구성된 광대한 우주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듯하다. 그 우주에 물질이 겨우 조금 포함되어 있는데 그 물질 대부분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또한 그 우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양의 생명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의식을 지닌 훨씬 더 적은 양의 생명체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방대한 양의 우주에 생명체가 없을 뿐 아니라 광대한 시간에도 생명체가 없다. 무생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기원이 틀림없이 극단적으로 비개연적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자생물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심지어 매우 호의적인 상황에서도 ㅡ 그 상황들 자체가 비개연적이다 ㅡ 생명체는 셀 수 없이 많은 사건과 그 사건들이 길게 연속된 후에만 시작될 수 있었고, 그 사건들 각각은 전체적으로 아니라 간신히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현대 과학에 의하여 묘사되는 바와 같이, 우주에 대한 이 그림은 친숙하거나 직관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고 우리가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그림이 분명히 지적[知的]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흥미로울지라도). 그러나 왜 그 그림이 그런 인상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는가? 그것은 참이거나 진리에 근접할 개연성이 높다: 지금쯤 우리는 진리가 흔히 기묘하다는 것을 배웠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진리는 아마도 진리가 전혀 아닐 터이다 ㅡ 우리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잘못 읽었거나, 더 정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우리가 간주하는 것을 잘못 읽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비판적으로 진화하면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개연적이다. 무생물과 생명체와 의식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 세 가지와 그것들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리고 특히 우주에서 인간과 인간의 지식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 또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그림의 기묘함으로 인하여 주관론적 (그리고 신앙 지상주의적) 확률이론과 또한 주관론적 귀납이론, 더 정확하게, ‘개연적 믿음이라는 주관론적 이론이 내가 보기에 반박된다고 나는 지나가는 길에 언급할 것이다. 이유인즉 이 이론에 따르면, 친숙한 것인 우리가 익숙한 것은 또한 합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틀림없이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실상 과학의 진보에 의하여 친숙한 것이 수정되고 친숙하지 않는 것으로 대체된다.

우리의 최신 이론들에 따르면 이 우주론적 물질들은 극도로 생소하게 보일 터이다; 부언하여 과학이 비판의 압력을 받아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anthropomorphic) 신화들의 출발점에서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를 밝히는 사실이다. 물리적 우주는 강력한 폭발인 최초의 빅뱅(the first big bang)’에서 시작되었다는 몇 가지 독립적이고도 일관된 흔적을 지닌다 ㅡ 또는 그렇게 보인다. 게다가 우리의 동시대 이론 중 최고의 이론들로 보이는 이론들은 우주의 궁극적 붕괴를 예언한다. 이 두 가지 종말적 사건은 공간과 시간의 시작과 종말로서 심지어 해석되었다 ㅡ 비록 분명히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과학이론이 지니는 기묘함은, 더 순진한 견해와 비교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토론되었는데 그는 정사각형의 변을 지닌 대각선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에 관한 증거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이상학[Metaphysics] 983a11):

 

지식습득으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연구를 원래 시작한 정신 상태와

정반대되는 정신 상태가 틀림없이 확립된다....

이유인즉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심지어 최소

단위로도 측정될 수 없는 것이 {다시 말해서, 정사각형의 대각선}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경이로움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The acquisition of knowledge must establish a state of mind right

opposite to that from which we originally started our search....

For those who have not yet grasped the reason it must seem a

marvel that there should be something {that is, the diagonal of

the square} that cannot be measured, not even by the smallest

unit.

 

아리스토텔레스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식습득은 끝나지 않는 과정일 것이라는 점과, 지식의 진보의 의하여 우리가 지속적으로 놀라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질이론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보다 더 극적인 이것의 사례는 있을 수 없을 터이다. 그리스어 hylē는 우리가 물질(matter)’로 번역하고 호메로스에게서 흔히 화목(火木: firewood)’을 의미하는데 그 단어로부터 내가 자아와 자아의 두뇌(S. I. B: The Self and Its Brain), 3절에서 유물론의 자기-초월로서 기술한 것까지 우리가 진보했다. 그리고 몇 명의 주도적 물리학자들은 물질이라는 관념을 자신들이 해체하는 데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이것에서 내가 그들을 추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흐(Mach)의 영향을 받아서 물질이나 원자를 신뢰하지 않고 버클리(Berkeley)의 주관적 관념론을 상기시키는 지식론을 제안했던 마흐(Mach)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ㅡ 젊었을 때 마흐주의자였던 ㅡ 영향을 받아서, 양자역학의 위대한 선구자 몇 명에 의하여 특히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위그너(Wigner)에 의하여 양자역학에 대한 관념론적이고 심지어 유아론적(唯我論的)인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객관적 실재는 증발했다고 하이젠베르크는 서술했다. 버트런드 러셀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체셔 고양이(Cheshire Cat) 같이, 물질이 점점 속까지 비치게 되고 있어 마침내 아마도 즐거움에 의하여 야기되는, 물질이 거기에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없는 웃음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시작한 듯하다.’

 

사상사에 관한 나의 비평은 매우 개괄적일 것이다. 이야기하기가 나의 주목적일지라도 이것은 불가피할 터이다; 그러나 이야기하기는 나의 주목적이 아니다. 나의 주목적은, 문제를 ㅡ 그리고 심신 문제만 아니라 ㅡ 해결하려는 초기 시도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문제 상황이 발생했는지를 밝힘에 의하여 심신 관계에 관한 현재의 문제 상황을 더 잘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언하여 나의 주목적에 의해 역사란 문제 상황의 역사로서 기술되어야 한다는 나의 논지가 틀림없이 예시된다.

 

2. 이어지는 것에 의하여 해결될 문제

심신 문제의 고대 역사에 관하여 서술하면서 나의 주목적 중 한 가지는, 이 문제가 현대적 이념의 일부일 뿐이고 고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교설의 근거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 교설에 선전적(宣傳的: propagandist) 편견이 있다. 이원론적 종교나 철학에 의하여 세뇌당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유물론을 수용할 터라고 제안되었다. 고대 철학은 유물론적이었다고 주장되는데 ㅡ 비록 호도하는 것이지만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정신과 심신 문제에 흥미를 지닌 우리는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세뇌당했다고 제안되었다.

이 노선에서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의 탁월하고도 귀중한 정신의 개념(Concept of Mind)에서 중요한 것이 제시된다; 그것은 라일이 두 개의 극장 전설(77) 대하여 말하는 방송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제시되는데 그 전설을 그는 상당히 최신의 전설로 기술한다. 그는 또한 과학자들이 {쉐링튼<Sherrington>과 에이드리언 경<Lord Adrian>에 대한 언급} 자신들의 심신 문제를 결정했던 일반적인 용어들에 대하여 철학자들인 우리가 주로 비난받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76).철학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은 여기서 데카르트와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을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라일(Ryle)과 같은 탁월한 철학자에게서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 발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널리 퍼져 있다. 플라톤 연구(A Study in Plato)(1936)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론(Aristotle's Ethical Theory)(1968) 저자인 윌리엄(William) F. R. 하디(Hardie)는 최근 기고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두 가지 저서와 여덟 편의 기고문을 검토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기고문들 {그리고 저서들} 대부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거나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좋든 나쁘든, 의식에 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우리가 지닌 의식 개념에 대응하는 개념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디는 그 기고문 중에서 최고의 기고문을 매우 신중하게 검토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데카르트주의자가 아니었다고 ㅡ 전적으로 기대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ㅡ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의식하고있거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식물로부터 동물을 구분하는 것이거나 다른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 구분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용어사용법을 (“심리학”, “정신의[psychical]”, “정신물리학적[psychophysical]”, “심신의학적[psychosomatic]”’) 우리에게 부여했는데, 그 구분을 무시했다고 언급될 수 없음을 하디는 분명히 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말의 매우 폭넓고 다소 애매한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니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다양한 종류의 의식적 사건에 대하여 말하면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신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 ㅡ 비록 이 상호작용에 대한 그의 이론이 데카르트가 상호작용론에 부여한 기발하고도 일관성이 없는 (그리하여 옹호될 수 없는) 세밀한 설명과 다를지라도.

이 논문을 구성하는 역사관련 개괄에서 나는 다음 관점들을 선호하여 논증하려고 시도하겠다.

(1)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아니면 낫게, 신체 속의 유령이라는) 이야기 형태로 이원론은, 비록 원자론자들에 앞서서 신체가 기계로 간주되었을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역사적이거나 고고학적 증거가 도달하는 만큼 오래되었다.

(2) 그들의 입장에 관하여 확정된 것을 말할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상가는 데카르트를 포함하여 이르기까지 이원론적 상호작용론자들이었다.

(3) 인간 언어에 (원래 표면적으로 물질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속성을 기술하는 데만 합당했던) 내재하는 특정 경향으로 인하여 우리가 정신이나 영혼이나 정기에 대하여 마치 그것들이 고유한 (기체와 같은) 종류의 신체인 양 말하는 경향을 지니는 듯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이원론은 매우 뚜렷하다.

(4) 도덕적 세계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정신의 특징에 대한 깨달음이 나타난다. 이것은 호메로스(Homer)에게서 그러하다 (도덕적이고 인도적 고찰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전체 시의 절정으로서 프리아모스[Priam]가 아킬레스[Achilles]를 방문하는 것을 설명하는 일리아드[Iliad] 24 참조);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소크라테스에게서도 그러하다.

(5) 원자론자들의 사상에서 우리는 유물론과 상호작용론 그리고 또한 정신의 특별한 도덕적 특징에 대한 인정을 발견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그들 자신이 도덕적으로 대비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았다.

(6) 피타고라스학파,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에 대하여 유물론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초월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정신의 비물질적 특징을 인정하여 이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파이돈[Phaedo]에서 (아래 4절 참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귀속시키는 중요한 말은 목적 및 결정을 통한 인간 행동에 대한 도덕적 설명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이것을 생리학적 원인들을 통하여 인간 행태에 대한 설명과 대비시킨다.

(7) 상호작용론에 대한 대안들은 단지 데카르트 이후에 떠올랐다. 그 대안들은, 데카르트의 정교한 상호작용론이 지닌 특수한 난제들과 그 상호작용론이 물리학에서 데카르트의 인과론과 충돌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 요점들은 현재 그렇게 널리 퍼져있는 듯한 견해와 매우 다른 견해를 분명히 가리킨다. 이 일곱 가지 요점들에 나는 여덟 번째 요점을 덧붙이겠다.

(8) 우리는 심신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물리적 물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우리에게 실제로 확정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거의 확실하게 거짓인 정신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론을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 사건들이 상호작용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연상론(associationism)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 사건들이 상호작용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념들에 대한 연상론은, 정신적 사건들이나 과정들을 물체들처럼 (관념들, 그림들) 취급하고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인력(引力: attractive force)과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취급하는 이론이다. 연상론은,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정신적 사건들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시도할 때 거의 항상 우리가 사용하는 저 유물론적 은유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3 자아와 정신세계에 (2세계) 대한 선사시대의 발견

자아와 정신에 관한 이론의 역사는 물질론들의 역사와 매우 다르다.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선사시대에 이룩되었고, 피타고라스 학파와 히포크라테스 학파(Hippocrates)에 의하여 이룩되었다는 인상을 우리가 받는다. 더 최근에 많은 비판적 행위가 있었지만, 그 행위는 위대한 혁명적 관념들을 유발하지 못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은 과거에 놓여있다. 그 업적들은 언어의 발명과 다른 인공물을 만들기 위한 인위적 도구 사용의 발명을 포함한다; 도구로서 불의 사용; 자아의식 발견과 다른 자아의식들의 발견; 그리고 우리 모두 틀림없이 죽는다는 지식.

이 발견 중에서 마지막 두 가지 발견은 언어의 발명에 의존하는 듯하고 다른 발견들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언어는 분명히 이 업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업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언어는 우리의 유전적 구성에서 매우 깊이 뿌리박힌 업적이다 (물론 특수 언어가 틀림없이 전통으로부터 습득될지라도).

죽음의 발견과 상실감, 사별의 감정도 틀림없이 매우 오래되었다. 네안데르탈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장이라는 오래된 관습으로부터 우리는 이 인종이 죽음을 의식했을 뿐 아니라 부활을 또한 신뢰했다고 추측하게 된다. 이유인즉 네안데르탈인들이 죽은 자를 부장품과 함께 매장했기 때문이다 ㅡ 아마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세계나 또 다른 삶으로 여행하는 데 요긴한 부장품들. 게다가 R. S. 솔레키(Solecki)는 북부 이라크의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 분명히 나뭇가지로 만든 침상 위에서 꽃으로 치장된 채 매장된 (아마도 몇 명의)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보고한다. 그는 또한 두 명의 노인 해골을 발견했는데 한 명은 장애가 심한 노인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재활치료를 받은 경우를 발견했다고 보고한다. 그 장애인들은 인내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가족이나 무리에 의하여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약자들을 돕는다는 인도적 관념은 매우 오래된 듯하여 60,000-35,0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안데르탈인들의 원시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우리가 수정해야 한다.

죽음으로부터 생존이라는 관념이 심신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원론을 수반한다는 추측을, 많은 것이 대변하는 듯하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것이 아니다. 영혼이 연장된 것으로서 간주되었다는 관념을, 모든 것이 대변한다: 유령이나 혼령으로서 ㅡ 육신을 닮은 육체적 형태를 지닌 비실재적 모습으로서 ㅡ 간주되었다는 관념을, 모든 것이 대변한다. 아무튼 이것은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된 문헌적 자료에서, 특히 호메로스(Homer)에게서, 영웅전설에서 그리고 동화에서 (그리고 또한 셰익스피어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관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한 가지 형태의 유물론인데 물질이 (3차원적) 연장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데카르트적 관념을 수용한다면 특히 그렇다. 아무튼 데카르트적 관념의 이원론적 특징은 분명하다: 유령 같은 영혼은 육신과 다르고, 그 영혼은 육신보다 물질적이고, 그 영혼은 더 미세하고 더 공기 같고, 수증기 같고, 숨결 같다.

호메로스에게서 우리는 정신이나 영혼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의 기능인 R. B. 오니언즈(Onians)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의식의 과정에 대하여 단어들의 복합성을 우리가 경험한다: 느낌, 감지, 사유, 경멸, 분노, 기타 등등.

나는 여기서 이 단어들 중 세 가지만 언급하겠다. (헤시오도스[Hesiod]에게서 그 단어들은 유사하게 사용된다.)

호메로스에게서 극히 중요한 것은 혈액과 관련된 생명의 물질이자 수증기 같은 숨결 영혼이자 능동적이며 정열적이고 느끼고 사고하는 재료인 발랄함(thymos)이다. 우리가 졸도하거나, 마지막 숨을 쉬며 죽을 때 그것은 우리를 떠난다. 나중에 이 용어는, 용기와 에너지 및 정신과 활력을 뜻하기 위하여 의미에서 흔히 제한된다. 대조적으로 호메로스에게서 psychē(비록 thymos와 동의어로서 때때로 사용될지라도) 후기 저술가들에게서처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의 원리가 아니다. 오히려 psychē는 호메로스에게서 우리가 죽을 때 남겨지는 슬픈 잔재인 지능이 없는 불쌍한 귀신이고 육체에서 살아남는 유령이다: psychē통상적인 의식(意識)에 관여하지 않는다’; psychē저승의 집에서 통상적인 의식 {또는 통상적인 생명} 없이 존속하는 것이다... 한때 살았던 가시적이지만 감지되지 않는육신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오디세이(Odyssey) 11권에서 오디세우스(Odysseus)가 저승의 어둡고 음울한 집인 지하세계를 방문할 때, 생명과 유사한 것을 복원시키는 힘을 지닌 물질인 psychē를 그가 유령들에게 먹일 때까지 죽은 자들의 유령은 거의 완전히 생명이 없는 것을 그가 발견한다. 그 장면은 죽은 자가 생존하는 상태에 대한 통렬한 슬픔과 절망적인 연민의 장면이다. 살아있는 육신만 호메로스에게 온전히 의식을 지닌 자아이다.

세 번째 용어인 noos (혹은 곧 토론될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절 오디세이 10.240에서 nous) 통상적으로 영어로 정신(mind)’이나 이해(understanding)’로서 매우 잘 번역된다. 통상적으로 그 용어는 의도를 지닌 정신으로 목적이다 (독일어로 Absicht; 오디세이 24.474 참조). 오니언즈는 (전게서, 83) 그 용어를 목적을 지닌 의식(purposing consciousness)’으로 잘 규정한다. 그 용어는, 통상적으로 상황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며 호메로스에게서 때때로 의식적 지능이나 심지어 자아의 지능적 의식을 의미한다.

정신에 대한 (이원론적) 관념이 데카르트 이전에 발생한다는 것이 때때로 함축적으로 부인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사실로 인하여 내가 이 관념을 호메로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완전히 비역사적이 될 텐데, 내가 보기에 심신 문제의 역사이전과 초기 역사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구절을 (오디세이 10.240)을 나는 언급하고 싶다.

정신을 변화 없이 남겨두는 것은 육신의 마술적 변화인 변신(metamorphosis)의 이야기인데 동화와 민속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진 화제 중 하나이다. 우리 서구 문명의 거의 가장 오래된 현존 문예 서적인 이것에서 육신의 마술적 변화로 인하여 정신인 의식의 자기-동일성이 온전히 남는다고 명시적으로 서술된다.

오디세이 10권에서 그 구절은 키르케(Circe)가 오디세우스의 동료 몇 명을 자신의 지팡이로 후려치는 방식을 묘사한다: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목소리, 털과 몸을 (demas) 지녔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nous)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울면서 그곳에서 우리에 갇혀 있었다.’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의 충격적인 상황을 이해해서 자신들의 정체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명백하다; 그래서 고전적 고대와 다른 동화 이야기의 많은 마술적 변신을 그에 따라서 해석할 많은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하여 의식이 있는 자아란 데카르트적 이념의 인공물이 아니다. 의식이 있는 자아란, 현대의 반()-데카르트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다.

이것이 보이자마자 심신 이원론은 호메로스의 작품 모든 곳에서 증거로 남아있는 것이 보이고, 물론, 이후 그리스 작가들에게서도 그렇다. 이 이원론은 필멸-불멸이라는 대립과 같이 극단적으로 반대가 되는 것을 생각하는 매우 오래된 경향에 전형적이다. 예를 들어 아가멤논(Agamemnon)은 크리세이스(Chryseis)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일리아드 1.113-15): ‘당신을 알라, 나는 나와 결혼한 아내인 클라이템네스트라(Clytemnestra)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신체나 자세나 정신이나 정신의 업적에서 조금도 내 아내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신의 대비나 이원론은 호메로스에게서 매우 특징적이다. (위 주석14 참조); 그리고 정신이 통상적으로 물질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심신 상호작용이라는 분명한 교설에 어떤 장애물도 없다.

이원론에 관하여, 심신의 대비나 양극성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나의 정신나의 신체, 비록 그것들이 서로 동의어가 되는 일이 드물지라도, ‘나라는 개인(my person)’과 동의어로서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오이디푸스가 나의 정신(psychē)은 나와 너의 슬픔의 무게를 지닌다라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 그는 (크레온[Creon]) 교활하게 나의 신체(sōma)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라고 말할 때 소포클레스(Sophocles)에게서 한 가지 사례가 발견된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 나라는 개인’ (또는 단순히 (I)’는 영어로 충분하거나 훨씬 더 나을 터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뿐 아니라 그리스어에서도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한 가지 표현을 (psychē) 다른 표현으로 (sōma) 대체할 수는 없을 터이다. 우리가 항상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뿐 아니라 호메로스에게나 소포클레스에게도 성립한다.

내가 방금 상호작용론에 ㅡ 물질적 영혼과 물질적 신체의 상호작용 ㅡ 대하여 말한 것에 관하여, 그 상호작용이 기계론적 방식으로 간주되었다고 나는 암시하고 싶지 않다. 일관적인 기계론적 사유는, 물론 이전에 기계론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을지라도,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Leucippus) 및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함께 매우 훨씬 뒤에만 두드러진다. 호메로스 시대와 그 후 오랫동안 기계론적 용어나 다른 용어들로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많았고, 제우스의 벼락처럼 조악하게 물활론적(物活論的: animistic)’ 방식으로 해석된 것이 많았다. 인과성은 문제였다 그리고 물활론적 인과성은 신성(神性)에 가까웠다. 그래서 심신 모두에 신적(神的: divine) 행동이 있었다. 헬레네(Helen)의 경우와 같은 연애 사건이나 아가멤논의 경우와 같은 맹목적인 분노와 고집불통은 신()들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E. R. 도즈(Dodds)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전게서 9), 그것은 초월적 설명을 {요구했던} 특이한 상태였다.

 

심신에 관한 이원론적이자 상호작용론적 믿음들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가설을ㅡ 선사시대와 물론 역사시대의 ㅡ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는 많다. 민속과 동화는 별도로 그 가설은 원시종교, 신화 그리고 마술적 신념들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모든 것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예를 들어 샤머니즘이 있는데 샤머니즘은 무당의 영혼이 신체를 떠나 여행을 할 것이라는 특징적 교설을 지닌다; 에스키모의 경우 무당의 영혼은 심지어 달까지 여행한다. 그러는 동안 신체는 깊은 수면 상태, 즉 혼수상태에 빠져서 음식 없이도 생존한다. ‘저 상태에 빠져 그는, 피티아(Pythia)나 현대적 영매처럼, 외계의 영혼에 의하여 들씌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의 영혼은 자체의 육신을 떠난다고 생각된다’ (도즈, 전게서, 140). 도즈는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의 그리스 무당에 대하여 길게 설명한다; 선사시대의 무당에 대해서 단지 전설만 남아 있지만 그 전설들은 이원론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에베소의 일곱 수면자들(the Seven Sleepers of Ephesus) 이야기는 아마도 이 전설에 속하고, 윤회나 부활 이론에도 아마도 속할 것이다 (역사시대의 무당 가운데 도즈는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를 꼽는다.)

우리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회인류학자 E. E. 에반스-프리차드 (Evans-Pritchard) 따른 남녀 주술사(witches)와 마법사(sorcerers)의 구분이다. 그는 아잔데족(Azande)의 관념들을 분석하면서 의식적(意識的: conscious) 의도가 역할을 수행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마법사로부터 주술사를 구분하게 되었다. 아잔데족의 견해에 따르면, 주술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코지할 내재적인 초자연적 능력을 물려받았지만, 자신의 위험한 잠재력을 철저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사악한 눈이 그런 잠재력의 사례가 될 것이다.) 대조적으로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할 수 있는 실체과 마력을 다루는 기교를 습득했다. 이 구분은 모두는 아닐지라도 많은 원시적 아프리카 문화에 적용될 수 있는 듯하다. 그 적용 가능성으로 인하여 의식하여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과 무의식적이어서 의도되지 않은 효과들을 폭넓게 원시적으로 구분하는 사례가 존재함이 밝혀진다.

신화와 신앙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ㅡ 물론 사회적 세계를 포함하여 ㅡ 이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고 우리가 사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영혼과 신체의 오래된 구분은 그런 이론적 설명의 사례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그 구분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은 의식의 ㅡ 지능의, 의지의, 우리의 계획을 만들고 실행하는 것의 ㅡ 경험이다; 우리의 손과 발을 도구로서 사용하는 경험; 그리고 인공적이고 물질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그 도구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경험. 이 경험들은 철학적인 이념들이 아니다. 그 경험들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실체적 (혹은 심지어 물질적) 영혼에 관한 교설은 신화일 개연성이 높다: 정말로 실체론(substance theory)과 같은 것은 신화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그것이 신화라면, 그 신화는 의식과 우리가 지닌 의지의 실재나 유효성을 파악한 결과로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를 파악하면 우리는 먼저 영혼을 물질적으로서, 가장 미세한 물질로서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영혼을 비-물질적 실체로서 생각하게 된다.

원시인에 의하여 그리고 선사시대의 인류에 의하여 (그리고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의 종[: species]보다 앞서고 구분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분류되고 최근에 자신의 피를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섞었다고 생각되는 네안데르탈인에 의하여) 이룩된 것으로 보이는 주요 발견을 나는 혹시 최종적으로 요약할 것이다.

죽음과 죽음의 불가피성이 발견된다; 수면과 무의식 상태는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그리고 임종에서 우리를 떠나는것은 의식이나 영혼 혹은 정신(thymos)이라는 이론이 수용된다. 의식의 ㅡ 영혼의 (또는 정신) ㅡ 실재와 그리하여 물질성과 실체성이라는 교설은 발전되고, 나아가 영혼이나 정신의 복잡성에 대한 교설도 발전된다: 욕망, 공포, 분노, 지성, 이성 혹은 통찰은 (nous) 구별된다. 꿈 경험과 신적(神的) 영감 및 접신(接神) 상태와 다른 특이한 상태들이 인정되고 또한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 정신 상태가 (‘주술사의 정신 상태와 같은) 인정된다. 영혼은 살아있는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나 생명의 원리로서 간주된다. 특이한 상태에서 (광란) 저질러지는 행위나 비의도적 행위에 대한 우리의 책임 결여라는 문제가 파악된다. 신체에서 영혼의 위치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통상적으로 영혼은 신체에 퍼지지만 심장과 폐에 중심을 잡는다는 이론에 의하여 답변된다.

이 교설 중 몇 가지는 틀림없이 실체화(hypostatizations)이어서 비판에 의하여 과거에 수정되었거나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교설들은 오류다. 그러나 그 교설들은, 의식에 관해 우리가 지닌 현대적 관점의 원시적 특징에 이것이 기인할 것임이 수용될지라도, 물질에 관한 이오니아학파 이전이나 심지어 이오니아학파의 이론들보다 현대적 관점 및 현대적 문제에 더 가깝다.

 

4. 그리스 철학에서 심신 문제

그리스인들은 심신 문제가 아니라 영혼-신체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고 때때로 주장된다. 이 주장은 내가 보기에 오류이거나 언어적 장난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영혼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에서 정신의 역할과 매우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영혼은 독립체였고 실체였는데 자아의 의식적 경험을 요약한다. (영혼은 의식적 경험의 실체화[hypostatization]로 ㅡ 거의 불가피하고 아마도 정당화된 ㅡ 언급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기원전 5세기의 피타고라스 학설에서만큼 일찍 영혼의 비물질성이라는 교설을 발견한다; 그리고 몇몇 저술가들에게서 몇 가지 개념들이 (예를 들어 nouspsychē) 때때로 현대적 정신 개념에 매우 근접하게 대응한다. (‘정신[mind]’의 영어적 개념은 흔히 독일어 Seele로 번역되는데 그 독일어 단어는 또한 영혼의 번역이기도 함을 또한 기억하라; 이 절의 첫머리의 주장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정신영혼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상.) 특정 용어들의 사용이, 흔히 주장되는 이론과 당연시되는 견해를 지적할지라도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밀접하게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한 이론들도 때때로 매우 상이한 용어사용법으로 언명된다. 정말로 심신에 관한 호메로스 이후의 주요 변화 몇 가지는 용어사용법과 관련된다; 그래서 그 변화들은 이론에서의 변화들과 병행하지 않는다.

다음에서 나는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Epicurus)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영혼의 (I) 역사를 (정신의 위치에 대한 역사를 포함하여); 피타고라스학파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정신의 비물질화 즉, 정신화의 (II) 역사를; 피타고라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에 이르는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도덕적 개념의 (III) 역사를 간략하게 개괄하겠다.

 

I

호메로스에게서 살아있는 육신의 물질적 영혼은 수증기 같은 호흡이었다. (이 호흡-영혼이 어떻게 지능이나 이해력 혹은 정신과 연관되었는지는 아주 분명하지 않다.) 아낙시메네스에서부터 아래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Diogenes of Appolonia)에 이르는 이오니아 철학의 전통에서 호흡-영혼은 매우 근접하게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영혼은 공기로 구성된다.

거스리(Guthrie)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psychē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상가에게 한 가지 영혼뿐 아니라 영혼 자체를; 다시 말해서, 관사의 생략에 의하여 더 잘 지적되는 일종의 영혼-물질에 의하여 세상이 스며들다를 의미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당시 유물론적 사상가들에게도 해당된다: 물질의 알려진 형태 중에서 공기가 가장 미세하고 가장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혼을 공기로서 (그리고 영혼을 공기의 일부로서) 간주했다.

아마도 더 이상 물질적 정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가 그것을 표현하는 바와 같이 (DK 59B12), ‘정신은 (nous)... 사물 중에서 가장 정화된 것이어서 가장 순수한 것이다; 정신은 만물에 관한 모든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정신이 가장 큰 힘을 지닌다. 그래서 생명(psychē)을 지닌 모든 것, 가장 큰 것과 {유기체} 가장 작은 것들, 이 모든 것을 정신이 지배한다.’ 아낙사고라스가 물질적 정신을 신뢰했든 아니든, 그는 정신과 모든 다른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들을 날카롭게 틀림없이 구분했다. 아낙사고라스에게 정신이 움직임과 질서의 원리인데 그리하여 생명의 원리이다.

심지어 아낙사고라스 이전에도 여전히 영혼의 ㅡ 영혼 물질의 ㅡ 교설에 관한 유물론적 해석일지라도 더 흥미로운 해석이, 모든 유물론자 중에서 아마도 기계론적 유물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상가였던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에 의하여 주어졌는데 왜냐하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모든 물질적 실체들과 특히 영혼을 물질적 과정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영혼은 (fire)이었다. 우리가 화염이고 우리 자신이 과정이라는 것은 놀랍고도 혁명적인 관념이었다. 그 관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지녔던 우주론의 일부였다: 모든 물질적 물체는 변화 속에 놓여있다: 그 물체들은, 전체 우주를 포함하여, 모두 과정이다. 그리고 만물은 법칙(logos)에 의하여 지배된다. ‘당신은 영혼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모든 길을 여행할지라도: 영혼의 법칙(logos)은 그렇게 깊다’ (DK B45). 영혼은, 불과 같이, 물에 의하여 살해된다: ‘영혼이 물이 되는 것은 죽음이다’ (DK B36). 불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물질적 과정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순수한 (그리고 틀림없이 또한 가장 세밀한) 것이다.

이 모든 유물론적 이론은, 우주 안에서 영혼에게 매우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위상을 부여한 한 이원론적이다.

의학적 사상가들로 구성된 학파들도, 여기에 기술된 의미에서 틀림없이 유물론적이자 동시에 이원론자들이었다. 크로톤의 알크마이온(Alcmaeon of Croton)은 통상적으로 피타고라스학파로 간주되는데 감각과 사유를 (그가 날카롭게 구분했던 듯한) 두뇌 속에 위치시킨 최초의 사상가였던 듯하다.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그가 감각기관으로부터 두뇌에 이르는 통로들에 (poroi) 대하여 말했다고 보고한다 (거스리, 그리스 철학사, 1, 349; DK A5, 212, 8). 그리하여 그는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플라톤이 집착한 전통을 창조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전통에 집착하지 않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오래된 전통에 집착하여 심장을 공동 감각기관으로서, 그리하여 의식의 보금자리로서 간주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논문 성스러운 질병에 관하여(On the Sacred Disease)는 가장 흥미롭다. 그 논문은 두뇌가 사지(四肢)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지시할 뿐 아니라 두뇌가 의식(sunesis)의 사자(使者)이어서 발생하는 사건을 의식에게 말한다라고 또한 크게 강조하여 주장한다. 두뇌는 또한 의식의 해석자로서 (hermēneus) 기술된다. 물론 sunesis라는 단어는 여기서 의식으로 번역되는데 또한 지능이나 총명함혹은 이해력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하다 ㅡ 또한 그 논문의 저자가 우리가 심신 문제 그리고 심신 상호작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을 상세하게 토론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성스러운 질병에 관하여, 특히 19장 및 20.) ‘두뇌에게 지능을 부여하는 것은 공기이다라는 사실에 의하여 그는 두뇌의 영향을 설명한다 (19); 그리하여 공기는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에게서처럼, 영혼으로서 해석된다. 그 설명은 사람이 숨을 들이쉴 때, 공기가 먼저 두뇌에 도달한다이다. (의학적 전통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공기와 영혼 사이의 관계를 포기하고 공기와 두뇌 사이의 관계를 유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기에 의한 냉각장치로서 ㅡ 일종의 공랭식 발열기[air-cooled radiator]로서 ㅡ 두뇌를 간주했다.)

유물론적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일관적 사상가는 데모크리토스였다. 원자의 움직임과 충돌에 의하여 그리고 원자들이 결합하고 분리함인 원자들의 합성과 분열에 의하여, 그는 자연적이고 심리학적인 모든 과정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했다.

1945-46년에 최초로 발간된 탁월한 논문 데모크리토스의 윤리학과 물리학(Ethics and Physics in Democritus)’에서, 그레고리 블라스토스(Gregory Vlastos)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심신 문제를 상당히 자세하게 토론한다. 데모크리토스 자신이 의학 논문의 저자였으며 신체를, 신체와 영혼 모두의 복리에 대한 열쇠로 만들려는 전문적 경향에 대항하여 반론을 펴고 있었다고 그가 지적한다. 유명한 데모크리토스의 단편 글 (DK B187)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단편 글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신체에 관해서보다 영혼에 관하여 logos{= 법칙 혹은 이론}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하다. 이유인즉 영혼이 완성되면 신체의

결함이 바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론 없는 신체의 힘에 의하여 영혼이

향상되지 않는다.

 

블라스토스는 영혼에 대한 이 logos의 최초 격언은 책임의 원리라고 지적한다: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 책임을 지는 대행기관이다. 이것은 영혼이 신체를 움직인다라는 물리학의 원리로부터 귀결된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물리학에서, 영혼은 최소의 원자들로 구성된다. 그 원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De Anima] 403b31에 따르면) 불의 원자들과 동일한 원자들이다. (분명히 데모크리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 원자들은 둥글고 여하한 것을 통과하여 가장 잘 빠져나갈 수 있고 자체의 움직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을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다.’

작은 영혼 원자들은 영혼과 신체의 원자들이 번갈아 나오는 방식으로 신체 도처에 분포된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만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III, 371-3 참조). 더 정확하게, ‘영혼에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합리적(logikos)인데 심장에 위치하고 반면 추론하지 않는 부분은 전체 신체 도처에 퍼진다’ (DK 68 A105). 이것은 틀림없이 심신 문제의 특정 면모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당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가르쳤던 (변명[Apology] 참조) 소크라테스처럼, 기계론적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인간은 신체나 재화로부터 행복을 얻지 않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폭넓게 생각함에 의하여 행복을 얻는다’ (DK B40). 또 다른 윤리적 단편 글은 영혼이라는 상품을 선택하는 자는 신성한 것을 더 많이 선택한다; 신체라는 상품을 선택하는 자는 인간의 것을 더 많이 선택한다’ (DK B37; 블라스토스의 전게서 382쪽 이하와 비교하라). 자신의 동시대인이었던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은 불의한 행위로 고통당하는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He who commits an act of injustice is more unhappy than he who suffers it)’ (DK B45).

우리는 데모크리토스를 유물론자로서 뿐 아니라고 일원론적 원자론자로서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그는 일종의 이원론자이기도 했다. 이유인즉 그가 영혼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의 역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할지라도 그는, 아래 (III)에서 다루어지는 바와 같이, 영혼의 도덕적 개념과 신체에 대한 영혼의 대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또한 수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단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ura] IV) 꿈에 관한 이론을 간단히 언급하겠는데, 그 이론으로부터 영혼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이 의식적 경험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꿈은 신()들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지가 기억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II

호흡으로서의 ㅡ 공기로서 혹은 불(fire)로서 ㅡ 영혼이라는 호메로스의 개념을 우리가 방금 알았다: ㅡ 오랫동안 생존한 ㅡ 매우 미세한 물질적 실체로서의 영혼.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선배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을 때 (영혼에 관하여[De Animα] 405b11) 매우 올바르지 않았다: ‘그들 거의 모두는 영혼의 세 가지 속성에 의하여 영혼을 규정한다: 움직임 {의 힘}; 감각; 그리고 비실체성.’ 마지막 용어는 이것을 완전히 올바르게 만들기 위하여 약화되어 비교적 비실체성이 되어야 한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선배 중 몇 명이 영혼은 미세한 신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수는 용서될 수 있다. 심지어 유물론자들도, 습관적으로 영혼을 신체와 대비시켰던 이원론자들이었고 나는 제안한다. 그들 모두가 영혼이나 정신에서 신체의 진수(essence)를 보았다고 나는 제안한다.

분명히 진수에 대하여 두 가지 관념이 있다: 실체적 진수와 비실체적 진수. 유물론자들은, 데모크리토스에 이르고 초월해서까지, 인간의 영혼이나 정기를 술의 주정(酒精: spirit)과 유사한 것으로서 ㅡ 혹은 영혼과 유사한 것으로서 술의 주정 ㅡ 간주했다.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S. I. B.], 1, 30, 주석2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공기와 같은 (물질적) 영혼 실체에 도달한다. 그러나 또 다른 관념은, 내가 생각하기에 피타고라스나 피타고라스학파인 필로라우스(Philolaus)에게서 기인하는데 사물의 진수(essence)가 추상적인 것이라는 (숫자나 숫자비율과 같이) 것이었다.

아마도 일시적이거나 비실체성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일신론이다. 크세노파네스는 그 이오니아의 전통을 이탈리아로 가져왔는데 신()에 대한 정신이나 생각이 신성한 진수(essence)라고 강조했다; 비록 그의 신()이 사람을 닮았다고 상상되지 않을지라도 (DK B23, 26, 25, 24):

 

한 분의 신(), () 가운데 홀로, 인간 가운데 홀로, 가장 위대한데,

그분은 신체에서도 정신에서도 인간을 닮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한 곳에 주재하신다: 그분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분이 이제 여기로 이제 저기로 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분은 생각과 의도만으로 노력도 하지 않고 세상을 휘두른다.

그분은 모두 본다; 모두 안다; 그리고 모두 듣는다.

 

정신은 여기서 감지와 사유, 의지력 그리고 행동력과 동일시된다.

피타고라스학파의 비물질적인 숨은 진수들(essences)숫자들, 그리고 비율들이나 화음들과 같은 숫자들 사이의 관계가 이오니아 철학의 실체적 원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탈레스가 주장하는 , 아낙시만드로스가 주장하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의 공기,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하는 이라는 이오니아 철학의 실체적 원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매우 뚜렷한 변화이고, 협화음 음정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숫자 비율임을 발견했던 사람이 피타고라스 자신이었다는 상정(想定)에 의하여 최고로 설명된다. 움직여지는 기러기발(movable bridge: 안족[雁足]) 도움을 받아서 중단될 수 있는 한 줄의 현을 가진 악기인 일현금(一絃琴)으로 우리는 옥타브가 현()의 길이의 1:2 비율에 일치하고 5옥타브가 2:3의 비율과 일치하며 4옥타브가 3:4의 비율에 일치함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멜로디나 화음의 숨은 진수들(essences)은 간단한 특정 숫자인 1:2:3:4의 비율이다 ㅡ 비록 경험된 화음이 분명히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이 아니라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사건일지라도.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직각삼각형이 (분명히 또 다른 정성적 사건) 3:4:5의 비율과 관련되어 있음을 피타고라스가 발견했을 때 이것은 틀림없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이 비율들의 변을 지닌 모든 삼각형은 직각삼각형이었다. 이 발견을 이룬 한 사람이 피타고라스였던 듯한데 그렇다면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기하학의 대수적 면에 썼다는 보고가 사실일 것 같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VIII. 11 이하).

이 보고들로 인하여 만물의 숨겨진 진수들이 추상적이라는 피타고라스 이론의 배경이 설명된다. 그 진수들은 숫자들이다; 숫자들로 된 숫자적 비율들이다; 그리고 화음들이다. 거스리 그리스 철학사 (1301)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만물이 숫자의 구현이었다. 그들은 정의(正義), 혼합, 기회처럼 우리가 추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을 포함시켰다.’ 거스리가 여기서 구현(embodiment)’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아마도 흥미롭다. 정말로 진수가 속하는 것에 대한 진수의 관계가 신체에 대한 영혼이나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우리가 여전히 느낀다.

거스리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름으로 알려진 영혼에 관한 두 가지 이론이 사실상 있었다고 제안했다 (전게서, 306쪽 이하). 첫 번째 이론은 원래 이론인데 아마도 피타고라스 자신에게서 유래하거나 피타고라스학파인 필로라오스(Philolaus)에게서 유래하는데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이 추상적 숫자들의 화음이거나 조율이라는 것이었다. 이 숫자들과 이 숫자들의 화음적 관계는 신체에 앞서고 신체보다 오래 산다. 두 번째 이론은 플라톤에 의하여 필로라오스의 제자인 심미아스(Simmias)의 입으로 표현되는데 영혼은 수금(竪琴: lyre)의 화음이나 조율처럼, 신체의 화음이나 조율이라는 것이었다 (수금은 물리적인 제1세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이론으로 잉태된 제3세계의 대상이라는 것이 주시되어야 한다). 수금(竪琴: lyre)의 화음이 수금과 함께 틀림없이 죽는 것처럼 영혼도 신체와 함께 틀림없이 죽는다. 두 번째 이론은 인기를 얻게 되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폭넓게 토론되었다. 그 이론의 인기는 분명히 그 이론이 심신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쉽게 파악되는 모형을 제시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관련되지만 미묘하게 다른 두 가지 이론을 경험한다; ‘두 가지 종류의 영혼(거스리, 그리스 철학사, 1, 317) 불멸이며 더 높은 종류의 영혼 그리고 죽을 수 있어서 더 낮은 종류의 영혼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두 가지 이론; 두 가지 이론 모두 화음이다. 두 가지 이론인 피타고라스 이론과 심미아스 이론 모두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거스리가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학파를 추적하여 탁월하게 토론하기 전까지 그 두 가지 이론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우리가 거스리와 함께 피타고라스의 이론으로서 (심미아스의 이론과 대조적으로) 기술할 이론이 어떻게 신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화음, 숫자의 비율) 상상하는지의 문제가 틀림없이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이론과 ㅡ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론 ㅡ 유사했을 수 있다고 우리가 추측할 것이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형성된 신체란 무형이거나 확정되지 않은 공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질료에 대응하는) 자체를 각인시키는 이전에 존재하던 형태의 결과이다. 이 형태는 숫자의 (혹은 숫자 비율이나 삼각형의) 본성일 터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부터, 조직된 신체가 또한 신체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이전에 존재하던 숫자들의 화음에 의하여 조직될 터라고 우리가 아마도 결론을 내릴 터이다.

영혼과/또는 정신을 비실체적 진수들(essences)로서 해석했던 이론을 제시하면서 피타고라스학파를 따랐던 철학자들은 (‘심미아스를 포함하여)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틀림없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들은 나중에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어지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하여 이어지고 데카르트에 의하여 이어졌다.

플라톤은 다양한 때에 정신에 관하여 다소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했지만, 그 이론들은, 피타고라스의 정신 이론이 그의 숫자나 비율 이론과 관련된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플라톤 자신의 형상이나 이데아 이론과 관련되었다. 숫자들과 숫자들의 비율에 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은 일반적 사물의 참된 본성이나 진수에 관한 이론으로서 해석될 수 있고 플라톤의 형상이나 이데아의 이론도 그렇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에게 영혼이 숫자들의 비율인 반면 플라톤에게 영혼은, 비록 형상이나 이데아는 아닐지라도, 형상이나 이데아와 유사하다. 그 유사함은 매우 크다: 영혼은, 살아있는 몸의 진수에 매우 근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도 다시 유사하다. 그는 영혼을 살아있는 신체의 1 현실태(entelechy)’로 묘사한다; 그리고 제1 현실태는 살아있는 신체의 거의 형상이나 진수이다. 영혼에 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주요 차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적 낙관론자이지만 플라톤은 오히려 비관론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목적론적이다: 모든 것이 완성을 향하여 진보한다. 플라톤의 세계는 신()에 의하여 창조되어, 창조되었을 때 최상의 세계이다: 플라톤의 세계는 나은 것을 향하여 진보하지 않는다. 유사하게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도 진보적이지 않다; 그 영혼은 보수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entelechy)은 진보적이다: 그 현실태는 목적을 향하여 분투한다.

 

내가 보기에 이 목적론적 이론은 ㅡ 목적을 향한, ()을 향한 영혼의 분투 ㅡ 소크라테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상의 목표를 지니고 최상의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이 최상인지를 아는 데서 귀결되며, 정신이나 영혼은 항상 최상의 결과를 낳기 위하여 행동하려고 시도한다고 그가 가르쳤다. (거스리의 저서 III421쪽 이하에 따라서 내가 역사적으로서 간주하고 싶은 파이돈[Phaedo], 96a 이하, 특히 97d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자전적 언급을 또한 참조.)

진수들(essences)의 세계라는 플라톤의 교설은 ㅡ 그의 형상이나 이데아 이론 ㅡ 내가 제3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최초의 교설이다. 그러나 (내가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S. I. B.]13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 정신의 생산물들 세계인 나의 제3세계 이론과 플라톤의 형상 이론 사이에 상당한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서 관념들의 ㅡ 현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문화의 ㅡ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인들 (아마도 프로타고라스 및 데모크리토스와 함께) 중의 한 명이었다.

심신의 문제에 관하여 플라톤은 이 문제를 주로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밀교적-피타고라스적 전통처럼 그는 신체를 영혼의 감옥으로서 간주한다 (우리가 윤회를 통하여 신체로부터 어떻게 탈출하는지는 아마도 매우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이나 정신 혹은 이성은 틀림없이 신체의 (그리고 영혼의 낮은 부분들의: 신체적 욕구는 신체와 비슷해서 영혼이나 정신 혹은 이성에 의하여 지배당하기 쉽다) 지배자다. 플라톤은 자주 심신의 병행론을 지적하지만 심신의 상호작용을 당연한 문제로서 수용한다: 프로이트처럼 그는 정신에 세 가지 부분이 있다는 이론을 옹호한다: (1) 이성; (2) 활동이나 에너지 혹은 활기 (thymos로 흔히 정신이나 영혼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3) (저급한) 신체적 욕구. 프로이트처럼 그는 영혼의 저급 부분과 고급 부분 사이에서 일종의 계급투쟁을 전제한다. 꿈속에서 저급 부분은 억제에서 풀려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욕구들로 인하여 우리가 어머니와 결혼하는 꿈을 꾸게 되거나 혈육과 관련된 추잡한 행위(제임스 애덤[James Adam]이 추가하는 존속살해와 같은) 관한 꿈을 꾸게 (국가[Republic], 9권의 첫머리, 571d 이하) 될 것이다. 그런 꿈은 영혼의 동물적이고 야만적 부분을 근거로 우리 신체의 행동으로부터 출현한다고 분명히 암시된다; 그래서 이 부분들을 길들여서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이성의 과제라고 분명히 암시된다. 심신 사이의 상호작용은 플라톤이 여기와 다른 곳에서 기계적 힘이라기보다 정치적 힘과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힘에 기인한다: 틀림없이 심신 문제에 흥미로운 공헌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육체의 항해사로서 기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영혼의 저급한 (비합리적) 부분과 고급 (합리적) 부분이라는 이론을 지녔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정치적이나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고취된다. (그러나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1102b10 이하에서, 아마도 플라톤의 꿈 구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훌륭한 사람들의 꿈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보다 낫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들은, 몇 가지 면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선례가 된다. 그는 영양과 관련된 영혼을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감각적 영혼 및 움직임의 근원인 영혼 (동물에게서만 발견되는) 그리고 인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불멸하는 합리적 영혼(nous)으로부터 구분한다. 그는 이 다양한 영혼들이 형상들이나 진수들이라고 자주 강조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수에 관한 이론은 플라톤의 이론과 다르다. 그가 말하는 진수들은 플라톤의 이론처럼 형상이나 이데아의 분리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수들은 물체들에 내재한다. (유기체의 경우 그 진수들은, 유기체의 생명 원리처럼, 유기체에 산다고 언급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합리적인 영혼이나 진수는 현대 유전 이론의 선례라고 언급될 것이다: DNA처럼 그것들은 유기체의 행동을 계획하고 자체의 완성인 자체의 telos로 조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감각적이고 움직이는 영혼의 비합리적 부분이나 잠재력은 라일(Ryle)의 행동 의향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은 물론, 사멸할 수 있고, 심미아스(Simmias)신체 조화와 전적으로 흡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조화론을 비판하여 할 말이 많을지라도). 그러나 합리적 부분인 영혼의 불멸하는 부분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합리적 영혼은, 물론 플라톤이 말하는 합리적 영혼처럼 그 영혼 자체의 자아를 의식한다 (예를 들어 여기서 지적[知的] 직관을 의미하는 nous에 대한 토론과 함께, 후 분석론[Posterior Analytics] 99b20 끝까지 참조). 심지어 찰스 칸(Charles Kahn)도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의 개념 사이의 차이점을 기꺼이 강조하는데, 탁월하고도 매우 신중한 연구 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이 자아의식에 대한 개념을 정말로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내가 거의 명백하다고 간주하는) 다다른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지닌 신체적 감각기관과 우리가 지닌 주관적 의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깨달았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한 가지 중요한 구절만을 나는 언급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 꿈에 관하여(On Dreams) 461b31에서 우리는 다음 글을 읽는다:

 

손가락이 자기 눈 아래를 누르고 있음을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면 한 가지 사물이 두 개로 보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은 한 가지 사물이 두 개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그가 {자기 눈 아래서 손가락이 누르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지 않으면, 한 가지 사물은 여전히 두 개로 보일 것이지만 그 사람은 그 사물이 두 개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 인식의 실재와, 감각이란 믿는 의향이 아니라는 사실의 실재를 보여주는 고전적 실험이다.

 

III

영혼이나 정신 혹은 자아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서 윤리적 관념들의 발전이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매우 두드러지고 중요한 것은 주로 영혼의 생존 이론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호메로스와 지하세계에 대한 몇몇 다른 신화 중에서 영혼의 특별한 우수성이나 영혼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보상과 처벌의 문제가 항상 적시됨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에서 많은 죄악을 결코 저지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의 살아남은 영혼의 위상은 지독하고 암울하다. 오디세이의 어머니가 그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범죄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 그녀는 죽어있는 상태의 일부로서만 고통을 겪는다.

엘레우시스(Eleusis)의 밀교는 (그리고 아마도 소위 오르페우스 종교[Orphic religion]’) 이 신앙에 변화를 초래했다. 여기에 미래의 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이 있다 ㅡ 올바른 의식(儀式: rituals)을 갖춘 올바른 종교가 채택된다면.

칸트 이후 사람인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보상 약속이 도덕적 동기부여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보상 약속은 도덕적 행동이 자체를 위하여 실천된다는 소크라테스와 칸트의 관점으로 가는 길에서 최초의 걸음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소크라테스와 칸트의 관점에서 그런 종류의 보상 약속은 내세에 약속된 보상에 지불되는 대가인 훌륭한 투자라기보다 자체에 대한 보상이다.

이 발전에서 단계들이 명백하게 목격될 수 있다; 그래서 책임지고 행동하는 인격인 자아, 즉 영혼에 대한 발전적 관념은 이런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아마도 엘레우시스 밀교와 오르페우스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피타고라스는 영혼의 생존과 부활 즉, 윤회를 가르쳤다: 영혼은 다음 생애의 품격에 ㅡ 도덕적 품격 ㅡ 의한 자체의 행동에 대하여 보상받거나 처벌받는다. 이것은 선()이 자체의 보상이라는 관념을 향한 첫걸음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피타고라스학파 교설의 영향을 받았는데, 소크라테스처럼 (이 절의 앞부분에서 우리가 안 바와 같이) 불의한 행위로 고통받는 것보다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더 나쁘다고 가르쳤다.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는, 물론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부활과 관련하여 불가지론자였던 듯하다 (파이돈[Phαedo]에 따르지 않을지라도 플라톤의 변명[Apology]에 따르면). 두 권의 저서 모두 보상과 처벌을 통하여 ㅡ 칸트의 도덕적 엄격주의에 수용될 수 없는 관계 ㅡ 논증한다. 그러나 두 권의 저서 모두는 향락주의에 ㅡ 향락 원리에 ㅡ 대한 원시적 관념을 멀리 초월했다. (파이돈[Phαedo] 68e-69a와 비교하라.) 두 권의 저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사실상 자신의 자아를 처벌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두 권의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단순한 교훈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말라;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모든 사람을 도우라!’ (Neminem laede; immo omnes, ut potes, juva!)를 수용했을 터이다. 그리고 두 권의 저서 모두는, 본질적으로 자존심과 다른 개인들의 존중에 대한 호소였던 것에 의하여 이 원리를 옹호했을 터이다.

많은 유물론자와 결정론자처럼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과 결정론이 사실상 자체의 계몽되고 인도주의적인 도덕적 교훈과 양립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성을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으로서 간주할지라도, 그들은 제3세계의 일부임을 알지 못했다: 도덕성이 부분적으로 인간 정신의 자주적 산물임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분명하게 최초로 깨달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심신의 문제에 매우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언급인데 아마도 진정으로 소크라테스의 언급으로, 감옥에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을 플라톤이 기술하는 대화편인 파이돈[Phαedo]에 보고된다. 내가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언급은 소크라테스에 의한 몇 가지 자전적 언급을 포함하고 있어서 유명한 파이돈[Phαedo] (96a-100d)의 글귀에서 출현한다. 첫 번째 언급은 (96b) 전체 철학사에서 심신 문제를 가장 명료하게 언명한 것 중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렸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에 흥미를 지녔다고 보고한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더위와 추위는 발효의 과정에

의하여 동물의 조직을 유발하는가? 우리의 혈액으로써, 혹은

공기로써, 혹은 불로써 우리가 생각하는가? 아니면 감각을 ㅡ

청각, 시각 그리고 후각 ㅡ 낳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고 오히려

두뇌인가; 그리고 기억과 견해는 이런 감각으로부터 출현하는가?

그래서 논증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 epistēmē)

확고하게 확립된 기억과 견해로부터 도출되는가?

 

소크라테스는 곧 자신이 그런 모든 물리주의적 사념을 거부했다고 밝힌다. 생각이나 사유나 이성은 항상 어떤 목표나 목적을 추구한다고 그는 결정했다: 그런 것은 항상 최선의 것을 수행하면서 목표를 추구했다. 아낙사고라스가 정신(nous)모든 것을 명령하고 야기한다고 가르친 책을 집필했다는 것을 듣자마자 소크라테스는 그 책을 읽고자 매우 열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심하게 낙담했다. 왜냐하면 그 책이 세계질서의 기초를 이루는 목적이나 근거를 설명하지 않았고 세계를 순전히 기계적 원인에 의하여 움직이는 기계로서 설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 98c-99a, 두 번째 언급에서 말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가 이성이나 지성을 지니고 행동하는 것 같다고 처음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경우 내가 지금 수행하는 것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면서, 나의 몸이 뼈와 힘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앉아있음을 주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힘줄은

이완과 수축에 의하여, 내가 나의 사지를 지금 굽히도록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 같고 이것이 내가 여기에 나의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있는 이유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여기 감옥

안에 앉아있는 실재적 이유는 아테네인들이 나를 기소하기로

결정했고, 내가 여기에 머물면서 아테네인들이 나에게 부과한

처벌을 겪는다면 더 정의롭다고 내가 결정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탈출하여 도망치는 것보다 나의 도시가 나에게 가할 벌을

견디는 것이 낫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개에 의하여...

나의 이 뼈들이 메가라(Megara)나 보에티아(Boetia)에 있었을 테니까.

 

존 벨로프(John Beloff)는 이 구절을 죽음에 직면한 도덕적 자유에 대한 탁월한 확인이라고 올바르게 지칭한다. 그러나 그 구절의 의도는 물리적 원인들을 통한 설명과 (1세계의 인과적 설명) 실현될 목표, 목적, 동기, 이유와 가치를 통한 설명을 (2세계의 설명으로 또한 제3세계에 대한 고찰을 포함한다: 아테네의 법률질서를 위반하지 않으려는 소크라테스의 소망) 날카롭게 구분하는 진술이다. 그리고 그 구절로 인하여 두 가지 종류의 설명 모두가 참일 것이지만, 책임지고 목적이 있는 행동에 대한 설명에 관한 한 첫 번째 종류가 (1세계의 인과적 설명) 터무니없이 무관할 것임이 분명해진다.

몇 가지 현대적 전개에 비추어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평행론이자 동질성 이론을 고려한다고 우리가 잘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행동에 대한 인과적 물리학적 설명이나 행동주의적 설명이 아마도 목적, 목표 그리고 결정을 통한 설명과 (혹은 인간의 상황 논리에 관한 설명과) 대등할 수 있다는 주장을 소크라테스가 배척한다고 우리가 잘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물리학적 설명을, 거짓으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설명적 가치 결핍으로서 배척한다. 물리학적 설명은 유관한 모든 것을 생략한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의식적 선택을 생략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심신 문제에 관한 두 번째이자 매우 다른 언급을 경험한다. 그것은 책임지는 인간의 행동을 통한 진술이다: 본질적으로 윤리적 맥락 안에 놓인 진술이다. 그 진술로 인하여 책임지는 도덕적 자아라는 윤리적 관념이 심신 문제 및 자아의 의식과 연계된 고대의 토론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음이 밝혀진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취한 입장은 어떤 상호작용론자도 틀림없이 지지할 입장이다: 여하한 상호작용론자에게도, 인간의 육체적 움직임에 대한 완벽한 설명조차도 순전히 물리적 움직임으로 간주된다면, 순전히 물리적 관계로 제공될 수 없다: 물리적 세계1은 자족적이 아니고 제2세계에 (그리고 제2세계를 통하여, 3세계에) 인과적으로 열려있다.

 

5 추측성 설명 대() 궁극적 설명

역사에 관심이 없지만, 현대적 문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조차도, 플라톤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전통의 일부로 밝혀질 수 있는 과학에 관한 그리고 과학적 설명에 관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플라톤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전통은 객관론적 및 합리주의적으로서 기술될 수 있다 (자체의 출발점으로 감각 인상을 취하여 감각 인상들로부터 물리적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주관론적 감각주의나 경험주의와 대조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선두주자는 다음 의미에서 합리론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상적 세계 뒤에 숨겨진 실재들의 세계인 숨은 세계를 상정(想定)함에 의하여 세계의 표면적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이 선두주자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람들은 원자론자들인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였는데 그들은 압축성, 침투성(porousness) 그리고 액체 상태에서 기체 상태 및 고체 상태로의 변화와 같은 물질의 많은 속성을 설명했다.

그들의 방식은 추측이나 가설의 방법, 혹은 추측성 설명의 방법으로 지칭될 수 있다. 그 방식은 플라톤의 국가(Republic)에서 (예를 들어 510b-511e), 메논(Meno)에서 (86e-87c) 그리고 파이돈(Phedo)에서 (85c-d) 어느 정도 상세하게 분석된다. 그 방식은 본질적으로, 어떤 전제를 만들고 (우리에게 그 전제를 선호하여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도출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전제가 낳은 결과를 탐색함에 의하여 우리의 전제나 추측을 우리가 시험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전제를 결코 확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전제는 우리를 직관적으로 매혹할 것이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직관은 중요하지만 (이 방식 안에서) 결코 결정적이 아니다. 그 방식의 주요 기능 중 한 가지 기능은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 현상들을 구하는 것(to save the phenomena)’이다.

나의 견해로 추측이나 가설의 방식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어야 하는 두 번째 방식은 진수에 대한 직관적 파악 방식(the method of the intuitive grasp of the essence)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주의적 설명 방식(the method of essentialist explanation) (진수에 대한 직관은 독일어로, ‘Wesensschau라고 불리는데 후설[Husserl]의 용어이다). 여기서 직관(intuition: nous, 지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은 무오류의 통찰을 의미한다: 그 직관은 진리를 보증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보거나 이해하는 것은 (‘직관에 대한 이런 의미에서) 진수 자체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파이돈[Phedo], 100c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후 분석론[Posterior Anαlytics], 특히 100b를 참조.) 본질주의적 설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무엇인가(what is)’라는 질문에 답변할 수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 진수에 대한 공식인 진수의 정의(a definition of the essence)로 답변을 진술할 수 있다. (본질주의적 정의[定義], 실재적 정의[定義].) 이 정의를 전제로서 이용하면서 우리는 연역적으로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ㅡ 현상들을 구하려고 ㅡ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닌 전제의 결함일 리가 없다: 우리가 올바르게 진수를 파악했다면 전제는 틀림없이 참이다. 게다가 진수에 대한 직관적 설명은 궁극적 설명이다: 그 설명에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 설명은 추가로 설명할 수도 없다. 대조적으로 추측성 설명으로 인하여 새로운 설명, 설명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수 있다: ‘?’라는 질문은,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아는 바와 같이, 항상 반복될 수 있다. (아빠는 왜 점심 먹으러 집에 오지 않았지? 아빠는 치과에 갔어. 왜 아빠는 치과에 가야 하지? 아빠의 치아가 나빠. 왜 아빠는 치아가 나쁘지?) ‘?’ 질문은 무엇이지(what is)’ 질문과 다르다. 여기서는 답변이 궁극적이 될 것이다.

추측성 설명 ㅡ 직관에 의하여 통제될지라도 항상 잠정적으로 남는 ㅡ 그리고 다른 한편 본질주의적이거나 궁극적 설명 ㅡ 직관에 의하여 통제될지라도 (또 다른 의미에서) 무오류인 ㅡ 사이의 차이점을 내가 분명하게 밝혔기를 나는 바란다.

부언하여 주장을 비판하는 데 두 가지 대응하는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과학적 비판’) 그 주장으로부터 (아마도 다른, 문제가 없는 주장들과 연접하여 그 주장으로부터) 논리적 결론들을 도출함에 의하여, 그리고 수용될 수 없는 결론들을 발견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그 주장을 비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철학적 비판’) 주장이 실제로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주장이 특정 전제들로부터 직관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것과 그래서 그 주장 자체가 직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거의 모든 과학자는 첫 번째 방식에 의하여 주장들을 비판한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철학적 비판은 두 번째 방식에 의하여 진행된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설명에 대한 두 가지 방식의 구분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 방식에 대한 두 가지 이론적 기술이 그들 저술에 있고 또한 그 방식들의 용례도 실용적 사례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은 그 방식들이 두 가지라는 완전한 인식이다: 그 두 가지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완전한 인식;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 두 번째 방식이 환상인 반면, 추측성 설명인 첫 번째 방식만이 유효하고 합당하는 완전한 인식.

두 가지 방식의 차이점은, ‘지식 소유주장이라고 명칭이 붙었던 것을 유발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차이점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 방식만이 지식 소유주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식은 추측이나 가설을 초래한다. 이것들이 객관적이거나 제3세계의 의미에서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지만, 알려지거나 참으로 주장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참이라고 추측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고대의 회의론에서부터 출발하여 본질주의적 설명에 대항하는 오래된 전통적 움직임이 존재한다고 인정된다; , 키르히호프(Kirchhoff), 마흐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움직임. 그러나 이 움직임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두 가지 종류의 설명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설명을 내가 본질주의적 설명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그들은 설명을 전적으로 배척한다. (대신 우리가 기술[記述: description]’을 과학의 실재적 과제로 삼으라고 그들은 권고한다.)

사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서 (역사에서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 바와 같이), 두 가지 종류의 설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몇몇 장소에서 분명하게 인정되어 심지어 회의론자들 가운데서도 본질주의적 형태의 설명만 실제로 설명이고 그 설명만이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는 거의 보편적인 믿음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이 태도는 제2세계와 제3세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피하다고 내가 제안한다. 이 구분이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관적인 제2세계의 의미에서를 제외하고 지식이란 없다. 추측이나 가설이 없고, 잠정적이고 경합하는 이론들이 없다. 주관적 의심, 주관적 불확실성만 있는데 그것은 거의 지식에 반대가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이론에 대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ㅡ 우리는 하나를 신뢰하고 다른 하나를 의심할 수만 있다. 물론 주관적 믿음의 (혹은 주관적 개연성의) 다양한 등급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객관적 제3세계의 (그리고 경합하는 이론들 어느 것도 참으로 밝혀지지 않을지라도, 경합하는 이론 중 다른 이론보다 하나가 객관적으로 선호될 수 있거나 객관적으로 더 강력하게 만들 객관적 근거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양한 등급들의 객관적 장점이나 선호도를 지닌 다양한 이론이나 가설이 (완벽한 진리나 거짓을 제외한) 있을 리 없다. 결과적으로 제3세계의 관점에서 이론들이 추측성 가설반면 이론과 가설을 제2세계 믿음들을 통하여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이론과 가설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다: 가설들은 임시적이어서 아무튼 참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반면, 이론들은 참으로 알려진다. (심지어 훌륭한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도 ㅡ 몇 가지 면에서 여기에서 옹호된 관점에 다가갔던 ㅡ 가설과 최종적으로 확립된 이론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을 신뢰했다: 휴얼과 밀[Mill] 사이의 합치점.)

신화를 말하게 되면 신화에 진리가 아니라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만 있다고 플라톤이 거의 항상 강조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확실성이고 확실성은 진수에 대한 지적 직관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이용 가능하지 않을 (혹은 항상 이용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회의론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추측의 방식은 모든 당사자에 의하여 잠정적일 뿐 아니라 나은 것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 간주되는 듯하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건 중 하나는 이 관점을 심지어 뉴튼이 지지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의 프린키피아(Principia)는 역사상 추측성이거나 가설적 설명서의 모든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서 기술될 것이라고 나는 믿으며, 뉴튼은 프린키피아에 있는 자신의 이론들이 본질주의적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본질주의적 철학을 배척한 적이 없고 그 철학을 묵시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나는 가설을 창안하지 않는다라고 (이 특정 언급은 데카르트가 제공하는 것처럼, 나는 가능한 궁극적 설명에 관하여 사념들을 제공하지 않는다를 의미했을 개연성이 높다) 말했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본질주의적 설명이 탐색될 수 있고, 발견된다면 그 설명들은 최종적이고 자신의 원격 인력보다 나을 터임에 동의했다. 자신의 설명 유형보다 본질주의적 설명이 우수하다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설명 유형이 가설에 근거한다기보다 현상에서 나온 귀납에 근거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믿었다). 자신의 추종자 몇 명과 대조적으로 그는 자신의 이론이 설명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근면하게 사물들의 속성을 연구하고... {단지} 그 후에 사물을 설명하려고 가설을 찾는 것이 최상이고 가장 안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을 따름이다. 프린키피아 3판에서 (1726), 철학에서 추론 규칙 끝에 있는 III권의 시작에 뉴튼은 나는 중력이 몸체에 필수적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여, 그리하여 중력이 본질주의적 설명으로서 고려될 수 있음을 부인했다.

요컨대 현상을 구조하는추측성 설명 방식에 관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가인 뉴튼은 현상의 도움을 받는 데서 물론 옳았다. 그는 자신이 가설을 회피했고 (베이컨의) 귀납을 이용했다고 잘못 믿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더 깊은 이론에 의하여 아마도 설명될 것이라고 올바르게 믿었지만, 이것이 본질주의적 설명일 터라고 잘못 믿었다. 그는 또한 관성이 물질에 필수적이라고 ㅡ 물질의 내재하는 내재적 힘(vis insita)이라고 ㅡ 잘못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