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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4) 박정희와의 약속 [중앙일보]

이윤진이카루스 2010. 8. 3. 17:32

수갑 찬 박정희 눈가가 붉어졌다 … “한번 살려 주십시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전등불은 아직 켜지 않은 상태였다. 사무실 안으로는 아직 겨울 석양의 자락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면서 사무실 전체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김안일 방첩과장은 말을 이어갔다. “박정희 소령이 마지막으로 국장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꼭 만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대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모든 증거가 나와 사형이 확정됐지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한민국 군대에 파고 든 남로당 조직들을 검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한번 박 소령을 만나봅시다.”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김안일 소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잠시 기다렸던 것 같았다. 박 소령이 문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김안일 소령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 지하 1층의 감방에서 박 소령을 데리고 올라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의 결정에 따라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55년 원주의 1군사령부 사령관인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 신고를 받은 뒤 격려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군복을 벗었다가 6·25 전쟁이 터진 뒤 복직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조금 있으려니 내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당시 나는 사무실 중간에 있었던 응접세트 의자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김안일 소령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과묵한 표정은 그 전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됐다. 그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 치안국장으로부터 건네받아 마지막으로 내게 넘겼던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 명단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그 명단을 건네받아 수사에 착수한 뒤 별도의 과정을 거쳐 붙잡힌 것으로 기억한다.

김안일 과장은 아무 말 없이 내게 손짓으로 박 소령을 가리켰다. 김 과장은 내 왼쪽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박 소령은 내 정면에 서 있었다. 그와 나의 중간에는 기다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거리는 5m쯤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박 소령과 나 사이에는 그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얼굴 표정이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군복 차림이었다.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걸어 들어와 응접세트 끝에 섰다. 이어 박 소령은 약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그러고서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선, 그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머뭇거리던 박정희 소령이 의자에 앉았다. 나와는 얼굴을 마주 보고서 앉은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박 소령은 꼿꼿한 자세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끝에 조금 걸터앉은 상태였다. 나는 그가 자리를 제대로 잡고 앉아 나를 마주 바라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 차례였다. 나는 박 소령이 김안일 과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던 터라, 그가 스스로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처지는 아니었다. 죽음의 길로 내몰린, 이제 10여 일이 지나면 수색의 처형장으로 끌려갈 박 소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왠지 모르게 말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박 소령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상황이 10여 초 흘렀던 것 같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릴지 모를 운명에 놓인 박 소령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시간으로는 꽤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박 소령의 얼굴이 잠시 움직였다. 어둑해진 사무실이었지만 내 눈도 그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 듯하더니 박 소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박 소령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도는 듯했다.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도 내 눈에 들어왔다. 꼭 할 말만을 강하게 내뱉었지만, 그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연(毅然)하기도 했지만, 처연(悽然)하기도 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선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 한마디만 얼른 내뱉는 점에서 그는 꿋꿋했다.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그는 많은 감회에 휩싸여 그를 끝내 이기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를 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주 엄혹한 시절이었다. 좌익은 발호했고, 급기야 제주 폭동에 이어 여수와 순천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벌어졌던 때였다. 군대 내부의 좌익을 척결하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작업이었다.

그 숙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설 수 있는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각과 미 군사고문단, 나아가 일반 시민 모두 이 작업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