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임진·병자 전쟁 순국자 애도를 ‘개가 짖는가’ 여긴다”/ 이경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8. 28. 22:14

“임진·병자 전쟁 순국자 애도를 ‘개가 짖는가’ 여긴다”

등록 :2015-08-27 19:04수정 :2015-08-27 21:05

 

청나라 병사를 그린 호병도(胡兵圖). 김창업의 아들이자 유명한 화가였던 김윤겸이 그렸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나라 병사를 그린 호병도(胡兵圖). 김창업의 아들이자 유명한 화가였던 김윤겸이 그렸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⑪ 삼무분설(三無分說), 호론의 날카로운 칼
“사대부나 여염집에서 잔치할 때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것을 한결같이 금지한다.”

1708년(숙종 34)에 내린 국왕의 명령, 정식 명칭은 수교(受敎)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지 70여 년. 청나라 문화는 조선 사대부들의 생활에도 어느새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이 불온한 풍조를 잠재우려는 국왕의 조처는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다음해에 벌어진 장면은 더 인상적이다. <실록>은 “청의 칙사가 서울에 들어오자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이 경쟁적으로 구경하였고, 심지어 사대부조차 사신들의 글씨를 다투어 얻으려 했다”고 전한다. 청에 대한 적개심을 동력 삼아 재건한 조선의 또 다른 얼굴이다.

드라마틱한 변화, 위선적인 현실에 접한다면 우리는 ‘무시할 것인가, 인정할 것인가’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고민하게 마련이다. 변화를 무겁게 받아들였지만 기존의 이념을 고수하길 바랐던 호론 학자들은 그 조짐이 가져올 결과를 경고하고 나섰다.

한원진의 디스토피아

숙종의 시도가 무위로 끝나고 한 세대가 또 흘러 1738년. 영조 대의 일상은 숙종 대를 넘고 있었다. 청나라 칙사를 대접하는 산대놀이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고 급기야 밟혀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지던 이인상은 당시 분위기를 다소 격정적으로 전한다. 임진과 병자 두 전쟁에서 순국한 이들을 애도하면 사람들은 ‘개가 짖는가’ 하고 여긴다는 것이다.

청을 적성국가로 보고 북벌을 이루겠다는 다짐은 이제 구호 속에서나 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인사들은 이처럼 풀려버리는 기강을 우려하였다. 그 선두에는 노론, 노론 중에서도 호론 학자들이 있었다. 호론의 지도자 한원진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정신에서 찾았다. 사상이 불분명하니 정치에서 탕평이 나타났고, 기강이 풀리니 사치 풍조가 혼탁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청에 대한 경계심마저 풀렸다. 세태를 인정하는 듯한 낙론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청의 문물에 혹한 민심
북벌 다짐은 구호로만
보수파들 기강혼탁 우려
한원진 ‘삼무분설’로 저항
“인간-금수, 유교-불교, 중화-오랑캐
구분 없다면 미래는 혼돈”

조선인이 중국에서 만났던 다양한 이국인들. ‘오랑캐’의 범주에 속했던 그들을 ‘인간’으로 확인한 순간 조선은 세계관의 수정을 겪어야 했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섬라인(暹羅人, 태국인), 몽고인, 서양인, 달자( 子, 러시아인). 서양인과 러시아인은 선교사를 모델로 그렸으므로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 <여지도(輿地圖)>(중앙박물관 소장)에 있는데 그림 수준은 낮다.
조선인이 중국에서 만났던 다양한 이국인들. ‘오랑캐’의 범주에 속했던 그들을 ‘인간’으로 확인한 순간 조선은 세계관의 수정을 겪어야 했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섬라인(暹羅人, 태국인), 몽고인, 서양인, 달자( 子, 러시아인). 서양인과 러시아인은 선교사를 모델로 그렸으므로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 <여지도(輿地圖)>(중앙박물관 소장)에 있는데 그림 수준은 낮다.

일세를 풍미했던 한원진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친구 윤봉구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글에서 핵심을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선생은 만년에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과 사물이 같은 오상(五常)을 지녔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과 금수의 분별을 없애자는 말이다. 마음이 오로지 선하다고 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과 같아지니 이것은 유교와 불교의 구분을 없애자는 말이다. 허형(許衡)의 공로를 높게 평가하여 진정한 유학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을 없애자는 말이다.” 이 말이 선생 평생의 정론이다. (허형은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출사하여 주자학이 관학(官學)이 되도록 힘쓴 유학자. 오랑캐의 조정에서 유학을 위한 큰 공을 세운 그의 행적을 두고 논쟁이 많았다.)

윤봉구가 전하는 한원진 최후의 정리는 이른바 ‘삼무분설’이라고 불렸다. 인간과 금수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인수무분(人獸無分), 유교와 불교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유석무분(儒釋無分),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화이무분(華夷無分)이 그것이다. 삼무분에 대한 경고는 현재를 인정한다면 미래는 혼돈일 뿐이라는 조선판 디스토피아 선언이었다.

분열된 세계, 차이인가 차별인가

한원진이 조야한 수준에서 삼무분설을 제기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평생에 걸친 그의 공부는 성리학의 철학, 즉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삼무분설 또한 이와 기, 심과 성 등에 대한 촘촘한 논설에 기초해 있었다. 이기, 심성 등이 섞이거나 분리되어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었고, 그 귀결이 현재에 대한 판단과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결론난 것이다.

추상적 개념에서 출발해 사회를 진단한 한원진의 여정은, 위대한 사상들이 처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준다. 우주와 인간에 차별 없이 구현되는 보편적인 원리들, 예컨대 유교의 천리(天理), 불교의 불심(佛心), 기독교의 유일신 등의 관념이 현실과 만났을 때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이들은 보편이란 이름으로 차이를 포용하지만, 한편으론 이질적 사상이나 문화를 적대적인 타자로 만들고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보편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보편 너머의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숙청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상이 차이를 포용하기보다 차별에 집착할 때는 세속을 호령하는 달콤한 권위와 건설을 위한 강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호론이 향수를 느꼈던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또한 청이라는 강력한 타자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적개심을 건설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 메커니즘의 막강한 효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근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는 1903년에 ‘희망을 말하다’(說希望)라는 글을 썼다. “희망이란 인류가 금수와, 문명이 야만과, 호걸이 범인(凡人)과 다를 수 있는 근거이다. (…) 자고로 뛰어난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눈과 마음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어 진보를 추구하고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량치차오 또한 고귀한 목표를 설정하여 변화의 동기를 얻고자 했다. 우리를 금수, 야만, 범인과 다르다고 설정하는 순간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추진력이 생겨날 터이다. 그렇지만 ‘보편의 딜레마’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양계초의 구상에 마냥 ‘옳구나’ 하고 찬성할 수가 없다. 희망의 뒤안에 설정된 열등한 존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에서 연민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별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운가

량치차오의 글과 한원진의 삼무분설에 제시된 차별의 범주는 똑같다. 같은 차별 논리에서 출생한 량치차오의 유토피아나, 한원진의 디스토피아는 사실 쌍둥이였다. 그 동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와 비슷한 논리들을 더 캐낼 수 있다.

량치차오가 중국의 진보를 염원한 그 시절, 진보의 모델은 서양이었다. 그리고 동양이 그렇게나 닮고 싶었던 서양, 더 정확히 말해 서양의 근대는 또 다른 분별주의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에 뿌리를 둔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에 대한 차별, 유럽·기독교 문화중심주의와 여타 사회의 문화·종교에 대한 이단시, 백인우월주의와 여타 종족·인종에 대한 차별이 그것이다. 차별을 통해 서양은 자기의 근대를 만들고, 선진 문명의 전파를 명목 삼아 세계를 단일한 기준으로 통합해냈다. 우리의 근대야말로 서양에서 생겨난 ‘신종 삼분설(三分說)’의 소산인 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가 결국 차별을 원죄 삼아 성립되었고, 지금 그 병폐가 점점 현저해진다면, 이제는 자유스러워질 때이다. 그렇다면 호락논쟁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할 수 있을까.

호론에게서 삼무분설이란 경고장을 받았던 낙론은 유학의 오래된 근본정신을 불러내 대응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이 동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성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을 앞서 깨친 사람, 곧 선각자일 뿐이었다. 인간들의 보편 심성을 강조하며 성인을 차별로 구축된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이 같은 논리는, 중심-주변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차별성을 파괴함과 동시에, 다양한 존재들의 개별성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이 지향을 더욱 넓히면 열등한 존재에 대한 연민을 항상적으로 보장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분별주의에 대한 원천적 비판이 아닐까.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물론 낙론 학자들이 이 같은 지향에 서 있지는 않았다. 많은 학자가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의 동일함을 말했지만, 대부분은 당시의 차별적 질서의 한 고리에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성리학적인 보편성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추상적인 논쟁을 뛰어넘는 의지나 실천은 없었다. 아마 일부의 교육에서나 실천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논리 속에 만물에 대한 동포애적 연민이 싹트고 있었음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은 그 싹이 건강하게 자라났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