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1월2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종교계·학계·정계·언론계·법조계를 망라한 각계 인사 71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식이 열려 김대중과 이희호도 참석했다. 고문 자격으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한 김대중은 처음으로 재야인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반유신 연대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육영수의 죽음을 부른 8·15 사건 일주일 뒤인 1974년 8월22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8월의 전당대회는 넉 달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총재 유진산의 빈자리를 메우는 행사이자 유신체제와 타협으로 얽힌 낡은 정치의 종말을 기약하는 마당이었다.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다섯 명의 후보가 나와 각축을 벌였다. “그때 남편은 연금당하고 있던 터라 후보로 나서지 못했어요. 남편은 가까운 분들에게 김영삼 의원을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지요.” 당시 김영삼은 당내에서 가장 선명하게 박정희 정권과 맞서고 있었다. 2차까지 가는 혼전 끝에 김영삼이 새 총재로 뽑혔다. 46살 최연소 야당 총재가 탄생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당선을 막으려고 심복 차지철을 시켜 공작을 폈지만 먹히지 않았다. 승리한 김영삼은 공약대로 개헌 추진 원외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신민당 새 총재가 뽑히고 한 달이 지난 뒤 가톨릭 사제 300여명이 참여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결성됐다. 주교 지학순 구속이 직접적 계기였다. 원주교구에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지학순은 1974년 7월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하므로 무효다’라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일로 구속된 지학순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바른말이 철창에 갇히자 전국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9월26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젊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첫발을 내디뎠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은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새로운 구심이 생겼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어 11월18일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문인들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했다. 문인들은 시인 고은을 대표간사로,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을 간사로 뽑고 광화문 앞 세종로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문인 일곱 명이 그 자리에서 잡혀갔다.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대회에 참석한 김대중은
처음 재야인사들과 인사 나눴다 동아일보·방송을 시작으로
기자들도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김대중 인터뷰도 신문에 실었다 11월27일에는 종교계·학계·정계·언론계·법조계를 망라한 각계 인사 71명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 모여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했다. 함석헌·이병린·천관우·김홍일·강원용·이희승·이태영으로 7인위원회를 구성했다. “남편도 이 모임에 고문으로 참여했지요. 이때 가택연금이 잠시 풀려 결성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어요. 남편은 그때까지 주로 정치권 인사들과 만났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재야인사들과 관계를 맺었지요.”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정부가 곧 국가라는 전제적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며 반정부는 반국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반정부 활동으로 복역·구속·연금을 당하고 있는 모든 인사를 사면·석방하고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키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한 달 뒤 12월25일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했다. 박정희 정권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성명에 서명한 경기공업전문대 교수 김병걸이 권고사직을 당했고 서울대 교수 백낙청이 교육공무원 신분에 어긋나는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변호사 이병린도 구속됐다. 1975년 1월14일 박정희는 새해기자회견에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반정부 활동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즉각 성명을 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이며 부정체제이며 부패체제이며 특권체제이며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는 탈권체제”라고 규정하고 “우리는 개헌에 앞서 비인간적인 권력집단의 퇴진을 먼저 요구한다”고 밝혔다. 유신체제 한가운데서 터뜨린 말의 폭탄이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힘을 얻어나가자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에게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시국수습방안으로 건의했다. 1월22일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투표 결과에 대통령 신임을 걸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김대중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만나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국민투표일인 2월12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금식기도를 드렸다.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우리 국민은 결단코 발표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정부는 투표율이 79.89%, 찬성률이 73.1%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공포통치 아래서 반강제로 벌인 투표의 결과였으니 믿을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는 수치의 나열이었다. 앞서 1974년 10월에 언론자유를 되찾으려는 기자들의 일대 항거가 시작됐다. 중심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10월23일 ‘서울대 농대 학생 300명 시위’ 기사를 내보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침묵하던 지면이 조그맣게 소리를 낸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이 보도를 문제 삼아 편집국장 송건호를 비롯해 간부들을 연행했다. 유신체제에 재갈이 물려 굴욕감을 느끼던 기자들은 더 참지 못했다. 10월24일 오전 동아일보사 편집국·출판국·방송국 기자 180명이 3층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기자들은 외부 간섭, 기관원 출입, 언론인 불법연행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선언은 즉각 다른 언론사로 번져 24일 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동참하고 이어 이틀 사이에 전국의 신문·방송·통신 31곳의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가 광고탄압으로 협박하자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맞대응했다
김대중도 익명으로 광고를 냈다
100만원을 마련해 직접 문안을 썼다 기자들 격려하려 신문사 찾았지만
경찰 벽에 막혀 번번이 돌아섰다
권력에 굴복한 동아일보 사주는
결국 기자 113명을 해고했다 언론인들의 선언과 행동은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희호와 김대중도 자유언론 투쟁을 예사롭지 않은 일로 보고 주시했다. 기자들이 재갈을 벗고 투쟁에 나서자 꽉 막혔던 신문 지면에도 숨구멍이 트였다. 그해 연말에 <동아일보>가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제하의 연속 인터뷰를 기획하여 가장 먼저 김대중을 만나러 동교동을 방문했다. “정말 내 이름이 나가는 거요? 그러다가 잡혀가든지 사장이 혼이 나든지 하는 거 아니오?” 김대중은 취재하러 온 기자가 걱정돼 그렇게 물었다. “1973년 10월 마지막 기자회견 이후 신문들이 남편에 관해서는 한 줄도 보도를 하지 못했거든요. 남편 소식이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느니 정신이상이 되었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어요.” 김대중 인터뷰는 <동아일보> 12월9일치 1면에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국민에 대한 한없는 신뢰심과 존경심이 있기 때문에 큰 역경 속에 있지만 실망도 불행도 느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6·25 전시 중에도 (대통령) 직접선거를 한 국민인데 지금 그런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유신정권을 비판했다. 김대중은 장기 연금이 주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 넘게 갇혀 지내니 때로 좌절감도 들고 욱하는 감정도 치받고 합니다. 자기 억제가 안 되고 예민해집니다. 저 사람들이 집 주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새벽에 오토바이 소리가 나는가 하면 협박전화가 오기도 하고….” 그 인터뷰는 김대중의 소식에 목이 말랐던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 <동아일보> 가판이 10만부가 나갔는데, 평소의 6~7배나 됐다고 해요.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 하야 보도 이후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의 기획 인터뷰는 윤보선·유진오·정구영·백낙준·함석헌·윤제술·장준하·천관우로 이어졌다. 기자들의 투쟁이 열어젖힌 자유언론의 공간이 반독재 인사들을 매일같이 등장시키자 유신정권이 받는 압박감도 커졌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동아일보>를 혼내주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의 투쟁 의지를 꺾어버릴 방책을 찾던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을 불러들여 협박했다. 광고탄압이었다. 반독재 인사 인터뷰가 연재되고 있던 12월16일부터 광고 해약이 시작됐다. 광고가 들어오지 않자 동아일보사는 12월26일부터 광고란 일부를 백지로 비워두고 신문을 발행했다. 한 달 뒤에는 상품광고 대부분이 지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광고란이 백지가 되어가자 시민들이 나서서 격려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언론인 홍종인은 12월28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신문 하단 광고란에 개인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김대중도 새해 첫날 지면에 익명으로 광고를 냈다. “남편은 1975년 신년호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격려문을 냈어요. 여유가 없었지만 100만원가량을 마련해 친필로 문안을 써서 김옥두 비서에게 대신 다녀오게 했지요.”
김대중은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라는 제하의 격려문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 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 자유는 민주 국민의 혼이요 모든 소망의 근원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 백지광고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김대중은 이 격려문에서 “모든 민주시민은 언론자유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동아 매스컴에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자”는 제안도 했다.
이 광고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언론탄압에 즈음한 호소문’,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항의문, 경동교회 교인 일동의 격려문과 함께 실렸다. 그 뒤로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3월8일치에도 ‘동아일보를 지킵시다’라는 격려광고를 1면 하단을 털어 실명으로 내고 ‘동아의 수난은 우리의 수난’이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고 역설했다.
당시 동교동 비서였던 김형국은 그때의 상황을 기억해 이렇게 증언했다. “김대중 선생님과 사모님이 김옥두·한화갑 비서와 나에게 <동아일보>를 도와야 하니 용돈을 아껴서든 친척에게 부탁을 해서든 단 한 줄이라도 광고를 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세 사람이 친구들,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격려광고를 내도록 했지요. 정신없이 다녔는데, 그렇게 모은 광고가 100건이 넘었어요. 광고는 실명으로 낼 수 없어 대개 동창회, 4·19회, 월요회 같은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동아일보> 광고란은 유신 치하의 민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면의 아고라였다. 시민들의 격려광고는 3월25일까지 9223건에 이르렀다.
이희호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농성을 벌이는 광화문 본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때 <동아일보> 기자들을 격려하려고 두 번인가 세 번 현장으로 갔어요. 목요기도회에서 만난 분들과 함께 갔던 것 같아요. 새벽에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경찰들이 정문 앞에서 막고 있어서 결국 한 번도 사옥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어요.” 이희호와 함께 간 김형국은 농성장에 진입해 이희호의 뜻을 대신 전하기도 했다. “경찰들이 사모님 얼굴을 아니까 막고 못 들어가게 했어요. 사모님이 나한테 눈짓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경찰을 피해 잽싸게 정문으로 들어가 기자들이 농성하는 곳으로 갔지요. 사모님이 경찰 제지로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할 수 있는 투쟁을 다 하겠다는 뜻을 대신 전했지요.”
박정희 정권은 시민들의 분노가 격려광고로 폭발하자 동아일보사 사주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1975년 3월8일 광고탄압에 굴복한 사장 김상만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들어 사원 18명을 해고했다. 해고가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기자 장윤환과 박지동에게도 해고로 대응했다. 앞서 3월6일 <조선일보> 기자들도 한국기자협회 분회(분회장 정태기)의 주도로 “진실에 투철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열과 성을 다해, 언론자유에 도전하는 외부권력과의 투쟁은 물론이고 언론 내부의 패배주의와도 싸우려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기자들은 제작거부에 들어가 먼저 해고된 두 기자 백기범·신홍범을 복직시키라며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6일째인 3월11일 조선일보사 사장 방우영과 경영진은 편집국에서 농성하던 기자들을 끌어내 32명을 해고했다. 해고된 기자들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도 3월12일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23명은 공무국을 점거해 단식투쟁을 벌였다. 농성 엿새째인 17일 새벽 3시 회사 쪽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 200여명이 들이닥쳐 기자·피디·아나운서·엔지니어 160여명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며 농성장에서 끌어냈다. 사회부 기자 정연주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다쳤다. 동아일보사는 모두 113명을 해고했다. 편집국장 송건호는 “동아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신문사를 떠났다. 다음날 오전 축출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해직기자들은 끝을 알 수 없는 투쟁의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동아일보>의 격려광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7월16일부터 다시 기업 광고가 광고란을 채우기 시작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6회 긴급조치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편집국·출판국·방송국 기자 180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면서 반유신 반독재 여론을 주도하자 박정희 정권은 광고탄압을 가했다. <동아일보>는 12월26일치부터 백지광고를 내기 시작했고, 김대중은 1975년 1월1일치 신년호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격려문을 냈다. 사실상 최초의 격려광고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결성 대회에 참석한 김대중은
처음 재야인사들과 인사 나눴다 동아일보·방송을 시작으로
기자들도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김대중 인터뷰도 신문에 실었다 11월27일에는 종교계·학계·정계·언론계·법조계를 망라한 각계 인사 71명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 모여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했다. 함석헌·이병린·천관우·김홍일·강원용·이희승·이태영으로 7인위원회를 구성했다. “남편도 이 모임에 고문으로 참여했지요. 이때 가택연금이 잠시 풀려 결성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어요. 남편은 그때까지 주로 정치권 인사들과 만났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재야인사들과 관계를 맺었지요.”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정부가 곧 국가라는 전제적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며 반정부는 반국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반정부 활동으로 복역·구속·연금을 당하고 있는 모든 인사를 사면·석방하고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키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한 달 뒤 12월25일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했다. 박정희 정권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성명에 서명한 경기공업전문대 교수 김병걸이 권고사직을 당했고 서울대 교수 백낙청이 교육공무원 신분에 어긋나는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변호사 이병린도 구속됐다. 1975년 1월14일 박정희는 새해기자회견에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반정부 활동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즉각 성명을 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이며 부정체제이며 부패체제이며 특권체제이며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는 탈권체제”라고 규정하고 “우리는 개헌에 앞서 비인간적인 권력집단의 퇴진을 먼저 요구한다”고 밝혔다. 유신체제 한가운데서 터뜨린 말의 폭탄이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힘을 얻어나가자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에게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시국수습방안으로 건의했다. 1월22일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투표 결과에 대통령 신임을 걸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김대중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만나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국민투표일인 2월12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금식기도를 드렸다.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우리 국민은 결단코 발표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정부는 투표율이 79.89%, 찬성률이 73.1%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공포통치 아래서 반강제로 벌인 투표의 결과였으니 믿을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는 수치의 나열이었다. 앞서 1974년 10월에 언론자유를 되찾으려는 기자들의 일대 항거가 시작됐다. 중심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10월23일 ‘서울대 농대 학생 300명 시위’ 기사를 내보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침묵하던 지면이 조그맣게 소리를 낸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이 보도를 문제 삼아 편집국장 송건호를 비롯해 간부들을 연행했다. 유신체제에 재갈이 물려 굴욕감을 느끼던 기자들은 더 참지 못했다. 10월24일 오전 동아일보사 편집국·출판국·방송국 기자 180명이 3층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기자들은 외부 간섭, 기관원 출입, 언론인 불법연행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선언은 즉각 다른 언론사로 번져 24일 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동참하고 이어 이틀 사이에 전국의 신문·방송·통신 31곳의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가 광고탄압으로 협박하자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맞대응했다
김대중도 익명으로 광고를 냈다
100만원을 마련해 직접 문안을 썼다 기자들 격려하려 신문사 찾았지만
경찰 벽에 막혀 번번이 돌아섰다
권력에 굴복한 동아일보 사주는
결국 기자 113명을 해고했다 언론인들의 선언과 행동은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희호와 김대중도 자유언론 투쟁을 예사롭지 않은 일로 보고 주시했다. 기자들이 재갈을 벗고 투쟁에 나서자 꽉 막혔던 신문 지면에도 숨구멍이 트였다. 그해 연말에 <동아일보>가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제하의 연속 인터뷰를 기획하여 가장 먼저 김대중을 만나러 동교동을 방문했다. “정말 내 이름이 나가는 거요? 그러다가 잡혀가든지 사장이 혼이 나든지 하는 거 아니오?” 김대중은 취재하러 온 기자가 걱정돼 그렇게 물었다. “1973년 10월 마지막 기자회견 이후 신문들이 남편에 관해서는 한 줄도 보도를 하지 못했거든요. 남편 소식이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느니 정신이상이 되었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어요.” 김대중 인터뷰는 <동아일보> 12월9일치 1면에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국민에 대한 한없는 신뢰심과 존경심이 있기 때문에 큰 역경 속에 있지만 실망도 불행도 느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6·25 전시 중에도 (대통령) 직접선거를 한 국민인데 지금 그런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유신정권을 비판했다. 김대중은 장기 연금이 주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 넘게 갇혀 지내니 때로 좌절감도 들고 욱하는 감정도 치받고 합니다. 자기 억제가 안 되고 예민해집니다. 저 사람들이 집 주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새벽에 오토바이 소리가 나는가 하면 협박전화가 오기도 하고….” 그 인터뷰는 김대중의 소식에 목이 말랐던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 <동아일보> 가판이 10만부가 나갔는데, 평소의 6~7배나 됐다고 해요.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 하야 보도 이후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의 기획 인터뷰는 윤보선·유진오·정구영·백낙준·함석헌·윤제술·장준하·천관우로 이어졌다. 기자들의 투쟁이 열어젖힌 자유언론의 공간이 반독재 인사들을 매일같이 등장시키자 유신정권이 받는 압박감도 커졌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동아일보>를 혼내주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의 투쟁 의지를 꺾어버릴 방책을 찾던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을 불러들여 협박했다. 광고탄압이었다. 반독재 인사 인터뷰가 연재되고 있던 12월16일부터 광고 해약이 시작됐다. 광고가 들어오지 않자 동아일보사는 12월26일부터 광고란 일부를 백지로 비워두고 신문을 발행했다. 한 달 뒤에는 상품광고 대부분이 지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광고란이 백지가 되어가자 시민들이 나서서 격려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언론인 홍종인은 12월28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신문 하단 광고란에 개인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김대중도 새해 첫날 지면에 익명으로 광고를 냈다. “남편은 1975년 신년호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격려문을 냈어요. 여유가 없었지만 100만원가량을 마련해 친필로 문안을 써서 김옥두 비서에게 대신 다녀오게 했지요.”
1974년 12월10일 밤 김대중(왼쪽 둘째)·이희호(가운데)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사진은 미사가 끝난 뒤 거리행진에 나서 김상현(맨 왼쪽)·김옥두(그 뒤쪽) 등도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 사주는 정권의 광고탄압에 굴복해 끝내 기자·피디 등 모두 113명을 해고했다. 사진은 3월12일부터 공무국을 점거하고 제작 거부와 단식 투쟁을 벌인 <동아일보> 기자 23명이 3월17일 새벽 사주가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쫓겨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것이다. 맨 앞줄 두 사람이 성유보·정연주다. 사진 동아투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