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창학 105주년 신흥무관학교
경희대학교의 역사는 1911년 만주에 설립됐던 신흥무관학교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만, 경희대학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서울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학교의 모습으로, 왼쪽 앞 건물은 1956년 완공된 석조전 본관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독립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간
이회영·시영 6형제가 1911년 설립
3500명 졸업생 독립운동에 투신
만주·연해주 일대 항일투쟁의 주역 해방 후 창학 정신 계승한 신흥전문
6·25로 재정난 겪다 주인 바뀐 뒤
재단·학교명 차례로 변경돼
‘경희대’ 이름으로 성장했으나
“창학 정신 복원” 요구엔 모르쇠
1911년 설립된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 우당기념관 제공
1947년 10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신흥학우단의 복원 모임을 한 뒤 성재 이시영(앞줄 가운데 흰옷 입은 이)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여러 만만 헌헌 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 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장백산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거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후략) ” 조국 해방을 향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가이다.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우당 이회영 6형제 중 1945년 해방 때까지 생존했던 사람은 다섯째인 성재 이시영이 유일했다. 우당은 일제에 검거돼 옥사했으며, 둘째인 이석영은 상하이 빈민가에서 굶어 죽었다. 또 막내인 이호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연락이 끊겼다. 성재만 충칭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으로 일하는 등 35년의 간난신고 끝에 임정 요인들과 함께 해방 뒤 귀국했다. 6·25로 주인 바뀌고 ‘경희대’로 개명 성재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애국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1947년 2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했다. 학교 이름부터 신흥무관학교에서 가져왔다. 신흥전문학원은 해방 직후 비슷한 시기에 항일운동가들이 설립했던 성균관대(김창숙)와 국민대(신익희), 단국대(장형), 국학대학(정인보) 등과 함께 민족대학을 지향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된 성재 이시영은 신흥전문학원을 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등의 도움을 얻어 1949년 2월 성재학원이 설립됐으며, 다음달인 3월 신흥대학으로 교육부의 승인을 얻었다. 당시 보결생 약간 명을 모집하는 신흥대학 광고에 따르면, 이 학교의 창립일은 1911년 6월10일자로 명시됐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후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선언한 셈이다. 신흥대학은 초기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회와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신흥대학은 주인이 바뀌게 된다. 재정이 어려운데다가 대학도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1951년 7월 성재학원의 이사진에 조영식과 김인선이 신임 이사로 들어왔다. 이즈음 성재 이시영은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가 됐다. 그는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1951년 5월 이승만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성토하는 ‘국민에게 고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조영식이 ‘접수’한 이후 학교는 크게 성장했다. 서울 회기동에 캠퍼스를 마련(1954년)하고, 석조전 본관을 준공(56년)했다. 그러나 기존 이사들 대부분이 차례로 해임되고, 대신에 조영식 사람들로 채워지는 등 이사진이 바뀌었다. 1955년 6월에는 자유당의 거물급 정치인인 이익흥과 조경규 두 사람이 이사로 영입되기까지 했다. 이어 그해 8월에는 재단법인의 이름이 성재학원에서 고봉재단으로 바뀌었다. 1960년 3월에는 학교 이름마저도 신흥대학교에서 경희대학교로 변경됐다. ‘경희 20년’에는 “신흥이란 이름이 너무 속되고 대중적이어서 시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호 같아 심오한 학술을 연마하는 최고 학부의 이름으로서는 부적당”하다며 “경희는 부르기도 좋고 듣기에도 어감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 뜻도 심오한 명칭으로 풀이가 된다”고 밝혔다. 성재의 아들인 이규창이 조영식을 상대로 개명 무효 등의 소송을 제기하고 나서 법적인 다툼이 오랫동안 벌어졌다. 신흥대학 학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규창은 1951년 조영식을 이사로 선임하는 절차부터 원천무효라고 주장한 반면에 조영식 쪽은 ‘경희 20년’에서 “당시 신흥대학은 막대한 은행 부채까지 걸머지고 있었고 재단이 분열되어 더 이상 학교를 지탱할 수 없었다”며 “이시영이 젊고 의지가 굳세며 패기가 있는 조 선생이 맡아주지 않으면 불가분 문을 닫고 폐교할 수밖에 없다면서 재단을 백지인수해줄 것을 종용했다”고 밝혔다. 법정투쟁은 1963년 이규창의 사망으로 일단락되면서 이후 ‘신흥’이라는 이름도 경희대에서는 찾기 어려워졌다. 신흥에 대한 기억 투쟁이 시작된 건 1982년 ‘신흥대학 연혁복원추진위원회’가 신흥대학 졸업생을 주축으로 구성되면서부터였다. 이후 경희총민주동문회(회장 박용익)와 2011년 발족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도 신흥무관학교의 이름찾기에 적극적이다. 기념사업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5주년을 맞아 오는 8월에 기념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자랑할 역사를 왜 무시하나?” 이들의 요구는 의외로 간단하다. 경희대학교의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에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자랑하자는 것이다. 경희총민주동문회의 김종욱 사무국장은 3일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자랑스런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경희대학교가 잇고 있음에도 학교가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며 “소유권을 놓고 우당 및 성재 후손들과 다퉜던 조영식 이사장도 이미 돌아가신 만큼 재단과 학교가 이제 경희대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주동욱 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은 “경희대로 이름이 바뀐 뒤로 신흥이라는 이름은 금기처럼 되면서 신흥대학이 가지고 있던 이념과 정신이 사장됐다”며 “조영식 전 이사장이 학교를 훌륭하게 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지우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역사 독점”이라고 말했다. 성재 가문의 요구도 이들과 같다. 성재의 조카인 이종찬 우당기념관장은 지난달 30일 기자와 만나 “조영식이 자유당 시절에 위계로 신흥대학을 뺏은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 와서 우리가 학교를 되찾자는 게 아니다”라며 “항일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신흥무관학교의 창학 정신을 살리자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경희대는 2006년 말부터 조영식의 둘째 아들(조인원)이 총장을 맡고 있다. 정치학자 출신의 조 총장은 “책임 있는 시민, 성숙한 공동체 성원을 양성”하는 전문적인 교양교육기관인 후마니타스칼리지를 2011년 출범시키는 등 대학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평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데는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념사업회 등의 거듭된 요청에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신 학교 쪽 관계자는 “신흥무관학교 계승 여부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인 사안이라 가타부타 공식적인 입장을 말씀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경희 50년사에 기록된 내용을 참조하라”고 밝혔다. 경희대학교 요람(2014년)에는 “연원은 1946년에 설립된 배영대학관과 1947년에 설립된 신흥전문관이 합병하여 1949년 5월에 발족한 신흥초급대학(2년제 가인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대학은 다음해에 6·25전쟁을 맞아 심각한 운영난에 부딪쳤으며 마침내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영식 학원장은 1500만원의 부채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1951년 5월18일 동 대학을 인수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