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9일의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는 80년대 첫 ‘반미 운동’으로, 1년3개월 뒤에 일어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일명 ‘부미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82년 3월18일 불타고 있는 부산 미 문화원 모습.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3) 광주와 NL
박찬수의 NL 현대사 (3) 광주와 NL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980년 12월9일 밤, 광주시 동구 황금동의 미국문화원 지붕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지붕을 거의 태우고 진화됐다. 경찰 공식발표는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였다. 그러나 경찰은 내부적으로 검거팀을 꾸리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그해 5월 광주 시민항쟁이 26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유혈 진압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불을 지른 사람은 광주·전남 가톨릭농민회(가농) 회원인 김동혁(당시 40, 1996년 사망)씨와 정순철(당시 25, 2004년 사망)씨, 임종수·윤종형·박시형씨 등 5명이었다. 대학생으로 가농 활동을 했던 임종수(전남대 경영대 79학번)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정순철씨와 내가 문화원 지붕에 올라가고 가농 전남연합회장인 김동혁씨 등은 주변에서 망을 봤다. 내가 문화원과 맞붙은 여관 지붕에서 석유와 휘발유를 1 대 1로 섞은 기름통을 정씨에게 건네줬다. 정씨가 기와 일부를 뜯어내고 기름을 부은 뒤 종이를 길게 말아 불을 붙였다. 불이 확 이는 걸 보고 광주공원으로 달아났다. 황금동 일대에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미 항공모함 ‘코럴 시’ 한국 출동
이 사건은 임종수씨가 가농 집회와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김동혁·박시형씨는 체포되고 정순철씨와 윤종형씨는 도피했다. 경찰은 수사 과정을 비밀에 부쳤다. 임씨를 데리고 미 문화원에 가서 현장검증을 할 때도 문화원 직원에게 “조사할 게 있어서 나왔다”고만 말했다.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광주 미 문화원 방화는 1980년대 첫 ‘반미 운동’이었다. 그로부터 1년3개월 뒤 일어난 부산 미 문화원 방화는 이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고마운 우방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던 시절이었다. 임종수씨는 “광주에선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을 방조했다는 분노와 배신감이 굉장히 컸다. 그래서 미 문화원에 불을 지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그랬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고립된 광주에선 미 항공모함이 광주 시민을 돕기 위해 부산에 입항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 항모가 부산에 왔으니 군사독재는 끝났다고 시민들은 생각했다. 5·18을 다룬 홍희담씨 소설 <깃발>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언니, 저 벽보 봐.”
순분이가 가리킨 곳에 큰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미국 항공모함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나라입니다. 광주의 민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이 정박중에 있습니다. 더이상 광주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시고 도청에 집결합시다.’
시민들은 그 대자보를 보고 안심하는 눈치였다.(홍희담 <깃발>)
미 항공모함 ‘코럴 시’(Coral Sea)가 필리핀 수비크 기지를 떠나 한국 근해로 출동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지 광주 시민을 지원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미 국방부는 5월23일(현지시각) ‘코럴 시’ 출동과 함께 “일부 지상군을 연합사에서 한국군 지휘하에 들어가도록 허가했다”고 밝혔다. 한국군 요청으로 20사단 등 일부 군 병력의 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넘겼다는 뜻이었다.
1980년 5월의 경험은 광주에서 반미 의식을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게 했다. 서울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선 반미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데 주저하던 시절에, 광주에선 ‘양키 고 홈’이 터져나왔다. 전남대 민주동우회의 박세종(84학번)씨는 “대학에 들어가니 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서울처럼 이론적으로 반독재에서 반미로 진화한 게 아니라 광주항쟁의 경험 속에서 반미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1985년 봄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은 대체로 총학생회 산하에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학내외 투쟁을 이끌어가는 형태를 취했다. 전남대에선 삼민투와 별도로 ‘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오진투위)가 꾸려졌다. 광주 유혈진압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해서였다. 전남대 삼민투 위원장은 강기정(공대 82학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오진투위 위원장은 한경(영문과 82학번)씨가 맡았다.
1980년 12월 ‘가농’ 소속회원 5명
광주 황금동 미국문화원 불 질러
경찰이 쉬쉬한 80년대 첫 ‘반미’
학살 방조 미국에 배신감·분노
자연스레 터져나온 ‘양키 고 홈’ “NL이 이론적으로 나타나기 이전
5·18 경험 통해 자생적 기류 형성”
실천 강조하는 광주 운동 문화에
정파 대립은 ‘적전 분열’ 인식 퍼져
“NL·PD 통합은 전남대가 유일” 서울과 광주의 ‘미묘한 온도 차’ 조이권(사범대 84학번)씨는 1985년 4월19일의 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 발족식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남대 도서관 앞 5·18광장에 2천여명이 모였다. 여학생으로 오진투위 위원장을 맡은 한경씨는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나무 깃발을 들고 연단에 섰다. 광주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며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외쳤다. 그 광경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상적이라” 조씨는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강기정씨는 “대학 집회에서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공개적으로 나온 건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선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반미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광주는 달랐다. 광주 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나중에 구속돼 재판을 받을 때도 ‘양키 고 홈’의 의미가 뭐냐는 게 계속 논쟁이 됐다”고 말했다. 그해 5월23일 낮 서울에서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을지로1가 미 문화원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광주학살 지원한 미국의 사과’ ‘전두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등을 내걸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과 미국의 방조 책임을 부각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애초 거사일은 5월23일이 아니라 22일이었다. 22일에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미 문화원을 점거하자고 논의를 진행했다. 전남대 삼민투 위원장이던 강기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광주 학살 진상규명과 미국의 책임론 부각이 목적이니까,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미 문화원 점거투쟁을 벌이자고 얘기가 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22일로 날짜를 잡았는데 마침 그날 서울에 경찰력이 대거 배치돼 갑자기 계획을 취소한다는 연락이 왔다.(그날 서울 미 문화원 부근 롯데호텔에선 한미안보협의회가 열렸다.) 그러고는 23일에 서울만 먼저 미 문화원에 진입했다.” 당시 공동투쟁을 준비하면서 서울과 광주 사이엔 반미 구호의 수준과 미 문화원 타격 수위를 놓고 이견이 있었다고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 인사는 말했다. 광주에선 ‘반미 슬로건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문화원을 화염병으로 타격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서울은 여론을 고려해 ‘비폭력’과 ‘전두환 정권 고립’에 방점을 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기정씨는 “점거 이후 내거는 구호와 타격 수준에서 약간의 온도 차가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게 공동투쟁을 무산시킨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22일 계획이 연기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만 먼저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 공동투쟁을 준비했던 학생들이 느낀 ‘미묘한 온도 차’는 광주의 엔엘(NL) 운동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김보현(전남대 사학과 84학번, 현 광주시의원)씨는 “서울에서 엔엘이 이론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광주에선 5·18의 경험을 통해 실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미 자생적인 엔엘적 기류가 형성돼 있었다. 그게 (1986년 봄 ‘강철서신’ 이후) 서울에서 들어온 엔엘 이론(NL-PDR,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론)과 결합하면서 더 조직적이고 대세가 됐다. 광주의 엔엘은 ‘반미’에 강조점을 뒀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의 한 인사(84학번)는 이렇게 말했다. “80년 5·18 때 고교생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구속됐다 나온 뒤 동기생보다 조금 늦게 84년 무렵 대학에 들어왔다. 이들은 매우 실천적으로 이론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는데, 엔엘은 반미 투쟁을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향과 딱 맞아떨어졌다. 광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측면도 엔엘 확산의 한 계기로 작용했다.” 엔엘 등장으로 심해진 정파 갈등을 광주 역시 비켜가진 못했다. 1986년 9월8일 전남대 5·18광장에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출범식이 열렸다. 시에이(CA·제헌의회, 나중에 PD로 진화한다) 계열이 주도한 투쟁조직 결성이었다. 400명의 학생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도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제를 몰아내자’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미제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다. 사흘 뒤인 9월11일엔 같은 장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반미투)가 출범했다. 이름에서부터 엔엘의 향기가 물씬 났다. 민민투 때보다 약간 적은 수의 학생들이 모여 ‘민족자주경제 수립’ ‘조국분단 영구화하는 86·88 결사반대’ 등을 외쳤다. 반미투 위원이었던 박정신(철학과 84학번)씨는 “집회와 시위를 각기 따로 할 정도로 한동안 내부 갈등이 있었다. 두 개의 투위 출범은 학교 안팎에 충격을 줬고, 선배들로부터 통합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통합 이후에도 흐름은 NL 쪽으로” 박정신씨 말대로, 전남대에서 투쟁조직이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은 학내 구성원뿐 아니라 광주 시민사회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이론보다 실천을 중요시하는 게 광주의 운동 문화였다. 비록 노선 차이가 있더라도 단일한 대오로 투쟁하지 않는 건 ‘적전 분열’ 행위였다. 노선 차이도 서울만큼은 크지 않았다. 민민투 집회에선 광주 유혈진압에 대한 미국 책임론을 주요 이슈로 거론했다. 그래서 학내에선 두 그룹을 그냥 ‘신파’(반미투)와 ‘구파’(민민투)로 불렀다. 학교 안팎의 거센 압력에 신·구파 대표들은 여러 차례 만나 투위(투쟁위원회) 통합을 논의했다. 구파 대표로 통합 논의에 참여했던 최영호(무역학과 83학번, 현 광주 남구청장)씨의 얘기다. “민주화를 위해선 사상은 달라도 투쟁은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시민사회 쪽에서 강하게 요구했다. 우선 신·구파 양쪽에서 책임자들이 분열에 대한 자기반성을 했다. 구파에선 내가 자기비판하는 글을 써서 내부 회람을 했다. 그리고 통합 투위의 명칭과 활동 방향, 내년(87년) 학내 지도부 구성을 같이 논의했다. 통합 투위 위원장은 내가 맡기로 했다. 사투(사상투쟁)가 극심했던 1986년에 엔엘과 피디(시에이)가 투쟁조직을 통합한 건 전국에서 전남대가 유일했을 거다.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통합 투위 이름은 ‘반제자주화·반파쇼민중민주화 투쟁위원회’(반반투)로 정했다. 엔엘의 ‘자주’와 피디(PD·People’s Democracy)의 ‘민중민주’를 합친 이름이었다. 신파(엔엘) 핵심 중 몇 명은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으로 활동 중심을 옮겼다.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었던 ‘현장 투신’(노동운동 참여)이었지만 분열의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있었다. 신파에 속했던 박정신씨는 “(새로 출현한) 엔엘이 분열의 책임을 더 많이 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통합 이후에도 학내 흐름은 엔엘 쪽으로 쏠렸다”고 말했다. 최영호씨도 “통합 당시만 해도 엔엘과 피디(PD)가 양립했는데, 오히려 피디가 좀더 강한 듯했는데, 87년과 88년을 지나면서 전남대 학생운동은 엔엘이 주도하게 됐다”고 말했다. ‘80년 광주’에서 발원한 반미 정서를 기반으로, 엔엘 사조는 그렇게 전국 학생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1980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 참여했던 임종수씨가 2012년 2월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동지인 정순철(2004년 사망)씨의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주 황금동 미국문화원 불 질러
경찰이 쉬쉬한 80년대 첫 ‘반미’
학살 방조 미국에 배신감·분노
자연스레 터져나온 ‘양키 고 홈’ “NL이 이론적으로 나타나기 이전
5·18 경험 통해 자생적 기류 형성”
실천 강조하는 광주 운동 문화에
정파 대립은 ‘적전 분열’ 인식 퍼져
“NL·PD 통합은 전남대가 유일” 서울과 광주의 ‘미묘한 온도 차’ 조이권(사범대 84학번)씨는 1985년 4월19일의 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 발족식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남대 도서관 앞 5·18광장에 2천여명이 모였다. 여학생으로 오진투위 위원장을 맡은 한경씨는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대나무 깃발을 들고 연단에 섰다. 광주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며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외쳤다. 그 광경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상적이라” 조씨는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강기정씨는 “대학 집회에서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공개적으로 나온 건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선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반미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광주는 달랐다. 광주 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나중에 구속돼 재판을 받을 때도 ‘양키 고 홈’의 의미가 뭐냐는 게 계속 논쟁이 됐다”고 말했다. 그해 5월23일 낮 서울에서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을지로1가 미 문화원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광주학살 지원한 미국의 사과’ ‘전두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등을 내걸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과 미국의 방조 책임을 부각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애초 거사일은 5월23일이 아니라 22일이었다. 22일에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미 문화원을 점거하자고 논의를 진행했다. 전남대 삼민투 위원장이던 강기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광주 학살 진상규명과 미국의 책임론 부각이 목적이니까,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미 문화원 점거투쟁을 벌이자고 얘기가 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22일로 날짜를 잡았는데 마침 그날 서울에 경찰력이 대거 배치돼 갑자기 계획을 취소한다는 연락이 왔다.(그날 서울 미 문화원 부근 롯데호텔에선 한미안보협의회가 열렸다.) 그러고는 23일에 서울만 먼저 미 문화원에 진입했다.” 당시 공동투쟁을 준비하면서 서울과 광주 사이엔 반미 구호의 수준과 미 문화원 타격 수위를 놓고 이견이 있었다고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 인사는 말했다. 광주에선 ‘반미 슬로건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문화원을 화염병으로 타격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서울은 여론을 고려해 ‘비폭력’과 ‘전두환 정권 고립’에 방점을 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기정씨는 “점거 이후 내거는 구호와 타격 수준에서 약간의 온도 차가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게 공동투쟁을 무산시킨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22일 계획이 연기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만 먼저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 공동투쟁을 준비했던 학생들이 느낀 ‘미묘한 온도 차’는 광주의 엔엘(NL) 운동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김보현(전남대 사학과 84학번, 현 광주시의원)씨는 “서울에서 엔엘이 이론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광주에선 5·18의 경험을 통해 실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미 자생적인 엔엘적 기류가 형성돼 있었다. 그게 (1986년 봄 ‘강철서신’ 이후) 서울에서 들어온 엔엘 이론(NL-PDR,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론)과 결합하면서 더 조직적이고 대세가 됐다. 광주의 엔엘은 ‘반미’에 강조점을 뒀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의 한 인사(84학번)는 이렇게 말했다. “80년 5·18 때 고교생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구속됐다 나온 뒤 동기생보다 조금 늦게 84년 무렵 대학에 들어왔다. 이들은 매우 실천적으로 이론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는데, 엔엘은 반미 투쟁을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향과 딱 맞아떨어졌다. 광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측면도 엔엘 확산의 한 계기로 작용했다.” 엔엘 등장으로 심해진 정파 갈등을 광주 역시 비켜가진 못했다. 1986년 9월8일 전남대 5·18광장에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출범식이 열렸다. 시에이(CA·제헌의회, 나중에 PD로 진화한다) 계열이 주도한 투쟁조직 결성이었다. 400명의 학생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도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제를 몰아내자’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미제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다. 사흘 뒤인 9월11일엔 같은 장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반미투)가 출범했다. 이름에서부터 엔엘의 향기가 물씬 났다. 민민투 때보다 약간 적은 수의 학생들이 모여 ‘민족자주경제 수립’ ‘조국분단 영구화하는 86·88 결사반대’ 등을 외쳤다. 반미투 위원이었던 박정신(철학과 84학번)씨는 “집회와 시위를 각기 따로 할 정도로 한동안 내부 갈등이 있었다. 두 개의 투위 출범은 학교 안팎에 충격을 줬고, 선배들로부터 통합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통합 이후에도 흐름은 NL 쪽으로” 박정신씨 말대로, 전남대에서 투쟁조직이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은 학내 구성원뿐 아니라 광주 시민사회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이론보다 실천을 중요시하는 게 광주의 운동 문화였다. 비록 노선 차이가 있더라도 단일한 대오로 투쟁하지 않는 건 ‘적전 분열’ 행위였다. 노선 차이도 서울만큼은 크지 않았다. 민민투 집회에선 광주 유혈진압에 대한 미국 책임론을 주요 이슈로 거론했다. 그래서 학내에선 두 그룹을 그냥 ‘신파’(반미투)와 ‘구파’(민민투)로 불렀다. 학교 안팎의 거센 압력에 신·구파 대표들은 여러 차례 만나 투위(투쟁위원회) 통합을 논의했다. 구파 대표로 통합 논의에 참여했던 최영호(무역학과 83학번, 현 광주 남구청장)씨의 얘기다. “민주화를 위해선 사상은 달라도 투쟁은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시민사회 쪽에서 강하게 요구했다. 우선 신·구파 양쪽에서 책임자들이 분열에 대한 자기반성을 했다. 구파에선 내가 자기비판하는 글을 써서 내부 회람을 했다. 그리고 통합 투위의 명칭과 활동 방향, 내년(87년) 학내 지도부 구성을 같이 논의했다. 통합 투위 위원장은 내가 맡기로 했다. 사투(사상투쟁)가 극심했던 1986년에 엔엘과 피디(시에이)가 투쟁조직을 통합한 건 전국에서 전남대가 유일했을 거다. 광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통합 투위 이름은 ‘반제자주화·반파쇼민중민주화 투쟁위원회’(반반투)로 정했다. 엔엘의 ‘자주’와 피디(PD·People’s Democracy)의 ‘민중민주’를 합친 이름이었다. 신파(엔엘) 핵심 중 몇 명은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으로 활동 중심을 옮겼다.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었던 ‘현장 투신’(노동운동 참여)이었지만 분열의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있었다. 신파에 속했던 박정신씨는 “(새로 출현한) 엔엘이 분열의 책임을 더 많이 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통합 이후에도 학내 흐름은 엔엘 쪽으로 쏠렸다”고 말했다. 최영호씨도 “통합 당시만 해도 엔엘과 피디(PD)가 양립했는데, 오히려 피디가 좀더 강한 듯했는데, 87년과 88년을 지나면서 전남대 학생운동은 엔엘이 주도하게 됐다”고 말했다. ‘80년 광주’에서 발원한 반미 정서를 기반으로, 엔엘 사조는 그렇게 전국 학생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
박찬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