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 3·1운동 앞장선 정석해
연세대 재직때 ‘4·19 교수시위’ 주도
유신정권 ‘정치교수 1호’ 낙인
89년 첫 일대기 출간됐으나 묻혀
“재단 비판 학내민주화 활동탓인 듯”
직계제자 박 교수 “지식인 표상으로”
스승 ‘정석해 일대기’ 펴낸 박상규 홍익대 명예교수
‘폴리페서’란 말이 있다. 정치나 사회 활동에 직접 뛰어들거나 큰 관심을 보이는 교수를 부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전엔 ‘정치교수’라고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 때 교수단 반대시위를 주도한 정석해(1899~1996) 당시 연세대 퇴직교수에게 정치교수란 낙인을 찍었다. ‘정석해=정치교수 1호’ 등식이 이때 생겼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학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법을 제정하려 할 때 언론기고 등을 통해 맞섰다. 독재의 불의를 그냥 지켜보지 못했다.
그의 제자인 박상규(80) 홍익대 명예교수가 최근 스승의 일대기 <철학자 정석해 그의 시대, 그의 사상>(사월의 책)을 펴냈다. 저자를 지난 24일 경기 파주 금릉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60년 4월25일 교수들이 거리시위에 나선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교수들의 직접 행동이 4·19의 물줄기를 급변시켰다. 정석해는 이 시위를 기획하고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의 아우 정석원씨의 집에서 준비모임이 열렸고 데모 당일 그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열린 교수궐기대회 의장으로 선출돼 사회를 봤다. 연희전문 학생 시절엔 3·1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하숙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3월5일 남대문 역두 시위도 이끌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넘어간 뒤 유학을 결심하고 20년 프랑스 마르세유행 배를 타게 된다. 39년 귀국 때까지 프랑스와 독일에서 ‘철학전공 고학생’의 삶을 살았다.
이번 일대기는 89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찍은 책을 다시 펴낸 것이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 서점에서 구경도 못했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책이 사장된 게 안타까웠죠. 우리 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큰 사건인 기미년과 4·19 운동을 학생과 교수로서 이끌었고, 학자로서도 비중이 큰 분인데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어요.”
박 교수는 당시 책이 묻힌 데는 연세대 쪽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책엔 4·19 직후 연세대의 학내 민주화 운동 과정에 대한 기록도 상세히 담겼다. 정석해 등 문과대 교수들은 총장 임명 때 교수회 동의를 구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대학기구 개편안을 마련하고 재단과 협상에 나선다. 재단이 이 안을 거부하고 교수 3명을 해임하자 교수들은 농성에 나서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는 등 대립으로 치닫는다. 재단에 맞선 이런 이력이 대학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연세대 100년사 책을 사서 봤는데, 4·19 이후 학원민주화 노력은 아예 언급도 없더군요.”
45년 연희전문 강사로 임용된 뒤 교무처장, 문과대학장 등 보직을 두루 지낸 정석해는 61년 정년퇴임했다. 2년 뒤 고려대는 그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줬다. 그가 기틀을 마련한 연세대로부터는 명예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는 스승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는 “우리 지식인들에게 책임이 크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뒤 대학 행정을 주도한 이들이 일제와 가까웠고, 미군정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근원이 거기에 있어요. 재단 이사회 구성원이 다 그래요.”
책엔 연세대 초창기 실권자였던 백낙준(1896~1985)씨에 대한 불편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 때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이사장을 겸했던 백씨는 교수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학교 차를 타고 혼자 피난을 떠났다. 당시 문과대학장이었던 정석해는 인민군 치하 3개월을 학교 사택에서 견뎠다. “백씨의 말로 시작하고 끝나는 교무위원회에서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개진하는 교직원이 정 선생이었습니다.”
책이 다시 나온 데는 정석해의 조카인 정세장(정석원의 아들) 면사랑 대표 덕이 컸다. “정세장씨의 백부에 대한 존경심이 커요. 2년 전 대학발전기금 2억원을 연세대 철학과에 내놓으면서 백부를 기리는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죠.” 그 뒤 연세대 철학과는 정석해의 호를 딴 ‘서산신진철학연구자상’을 만들었고, 1년에 8차례 서산철학강좌도 열고 있다. 일대기도 기금으로 구매해 철학과 재학생과 동문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연세대 철학과 53학번인 박 교수는 정석해의 직계 제자다. “선생님은 늘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죠. 어떤 후배 교수와 친한 것 같아 이유를 물어보면 ‘저이는 용기가 있어’라고 하셨죠. 교수로서도 일류였어요. 말씀이 어눌하지만 힘이 있었죠. 그래서 머리에 쏙쏙 들어왔죠. 학구적 열정도 대단한 분이죠.”
4·19 당시 연세대 한국어학당 전임강사였던 박 교수는 5·16 쿠데타 이후 스승과 함께 연세대를 나와야 했다. 병역미필 교수 정리라는 명분으로 학교가 일괄 사표를 강요한 것이다. 정석해 역시 군사정부가 대학교원 정년을 60살로 낮추면서 교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인터뷰에 동석했던 김은중 박사(연세대 철학과 78학번)는 “학교가 병역을 마친 교수들을 선별 복직시켰다. 박 교수처럼 학내 분규 때 정 교수 편에 섰던 교수들은 복직을 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오랜 시간강사 생활을 거쳐 76년에야 홍익대 교수로 임용됐다.
박 교수는 스승이 행동주의자였지만, 개인주의자의 면모도 있었다고 했다. “단체활동을 했으나 패거리 짓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3·1 운동 이후 상하이 체류 시절에 도산 안창호가 흥사단에 들어오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규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니 ‘나도 생각이 있다’면서 가입하지 않았어요. 뒤에 도산이 ‘공부하려고 하면 막지 않겠다’고 해 들어갔다고 해요.”
2002년 정년퇴임한 박 교수는 “나도 흐릿하게나마 그 양반(정석해) 복사본이다”라고 말했다. 요즘의 교수 사회는 어떨까?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누구나 그분 하면 알 정도로 어른이 있었어요. 지금은 대학교수상이 달라졌어요. 그때 이야기를 하면 어디서 왔냐고 할 정도이지요. 교수가 학생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그걸 아는 사람이 없어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박상규 홍익대 명예교수
고 정석해 연세대 교수. 사월의 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