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김대중은 세계적 인권지도자들이 받았던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받았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옥외광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이희호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중이 인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제6부 청와대 시간-4회 국가조찬기도회
1999년 5월 법무장관 부인의 ‘고발’
검찰 수사·청문회·첫 특검까지 도입
6개월 만에 “실체 없는 해프닝” 결론
“청와대 시절 한번도 로비 받지 않아”
2000년 2월 워싱턴서 오찬 연설
“탄압한 군사지도자들 용서·화해”
세계적 정치인들 감동의 기립박수
“남편 노벨평화상 추천에 긍정 영향”
5월 대통령 부인 첫 소록도 방문
“바오로 교황보다 16년이나 늦게”
1999년 5월 법무장관 부인의 ‘고발’
검찰 수사·청문회·첫 특검까지 도입
6개월 만에 “실체 없는 해프닝” 결론
“청와대 시절 한번도 로비 받지 않아”
2000년 2월 워싱턴서 오찬 연설
“탄압한 군사지도자들 용서·화해”
세계적 정치인들 감동의 기립박수
“남편 노벨평화상 추천에 긍정 영향”
5월 대통령 부인 첫 소록도 방문
“바오로 교황보다 16년이나 늦게”
1999년 5월 말 김대중과 이희호는 4대국 외교의 마지막 나라인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남편이 첫해 미국을 방문한 데서 시작해 일본·중국을 거쳐 러시아 방문으로 4대국 외교를 마쳤지요. 1년 걸린 일이었어요. 그 순방으로 주변 4대국과 모두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었어요. 남편은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고 북한과의 관계를 푸는 데도 힘을 얻었다고 기뻐했지요.”
1999년 5월24일 국민의 정부 2기 내각이 출범했다. 통일부 장관에 외교안보수석 임동원, 법무부 장관에 검찰총장 김태정, 문화부 장관에 청와대 공보수석 박지원이 임명됐다. 다음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된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가 남편을 구명하려고 고급 옷을 사 들고 고위 공직자 부인들에게 로비했다는 혐의였다.
5월25일 청와대는 이희호의 이름이 거론되는 데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나는 원래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사 입었어요. 험한 세월을 보내느라 사치할 여유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야당 총재 부인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되니까 강남에 있는 옷가게 라스포사를 가끔 이용했어요. 30% 정도 깎아주었거든요. 그런데 법무부 장관 부인이 거기서 옷을 한 벌 산 적이 있나 봐요. 그런 이유로 내 이름까지 거론된 거지요.”
5월28일 법무장관 김태정의 부인 연정희가 이형자를 고발하자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6월2일 서울지검 특수2부는 “이형자씨가 ‘남편 구명’을 위해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씨에게 접근했고 배정숙씨는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를 통해 선처를 부탁하려 했으나 실제로 하지 못했으며, 연정희씨에게 옷을 사준 일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6월1일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을 유리 속처럼 투명하게 수사해서 잘못이 나오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언론 보도가 ‘마녀사냥 식’이라는 말도 했다. 이 발언이 여론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남편은 항상 말을 절제해서 하는데, 그날은 좀 흥분했어요. 내 이름이 거론돼서 그랬던가 봐요. 청와대에 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로비를 받아본 일이 없어요.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이 나에게 밍크코트를 선물하려고 했다는데, 어처구니가 없지요. 청와대에 들어오려면 경호실을 거쳐야 하고, 혹시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도 다 뒤져보고 거기다 맡기고 핸드백도 못 가지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코트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전할 수 있겠어요.”
8월23일부터 25일까지 국회 법사위에서 옷 로비 의혹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로도 여론의 관심이 수그러들지 않자 특별검사제가 도입됐다.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10월7일 임명된 특별검사는 12월20일 ‘이형자가 남편 최순영의 구명을 위해 이희호와 연정희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연정희로부터 최순영의 구속 방침을 접하고 로비를 포기했다’고 발표했다. 여섯 달 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옷 로비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사건이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 사건으로 ‘국민의 정부’의 도덕성에 흠집이 났어요. 구제금융 사태로 국민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만으로도 사람들이 실망했던 거지요. 그 뒤로 행보를 더욱 조심하게 됐지요.”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서쪽 해역에서 남한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연평해전’이었다.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들어오자 남한 경비정들이 북한 경비정들과 힘겨루기를 하다 벌어진 교전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에 남한 해군이 대응 사격을 했다. 북한의 피해가 컸다. 어뢰정 한 척이 침몰하고 경비정이 크게 부서졌다. 북한군의 사망자는 30명이 넘었다. 남한 해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우리 정부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어떠한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 위에 선 것이었어요. 남편은 그 원칙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지요. 그날 동해안에서는 금강산 관광선이 떠났는데, 관광객들은 아무 일 없이 금강산을 올랐어요.”
1999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김대중은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받았다. 필라델피아는 이날을 ‘김대중의 날’로 선포했다. “그해 4월7일에 남편이 수상자로 발표됐지요.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은 제2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데, 레흐 바웬사, 바츨라프 하벨, 지미 카터 같은 인권지도자들이 받은 상이었어요.” 김대중은 수상연설을 하던 중 아내와 막내아들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나는 지금도 1980년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사형언도를 받고 육군교도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자식들과 같이 면회를 와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온 가족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내 가족 중 누구도 군사독재자와 타협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7월26일 박정희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김대중은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남편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기념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명예회장까지 맡았어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요.”
1999년 9월11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아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각국 대표들에게 동티모르 유혈 사태 해결책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동부의 섬나라 동티모르는 1975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으나 곧바로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9년 1월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허용했다. 8월30일 유엔이 주관해 실시한 투표에서 78.5%가 독립에 찬성했다.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한 인도네시아 군부는 민병대를 투입해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남편은 동티모르 사태에 깊은 관심이 있었어요. 19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것도 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이어서 책임감을 느꼈지요. 각국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동티모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어요. ‘아펙이 경제 문제를 다루는 협력체라고 하지만 동티모르 문제를 외면한다면 세계가 아펙이 필요 없다고 할 것’이라고요.” 김대중은 한·중 정상회담에 이어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했다. 폐막 전날 3국 정상은 유엔과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 독립에 힘써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편은 아펙에 참석한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에게도 동티모르 사태 해결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어요.” 재무장관이 아펙 회의 분위기를 인도네시아 대통령 바하루딘 유숩 하비비에게 전했다. 하비비는 유엔의 다국적군 파병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몇 주 뒤에 조제 하무스 오르타 동티모르 저항운동협의회 부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을 만났다. “인도네시아 점령 3년 동안 20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10만명이 더 죽었을 겁니다.” 하무스 오르타는 뒤에 노벨평화상을 받고 대통령이 됐다.
“남편은 상록수부대를 평화유지군으로 동티모르에 파견했어요. 그 뒤로도 정상회담이 있을 때마다 동티모르 문제를 거론했지요.” 동티모르는 2002년 완전 독립을 이루었고 독립혁명전선을 이끈 샤나나 구스망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국은 동티모르를 주권국가로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남편은 동티모르 학살을 중단시키고 독립을 도운 데 보람을 느꼈지요.”
김대중은 미얀마 민주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오랫동안 탄압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얀마 군사정권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수치 여사와 대화할 것을 촉구했지요. 2013년 1월 수치 여사가 방한했을 때 김대중평화센터를 찾아와서 반갑게 만났어요. 아주 겸손하고 청렴해 보이는 분이었어요. 결국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미얀마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새 천년이 시작됐다. 2000년 2월2일 이희호는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가 주최한 ‘오찬 연설’에 참석해 주요 연사로 연설했다. “오찬 연설은 국가조찬기도회 전날에 열려요. 정근모 박사가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끄는 더글러스 코어 준비위원장에게 나를 소개해 이루어진 일이었어요.”
이희호의 오찬 연설에는 미국 상하 의원과 정계 인사, 외교사절 수백명이 참석했다. 이희호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자고 촉구했다.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기아와 전쟁, 질병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이 ‘희망의 아침’이 아니라 또다른 ‘어두운 밤’의 시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희호는 북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도 요청했다. “우리 한반도의 북녘에는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에 지친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북한 어린이들의 기아와 질병,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 부진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이희호는 이 연설에서 남편 김대중과 함께 겪은 고난의 삶도 이야기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오랜 세월 고난에 찬 삶을 살아왔습니다. (…) 그러나 저는 남편의 신념이 옳은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지금 남편은 자신을 탄압했던 군사정권 지도자들을 모두 용서하고 그이들과 화해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박해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의 기념사업회 명예회장까지 맡았습니다.” 이희호는 북한·일본에 대한 화해정책의 의미도 이런 신념과 결부해 설명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포용정책이나 일본과의 오랜 갈등과 증오를 청산한 일은 모두 이런 용서와 화해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희호의 연설은 박수를 많이 받았다. “연설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눈시울이 붉어진 사람들도 있었고요. 외국 참석자 중에 셸 보네비크 노르웨이 총리가 있었는데, 그이가 ‘고난의 의미’에 대한 내 연설에 감동해,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지요.”
이희호는 ‘오찬 연설’ 뒤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 클린턴과 만났다. “1998년 한·미 정상회담 때 본 뒤로 두 번째 만남이었어요. 백악관에서 30분 정도 이야기했는데, 대통령 부인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있었어요. 남편 클린턴 대통령 못지않은 실력과 매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느꼈지요.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여성이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세계의 여성들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희호는 로스앤젤레스로 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이 제정한 ‘국제사회복지상’을 수상했다. “과분하게도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어요. 2000년 9월에는 미국 뉴저지주 드루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2002년에는 밴더빌트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지요. 밴더빌트는 모교 스캐릿대학과 합쳐진 대학이었어요. 또 1998년에는 일본 아오야마학원대학에서 교육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지요.”
2000년 1월20일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이 총재를, 서영훈이 대표를 맡았다. 4·13 총선을 앞둔 여당의 재정비였다. 그 무렵 진보적인 시민단체들이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하고 ‘낙천낙선운동’을 시작했다. 총선시민연대는 1월24일 ‘공천 받아서는 안 될 정치인’ 6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총선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박원순은 “낙천낙선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2000년 2월10일치에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수도권 유권자 77%가 총선시민연대의 부적격자 명단이 적절하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2월2일 총선시민연대는 부적격 정치인 48명을 추가로 발표했다.
4월13일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133석을 차지해 제1당을 유지했다. 새천년민주당은 115석을 얻었다. 자민련은 17석으로 줄었다. 민주당 소속으로 영남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모두 낙선했다. 지역주의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특히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의 패배는 반향이 컸다. 4월28일 광주에서 노무현 팬클럽 ‘노사모’ 호남지부가 처음으로 결성됐다. 그 뒤 노사모는 전국으로 퍼졌다.
2000년 5월 이희호는 소록도의 한센인들을 방문했다. “주민자치회장이 대통령 부인의 방문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동안 대통령 부인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한 대통령 부인이 되었지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는데, 그보다 16년이나 늦은 방문이었어요.”
이희호는 한센인들의 손을 잡았다. “나이 든 한센인들이 100여분 계셨어요. 손가락이 하나뿐인 사람도 있고 얼굴이 쭈그러지거나 코가 주저앉은 분들도 있고요. 그분들이 대통령 부인이 왔다고 반가워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살아온 삶이 서러워서 그랬겠지요. 그분들 손을 하나하나 잡아드렸지요.” 이희호는 2001년 11월 소록도를 다시 방문했다. “한센인들 친척이나 자원봉사자가 소록도에 오면 쉴 곳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라는 곳에 부탁해서 그쪽의 지정 기탁을 받아 ‘자원봉사회관’을 지었지요. 준공식 때 다시 거기에 갔어요. 미안함이 조금 덜어졌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99년 5월25일 터진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은 검사 수사와 국회 청문회에 이어 사상 첫 특별검사까지 도입해 ‘실체 없는 소동’으로 밝혀졌으나 국민의 정부 도덕성에는 흠집이 생겼다. 사진은 그해 11월24일 특별검사 사무실에 출두한 김태정(왼쪽) 전 법무장관과 부인 연정희(오른쪽)가 울먹이며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2월2일 이희호는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주최로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열린 ‘오찬 연설’에 주요 연사로 나서 세계적인 지도자들에게 감동 어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연설이 끝난 뒤 백악관에서 두 번째 만난 힐러리 클린턴(왼쪽)한테서 미래 여성 대통령의 모습을 예감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0년 5월 이희호는 대통령 부인으로는 처음 소록도를 방문해 한센인들을 위로했다. 이듬해 11월 약속한 대로 자원봉사회관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