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고분 후속 발굴과 귀국
경주 집착 깊었던 야쓰이 1910~20년 마구잡이 발굴 지속
총독부 비호아래 검총 보문총 등 뒤졌지만 성과 미미
1920년 김해 패총 발굴 마지막으로 21년 돌연 귀국
돌아간 직후 금관총에서 신라 황금유물들 쏟아져
1909년부터 1920년까지 야쓰이 세이이쓰와 세키노 다다시가 이끌었던 조선 고적 조사는 관의 지원 아래 발굴이 진행된 한반도 고대 유적 최초의 근대 학술조사였다. 서북지방 평양 일대의 고분과 성터 등에서 낙랑계 토기와 금공예품, 금석문이 쏟아진 덕분에 야쓰이 일행은 이를 활용해 중국 한사군과 임나일본부의 타율적 지배로 대표되는 식민사학의 물리적 토대를 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조선 팔도를 아우르며 이후 한반도의 역사고고학적 연구에서 기준이 된 주요 고고유적들을 설정했다. 평양의 석암리 고분과 대동강변 낙랑계 토성 등을 비롯해 서울 석촌고분, 부여 능산리, 공주 송산리의 백제 고분, 나주의 마한계 반남고분, 경주의 황남리 고분, 검총, 보문리 고분, 진주 옥봉 고분, 창녕 교동 고분, 익산 쌍릉 등이 야쓰이·세키노 조사단의 굴착조사와 실측 등을 통해 한반도 고고미술사 연구의 핵심 유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야쓰이의 회고나 기록에는 21년 귀국할 때까지 만족감을 표시한 구절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 고도 경주의 유적에서 진구왕후의 삼한 정벌 흔적을 찾는다는 필생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압박감이 그를 계속 짓눌렀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발굴한 나주 반남면 고분의 경우 왜계 토기유물인 하니와가 나왔고, 17~18년 창녕 고분 조사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입증하는 물증은 아니지만, 막대한 토기류와 금공품 등의 교류사 유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경주 고분만은 학자로서의 성취감을 안겨주지 않았다. 고대의 <일본서기>는 3세기 진구왕후가 정벌했다는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언급했지만, 발굴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내부에서는 돌들이 쏟아져내릴 뿐 기대했던 물증들은 거의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야쓰이와 세키노는 1913~19년 관심이 집중된 낙랑 발굴현장을 간간이 벗어나 경주 고분 발굴에 지속적으로 역량을 투입했다. 1915년 황남리 100호분 검총을 발굴조사해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곽 위에 강돌을 쌓은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처음 확인했고, 1909년 조사한 황남리 남총, 석침총의 재발굴과 보문리 부부총, 동천리의 와총 등에 대한 조사를 거듭했다. 이를 통해 경주 고분들의 주된 얼개가 돌무지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방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란 것을 밝혀냈고, 금제귀고리, 비취옥, 굽다리 접시 등 전형적인 신라 유물들의 계보도 처음 정리하게 된다. 야쓰이는 명활산성과 남산성, 선도산성, 관문서 등의 신라 성곽도 조사하면서 유적 도면과 출토유물에 대한 사진촬영을 함께 하는 조사기법도 확립했다.
구한말까지 일본 학자들은 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경주 시내의 고분들을 파헤치기보다는 외곽 서악리나 황남리 남쪽의 고분들을 조선인들을 동원해 굴착했다. 그러나 병합 뒤에는 총독부 관리들의 비호 아래 내키는 대로 도심의 고분들과 유적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검총, 부부총, 완총, 금환총 등이 그렇게 싹쓸이 발굴되었지만, 지금도 검총과 부부총 등 일부를 제외하면 조사보고서 미비로 발굴 경위의 윤곽조차 알 수 없다. 야쓰이는 3·1 독립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서악리 태종무열왕릉 비석 주변을 모두 파헤쳐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만용도 부렸다. (비망록에 당시 비석을 파헤쳐놓은 사진이 전하고 있다.)
게다가 야쓰이에 대한 학계와 총독부 당국의 평판도 나빠지고 있었다. 대형 유적을 발굴한 뒤 보고서를 내지 않고 유물만 여러 경로로 빼돌리는 악행이 소문나면서 그에게 발굴을 맡기는 것은 곤란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18년 이후 그와 친분이 있던 제자뻘인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 등 교토대 학맥의 소장학자들이 조선에 들어와 주요 발굴조사를 접수하면서 그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1920년 하마다와 우메하라가 주도한 김해 패총 조사에 참여한 것을 끝으로 그는 이듬해 4월 부친의 병환을 이유 삼아 고향 와카야마로 귀국해 버린다. 그 뒤 야쓰이는 영영 조선에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뒤로 공안위원, 문화재보호위원 등을 맡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그는 59년 세상을 떠난다.
야쓰이의 갑작스런 귀국을 계기로 야쓰이가 감식안을 가르친 하마다와 우메하라 등 교토대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은 조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그가 귀국한 지 다섯달 뒤에 하마다 조사팀이 터뜨린 경주 금관총 발굴의 낭보는 조선 고적 조사의 권력 지형을 교토대 학맥 중심으로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그렇게도 야쓰이가 소망했던 진구왕후의 신라 정벌설에 끼워맞출 수 있는 금관 등의 황금유물들과 비단벌레 장식, 일본산 추정 곡옥, 마구 등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으니 기구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야쓰이의 후손들은 일본 현지에서 고인의 자료컬렉션들을 처분하면서 그가 반출해간 수백억원대의 조선 미술품과 토기 등의 고고유물들도 매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각지로 흩어졌을 야쓰이 반출 유물들에 대한 추적을 국외 소재 문화재재단 등의 국가기관에서 학계와 함께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안갯속인 한반도 고고역사 연구 초창기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끝>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19년 야쓰이 조사단이 벌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주변의 발굴조사 모습. 비석 둘레 사방을 마구 파헤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