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명사 70인과의 동행] (24) 한강 따라 구불구불 ‘아홉 굽이’ 다산의 숨결과 마주하다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8. 17:59

[명사 70인과의 동행] (24) 한강 따라 구불구불 ‘아홉 굽이’ 다산의 숨결과 마주하다

조홍민 스포츠부장 dury129@kyunghyang.com

ㆍ심경호 교수와 함께한 유배 이후 다산의 춘천 여행

24번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인 ‘유배 이후 다산의 춘천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이 지난 1일 춘천 소양정을 찾아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운데)의 설명을 듣고 있다.<br />춘천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24번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인 ‘유배 이후 다산의 춘천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이 지난 1일 춘천 소양정을 찾아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운데)의 설명을 듣고 있다. 춘천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한강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머금은 물비늘이 산촌의 고요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간간이 햇살이 비추면서 가을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난 1일 찾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생가는 여유로운 가을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스물네번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은 한강을 따라 다산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심경호 고려대 교수의 설명과 안내로 28명의 참가자들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다산의 행적을 더듬어 좇아갔다.

■ ‘부가범택’의 꿈

지난 1일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경기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 1일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경기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자세히보기 CLICK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로 꼽히는 다산에게 한강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생가는 한강이 바로 보이는 마재(현재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란 곳에 위치해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살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척에 두고 있는 곳. 자신이 나고 자란 이곳에서 다산은 유배 후 18년을 더 살았다. 특히 다산은 한강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산’이나 ‘여유당’이라는 당호보다 ‘열수(冽水·한강의 별칭)’란 호를 즐겨 썼다고 한다.

심 교수는 “보통 다산 하면 강진 유배생활을 많이 떠올리지만 사실 유배생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낸 세월이 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배지 강진에서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면 그곳에서 쓴 책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한 곳이 여유당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유배 이후 다산의 생애에 대한 연구도 더 활발해지고 있는 추세라는 게 심 교수의 설명이다.

이날 방문지는 다산의 생가와 춘천의 소양정, 화천 곡운구곡(谷雲九曲) 등 말년에 그의 발길이 닿았던 장소이자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위치한 곳들이었다.

첫 방문지인 다산의 생가는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고요했다. 주변 곳곳에 터를 잡은 음식점과 카페들이 눈에 거슬렸지만 대체로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이곳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원래 생가를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것은 생가 뒤 작은 언덕에 자리 잡은 그의 묘뿐이다.

참가자들과 함께 생가를 둘러본 뒤 다산의 묘에 올라갔다. 부인과 합장된 묘 앞에는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 숙부인 풍산 홍씨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先生 淑夫人豊山洪氏之墓)’라고 쓴 비석이 서 있었다. 심 교수는 다산이 ‘위대한 학자’로 후세의 추앙을 받는 이유에 대해 ‘저술’이 많다는 점을 들었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경우, 조선의 대성리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다산만큼 저술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다산은 시, 천문, 경전, 역사, 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유한, 지금으로 말하면 ‘융합’을 실천한 학자입니다. 다산의 이름 끝자인 용(鏞)자도 종을 뜻하는 악기의 일종을 의미합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이 한 시대를 울릴 만한 ‘악기’가 된 셈이죠.”

이렇게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였지만 다산은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자신의 고향에서 은둔의 삶을 꿈꿨다고 한다. 이른바 ‘부가범택(浮家泛宅)’의 삶이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원굉도(袁宏道)가 ‘배를 하나 사서, 북이며 피리 부는 악대를 갖춰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니고 싶다’고 했던 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다산 역시 물에 떠 있는 배를 집으로 삼아 소요(逍遙)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산은 유배를 떠나기 전 낙향해 부가범택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정조가 다시 부르는 바람에 자신의 바람을 먼 훗날로 미뤄야 했다.

■ “강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한낮이 되자 따가운 햇살이 저절로 눈을 감게 만든다. 춘천 소양정을 찾아가는 동안 쌀쌀한 아침 날씨에 챙겨입은 겉옷들을 하나둘 벗어 팔에 걸친다.

다산은 59세 때인 1820년과 62세 되던 1823년 4월에 두 차례 춘천을 여행한다. 그가 춘천을 찾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손자의 혼사에 동행해 풍경을 구경하면서 상고시대의 춘천의 지역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국난의 상황이 닥칠 경우 춘천이 ‘임시수도’ 격인 ‘행도(行都)’의 기능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목적에서였다.

다산이 두 차례 춘천을 방문하는 동안 찾았던 곳이 바로 소양정이다. 그곳에서 다산은 시를 지었고, 위정자들의 실정(失政)을 목격하고 비판하면서 훗날 자신의 저서에 담은, 목민관이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가이드와 함께 길을 물어 한 100m쯤 언덕을 올라가니 커다란 붉은 정자가 손님들을 맞는다. 심 교수는 “소양정 역시 원래 소양강변 가까이에 있었지만 1970년대 홍수로 쓸려가면서 지금보다 뒤에 있는 산기슭 쪽으로 옮겨가 다시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소양정에 오르니 탁 트인 앞으로 소양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강 저편엔 빽빽하게 늘어선 아파트의 행렬이 먼 경치를 막아서고 있다. 다산뿐 아니라 여러 학자와 문인들이 소양정에 올라 절경의 아름다움을 읊었다는 옛이야기가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다만 소양정 윗벽에 붙어 있는 소양정과 관련한 시와 기(記·산문) 23편을 통해서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심 교수는 여기 현판에 걸린 시와 기를 쓴 인물들이 “다 유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참가자들 가운데는 시를 적은 현판을 사진찍거나, 한 글자씩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고려말의 문인 원천석과 의병장 의암 유인석, 매월당 김시습의 한시를 적은 현판이 시선을 잡는다. 형식도 다양하다. 칠언시와 오언시, 산문이 소양강의 경치를 노래한다. 심 교수는 그중에서도 김시습의 ‘소양정에 올라(登昭陽亭)’가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구 가운데 ‘山多從北轉 江自西向流(산은 북쪽으로 줄을 서 있고, 강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란 부분을 백미로 꼽았다.

“이 시구엔 소양강이나 춘천이란 지명이 등장하지 않으면서 소양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쇠락과 쓸쓸함을 노래한 명시라고 할 수 있지요. 여러분은 여기의 공기를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를 한 것입니다.”

■ 아름다운 곡운구곡의 풍광

참가자들이 화천 곡운구곡 북쪽에 위치한 화음정사터 옆 계곡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춘천 |이석우 기자

참가자들이 화천 곡운구곡 북쪽에 위치한 화음정사터 옆 계곡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춘천 |이석우 기자

소양정을 떠나 곡운구곡을 가기 위해 험준한 산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더듬어 올라갔다. 다산이 곡운구곡을 유람한 것은 두 번째 춘천 여행 때였다. 당시 한강을 거쳐 소양강을 따라 배를 타고 춘천에 온 뒤 늙은 암말을 갈아타고 곡운구곡을 찾아갔다.

곡운구곡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2차 예송논쟁 때 밀려나면서 관직을 버리고 은둔한 곳이다. 자신의 호(곡운)를 따 이 계곡의 ‘절경’ 9곳을 정해 구곡(九曲)으로 이름붙였고, 북쪽으로 2㎞가량 올라간 곳에 화음정사를 짓고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버스가 잠시 멈춰 선다. 차로 하나를 막고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다시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다. 높은 산그늘을 끼고 도니 갑자기 탁 트인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전문제 때문에 차를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었지만 느린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아쉽게나마 계곡의 경치를 감상했다. 얕은 시내가 멈춘 듯 잔잔하면서도 너럭바위의 마디마다 작은 흐름이 일어나고, 이 물길이 자갈과 부딪쳐 뽀얀 포말을 이룬다. 마치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계곡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에는 불그스레한 단풍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다산이 이곳을 찾은 때는 음력 4월 초(5월)였다. 당시 다산은 화가 조세걸(曺世杰·1635~1705)이 그리고 김수증이 화제(畵題·그림에 써넣는 시를 비롯한 각종 글)를 쓴 화첩(곡운구곡도)을 발견했는데, 여기에 바로 김수증이 정한 1곡부터 9곡까지의 명칭과 각 계곡의 특징들이 묘사돼 있었다. 하지만 다산은 자신이 생각한 구곡의 느낌이 다르다고 해 다른 굽이를 7, 8, 9곡으로 대신하고 김수증이 선정한 계곡에 대해서는 반박하는 내용의 산문을 썼다. 아마도 다산은 꼼꼼하면서도 ‘까칠한’ 학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다산 역시 아름다운 구곡의 풍광에 ‘힐링’을 받았으리라.

1곡에서 9곡까지 차로 달린 거리는 약 3~4㎞. 버스가 멈춰 서자 이날 ‘동행’의 종착지 화음정사터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곳엔 연두색 철망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빈터와 여름휴가철을 끝낸 계곡의 평상만이 이리저리 널려 있을 뿐이었다. 참가자들은 철망 옆으로 난 작은 통로로 내려가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부인과 함께 이번 ‘동행’에 참가했다는 성준경씨(49)는 “다산 선생이 춘천과 이렇게 관계가 깊은 줄 몰랐다”며 “그가 사색하며 걸어온 길을 공감하며 찾아와 뿌듯하다”고 말했다.

마침 구름 낀 하늘 사이로 부연 햇무리가 가을 산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 교수가 말했다. “햇무리가 멋지네요. 시가 한 편 나올 것 같아요.”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code=900306&artid=201610072041005#csidx713cc1e4312a330b41b1d533c8eed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