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새로운 점령자 미국 향해 돌직구
8·15 직후 통일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한 건 미국, 소련, 일본 등 외세 개입과 국내 정치지도자들의 과오 때문이었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민족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했던가에 대한 반성과 속죄는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없고, 정치판은 여전히 싸움질이다. 이치로 따진다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해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일본 통치 사례가 한국에도 적용되어야 했다. 그런데 필화사건을 통해서만 본다면 미군정은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미국을 몰랐던 정치세력
심하게 말하면 민족독립 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 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검열과 통제로 일관했다. 이에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 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다.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 미군정 비판 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 사건(1946년 5월)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중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에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년 9월7일)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고 공공연하게 보도했고,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년 6월)되는 데도 여운형은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 10만 군중 앞 ‘눈 감으라 고요히’ 낭독
지식인들에게는 이미 절망적인 파국상태였던 1946년 9월1일은 ‘국제청년 데이’였다. 1915년 10월3일 스위스 베른에서 창립한 이 기구는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조직으로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부터 9월1일로 고정해 실시해오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경찰의 탄압으로 성공적인 집회를 열 수 없었기에 8·15 이후 서울훈련원(전 동대문운동장,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선민주청년총동맹 주최로 오전 10시부터 개회,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여기에 특별 초대받은 시인은 유진오였다.
등단(1945년 9월)한 지 만 1년이 된 이 풋풋한 해방세대 시인은 학병동맹 사건 희생자 추모행사(1946년 2월25일)에서 ‘눈 감으라 고요히’를 낭독해 일약 유명해져 수재구제 문예 강연회(1946년 7월1일)에서는 시 ‘장마’, 국치 기념 문예 강연회(1946년 8월29일)에서는 ‘38 이남’을 읊는 등 단연 최고 인기였다. 여러 문화행사에서 축사는 평론가 이원조, 시 낭송엔 유진오로 정평이 나 있었다. 둘 다 큰 몸집에 우렁찬 목소리로 대중을 압도했다.
유진오가 이날 낭독한 시는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였다. 시인은 친일파들을 “옛날을 찾으려는// 저승길이 가까운 영감님들이/ 주책없이 중얼거리는 잠꼬대”로 몰아댄다.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변신한 것을 “왜놈의 씨를 받아/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머리를 숙여/ 생명과 재산과 명예의/ 적선을 빌고 있다”고 한다.
이어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 삼천오백만 불의 빚을 걸머지고/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무리들에게 짓밟혀/ 가난한 동족들이/ 여기 눈물과 함께 우리들 앞에 섰다”라고 새로운 점령자 미국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어느 놈이 우리의/ 분통을 터뜨리느냐?/ 우리들 젊음의 힘은/ 피보다도 무서웁다// 머얼리 바다 건너 저쪽에서도/ 피끓는 젊은이의/ 씩씩한 행진과 부르짖음이/ 가슴과 가슴들 속에 파도처럼 울려온다.”
■ 분단 문학사의 첫 필화사건 주인공
유진오는 9월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돼 분단 문학사의 첫 필화사건 주인공이 된다. 조선문학가동맹은 “인민의 계관시인”이란 찬사를 보내면서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10월 군사재판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청주에서 석방(1947년 5월26일)됐다.
중동중학(1936~1941) 시절 시인 김상훈과 도서반에서 활동했던 그는 음악·미술·스포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으며 특히 기타를 잘 쳐 부민관의 한 음악회에 찬조 출연할 정도였다. 그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자주 때려 경찰서에 들락날락해서 고등계 형사의 시달림을 받았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메이지 등을 전전하다가 형사들의 등쌀로 도쿄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서 동양문학 혹은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학원은 파시스트 치하에서도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한 실험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니시무라 이사쿠와 진보적인 문학인에 평화운동가인 요사노 아키코가 설립했다. 1943년 폐교당했다가 전후에 복구됐다.
출옥 후 유진오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화공작대 제1대 소속으로 경남지방을 순회(1947년 7월)하고 돌아온 이듬해인 1948년 행운을 맞았다. 시집 <창>(정음사)을 낸 데 이어 5월에는 결혼도 했으나 행복의 순간은 짧았다. 지리산 문화공작대장으로 입산(1949년 2월28일), 여순병란(麗順兵亂)사건의 주모자 김지회 부대 등에서 한 달간 머물다가 하산 명령으로 내려오던 중 남원지역 민보단(民保團)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 1949년 9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가 앞장서 안재홍·신익희 등의 탄원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 중 1950년 3월 전주로 이감됐는데, 그 석 달 뒤 6·25가 났다. 혼란 중 대전 이북 지역 수감자들은 전원 자유의 몸이 됐으나 남쪽 지역은 특수 신분자 전원이 처형됐다. 유진오는 6월29일 새벽 3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내 생존의 확인인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시나무 떨리듯 엄습해 오는 이 공포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고 싶으냐? 어째서 밤이면 두고 온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냐?”(유진오를 모델로 한 강준식 소설 <어둠을 찾아서>)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 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라고 절규했던 이 시인은 문학사에서 복원시켜야 할 제1호이기도 하다. 강준식은 소설에서 유진오의 전주 이감 자체가 시인을 살려내기 위해 집안에서 은밀히 활동한 것으로 풀이해 그 성공 가능성을 상상에 맡겨둔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민중조선’ 창간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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