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방장 스님 "진보는 진보를, 보수는 보수를 내려놔라"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vangogh@joongang.co.kr + 이메일받기
[중앙일보] 입력 2020.09.18 00:35 수정 2020.09.18 06:09 |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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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필요한 정신은 중도
우리 당 말고 전체 국민을 위해야
진영 패러다임 내려놓을 때 소통
모든 것은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가 필요하다. 그래야 소통이 되고 상생(相生)이 된다.”
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방장 원각(源覺ㆍ73) 스님을 만났다. 방장은 선원ㆍ강원ㆍ율원을 모두 갖춘 해인총림의 최고 지도자다. 선방 수좌로서 평생을 살아온 원각 스님은 한국 사회를 향해 선(禪)적인 안목으로 진단을 내렸다. 원각 스님이 주문한 두 가지는 ‘소통과 상생’이었다. 그걸 얻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방장의 처소인 퇴설당(堆雪堂)에서 원각 스님에게 그 물음을 던졌다.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해인사 약수암에 대입 시험 공부를 하러 왔다가 불교를 알게 돼 그 길로 출가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신이 뭔가.
“중도(中道)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각자의 생각에 갇혀 있다. 불교에서는 그걸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고집이라 부른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그걸 깨부수어야 한다. 그러니 ‘살불살조’의 정신이 절실하다.”
살불살조(殺佛殺祖)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뜻이다. 진리에 닿기 위해선, 그걸 가로 막는 ‘우상(偶像)’을 부수라는 의미다. 그 우상이 때로는 부처의 이름으로, 때로는 스승의 이름으로, 때로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가 ‘살불살조’를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중도로 돌아가야 한다. 중도가 뭔가. 흔히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중도는 근본 바탕을 뜻한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 그 사이에 중도가 있는 게 아니다. 중도라는 거대한 바탕 안에 진보와 보수가 들어가 있는 거다.”
결국 생각의 패러다임, 이념의 패러다임을 부수라는 말인가.
“그렇다. 그게 살불살조다. 그래야 출발선에 제대로 설 수가 있다. 그렇다고 진보를 하지 말고, 보수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걸 하기 전에 출발선에 제대로 서라는 말이다. 그 출발선이 뭔가. 중도라는 근본 바탕이다. 불교에서는 그걸 ‘본래 입장’이라고 부른다.”
원각 스님은 출가 후에 전국의 제방선원을 돌면서 수행했다. 원각 스님은 "성철 스님은 큰 산이셨다. 덕분에 불교의 맥을 알게 됐다. 당시에 불교와 과학을 함께 이야기하는 스님은 거의 없었다. 지월 스님은 '이 세상 안 태어난 셈 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고, 경봉 스님은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 바탕 멋지게 하라'고 하셨다. 송광사 구산 스님은 '춥고 배 고플 때 공부가 잘 된다. 환경이 열악할 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씩 꺼냈다.
진보 진영 혹은 보수 진영에게 ‘근본 입장’이란 뭔가.
“진보 정치인에게는 진보를 내려놓은 자리다. 보수 정치인에게는 보수를 내려놓은 자리다. 양쪽 다, 그 자리에 먼저 서야 한다. 정치라는 게 뭔가.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는 일 아닌가. 그러려면 지혜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가진 안보다 상대방 안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럼 그걸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 자세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근본 입장에 설 줄 알아야 한다.”
현실 사회에서는 진보도 필요하고, 보수도 필요하지 않나.
“진보를 하지 말고, 보수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온갖 것을 벗어난 근본 자리에 먼저 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진보를 택해도 좋고, 보수를 택해도 좋다. 그래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만약 근본 자리를 잃어버린 채 진보와 보수를 택하면 어찌 되겠나. 내 주장만 옳다고 고집하게 된다. 그럼 소통이 안 된다. 평행선만 달리게 된다. 끝없는 싸움만 남는다. 거기에 무슨 소통이 있고, 무슨 상생이 있겠나.”
원각 스님은 “모든 것은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깥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근본 바탕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깥에서 무언가를 꽉 붙들고 있을 때는 흐르지 못한다. 그걸 내려놓고 근본 바탕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뭐든지 잘 흘러야 한다. 우리 몸의 피도 잘 돌아야 하고, 산 속의 물도 잘 돌아야 하고, 세상의 돈도 잘 돌아야 한다. 돈이 돌지 못하고 숨도록 만들면 어찌 되겠나. 경제가 어려워진다. 그럼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진다.”
원각 스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다. 우리도 몸이 아프면 조심하지 않나. 인간도 조심하면서 지구를 깨끗이 하라는 신호다"라고 말했다.
해인사 방장실에는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종종 찾아온다. 이런저런 조언과 충고를 구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원각 스님은 “큰 지도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어떤 사람이 ‘큰 지도자’인가.
“큰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 우리 당만 위하는 정치 말고, 전체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진보의 틀이나 보수의 틀에 갇히지 않는 사람이다. 진보를 하든, 보수를 하든 근본 바탕에서 출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큰 마음을 쓰게 된다. 그래서 큰 정치가 가능해진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삶에서도 중도가 중요한가.
“물론이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마음의 근본 바탕으로 돌아가는 게 중도다. 그럼 삶이 편안해진다.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해탈하는 종교다. 도(道)를 깨닫는다는 게 뭔가. 내 본래의 마음자리를 회복하는 거다. 회복한 뒤에 그 바탕에서 생활하는 거다. 그럼 ‘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다. 박 아무개나 김 아무개, 그걸 나라고 생각하면 속는 거다. 그림자에 속는 거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가 왜 마찬가지인가.
“진보도 도구일 뿐이고, 보수도 도구일 뿐이다. 그건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를 내려놓고 근본 바탕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소통과 상생이 이루어진다. 거기서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이 나온다.”
해인사 퇴설당 마루에 원각 스님이 서 있다. 퇴설당은 경허 선사가 지은 당호이며, 당시에는 선방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퇴설당을 나섰다. 처마 아래 ‘퇴설당(堆雪堂)’이란 현판의 당호가 또렷했다. 거기에는 달마 대사가 소림굴에서 면벽 수행할 때, 제자로 받아주길 간청하며 눈이 허리까지 차도록 꿈쩍도 하지 않던 혜가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 못지 않은 간절함으로 던진 원각 스님의 당부가 산사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진보는 진보를 내려놓고, 보수는 보수를 내려놓아라. 근본 바탕으로 돌아가 큰 정치를 하라!”
합천=글·사진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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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 스님의 스승 혜암 선사 탄생 100주년
「
혜암 선사는 생전에 후학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정진을 강조했다. [중앙포토]
원각 스님의 스승은 혜암(慧菴, 1920~2001) 선사다. 생전에 ‘가야산 해인사 정진불’로 불리던 수좌였다. 성철 스님에 이어 해인사 방장(1993년)에 올랐고, 조계종 제10대 종정(1999년)도 역임했다. 올해는 혜암 선사 탄생 100주년이다. 인터뷰 차 찾은 해인사는 혜암 스님을 기리는 각종 행사로 분주했다. 혜암 스님은 후학들에게 던진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사자후로 유명하다. 늘 “공부하다 죽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수지 맞는 일이 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원각 스님은 “노장님(혜암 스님)께서는 평생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하루 한 끼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하시면서 용맹정진 하셨다.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참선해야 한다하시고, 원당암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재가자 선원으로 만들었다”며 “토굴에 사실 적에도 방사(방 공간)가 허용하는 한 대중과 같이 정진하시고 기회가 되면 대중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법문하셨다. 스님의 삶은 당신께는 엄격하시고 대중을 위해서는 보살행의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지난 5~6일 해인사에서는 ‘혜암선사 탄신 100주년 국제학술대회’가 열렸고, 10월 4일까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유묵유품 특별전 ‘빈가보장(貧家寶藏)’도 마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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