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taire

관용론( Traite sur la Tolerance)

이윤진이카루스 2020. 10. 28. 07:16

traite_sur_la_tolerance-icarus5000-icarus5000.hwp
0.45MB

번역문을 읽으면서 참고할 사항:

1. 참조 인터넷 사이트

원문 참조 인터넷 사이트:
http://pagesperso-orange.fr/dboudin/VOLTAIRE/Traite.htm#Si%20la%20Tolérance%20est%20dangereuse,%20et%20chez%20quels%20peuples%20elle%20est%20permise. http://hypo.ge.ch/athena/voltaire/volt_tol.html

영문본 참조 인터넷 사이트:
http://assets.cambridge.org/97805216/40176/sample/9780521640176ws.pdf에서
브라이언 매스터즈(BRIAN MASTERS) 및 런던 대학교(University of London) 퀸 메어리 및 웨스트필드 대학(Queen Mary and Westfield College)의 사이몬 하베이(SIMON HARVEY)의 공동 번역본을 참조하였으며, 국역본은 관용론, 송기형/임미경 옮김, 한길사로 인터넷 (유료) 사이트
http://www.booktopia.com/booktopia/mylibrary/mylibrary.asp#에서 참조하였고, 본문에 나오는 베르길리우스 시의 영문번역은 인터넷 사이트
http://www.romansonline.com/Src_Frame.asp?DocID=Vrg_ae01_16에서 Theodore C. Williams가 번역한 내용을 참조함.

2. 18세기의 저술이기 때문에 현대적 지식으로 판단하면 오류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판단력이 필요함.

 

 

관용에 관하여,
장 칼라스(Jean Calas)의 죽음에 즈음하여

1장

장 칼라스의 죽음에 대한 축약된 이야기


칼라스에 대한 살인은, 1762년 3월 9일 사법의 칼에 의하여 툴루즈(Toulouse)에서 저질러졌는데, 우리 시대와 우리 자손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가장 기묘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쟁이 야기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만 아니라 살인무기에 의하여 죽는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적을 죽일 수 있어서 스스로 방어하지 않고 죽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죽은 다수의 사망자들을 금방 잊는다. 위험과 이익이 동등한 곳에서는 경악은 그치고 동정심 자체도 줄어든다; 그러나 죄 없는 가장(家長)이 오해나 열정이나 광신의 손아귀에 들게 되면: 피고가 자신의 미덕만을 방어수단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재판관들이 실수로 자신을 죽이는 위험만 지니고 있다면; 재판관들이 판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면, 대중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각자는 자신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설립된 법정 앞에서 아무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못함을 사람들은 보며, 그리하여 모든 목소리는 복수를 요구하기 위하여 결집한다.
그것은, 이 기묘한 사건 안에서, 종교와 자살 그리고 근친 살해의 문제였다; 그것은 어느 부모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목 졸라 죽였는지, 형제가 형제를 목 졸라 죽였는지, 친구가 친구를 목 졸라 죽였는지, 그리고 재판관들이 죄 없는 부친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한 것이나 죄지은 모친이나 형제나 친구를 구해준 것에 대하여 자책할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장 칼라스는 예순 여덟 살로 40년 이상을 툴루즈에서 도매상인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한 가장으로서 그와 함께 생활한 모든 사람들에 알려졌다. 그는, 이단을 거부하여 자신이 적은 하숙비를 대주었던 한 명의 자식을 제외하고, 아내와 모든 자식과 동시에 신교도였다. 그가 자신의 아들 루이 칼라스(Louis Calas)의 개종을 허락했던 것과, 자신의 가정에 열성적인 가톨릭교도 하녀를 데리고 있어서 그 하녀가 그의 자녀 모두를 양육했던 것은, 사회의 결속을 파괴하는 이 터무니없는 광신으로부터 매우 동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장 칼라스의 아들 한 명인 마르크 앙트완느(Marc-Antoine)는 문학가였다: 그는 불안정하고 우울하고 포악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이 젊은이는 자신에게 맞지 않았던 사업에서 성공할 수도 없었고, 법조계에 들어가는 데 가톨릭 증명서가 필요했으나 자신은 그 증명서를 얻을 수도 없어서 자신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의도를 친구 한 명에게 알렸다; 그는 사람들이 자살에 대하여 쓴 글을 모두 읽고 자신의 결심을 확고히 했다.
마침내 어느 날 도박에서 자신의 돈을 잃고 그는 그날을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기 위한 날로 결정했다. 그의 가족의 친구 한 명과 자신의 친구인 툴루즈에서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자 도덕적 솔직함과 친절함으로 널리 알려진 19세의 젊은이인 라베스(Lavaisse)가 보르도(Bordeaux)로부터 그 전날 도착했다 (주석 1); 그는 우연히 칼라스의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 양친과 장남 마르크-앙트완느, 차남 피에르(Pierre)가 함께 식사를 했다. 점심 후에 그들은 작은 방으로 갔다: 마르크-앙트완느가 사라졌다; 마침내 젊은 라베스가 떠나고 싶어 했을 때 피에르 칼라스와 라베스는 위층에서 내려와서 가게 근처 밑에서 셔츠차림의 마르크-앙트완느가 문에 매달려 있고 그의 옷이 계산대 위에 접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셔츠는 흐트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머리카락도 잘 빗질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체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다 (주석 2).
법률가들이 설명하는 세부상항은 그 정도다: 양친의 고통과 절망은 기술(記述)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이웃에게도 들렸다. 라베스와 피에르 칼라스는, 정신없이 의사와 사법기관을 찾았다.
그들이 할 일을 하는 동안, 양친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 툴루즈 사람들은 그 집 주위에 몰려든다. 이 사람들은 미신적이며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와 동일한 종교를 지니지 않은 형제들을 괴물로 취급했다. 사람들이 앙리 3세의 죽음에 대하여 엄숙하게 하느님께 감사하고, 훌륭하고 선한 앙리 4세를 인정한다고 말할 최초 사람의 목을 자르겠다고 맹서한 것도 툴루즈 사람들이었다. 툴루즈라는 도시는 매년 행진을 하면서 횃불을 들어 2세기 전 4천 명의 이단자 시민들을 집단학살했던 날을 여전히 엄숙하게 기념한다. 시 위원회는 여섯 번을 결정을 내려 이 가증스러운 축제를 금지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툴루즈 시민들은 꽃의 축제처럼 그 축제를 항상 개최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어떤 광신도가 장 칼라스는 자신의 자식 마르크-앙트완느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소리쳤다. 이 외침은, 반복되어, 일순간에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죽은 이가 다음날 개종을 하기도 되어 있었다고 부언했다; 그의 가족과 젊은 라베스가 가톨릭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그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양친이 자신들의 아들이 개종을 원하자마자 아들을 암살해야 했던 것은 신교 가정에서 종교에 관한 문제라고 도시 전체가 믿게 되었다.
한 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심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랑그도크(Languedoc)의 개신교도들이 전날 모였다고 생각했다; 개신교도들이 다수의 목소리로 개신교의 사형집행인을 선정했다고; 그 선정이 젊은 라베스였다고; 그 젊은이는, 24 시간 안에 자신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 칼라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자식인 피에르가 친구이자 아들이자 형제를 목 졸라 죽이는 것을 돕기 위하여 보르도로부터 도착했다고.
툴루즈 시의 시장 다비드(David) 씨는, 함성에 흥분하여 신속한 처형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서, 법과 포고령에 위반하는 절차를 밟았다. 칼라스 가족과 가톨릭교도 하녀와, 라베스는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 절차 못지않게 사악한 계고장을 내놓았다. 그들은 더 멀리 나아갔다: 마르크-앙트완느 칼라스는 칼빈교도였기에 그가 자살을 기도했다면 그는 처형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신성모독에 항의했던 구역 사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 장엄한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를 쎙-에티엔느(Saint-Etienne) 성당에 매장했다.
랑그도크에는 참회자의 신도 모임이 네 곳 있는데 백색 모임과 청색 모임과 회색 모임과 흑색 모임이다. 그 모임은 수도자들이 쓰는 긴 고깔모자를 쓰는데, 시야를 자유롭게 하게 위하여 두 개의 구멍이 난 천으로 된 가면이 붙어있다: 지방 사령관인 피츠-제임스(Fitz-James) 공작을 자신들의 모임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공작은 거부했다. 백색 모임은 순교자와 같이 엄숙한 장례식을 마르크-앙트완느에게 제공했다. 어떤 가톨릭 성당도 순교자에 대한 축제를 더 장엄하게 경축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장엄함은 지독했다. 사람들은, 움직이도록 만든 해골을 장엄한 관대(棺臺) 위에 세웠는데, 그 해골은 한 손에 종려나무를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개종에 서명하면서 실제로는 부친의 사형에 서명하는 펜을 쥐고 있으면서, 마르크-앙트완느를 상징했다.
그래서 자살을 실행한 그에게는 시성식(諡聖式) 외에는 더 이상 아쉬울 게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서 기도를 할 참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을 빌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한 일을 설명하였다. 어느 수도승은 그의 이빨 몇 개를 빼내어 영구적인 유품으로 지녔다. 어느 열렬 여성교도는 가는귀가 먹었는데 자신이 종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중풍에 걸린 어느 사제는 구토제(嘔吐劑)를 먹은 다음에 치료가 병이 나았다. 기적 같은 말들은 서류로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를 쓴 사람은 한 젊은 툴루즈 사람이 며칠 밤을 이 새로운 성인의 무덤 위에서 기도를 하고도 자신이 간구하던 기적을 얻을 수 없어서 미쳐버렸다는 증언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판사들은 백색 참회자 모임에 속해 있었다. 이 순간부터 장 칼라스의 죽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의 처형을 우선적으로 준비한 것은 툴루즈 사람들이 4천명의 위그노 교도를 집단학살한 것을 매년 기념하는 기묘한 이 축제의 접근방식이었다; 1762년은 세속적인 해였다. 사람들은 이 엄숙한 축제의 기념물을 도시 안에 세웠다: 그것 자체가 사람들의 뜨거운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은 칼라스 가족의 몸을 부셔버릴 사형대가 축제의 가장 훌륭한 치장물이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하느님 자신이 그들의 성스러운 종교에서 희생되기 위한 이 사형수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20명의 사람들이 이 하느님의 말을 들었는데 거기다가 또한 격노한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이 그렇게 많은 진보를 이룩한 시대 안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한림원이 도덕의 향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저술을 하던 때였다! 광신이, 이성(理性)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래 충격을 받고, 더 많은 광증과 함께 이성아래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13명의 판사들이 재판을 끝내기 위하여 매일 모였다. 그들은 칼라스 가족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고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가 증거를 대신했다. 여섯 명의 판사는 장 칼라스와 그의 아들, 그리고 라베스를 거열형 시키고, 장 칼라스의 부인을 화형을 시키는 판결을 장시간 요구하였다. 보다 온건한 일곱 명의 다른 판사들은 적어도 심문하기를 원했다. 토론은 반복되었고 길어졌다. 판사들 중 한 명은 피고인들의 결백과 그 범죄의 불가능성을 확신하고 피고인들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변호하였다: 그 판사는 인도적 열정으로 엄격성에 대한 열정에 대항했다; 그 판사는 칼라스 가족을 위한 공개적인 변호사가 되었는데, 툴루즈의 모든 가정에서는 남용된 종교의 지속적인 함성이 불행한 칼라스 가족들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한 명의 다른 판사는, 과격하기로 유명했는데, 전자(前者)가 칼라스 가족을 변호하는 데에 열성을 보인 것만큼 칼라스 가족에 대하여 과격하게 말하였다. 마침내 반목이 너무나 커서 두 판사는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재판권을 부인했다; 두 판사는 시골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묘한 불운에 의하여, 칼라스 가족에게 호의적인 판사가 자신의 재판권 박탈을 고수하는 교양을 지닌 동시에 다른 판사는 돌아와서 자신이 판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것이 거열형을 선고하는 목소리였는데 그 이유는 많은 토론을 거친 후에 반대편에 섰던 여섯 명의 판사 중 한 명이 재판부에 가장 엄한 형벌을 내놓아서 5 대 8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속살인과 관련되어 가장(家長)에게 가장 잔혹한 형벌을 가하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전대미문인 범죄(주석 3)에 대한 증거가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판결이 만장일치였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사한 사건 안에서 최소한의 의심은 사형선고서에 서명을 하려는 판사를 두려워하게 만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닌 이성의 허약함과 우리들이 지닌 법률의 불충분함이 항상 느껴진다; 그러나 한 목소리가 지닌 위압감이 시민을 바퀴에 놓고 압살당하도록 만들 때보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참혹함을 더 잘 발견할까? 아테네에서는 사형선고를 하기 위해서는 과반 50명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 우리의 지식이 매우 효과가 없다는 것, 그리스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했고 더 인자했다는 것.
예순 여덟 살의 노인으로 붓고 약한 다리를 오랫동안 지녔던 장 칼라스가, 스무 여덟 살로 평균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는 있던 자신의 아들을 혼자서 교살하여 문에 매달았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살인사건에서 장 칼라스가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다른 아들인 피에르 칼라스와 라베스와 그리고 하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었다. 그들은 이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저녁에 한 순간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상 역시 다른 상상만큼 터무니없었다: 그 이유는,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하녀가 어떻게 위그노교도들이 자신이 기른 젊은이를 자신의 종교를 사랑한다고 처형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기 친구가 했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개종을 알지도 못하는 라베스가 그 친구를 교살하기 위하여 보르도로부터 일부러 왔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들의 목을 조를까? 어떻게 그들 모두의 힘을 합친 것과 같은 힘을 지닌 젊은이를 그들이 함께, 길고도 격렬한 격투 없이, 이웃 사람들의 귀에 들렸을 무시무시한 단말마도 없이, 반복되는 타격소리도 없이, 타박상도 없이, 옷도 찢어지지 않고 교살했겠는가?
그 존속살인 사건이 저질러질 수 있었다면, 피고인 모두가 한 순간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 모두가 동등하게 유죄임은 분명했다; 그들이 유죄가 아님은 분명했다; 부친 혼자 유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은 부친이 바퀴 위에서 죽을 것을 선고했다. 판결의 동기는 나머지 것들만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 칼라스의 처형을 결정했던 판사들은, 이 허약한 늙은이가 고문을 견딜 수 없어서 고문자의 고문 아래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할 것이고 공모자들의 범죄도 고백할 것이라고 다른 판사들을 설득했다. 이 늙은이가 거열형을 당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증언하여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이 판사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을 때 판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판결과 반대가 되는 두 번째 판결을 내려 모친과 그녀의 아들 피에르와 젊은 라베스, 그리고 하녀를 석방했다; 그러나 판사 중 한 명이 이번 판결이 앞의 판결을 부정하여, 그들 스스로를 유죄로 만들며 피고인 모두가 그들이 존속살인이 일어났다고 상상하는 시간 안에 모두 함께 있어서 사형을 면한 모든 죄인들의 석방은 결정적으로 가장(家長)의 무죄를 증명한다고 지적하여, 판사들은 아들인 피에르 칼라스를 귀양 보내기로 판결하였다. 이 귀양 판결도 다른 모든 판결과 동등하게 무효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피에르 칼라스가 존속살해에 유죄이거나 무죄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유죄라면 부친처럼 바퀴 위에서 죽어야 한다; 그가 무죄라면 그를 귀양을 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판사들은, 부친이 당한 처형과 그 부친이 죽으면서 남긴 감동적인 성스러움에 겁을 먹고, 구해주려는 것이 새로운 사법훼손이 아닌 것인 양 그 아들을 살려주는 것을 믿도록 내버려 두면서, 자신들의 명예를 구하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판사들은 자신들이 불행히도 저지른 불의 이후에 이 불쌍하고 대책이 없는 젊은이를 귀양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큰 불의는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피에르 칼라스가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그의 부친처럼 다루겠다고 피에르 칼라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 젊은이가 (주석 4) 맹서로써 증언하는 것이다.
피에르 칼라스는, 도시를 떠나면서, 자신을 툴루즈로 돌아오게 만든 개종 전문가인 수도원장 만났다; 그는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원에 감금되었고 거기서 가톨릭의 모든 의무를 수행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고, 그의 부친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그리고 그들이 복수를 했다고 믿었던 그 종교는 만족한 듯이 보였다.
딸들은 모친에게서 강제로 떨어졌다; 딸들은 어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모친은, 남편의 피로 거의 젖고, 죽은 첫아들을 팔에 안았었고, 다른 아들은 귀양을 떠나는 것을 보고, 딸들은 빼앗기고, 자신의 재산은 차압당한 채, 식량도 없이 희망도 없이 과도한 자신의 불행으로 죽어가면서 세상에 홀로 남았다. 몇몇 사람이, 이 가공할 사건의 모든 상황을 성찰한 다음에, 그 상황에 매우 충격을 받고 홀로 남겨져 있던 칼라스 부인에게 왕에게 엎드려 사법 정의를 요구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당시 그녀는 스스로 지탱할 수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인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한 지방으로 이주하였기에, 파리(Paris)라는 도시 이름만으로도 그녀는 겁을 먹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틀림없이 랑그도크의 주도(主都)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남편에 대한 기억에 복수를 하겠다는 의무감이 그녀의 허약함을 이겼다. 그녀는 죽을 각오를 하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자신에 대한 환영과 협조와 눈물을 발견하고 놀랐다.
파리에서는 아무리 광신이 크다 할지라도 이성(理性)이 광신보다 우세했고, 대신에 지방에서는 광신이 거의 항상 이성보다 우세했다.
파리 법원의 유명한 변호사인 드 보몽(de Beaumont) 씨는 우선적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아서 변호사 15명의 서명을 받은 의견을 내놓았다. 드 보몽 변호사 못지않게 말을 잘하는 루와조(Loiseau) 씨는 칼라스 가족을 변호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국무회의의 변호사인 마리에트(Mariette) 씨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는 사법적 탄원서를 작성했다.
법과 결백을 옹호하는 이 3명의 고상한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변호서 판매수익을 미망인에게 주었다 (주석 5). 파리 시민들과 전 유럽인들이 감동을 받아 동정심을 갖고 이 불행한 여인에게 정의(正義)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판결은 국무회의에 의하여 서명되기 오래전에 대중들에 의하여 발표되었다.
동정심은,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으로 인하여 동정심을 배제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불행을 간과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한층 더 모질게 만들 수 있는 습관에도 불구하고, 정부에까지 파고들었다. 딸들은 모친에게 돌아갔다. 모친과 딸들은 상복을 입고 온통 눈물을 쏟았는데, 그 모습으로 인하여 판사들까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 가족에게는 아직도 몇 명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독실한 신자로 불리던 몇 명의 사람들은 (주석 6), 랑그도크 출신의 판사 8명이 오판을 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결백한 늙은 칼빈교도를 바퀴 위에서 사형당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과감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다음 표현을 사용했다: “칼라스 가족보다 판사가 더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부터 칼라스 가족은 판사직의 명예를 위하여 희생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판사들의 명예가, 다른 사람들의 명예처럼, 자신들의 오판을 고치는 데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사람들은 추기경들의 조언들 받는 교황도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일하게 툴루즈의 판사 8명이 무오류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는 툴루즈의 판결이, 심지어 특별조치가 그 판결이 툴루즈 법원 안에서 무효화되는 것을 막았을지라도, 유럽 전역에서 무효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악할 사건의 상황은 그러했는데, 당시 그 사건으로 인하여 공정하지만 합리적인 사람들에게서 용서에 관하여, 관용에 관하여, 자비에 관하여 몇 가지 성찰을 대중에게 제시할 의도가 태어났는데, 우트빌(Houteville) 수도원장은 그 사건에 관한 자신의 과장되고 왜곡된 장광설 속에서 기괴한 독단(獨斷)이라고 부르지만 이성(理性)적으로 자연의 속성이라고 불렸다.
툴루즈의 판사들이, 군중의 광신에 휩쓸려, 결백한 가장을 바퀴 위에서 사형당하도록 만들었는데 유례가 없는 일이거나; 혹은 가장과 그 아내가 이 존속살해 사건에서 다른 아들과 죽은 장남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장남을 교살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이 경우든 저 경우든, 최고로 성스러운 종교의 악용이 커다란 범죄를 낳았다. 그러므로 종교가 인자해야 하는지 혹은 잔인해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인간의 이익과 관련된다.


2장

장 칼라스 처형의 결과


백색 참회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는, 한 가족의 철저한 파멸의, 그 가족의 이산(離散)의, 그리고 불의에게만 이어져야 했지만 처형된 자에게 이어진 수치의 원인이었다면; 우리들의 야만적인 관행에 따라서, 사형수레에 싣고 끌고 갈 자살자를 성인(聖人)처럼 경축한 백색 참회자들의 이 성급함으로 인하여 도덕적인 가장(家長)을 바퀴 위에서 죽었다면; 이 불행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백색 참회자들은 여생동안 실제로 참회하여야 한다; 백색 참회자들과 판사들은 눈물을 흘려야 하지만, 길고 흰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자신들은 눈물을 감출 가면을 써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신도 모임을 존경한다: 신도 모임들은 교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임들이 국가에 가져올 수 있는 어떤 커다란 이익이, 역시 그 모임들이 낳은 지독한 해독과 동일할까? 그 모임들은 랑그도크에서 우리가 위그노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가톨릭교도들을 지원하는 열성으로 의하여 설립된 듯하다. 우리에게는 증오하고 박해하기 위한 많은 종교가 있지만 사랑하고 지원할 종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제를 증오하는 맹서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말을 더 잘하고 지식이 더 많은 법관 한 명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모임 안에서 유령을 경험하는 관습이 기술(技術)과 체제로 환치되었던 수공업자들과 귀족들이 만든 예전 모임처럼, 이 신도 모임들이 광신자들에 의하여 통제되었다면 어떨까? 그 신도 모임 안에 명상의 방이라고 불리는 어두운 방들을 설치하고 그 방에 뿔과 발톱이 달리 악마들과, 불구덩이와, 십자가와 단검을, 그림 위에 예수라는 성스러운 이름과 함께 그려 넣는다면 어떨까? 이미 홀린 눈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감독자에게 복종적인만큼 불타오르는 상상력에게, 얼마나 장관일까?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을 따름이지만 신도 모임들이 위험했던 시절이 있었다. 수사(修士)들과 채찍질 하는 고행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가톨릭교도동맹은 그와 같은 단체로 시작했다. 왜 그렇게 다른 시민들로부터 구분되어야 할까? 그들은 스스로 더 완벽하다고 믿는가? 그것 자체가 다른 국민들에게 모욕이다. 그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도 모임에 들기를 원하는가? 수도승의 고깔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눈으로 두 개의 작은 구멍을 낸 온 유럽의 모습은 가관일 것이다! 하느님이 몸에 맞는 옷보다 이런 의복을 선호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가? 훨씬 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의복은 파당(派黨)의 유니폼인데, 그들은 적(敵)에게 무기를 들라고 경고한다; 그 의복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종의 내전(內戰)을 촉발할 수 있으며, 광신도들이 미친 것만큼 왕과 장관들이 현명하지 않다면 아마도 그런 종류의 내전은 살인적인 폭동으로 끝날 것이다.
기독교도들이 교리에 대하여 논쟁한 이래 사람들은 그 대가를 충분히 알고 있다: 피가 4세기부터 오늘날까지 흘러, 사형대에 쏟아지고 전쟁터에서 흘렀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혁명의 논쟁이 촉발한 전쟁과 공포의 한계에 접하고, 프랑스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본다. 아마도 그렇게 많은 비극에서 축약되고 그 비극을 정확하게 그린 그림이 교양 없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들 것이고, 매우 성숙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3장

16세기 종교혁명의 이념

문예 부흥기에 사람들의 정신이 계몽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악습에 대하여 불평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불평이 합당했다고 인정한다.
교황 알렉산더(Alexandre) 6세는 교황직을 공개적으로 돈을 주고 샀으며, 그의 사생아 다섯 명이 교황직을 이용해 이익을 챙겼다. 그의 아들인 보르기아(Borgia) 공작 추기경은 자신의 아버지인 교황과 연합하여 영지를 빼앗기 위하여 비텔리(Vitelli), 위르비노(Urbino), 그라비나(Gravina), 올리베레토(Oliveretto) 가문 및 수많은 다른 영주들을 죽였다. 율리우스(Jules) 2세는 동일한 생각으로 흥분하여 루이 12세를 파문하고 그의 왕국을 처음 정복한 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등에 갑옷을 걸치고 이탈리아의 일부를 불태우고 피로 적셨다. 레오(Léon) 10세는 자신의 쾌락에 돈을 대기 위하여, 사람들이 시장에서 생필품을 파는 것처럼, 면죄부를 거래했다. 그렇게 많은 강도짓에 반발하여 분기하였던 사람들은 적어도 도덕에서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이 정치에서 우리들의 판단과 반대로 실수를 저질렀는지 보자.
예수-그리스도가 첫해의 수입도 보관해둔 물품도 요구하지 않았고, 이 세상을 위하여 특별 면제권을 그리고 저 세상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지도 않아서 낯선 지배자에게 이런 것 모두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로마에 지불되는 첫해의 수입과,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특별면제권에 매년 5십만 프랑이 드는 때, 프랑수아(François) 1세 이래 250년 동안 1억 2천 5백만 프랑을 우리가 지불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돈 가치의 다양한 환율을 추정하여 이 합계 금액은 오늘날 약 2억 5천만 프랑이 된다. 그러므로 신교도들이 후세대가 놀랄 기묘한 이 부담금의 폐지를 제안하면서 왕국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들이 나쁜 백성이라기보다는 훌륭한 회계가들이었음을 우리들은 불경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인정할 수 있다. 그들은 희랍어를 알고 있으며 고대시대를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음을 덧붙이자. 그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꺼운 야만성 속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인간 정신의 발전을 우리가 그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숨기지 말자.
그러나 우리가 의심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던 연옥을 그들이 부인했기에; 우리가 숭배해야 하지만 역시 이익을 가져다주는 성보(聖寶)를 그들이 숭배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그들이 매우 숭배 받는 교리를 공격했기에 (주석 7), 사람들은 그들을 화형 시키겠다고 우선 대답했다. 독일에서는 왕이 그들을 보호하고 고용했는데, 파리에서는 왕이 행렬의 앞머리에서 행진하고 행진 후에는 이 불행한 사람들 몇 명이 처형당했다; 처형 방법은 이러했다. 그들은 곧은 나무 위에서 흔들리는 긴 들보 끝에 매달렸다; 그들의 발밑에 큰 불을 지피고, 그 불에 그들을 넣었다 꺼냈다 번갈아 하였다: 그들은 차츰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서 마침내 야만성이 발명해낸 가장 길고도 가장 잔혹한 처형에 의하여 죽었다.
프랑수아 1세의 죽음 바로 전, 프로방스(Provence) 법원의 판사 몇 명이, 메렝돌(Mérindol)과 카브리에르(Cabrières)의 주민들에게 반감을 지닌 사제들의 사주를 받아, 자신들이 판결한 이 지역 사람 19명의 처형을 실행하기 위하여 왕에게 군대를 요청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6천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은 30곳의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사람들은,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틀림없이 보두아(Vaudois: 발드파: 계곡파[溪谷派]) 사람으로 태어난 잘못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죄였다. 그들은 3백 년 동안 황무지에서 살면서 믿을 수 없는 노력으로 자신들이 개간하여 비옥하게 만든 산악 위에 정착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그들의 삶은 세상의 태고의 순박함을 지녔다. 이웃 마을들은 그들이 팔려고 하던 과일 거래로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은 법률 소송이나 전쟁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울타리에서 살해되는 탈주 동물들처럼 살해당했다 (주석 8).

그러나 자신의 잔인성보다 자신의 애정행각과 불행으로 더 유명한 영주(領主)인 프랑수와 1세가 죽은 이후, 수많은 이교도 처형에서 무엇보다도 뒤부르(Dubourg) 법원판사의 처형과 마침내 바시(Vassy)의 학살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교파는 화형을 당하고 사형집행의 칼의 맞으며 확산되었다; 인내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들은적(敵)의 잔인성을 모방하였다: 9차례의 내전(內戰)이 프랑스를 살육으로 채웠다; 전쟁보다 더 살육적인 한 평화시대에 쎙-바르텔레미(la Saint-Barthélémy) 학살이 일어났는데, 범죄사에서 유례가 없는 학살이었다.
가톨릭교도동맹은 도미니쿠스 교단의 수도승과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 교단에 속하는 살인자의 손을 빌어 앙리 3세와 앙리 4세를 암살하였다. 인류애와 관용, 그리고 양심의 자유가 사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인류애와 관용과 양심의 자유가 그런 비극을 초래했는가?


4장

신앙의 자유가 위험한 것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 그 자유가 허용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나쁜 프랑스어로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들에게 우리가 부성적(父性的) 관용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리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자르나크(Jarnac)와 몽콩투르(Moncontour)와 쿠트라(Coutras)와 드뢰(Dreux)와, 쎙-드니(Saint-Denis)와 기타 등등의 전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그들을 나쁘게 대했을 때 그 사람들은 항거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잘 대할 때도 그들은 항거할 것이다.”
나는 내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높은 위치에 예정된 사람들에게, 잔인성이 탄생시킨 동일한 항거를 부드러움이 초래하는지를 사람들이 실제로 두려워해야 하는지 성숙하게 검토하기를, 감히 요구할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발생한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도 틀림없이 발생하는지를; 시대와 견해와 도덕은 항상 그대로인지.
위그노교도도 의심할 바 없이 우리처럼 광신에 취해있었고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현 세대는 그들의 조상 세대만큼 야만적인가? 시대와, 그렇게 많이 진보한 이성과 훌륭한 책과 사회의 평화로움이 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도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조금도 미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거의 전 유럽이 약 50년 동안 면모를 바꾸었음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가?
풍습이 순화되면서, 통치는 도처에서 강화되었다. 다양한 상비군으로 뒷받침을 받는 경찰력으로 인하여 무정부적 시대의 부활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 무정부적 시대에 칼빈교도들은 파종시기와 수확시기 사이에 서둘러 파당을 만들었던 가톨릭 농부들과 싸움을 벌였다.
다른 시기에는 다른 고찰이 필요하다. 소르본느 대학이 예전이 오를레앙의 처녀를 (잔다르크) 화형시키기 위하여 청원서를 내놓았다 하여, 그리고 앙리 3세가 통치권으로부터 추락하였다고 선언하여 앙리 3세를 파문했고 위대한 앙리 4세를 추방하였다 하여 오늘 소르본느 대학을 파괴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우리는 이 광기의 시대에 동일한 폭력을 저지른 왕국의 다른 대학들을 심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의일 뿐만 아니라; 1720년에 흑사병을 겪었다는 이유로 마르세유 주민 모두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 있기도 할 것이다.
1585년에 식스투스 5세(Sixte Quint)가 자신의 군주에게 항거하여 무기를 든 프랑스인들 모두에게 9년간의 면죄부를 부여했기 때문에 샤를르 5세(Charles Quint)의 군대처럼, 우리는 로마를 약탈할 것인가? 그리고 유사한 폭력을 로마가 영원히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을까?
독단적인 정신과 왜곡된 기독교의 악용을 불어넣는 광기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영국에서, 그리고 심지어 화란에서 많은 피를 뿌렸고 많은 파멸을 초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의 차이점은 이 나라에서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유대인, 가톨릭교도, 그리스인, 루터교도, 칼빈교도, 재세례교도, 소시니언교도, 메노교파, 모라비아교파, 그리고 다른 많은 교도들이 이 지역에서 형제처럼 살며 사회의 복리에 동등하게 기여한다.
화란에서는 사람들은 운명예정설에 관한 고마르(Gomar)의 논쟁으로 (주석 9) 인하여 재상의 목이 잘리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런던에서는 사람들이 전례와 전례 복장에 관한 장로교파와 감독교파의 논쟁이 사형대 위에서 왕의 피가 쏟아지게 만들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주석 10). 인구가 많고 부유해진 아일랜드는 가톨릭교도 시민들이 두 달 동안 개신교도 시민들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을, 개신교도 시민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것을, 모친을 교수대에 매달고 모친의 목에 딸들을 매달아 함께 죽는 것을 보는 일을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반쯤 자란 태아를 꺼내 돼지와 개에게 먹으라고 던져주는 것을; 묶인 죄수의 손에 단검을 쥐어주어 그 죄수의 팔이 죄수의 아내나 부친이나 모친이나 딸을 찌르도록 하여 상호 친족살해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모두를 죽이면서 모두가 죄가 있게 만드는 것을. 이것이 거의 동시대인이자 아일랜드의 장교인 러핀-소이라스(Rapin-Thoiras)가 보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료(史料)와 영국의 역사가 보고하는 것이고, 틀림없이 모방 범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자매간인 철학만이 미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피로 물들였던 손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리고 인간은 정신은 만취상태에서 깨어나면서 광신이 자신을 몰고 갔던 폭력을 보고 경악했다.
우리 자신은 프랑스에서 루터교가 가톨릭보다 우세한 풍요로운 지방을 가지고 있다. 알자스(Alsace) 대학은 루터교도의 손안에 있다; 그들은 그 지방재정의 한 부분을 나누어 갖는다: 그 지방이 우리 왕들에게 속한 이후 최소한의 종교전쟁도 그 지방의 평안을 방해하지 않았다. 왜? 그것은 어떤 사람도 그 지방에서 박해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괴롭히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모든 마음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군주의 종교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다수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직위나 명예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가톨릭이, 왕위 요구자 정당에 붙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직위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은 심지어 세금을 두 배로 낸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면에서 시민들이 지닌 모든 권리를 향유한다.
프랑스의 몇몇 주교들은 자신들의 교구에 칼빈교도가 있는 것이 자신들의 명예도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도 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 주교 사회는, 자신들의 태생에 합당한 고귀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도덕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인자하고 관용적인데, 그것은 그들이 받아야 할 합당한 평가이다; 그들은 도망친 교구민들이 다른 지역에서 확실히 개종하지 않을 것과, 자신들의 사제들에게로 돌아와서 가르침을 받고 사제들의 본보기에 의하여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개종시키는 명예가 있을 것이고, 세속적 권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시민들이 많을수록 고위성직자의 땅은 더 많은 이익을 낳을 것이다.
폴란드의 바르미(Varmie) 주교는 재세례교도 한 명을 소작인으로, 그리고 소시니언교도 한 명을 집사로 두었다; 한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아들을 15살이 되어서야 세례를 했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처형하라는 제안을 주교는 받았다: 주교는, 그들이 저 세상에서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자신에 매우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우리들의 작은 영역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우리의 지구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다른 종교를 가진 20개 민족을 평화롭게 다스린다; 20만 명의 그리스 정교도들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다; 이슬람 법률학자는 심지어 그리스 정교의 총주교를지명하여 황제에게 알현시킨다; 여기서는 로마 가톨릭의 총대주교도 허용된다. 술탄은 로마 가톨릭 주교들을 몇 명 그리스 섬에 임명하며, 그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들에게 키오스(Chio) 섬 안에서 자신들의 옛날 관습과 자신들의 세세한 의식(儀式)에 따라서 주교로서 살 것을 명한다.” 이 제국은 제임스 2세파와 네스토리우스교도와 단성론자(單性論者)들로 가득 차 있다; 콥트인도 있고, 성 요한의 기독교인도 있고 유태인도 있고 불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도인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사료(史料)에는 이들 종교에 의하여 사주를 받은 반란이 언급되지 않는다.
인도로, 페르시아로, 타타르 지방으로 가보라, 여러분은 그곳에서 동일한 관용과 동일한 평온을 발견할 것이다. 피터 대제(Pierre le Grand)는 자신이 관할하는 거대한 제국 안에서 모든 종파를 선호했다; 그 제국에서 상업과 농업은 발전하였고, 정치사회는 그로 인하여 고통을 겪지 않았다.
중국은 알려진 4000년 이상 동안 노아일족의 신앙인 하나의 신(神)이라는 단순한 종교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은 부처라는 미신을 허용하고, 사법적 감시가 없었다면 위험했을 많은 불교승려를 허용한다. 아마도 중국에서 최고로 현명했고 관용적이었던 옹정제(雍正帝: Young-tching)가 예수회교도를 추방했던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옹정제가 관용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예수회교도들이 관용적이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회교도들 자신이, 자신들 저서 진귀한 편지(Lettres curieuses) 속에서, 이 훌륭한 군주가 그들에게 한 말을 보고한다: “나는 당신들의 종교가 불인함을 안다; 나는 당신들이 마닐라와 일본에서 한 짓을 안다; 당신들은 부왕인 나의 부친을 속였고, 내 자신을 속일 기대는 하지도 말라.” 그 황제가 예수회교도들에게 했던 말을 모두 읽으면 가장 현명하고 가장 인자한지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온도계와 기력계(汽力計)를 궁정에서 선보인다는 구실 아래, 이미 군주의 분노를 자아냈던 유럽의 물리학자들을 그 황제는 실제로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읽었다면, 우리의 가톨릭교도동맹 시대와 화약음모 시대를 알았다면, 이 황제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세상의 끝에서 그 황제의 나라로 파견된 예수회교도들의, 도미니쿠스회의, 카푸친회(capucins)의, 세속적 사제들의 불합리한 논쟁에 대하여, 정보를 듣는 것으로 황제에게 충분했다: 그들은 진리를 설교하러 왔다, 그리고 서로 저주한다. 황제는 그러므로 이 외국인 훼방꾼들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나 친절하게 그들을 황제는 거부했던가! 그들의 귀국여행을 위하여, 여행 중에 그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황제는 그들에게 부친과 같은 배려를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추방은 심지어 관용과 인자함의 본보기였다.
일본인들은 (주석 12) 인류 최고로 관용적이었다: 일본제국 안에는 12가지의 평화로운 종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예수회는 13번째 종교를 만들러 왔지만, 곧 다른 종교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서 다음과 같은 결과가 초래되었다: 가톨릭교도동맹이 일으킨 내전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무서운 내전이 그 나라를 황폐화시켰다. 마침내 기독교는 핏물에 잠겼다; 일본인들은 나머지 세계에 대하여 일본제국의 문을 닫았고, 자신의 섬에서 영국인들이 추방했던 짐승들과 유사한 사나운 짐승으로 우리를 보았다. 우리들에 대하여 필요를 느끼지 않던 일본인들에 대하여 우리가 필요를 느끼어, 콜베르(Colbert) 장관이 일본제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한 것은 헛된 일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완고해진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우리 유럽대륙 전체는 편협함을 선언해서도 안 되고 실행해서도 안 됨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눈을 지구 반대편으로 돌려보자; 현명한 로크(Locke)가 입법했던 미국의 캐롤라이나 주를 보라: 법에 의하여 인정되는 공식적인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7명의 가장(家長)이면 충분하다; 이런 자유로 인하여 혼란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하느님이시여, 프랑스로 하여금 그 본보기들을 본받도록 만들기 위하여 그 본보기를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종교적 자유가 극단적으로 허용되어서 가장 가벼운 불화도 뒤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보고한다; 그러나 새로 생겨나는 식민지 안에서 매우 유용하고 매우 훌륭한 것은 오래된 왕국에서 합당하지 않다.
놀림감으로 퀘이커교도(Quakers)라고 지칭된, 그리고 아마도 우스운 관습에 의하여 그렇게 도덕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헛되이 평화를 가르쳤던, 원시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숫자가 10만 명에 이른다; 그들 스스로 만든 행복한 나라 안에서 불화나 논란은 알려지지 않으며, 언제나 사람들은 형제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그들의 도시 이름 필라델피아만도 아직 종교적 관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이자 질책이다.
결국 이 관용은 내전을 촉발하지 않았다; 불관용은 땅을 살육으로 뒤덮는다. 두 명의 어머니 사이에서, 자신의 아들의 목이 잘리기를 바라는 모친과 그 아들이 생존한다는 조건으로 그 짓을 그만두는 모친 사이에서, 이제 사람들은 결정을 하다니!
나는 여기서 국가의 이익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와 같이 신학(神學: la théologie)을 존중하면서, 이 지점에서 나는 사회의 물질적 및 도덕적 행복만을 주시하고 있다. 나는 모든 공정한 독자들에게 이 진리들을 숙고하고 바로잡고, 그리고 확대해 주기를 간청한다. 자신의 사상을 서로 주고받는 성실한 독자들은 저자보다 항상 훨씬 더 멀리 간다 (주석 13).


5장

어떻게 관용은 수용될 수 있는가

계몽되어 관용적인 각료, 인자하고 현명한 고위성직자, 자신의 이익은 많은 백성에게 달려있고 자신의 영광은 그 백성들의 행복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영주는 이 조악하고 불완전한 글에 눈을 돌릴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글은 그들이 지닌 합당한 지혜에 의하여 결점이 고쳐질 것이다; 그들은 자문한다: 더 많은 근면한 사람들에 의하여 경작되어 풍요로워진 땅과, 늘어난 수입과, 더 번성하는 국가를 보기 위하여 나는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웨스트팔리아(Westphalie) 조약의 평화가 종국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증하지 않았더라면, 독일은 가톨릭교도와 루터교도와 청교도와 재세례교도가 서로 살인을 하여 해골로 뒤덮인 황무지일 것이다.
보르도(Bordeaux)와 메츠(Metz)와 알자스(Alsace)에는 유태인들이 있다; 루터교도와 몰리우니스트(molinistes)와 얀센교도(jansénistes)가 있다: 우리는 칼빈교도들을 용인하여 가톨릭교도들이 런던에서 용인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조건에 포함시킬 수 없을까? 종파가 많을수록 그 종파는 덜 위험해진다; 다양성이 종파를 부드럽게 만든다; 모든 종파는, 소란한 집회와 언어적 오남용과 반역을 금지하여 항상 강제력에 의하여 효력을 발휘하는 공정한 법률에 의하여, 통제를 받는다.
외국에서 커다란 재산을 모아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몇몇 가장(家長)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법과 그들이 한 결혼의 유효성이 보호되기만을 요구하고, 자녀들의 지위에 대한 보장과 부친에 대한 상속권과 자신들이 데리고 오는 사람들에 대한 합법성만을 요구한다; 그들은 공식적 교회에 대한, 지방 관리직에 선출될 권리에 대한, 고위직에 선출될 권리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톨릭교도들은 그런 권리보장을 런던에서도 또 다른 몇몇 지방에서도 받고 있지 않다. 그것은 커다란 특권과 확보된 지위를 어떤 종파에게 부여하는 문제가 아니라, 평화로운 사람들을 살아가게 내버려두는, 그리고 예전에는 아마도 필요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칙령을 완화하는 문제이다. 각료직에 그 각료직이 할 수 있는 일을 지적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각료직에 간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불행한 사람들을 유용하게 만들어 그들이 위험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권력의 지지를 받는 각료직과 국무회의의 성찰로 인하여, 많은 다른 국가들이 매우 행복하게 사용하는 이 방법들은 매우 쉽게 발견될 것이다.
칼빈교도들 가운데도 아직 광신도들이 있다; 그러나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얀센파 중에 광신도들 더 많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성-메다르(Saint-Médard)의 광신도 잔재는 국가 안에서 무시되지만, 칼빈주의적 예언자 잔재는 몰살당했다. 광신자들의 숫자를 줄이는 훌륭한 방법은, 그 방법이 남아있다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람을 계몽시키는 이성적 통제에 이 정신병을 맡기는 것이다. 이 이성은 부드럽고, 이 이성은 인자하여, 이 이성은 관용을 고취하며, 이 이성은 불화를 잠재우며, 이 이성은 미덕을 강화하며, 이 이성은 법을 유지하는 강제성보다 훨씬 더 법 준수를 순화한다. 그리고 성실한 사람들 모두가 오늘날 광신에 던지는 조롱을 우리는 무시할 것인가? 이 조롱은 종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방종에 대한 강력한 억제책이다. 지나가 시대는 그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국가가 도달한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 공간에 대한 두려움에, 본질에, 그리고 사물에서 보편성에 반대가 되는 교설을 가르쳤던 사람들에게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유럽에서 우리는 마법에 관한, 그리고 거짓 마법서와 진짜 마법사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한, 1백 권 이상의 원리연구서를 가지고 있다. 추수에 해로운 메뚜기와 곤충을 파문시키는 일이 실제로 흔히 행하여졌으며 아직도 몇몇 기도서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관행은 끝났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법사와 메뚜기를 거론하지 않는다. 이 심각한 광신의 사례들은, 예전에 매우 중요했는데, 수없이 많다: 다른 광신의 사례들이 때때로 발생한다. 그러나 그 사례들이 결과를 내었을 때, 사람들이 그 사례들에 질렸을 때, 그 사례들은 끝장이 났다. 오늘날 카포크라티안(carpocratien: Carpocratian)이나 유티키안(eutychéen: Eutychian)이나 단성론자(monothélite: monothelite)나 모노피시스트(monophysite: Monophysist)나 네스토리안(nestorien: Nestorian)이나 마니교도(manichéen: Manichaean)나 기타 등등이 되는 것을 어떤 사람이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주름 깃과 누비조끼로 구식 복장을 한 사람을 비웃듯이 그 사람을 비웃을 것이다.
예수회의 르 텔리에(Le Tellier)와 두쎙(Ducin)이 우니게니투스(Unigenitus) 교서를 만들어 로마에 보냈던 때 사람들은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검토하지도 않고 채택하는 무지의 시대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진리를 지닌 다음 명제를 감히 막았다: “불의한 파문(破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성과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도덕의 기초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불의를 두려워할 때 하느님은 당신에게 당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양식(良識)이 이렇게 도전을 받은 적이 없다. 로마교황의 고문 신학자들이 이 점을 무시했다. 사람들은 교황에게 이 교서가 필요하며, 프랑스가 그 교서를 원하고 있다고 설득했다: 그 교서는 서명되고 봉인되어 송부되었다: 그들은 그 결과를 안다; 틀림없이 그들이 그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 교서를 수정하였을 것이다. 논쟁이 격렬했다; 마침내 왕의 사려분별과 인자함으로 인하여 논쟁이 수그러들었다.
개신교도들과 우리를 분할하는 여러 가지 면에서도 동일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면도 있다; 더 중대한 다른 면들이 있지만, 논쟁의 치열성이 매우 완화되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 자신이 오늘날 자신들의 교회에서 그 중대한 면들에 대하여 쟁점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공공적 평화의 시대와 안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혐오와 진저리와, 아니 이성의 시대이다. 논쟁은 최후의 수단인 전염병이고, 이 질병으로부터 우리는 치료되어 이 질병에는 부드러운 처방이 필요할 따름이다. 결국 국가의 이익이란 망명한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겸손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애는 그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것을 충고하며 정치는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6장

불관용이 자연의 법이고 인간의 법이라면

자연법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법이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기르고 그 아이는 아버지로서 당신을 존경해야 하며 보호자로서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당신은 손으로 경작한 땅의 소출에 대하여 권리를 지니고 있다. 당신은 약속을 주고받았으며,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인간의 법은 어떤 경우에도 이 자연법에 기초하여야 한다; 그리고 위대한 원칙인 자연법과 인간의 법칙에 관한 보편적 원칙은 모든 땅에 적용된다: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믿는 것을 믿어라, 그리고 네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면 너는 죽으리라.” 이것이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인도의 고아(Goa) 주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몇몇 다른 지방에서 이렇게 말하여 만족한다: “믿어라, 아니면 나는 당신을 혐오한다; 믿어라, 아니면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해코지를 할 것이다; 괴물, 당신은 나의 종교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종교가 없다: 당신은 당신의 이웃에게, 당신이 사는 도시에서, 당신이 사는 지방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법과 관련되어 있다면, 샴 사람들(Siamois)을 혐오하는 중국인들을 일본인들이 혐오해야 할 것이다; 샴 사람들은 인더스 강 유역 주민들을 공격했던 갠지스 강 유역 주민을 박해할 것이다; 몽골사람은 자신이 만난 첫 말라바르인(Malabare)의 심장을 찢을 것이다; 그 말라바르인은 투르크인을 학살할 수 있는 페르시아 인을 목을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잡아먹었던 기독교도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관용법은 터무니없고 야만적이다: 그 법은 호랑이의 법이요, 호랑이는 먹기 위해서만 물어뜯고 우리는 말 때문에 서로 학살했으니, 불관용법은 더 지독하다.

 

7장


그리스인들도 종교적 박해를 알고 있었을까

역사가 우리에게 희미하게 알려준 민족들 모두는, 그들의 다양한 종교들을 그들 모두를 함께 결합하는 연결고리로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인류의 결합이었다. 신(神)들 사이에는 인간들 사이처럼 일종의 환대법칙이 존재했다. 어느 마을에 이방인이 도착하면 그 이방인은 먼저 그 지방의 신(神)들을 찬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적(敵)이 숭배하는 신(神)들도 존경해마지 않았다. 트로이인들은 그리스인들을 위하여 싸우는 신(神)들에게 기도를 드리곤 했다.
알렉산더는 리비아 사막에서 암몬(Ammon) 신에게 신탁을 얻으러 갔는데, 그리스 사람들과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고국에 자신들만의 제우스(Zeus)와 주피터(Jupiter)를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암몬 신에게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로마인들은 주피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을 때, 그들은 환심을 사려고 그 마을의 신(神)들에게 제물을 올리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심지어 전쟁 와중에도, 전쟁이 때때로 사람들에게 비인간적이고 무서운 행위를 명령했다면, 종교는 사람들을 결합시켜 간혹 사람들의 광증을 가라앉히곤 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개화된 민족 중에서 어떤 민족도 사고의 자유를 막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민족은 종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민족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神)들과 함께, 그 종교를 이용하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민족들 모두는 하나의 최고 신(神)을 인정했지만, 그 최고 신(神)에 엄청나게 많은 하위 신(神)들을 연결시켰다; 고대 민족들은 하나의 종파만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양한 특정 종파를 허용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은, 아무리 종교적이었다 할지라도,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학파가 섭리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창조주에 대하여 지녀야 하는 건전한 생각에 상처를 입히고도 용인된 모든 다른 종파에 대하여 나는 말도 하지 않는다.
창조주에 대한 지식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에 대하여 대가를 치르고, 신성(神性)에 대한 순교자로서 죽었다; 그가 그리스인들이 그의 의견 때문에 죽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이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원인이었다면, 신(神)에게 홀로 영광을 드린 사람만 처벌을 받았고 신(神)에 관하여 가장 가치가 없는 개념을 내놓은 모든 사람들이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관용 편에서도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관용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재판한 사람들의 가증스러운 본보기를 자랑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적대하는 격노한 반대파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학교에서 가르치던 궤변론자들과 웅변가들과 시인들의 화해할 수 없는 적이 되었으며, 심지어 상류층 자제들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화해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플라톤이 전하는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이 이집 저집으로 다니면서 그 교사들이 무식할 따름임을 교사들에게 증명하곤 했음을 인정한다. 이 행동은 신탁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했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관 한 명과 5백인회(五百人會)의 위원 한 명을 소크라테스에게 보내어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그 비난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편 안에서 암시만을 본다; 소크라테스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도록 강요를 받았는데, 즉 사람들은 그가 젊은이들에게 종교와 국가에 반대하는 좌우명을 불어넣었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중상모략가들이 세상에서 항상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정에서는 확인된 사실과 정확하고 정황적 서술이 붙은 기소사항이 필요하다: 그런 것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우리에게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처음에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220명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오백인회로 구성된 재판정에는 220명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많은 숫자이다; 다른 재판정에서 그렇게 많은 숫자의 철학자가 있을지 나는 의심한다. 마침내 다수는 독약에 의한 사형을 판결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바른 길로 돌아와서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사람들과 판결한 사람들을 혐오했음을 또한 기억하자; 이 처형의 주모자인 멜리투스(Mélitus)가 이 불의로 인하여 사형당했음을; 다른 사람들은 추방당했음을,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기념하는 신전이 세워졌음을. 철학이 그렇게 잘 복수를 한 적도 없고 그렇게 명예를 받은 적도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사례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불관용에 반대하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 아테네인들은 외국의 신(神)들에게,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神)들에게 바쳐진 제단을 세웠다. 모든 국가에 대한 관용에 관해서 뿐 아니라 그 국가들의 종교에 대한 존중에 관한 더 강력한 증거가 있을까?
이성(理性)에 대한 적(敵)도 아니요, 문학에 대한 적도 아니요, 성실성에 대한 적도 아니요, 조국의 적도 아닌 정직한 어느 분이, 최근 쎙-바르텔레미(Saint-Barthélémy) 학살을 정당화하면서, 성전(聖戰)이라고 일컬어지는 포키스 전쟁(la guerre des Phocéens)을, 마치 이 전쟁이 종교 때문에 그리고 교리 때문에 그리고 신학적 논쟁 때문에 발발한 것처럼, 인용한다; 그 전쟁은 영토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판단하는 문제였다: 영토 문제는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밀짚단은 신앙의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 도시들은 의견 때문에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점잖고 부드러운 분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우리가 성전(聖戰)이라도 벌이기를 그분은 원하는 것일까?


8장

로마인들은 관용적이었던지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Romulus)에서부터 기독교도들이 로마제국의 신관들과 논쟁을 벌이던 시대까지 로마인들의 집에서, 자신의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키케로(Cicéron: Cicero)는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했으며, 루크레티우스(Lucrèce: Lucretius)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가벼운 비난도 하지 않았다. 자유 자체가 확대되어 자연과학자 플리니우스(Pline: Plinius)는 자신의 저서를 신(神)을 부인함으로써, 그리고 신(神)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태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시작한다. 키케로는 지옥에 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옥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은 노인은 없다(Non est anus tam excors quae credat).” 유베날리스(Juvénal: Iuvenalis)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도 믿지 않는다(Nec pueri credunt: 풍자 II, 152행).” 로마의 극장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네, 죽음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라네(Post mortem nihil est, ipsaque mors nihil).
(세네카[Seneca], 트로이의 여인들[Troade]; 2장 마지막의 합창.)
이 교훈을 증오하자, 그리고 최대한으로, 복음서가 가르친 바 없는 어느 민족에게는 그 교훈을 무시하자: 이 교훈은 가짜이고 불경스럽다; 그러나 그 교훈이 최소한의 불평도 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매우 관용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리자.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최고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신(神)에 대한 불경은 신(神)이 처리할 문제이다(Deorum offensae diis curae).” 이 정복 민족은 존 세계를 정복하여 다스리고 문명화하기만을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우리를 정복한 것처럼 우리에게 법을 제정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를 족쇄로 묶고 법률과 스포츠를 준 시저는 우리를 지배하는 국가의 최고 신관(神官)이었지만 자신을 위하여 우리들이 프랑스 고대 신관(神官)인 드루이드(druide: druid)로부터 떠날 것을 강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모든 종파를 신봉하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은 모든 종파를 공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모든 종파를 허용했다. 로마인들은 누마(Numa) 왕 치하에서도 물질적 숭배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우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곧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가르쳐준 위대한 민족의(majorum gentium) 신들로 우상을 세웠다. 외국의 신(神)을 숭배하지 말라(Deos peregrinos ne colunto)는 12표법(十二表法)에 따라 공식 종교는 원로원이 승인한 고등 종교로 축소되었다. 티베리우스(Tibère: Tiberius) 황제가 헐어버릴 때까지 이시스(Isis) 신(神)을 위한 신전이 로마에 있었는데 당시 이 신전의 제관들이 문두스(Mundus)에게 매수당하여 문두스를 아누비스(Anubis) 신(神)의 이름으로 신전에서 폴리나(Pauline: Paulina)라는 여자와 동침하게 만들었다. 요세푸스(Josèphe: Josephus)가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요세푸스는 당시에 살던 사람도 아니고 쉽게 믿어버리는 사람이었으며 과장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시절같이 개명한 시대에 고위 신분의 여성이 아누비스 신(神)의 은총을 받을 것을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이 일화가 사실이나 거짓이라 할지라도, 이집트의 미신이 공식 승인을 받아 로마에 사원을 세웠음은 분명하다. 유태인들은 포에니 전쟁이래 로마에서 장사를 했다; 유태인들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시절부터 로마에 유태교회를 가지고 있었고, 현대 로마에서와 동일하게 거의 항상 그 교회를 유지했다. 로마인들에 의하여 종교적 자유가 인간의 권리 중 가장 신성한 권리로서 간주된 이 사례보다 더 훌륭한 본보기가 있는가?
기독교가 출현하자마자 기독교도는 누구도 박해하지 않았던 바로 그 로마인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에게 이 일은 매우 거짓임이 분명해 보인다; 증거를 위하여 나는 성 바울 자신만 필요하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주석 14), 성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려고 했다고 유태인에 의하여 비난을 받자 야고보가 바울에게 “사람들이 당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과, 당신이 계속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음을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하여” 삭발을 하고 네 명의 유태인과 함께 성전으로 기도하려 갈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기독교도인 바울은 이레 동안 모든 유태 의식을 수행하러 갔다; 그러나 이레가 아직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시아의 유태인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유태인과 함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와 함께 바울이 성전에 들어온 것을 보고 그 유태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을 바울을 붙잡아 펠릭스(Félix) 총독에게 데려갔으며 그 다음에 페스투스(Festus) 총독에게는 법정을 열어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유태인들은 떼를 지어 바울의 사형을 요구했다; 페스투스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주석 15): “피고가 고소인 앞에서 자신을 방어할 자유가 주어지기 전에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로마의 관행이 아니다.”
이 말은 바울에게 어떤 호의도 가지지 않았고 경멸만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로마인 총독에게서 그만큼 더 두드러진다: 자신의 그릇된 판단력에 빠져 총독은 바울을 미치광이로 이해했다; 총독은 바울 자신에게 미쳤다며 이렇게 말했다 (주석 16): 많은 학식이 너를 미치게 만들었다(Multae te litterae ad insaniam convertunt). 그러므로 페스투스는 자신이 평가할 수 없는 미지의 인간을 보호해주면서 로마법의 공평성만 주목했다.
로마인들은 박해자가 아니고 공평했다고 선언하는 성령 자체가 있다. 바울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로마인이 아니고 유태인들이었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는 로마인이 아니라 사두개파의 유태인의 명령에 따라서 돌을 맞았다. 유태인들만 성 스테판(Etienne: Stephen)에게 돌을 던졌다 (주석 17);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바울이 사형집행인의 옷을 걸치고 있었을 때 분명히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로마인들과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유태인만 적이었는데 유태인들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광신도들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진 원한을 품는지 우리는 안다. 틀림없이 로마의 유태 성전에는 소요사태가 있었다. 수에토니우스(Suétone: Suetonius)는 자신의 저서 클라우디우스 황실기(la Vie de Claude) 2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태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아 끊임없이 소요사태를 일으켜 로마 밖으로 추방했다(Judaeos, impulsore Christo assidue tumultuantes, Roma expulit).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주였다고 말하면서 수에토니우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유태민족만큼 경멸을 받던 또 다른 민족에 대한 세부사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논란의 시점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는 기원 후 2세기 하드리아누스(Adrien: Hadrianus) 황제 시절에 글을 썼다; 당시 로마인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이 유태인과 구분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의 글은, 로마인들이 초기 기독교도를 박해하기는커녕, 초기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던 유태인을 박해했음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유태성전이 로마의 원로원이 그 성전에 보여주었던 동일한 관용을 분가한 형제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고, 추방당한 유태인들은 그 후 곧 귀환했다; 금지하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귀환한 유태인들은 심지어 명예를 되찾았다: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람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와 울피아누스(Ulpien: Ulpianus)이다 (주석 18).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로마의 황제들이 유태인들에게 권위를 남발하였다는 것과, 유태인의 한 종파로 간주되던 기독교도들을 사형장과 맹수에게 풀어놓아 박해했다는 것이 가능할까?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타키투스(Tacite: Tacitus)는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기독교도들은 기소되어 사람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그런 혐의를 뒤집어쓴 것은 그들의 신앙에 관한 문제였을까? 물론 아니다. 몇 년 전 바타비아(Batavia)의 교외에서 화란인들이 살해했던 중국인들은 종교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우리는 말하는가? 아무리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네로 치하에서 반은 유태인이고 반은 기독교도인 불행한 사람들에게 발생했던 참혹한 일을 불관용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주석 19).


9장

순교자들

그 후에 기독교 순교자들이 나타났다. 어떤 이유로 인하여 이 순교자들이 처형을 당했는지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초기 로마 황제 치하에서 누구도 자신의 종교만으로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모든 종교가 허용되었다; 다른 종교 모두가 허용되던 시절에 특정 종교를 지니고 있던 천한 사람들이 어떻게 추적되고 박해를 받을 수 있었을까?
티투스(Titus), 트라야누스(Trajan: Trajanus), 안토니누스(Antonin: Antoninus), 데키우스(Décius: Decius) 황제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 황제들이 모든 영토가 향유하던 자유를 기독교도들에게서만 빼앗았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로마의 종교에는 모두 이교(異敎)인 이시스(Isis)의 비교(秘敎)와 미트라(Mithra)의 비교(秘敎)와 아시리아의 여신 비교(秘敎)가 방해받지 않고 허용된 반면, 기독교도들이 비밀스런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감히 사람들이 비판을 퍼부었을 따름이겠는가? 기독교도 박해에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고, 그 특별한 증오는 국가 정책에 의하여 유지되어 기독교도들의 피를 뿌렸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성 라우렌티우스(saint Laurent: Laurentius)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기독교도들의 돈을 로마 총독 코르넬리우스 세쿨라리스(Cornelius Secularis)에게 지불을 거부했을 때, 총독과 로마 황제가 분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총독과 황제는 성 라우렌티우스가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자선적이고 성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라우렌티우스를 반역자로 간주하여 죽였다 (주석 20).
순교자 성 폴리유크투스(saint Polyeucte: Polyeuctus)를 고찰해보자. 그의 종교만으로 그는 처형되었는가? 사람들이 데키우스 황제의 승전을 위하여 신(神)들에게 감사를 드리던 신전으로 그는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제관(祭官)들을 모욕하며, 그는 제단과 신상(神像)들을 뒤엎고 산산조각을 낸다: 그와 유사한 범죄가 용서될 나라는 세상에서 어딜까?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étien: Diocletianus) 황제의 칙령을 공개적으로 찢어버렸으며, 그 황제의 통치 마지막 2년 동안 형제들에게 가장 큰 박해를 불러온 기독교도는 지식에 걸맞은 열정을 지니지 못해서, 스스로 재앙의 원인이 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이 생각이 없는 열정은, 자주 폭발하였으며 심지어 몇몇 교부(敎父)들에게서도 비난을 받았는데, 아마도 모든 박해의 근원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초창기의 성찬형식론자들을 초기 기독교도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오류를 진실 옆에 갖다놓지 않는다; 그러나 장 칼뱅(Jean Calvin)의 선배인 파렐(Farel)은 성 폴리유크투스가 아르메니아(Arménie: Armenia)에서 저지를 일과 동일한 것을 아를르(Arles)에서 저질렀다. 사람들은 행렬을 이루어 은둔자 성 안토니우스(saint Antoine: Antonius)의 상(像)을 거리에서 나르고 있었다; 파렐은 동료들과 안토니우스의 상을 운반하던 수도사를 덮치고 수도사들을 때리고 흩어뜨리고 성 안토니우스의 상을 강에 던진다. 그는 마땅히 죽음을 당해야 했으나 도망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했다. 파렐이 자신은 까마귀 한 마리가 은둔자 성 안토니우스에게 빵 반 덩어리를 가져왔다는 것을 믿지도 않고 또한 성 안토니우스가 켄타우루스(centaures: Centaurus) 및 사티로스(satyr: Saturos)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고 수도사들에 소리치는 데에 만족했더라면,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강한 질책만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행렬이 끝난 후 파렐이 까마귀와 켄타우루스와 사티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평화롭게 검토했더라면, 그에게는 질책당할 일이 없었을 텐데.
뭐라고! 로마인들은 사악한 안티노우스(Antinoüs: Antinous)가 제 2의 신(神)의 반열에 놓인 것을 용인했고, 도덕적인 한 분을 평화롭게 숭배했다 하여 질책을 받기만 한 모든 사람들을 로마인들이 야수에게 넘겨 찢어 죽였을 텐데 라니! 뭐라고! 로마인들은 다음 전형(典型)에 의하여 증명된 모든 부차적 신(神)들의 우두머리인 최고의 신(神)을 인식했을 텐데 라니: 지대지선(至大至善)한 신(神)(Deus optimus maximus); 그런데 로마인들이 유일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을 사냥했을 텐데 라니!
그 황제들 치하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종교재판이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기독교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기독교도들을 심문하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의 집으로 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유태인도 시리아인도 이집트인도 음유시인도 드루이드도 철학자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은 가짜 신(神)들에 대항하여 일어섰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현명하고 매우 신성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한 명의 신(神)을 영혼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숭배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순교자들이 용인된 종교에 반대하여 격렬하게 폭발한다면, 아무리 그 종교가 터무니없었다할지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순교자들 자신이 불관용적이었음을 인정한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en: Tertullianus)도 자신의 호교서(護敎書: Apologétique: Apologeticum)에서 기독교도들이 반란자로 간주되었음을 인정한다 (주석 22): 그 혐의는 부당한 것이지만, 로마 행정관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은 기독교들의 종교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황제들의 승리를 위한 공식적인 축제에서 기독교도들이 문을 월계수 가지로 장식할 것을 거부했음을 인정한다 (주석 22): 이런 가증스러운 과장된 행동은 쉽게 대역죄로 이해될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최초의 사법적 학대는 도미티아누스(Domitien: Domitianus) 황제의 때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학대도 일 년 동안조차도 지속되지 않은 추방이었다: “행동을 쉽게 억눌렀으나, 추방된 자들을 복권시켰다(Facile coeptum repressit, restitutis etiam quos relegaverat)”라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한다 (5 장). 문체가 불같은 락탄티우스(Lactance: Lactantius)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에서 데키우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조용하게 번성했다고 인정한다 (주석 24). 이 가증스러운 동물 데키우스가 교회를 탄압했을 때 이 긴 평화는 깨졌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해 뒤에 예를 들어 가증스러운 동물 데키우스가 나타나 교회를 박해했다(Exstitit enim post annos plurimos exsecrabile animal Decius, qui vexaret Ecclesiam.).” (호교서 4장)
소수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박식한 도드웰(Dodwell) 씨의 소감을 여기서 나는 토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많이 박해했다면, 로마 원로원이 특수한 형벌을 가하여 그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면, 그들이 기독교도들을 끓는 기름 속에 던졌다면, 그들이 원형경기장 안에서 발가벗은 처녀들을 맹수에게 주었다면, 왜 그들은 로마의 최초 기독교 주교들 내버려두었겠는가? 성 이레나에우스(Saint Irénée: Irenaeus)는 기원후 139년에 이 주교들 가운데서 텔레스포루스(Télesphore: Telesphorus)만을 순교자로 간주하지만, 텔레스포루스가 죽음을 당했다는 증거는 없다. 제피리누스(Zéphirin: Zephyrinus)는 18년 동안 로마의 기독교도들을 다스리고, 219년에 평화롭게 죽었다. 고대 순교사(殉敎史)에 거의 모든 초기 교황들이 들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순교자라는 말은 그 말의 진짜 의미로만 이해되었다: 순교자는 증언을 의미했지 고난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박해의 광증을, 기원 후 3세기 동안 교회 기록자들이 계산하는 56회의 종교회의를 소집하면서 기독교도들이 누렸던 자유와 양립시키기는 어렵다.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박해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난폭했다면, 기존 종교에 반대하여 그렇게 강력하게 글을 썼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en)는 침대 위에서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마 황제들이 그의 호교론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작성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달하지 못했던 알려지지 않은 책; 그러나 그 책은 아프리카의 지방총독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알려졌다: 그 책은 저자에게 대하여 많은 증오심을 틀림없이 불러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순교를 당하지 않았다.
오레게네스(Origène: Oregenes)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개적으로 설교하였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 오레게네스는, 이교도와 기독교 모두에게 그렇게 자유롭게 설교했고 이교도에게는 예수를 알렸고 기독교도에게는 삼위일체를 부인했는데, 켈수스(Celse: Celsus)에게 반박하는 그의 세 번째 책에서 “순교자는 매우 적었으며 게다가 드물게 출현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종교를 모든 사람들이 포용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어떤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기독교도들은 도시와 읍과 마을에서 돌아다닌다.”라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이 지속적인 선교행위가 상대방 제관(祭官)들에 의하여 모반으로 쉽게 혐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선교행위는, 항상 시끄럽고 모반적이고 천박한 이집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허용된다: 고양이 한 마리를 죽였다고 로마인 한 명을 찢어 죽인 이집트 사람들, 피라미드를 찬탄하는 사람들이 반론을 내놓을지라도 항상 경멸스러운 사람들인 이집트 사람들 (주석 25).
오레게네스의 제자인 이적(異蹟)을 행하는 성 그레고리우스(saint Grégoire Thaumaturge: Gregorius Thaumaturgus)보다 누가 더 이교도 제관과 로마의 분노를 자아냈을까? 그레고리우스는 밤에 하느님이 파견한 한 노인과 빛이 나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성모 마리아였고 노인은 사도 요한이었다. 사도 요한은 그레고리우스가 설교할 교리를 말해주었다. 네오카사에레아(Néocésarée: Neocaesarea)로 가면서 신탁이 주어지는 신전 곁을 지났는데 비로 인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밤을 그 신전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몇 번 성호를 그었다. 그 다음날 그 신전의 대제사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신탁을 내리던 악마들이 더 이상 신탁을 내리려 하지 않아서 놀랐다; 대제사장는 악마들을 불렀다: 악마들은 와서 자신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신전에서 밤을 보냈고 또 신전에서 성호를 그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더 이상 신전에서 살 수 없다고 악마들은 대제사장에게 알려주었다.
대제사장은 그레고리우스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레고리우스는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부터 악마를 추방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곳을 들어오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악마들이 나의 신전으로 다시 들어오게 하라”고 대제사장이 말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책 한 권으로부터 작은 종잇조각을 찢어서 이렇게 썼다: “그레고리우스가 악마에게: 나는 너에게 이 신전으로 다시 들어올 것을 명령한다.” 이 종잇조각은 제단 위에 붙여졌다: 악마들을 복종하여 그날 보통 때처럼 신탁을 내렸다; 그 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악마들은 발길을 끊었다.
이적을 행하는 성 그레고리우스의 일생 속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는 사람은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saint Grégoire de Nysse: Gregorius de Nyssa)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신관들은 틀림없이 그레고리우스에게 화가 났고, 맹신에 사로잡혀, 행정관들에게 그를 고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관들의 가장 큰 적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박해도 받지 않았다.
성 키프리아누스(saint Cyprien: Cyprianus) 일대기 안에서 그는 사형당한 최초의 카르타고 주교였다고 언급된다. 성 키프리아누스의 순교는 기원후 258년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매우 긴 기간 동안 카르타고의 어떤 주교도 자신의 종교로 인하여 희생되지 않았다. 성 키프리아누스에 대하여 어떤 비방이 일어났는지, 어떤 적들이 그에게 있었는지, 아프리카의 지방총독이 왜 그에게 분노했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로마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Cornélius: Cornelius)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카르타고에는 대중적 반감이 금방 일어났고, 사람들은 두 차례에 걸쳐 나를 사자에게 던져주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카르타고의 사나운 사람들의 분노가 종국적으로 키프리아누스가 죽는 원인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갈루스(Gallus) 황제가 코르넬리우스를 내버려 두어 코르넬리우스가 그의 눈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교 때문에 그렇게 멀리서부터 키프리아누스를 처형한 것은 갈루스 황제가 아니었음은 매우 확실하다.
그렇게 많은 알려지지 않은 원인들이 흔히 분명한 원인들과 뒤섞이고, 그렇게 많은 미지의 동기가 한 사람을 박해하는 데에 관련되어, 몇 세기가 지나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불행에 관하여 감추어진 근원을 풀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사람의 붕당에게만 알려질 수 있었던 특정인의 박해 이유는 더욱 그러하다.
이적을 행하는 성 그레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디오니시우스(saint Denis: Dionysius)는 처형당하지 않고, 성 키프리아누스의 시대에 살았음을 주지하시라. 왜, 이 카르타고의 주교만큼 적어도 유명하면서, 그들은 평화롭게 살았을까? 그리고 왜 키프리아누스는 처형을 당했을까? 한 사람은 개인적이고 강력한 적아래, 비방아래, 그렇게 흔히 종교와 결합하는 국가의 정책 아래 무릎을 꿇었고, 다른 두 사람은 인간의 사악함을 피하는 행운을 누렸을 개연성은 없는가?
성 이그나티우스(saint Ignace: Ignatius)가 로마로 끌려갈 때 기독교들은 그를 동반하면서 그를 위로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므로, 기독교에 대한 비난만으로 인자하고 정의로운 트라야누스(Trajan: Trajanus) 황제 치하에서 이그나티우스가 처형당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석 26). 이그나티우스가 기독교도들의 비밀 주교로 있던 항상 시끄럽던 도시인 안티옥(Antioche: Antioch)에서는 모반이 빈번했다: 아마도 이 모반이, 악의적으로 무고한 기독교도들에 뒤집어 쓰이어, 행정관서의 시선을 끌어서 행정관서는 매우 빈번히 그랬듯이 오판을 했다.
예를 들어 성 시메온(saint Siméon: Simeon)은 로마인들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페르시아 왕 사푸르 앞에서 받았다. 그의 순교 이야기에 따르면 사푸르 왕이 그에게 태양을 숭배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을 숭배하지 않는다: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을 훌륭한 원칙이자 오로마즈(Oromase) 혹은, 오로스마드(Orosmade)이자 그들이 인정하던 창조신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관용적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étien: Diocletianus) 황제가 제위에 오른 후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고 비방하는 비방자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하여 에우세비오스의 카에사레아(Eusèbe de Césarée: Eusebios de Caesarea)의 말을 참조하자: 그의 증언은 배척될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 황제를 찬양했던 사람이자 이전 황제들을 격렬하게 반대한 카에사레아는, 그 이전 황제들을 정당화하게 되는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그의 말이 있다 (주석 27): “그 황제들은 오랫동안 기독교도들에게 커다란 호의의 신호를 보냈다; 황제들은 기독교도들에게 지방을 맡겼다; 몇몇 기독교도들은 궁궐 안에서 살았다; 황제들은 심지어 여성기독교도와 결혼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부인으로 프리스카(Prisca) 선택했는데 그들의 딸은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Maximien Galère: Maximianus Galerius)의 부인이 되었다, 기타 등등.”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정적인 증언으로부터 더 이상 비방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레리우스에 의하여 촉발된 박해가, 자비와 은혜의 19년 통치 이후에, 그 근원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음모에 두고 있지 않은지 의심한다.
그러므로 철저히 종교 때문에 학살당했다고 언급되는 테베 군단의 신화가 터무니없는 허구임을 우리는 안다. 이 아시아의 군단이 생 베르나르(le grand Saint-Bernard) 협곡을 통하여 넘어왔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갈리아 족 안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아시아로부터 그 군단을 불렀으며, 그 반란이 평정된 후 1년이 지나서 그 군단을 불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00명이 1개 군단 전체를 막을 수 있는 통로에서 보병 6000명과 기병 700명이 살해되었다는 것도 그만큼 불가능하다. 이 소위 학살극에 관한 보고서는 명백한 기만극으로 시작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독재 치하에서 땅이 신음할 때, 하늘은 순교자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했던 바와 같이, 이 사건이 286년에 일어났다고 상상되는데,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들을 가장 총애했고,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은 태평성대였다. 마지막으로 모든 토론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은 테베 군단은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영리해서 로마에서 카노푸스의 노예(Verna Canopi)라는 노예 역할만 했던 이집트인들로 구성된 군단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로마인들이 유태인 군단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대를 구성했던 32개 군단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테베 군단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예수-그리스도의 기적을 예언하던 무녀(巫女)들의 글자수수께끼(아크로스틱 퍼즐[acrostic puzzle]) 운문과 그리고 가짜 열정이 고지식함을 오용하기 위하여 마구 내놓는 그렇게 많은 시(詩)와 동일선상에 두자.


10장

거짓 전설과 박해의 위험에 대하여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은 거짓에 속았다;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이래 로마의 역사를 가리고 있고, 거의 항상 다른 고대 국가의 연대기를 감싸고 있는 허구의 구름을 가로질러 우리가 풀어낼 수 있는 소량의 진실을 알아야 할 때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법률을 전수받은, 진중하고 엄격한 로마인들이 도덕적인 소녀들인 기독교도 처녀들에게 매춘이라는 벌을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법을 만들어 준 사람들의 엄격한 존엄성을 매우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그들은 베스타(Vesta) 여신을 모시는 무녀(巫女)들의 탈선을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곤 했다. 뤼나르(Runinart)의 순교자 열전(Les Actes sincères)은 이 도덕적 타락을 보고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우리가 믿듯이 뤼나르의 순교자 열전을 믿어야 할까? 볼란두스(Bollandus)에 따르면 앙키라(Ancyre: Ancyra)라는 도시에 약 70세인 기독교도 처녀 7명이 있었는데 테오테크투스(Théodecte) 총독은 그들을 도시의 젊은이들의 손을 거치는 형벌을 내렸다고 순교자 열전은 말한다; 그러나 물론 이 처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총독은 그 처녀들에게 발가벗고 디아나(Diane: Diana) 여신을 모실 것을 강요했는데 디아나 여신에게는 베일을 써야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성 테오도투스(Saint Théodote)는, 실제로 술집주인이었지만 누구 못지않은 믿음을 지녔는데, 그녀들이 유혹에 넘어갈까봐 그 성스러운 처녀들이 죽기를 원하도록 하느님에게 열렬히 기도했다. 하느님은 그것을 허락했다; 총독은 그녀들의 목에 돌을 매달아 호수에 던지도록 만들었다; 그녀들은 곧 테오도투스에게 나타나 자신들의 육체가 물고기에게 먹히는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간청했다; 그것은 그녀들의 합당한 요청이었다.
성스러운 술집주인과 그의 동료들은 밤에 군인들이 지키는 호수가로 갔다; 성스러운 횃불이 항상 그들을 인도했고, 군인들이 지키던 장소에 그들이 도착하자 완전무장을 한 하느님의 기사(騎士) 한 명이 손에 창을 들고 그 군인들을 쫓아냈다. 성 테오도투스는 호수로부터 처녀들의 시체를 건져냈다: 그는 총독 앞으로 끌려갔고, 하느님의 기사는 테오도투스의 목이 잘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참된 순교자를 우리가 존경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자, 그러나 볼란두스와 뤼나르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여기서 젊은 성 로마누스(Romain: Romanus)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 사람들이 그를 불 속에 넣었다고 에우세비우스(Eusèbe: Eusebius)는 말하며 현장에 있던 유태인들은, 하느님이 불가마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꺼내준 이후, 자신을 인정한 사람들을 불타죽게 내버려두었다고 예수-그리스도를 모욕했다. 유태인들이 이렇게 말하자마자 성 로마누스가 화형대로부터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왔다: 황제는 그를 사면하라고 명령하면서 자신은 하느님과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고 재판관에게 말했다; 디오클에티아누스 황제로서는 이상한 말이다! 재판관은, 황제의 사면에도 불구하고, 성 로마누스의 혀를 자르도록 명령을 내렸고, 사형집행들이 있었지만 그는 이 일을 의사가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젊은 로마누스는 태어나면서 말을 더듬는데 혀가 잘리자마자 유창하게 말을 했다. 의사는 질책을 당하고, 자신의 수술이 외과적 법칙에 따라 수행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성 로마누스에게서 잘라낸 만큼 혀를 잘라냈더니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유인즉, 해부학은 사람이 혀가 없으면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저자는 지혜롭게 부연한다. 정말로 에우세비우스가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썼고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첨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역사를 어떻게 믿겠는가?
사람들은 성 펠리시타스(sainte Félicité: Felicitas)와 그녀의 일곱 자녀가 현명하고 경건한 안토니누스 황제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순교 이야기를 이야기의 저자를 밝히지 않고 내놓는다.
진실보다는 열정에 가득 찬 어떤 작가가 마카베오서(書)의 이야기를 모방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매우 개연성이 높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성 펠리시타스는 로마 여인이었다. 그녀는 안토니누스 황제 통치 하에 살고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저자는 성 펠리시타스와 동시대인이 아님이 분명하다. 저자는 로마의 집정관이 샹 드 마르스(le champ de Mars) 안에 있는 자신의 재판정에서 그들을 판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의 집정관은 자신의 재판정을 카피톨(Capitole)에 가지고 있었지 샹 드 마르스가 아니었는데 샹 드 마르스는 민회(民會: comitia)를 여는데 이용된 후에 군인을 사열하는 데에, 경주하는 데, 군사적 경기를 하는 데에 이용됐다: 이것만으로도 조작이 드러난다.
판결 이후에 황제는 다른 판사들에게 처형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고 여전히 언급된다: 이것은 당시 모든 절차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절차와 완전히 어긋난다.
같은 방식으로 성 히폴리투스(saint Hippolyte: Hippolytus)라는 사람이 있는데 테세우스(Thésée: Theseus)의 아들 히폴리투스처럼, 말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형벌은 고대 로마인이 알지 못했고, 이름의 유사성만으로 인하여 이 이야기가 조작되었다.
기독교도들 자신에 의하여 독특하게 만들어진 순교 이야기들 속에서, 기독교도들의 무리가 자유롭게 순교자가 갇힌 감옥으로 와서 처형장까지 그를 따르고 그의 피를 간직하고 그의 시체를 땅에 묻고 유골을 사용하여 기적을 행하는 것이 거의 항상 목격됨을 다시 주시하라. 박해를 받은 것이 종교만이었다면 처벌을 받은 자신들의 형제를 도왔다고, 그리고 순교한 시체의 유골로 마술을 행했다고 밝혀진 이 기독교도도 희생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발도파(les vaudois)와 알비파(les albigeois)와 후스파(les hussites)와 다양한 신교 교파를 다루었던 바와 같이, 그들도 그렇게 다루지지 않았을까? 나이도 성별도 구분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의 목을 자르고 무리로 화형을 시켰다. 고대의 박해가 입증된 이야기 속에는 쎙 바르텔레미(Saint-Barthélémy) 대학살이나 아일랜드의 학살극과 비슷한 특징이 하나라도 있는가? 사람들이 아직도 툴루즈에 경축하는, 전체 주민들이 행렬을 지어 하느님에게 감사하며 200년 전에 동료시민 4천명을 살해한 것을 축하하는 영원히 폐지되어야 할 축제이자 잔인한 축제인, 연례 축제와 흡사한 것이 단 하나라도 그 이야기 속에 있는가?
나는 혐오스럽지만 진실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다: 박해자와 사형집행인과 암살자였던 것은 우리들 기도교인들이었다! 누구를? 우리의 형제들을 박해하고 사형집행하고 암살했다. 십자가와 성경을 손에 들과 수많은 도시를 파괴한 것은,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하에서부터 세벤느(les Cévennes) 지방에 거주하던 야만인들의 광증에 이르기까지 피 흘림과 화형장의 불붙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우리였다: 하늘의 덕택으로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광증.
우리는 아직도 푸아투(Poitou), 비바레(Vivarais), 발랑스(Valence), 몽토방(Montauban)의 불쌍한 사람들을 교수대로 보내고 있다. 1745년 아래 개신교 목사나 복음의 목사로 불리는 사람들 중 8명을 우리는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들의 죄는 방언으로 국왕을 위하여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린 것과 약간의 포도주와 빵 한 조각을 어리석은 농부 몇 명에게 준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는데 파리에서는 쾌락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고, 지방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과 이방인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무시된다.이 소송들은 한 시간에 완료되며, 탈영병을 재판하는 것보다 빠르다. 국왕이 그 소송에 대하여 들었다면 사면했을 것이다.
어떤 개신교 국가에서도 가톨릭 사제들은 이런 식으로 대접 받지 않는다. 영국과 아일랜드에는 100명 이상의 가톨릭 사제가 있다; 사람들을 그 사제들을 알고 있고 지난 전쟁 중에도 그들을 매우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건강한 견해를 포용하는 데 항상 마지막이 될 것인가? 다른 나라는 스스로 교정했다: 언제 우리는 스스로 교정할 것인가? 뉴턴이 증명한 것을 우리가 수용하는 데 60년이 걸렸다; 우리에게는 용감하게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데 종두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가 그렇다; 우리가 농업의 참된 원리를 실천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 인류에 대한 참된 원칙을 실천할 것인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하게 잔인한 짓을 우리가 저지른 반면, 어떻게 우리는 순교자들을 만들었다고 이교도들을 용감하게 비난할 수 있는가?
다수의 기독교도가 종교만으로 로마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인정하자: 그 경우 로마인들은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동일한 불의를 저지르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로마인들이 박해를 했다고 우리가 비난할 때, 우리는 박해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신실성이 많이 결핍되었거나 충분히 광신적인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왜 당신은 우리의 실수와 결점을 들추는가? 왜 우리의 거짓 기적과 우리의 거짓 전설을 파괴하는가? 거짓 전설은 몇몇 사람들이 지닌 성스러움의 자양분이다; 필요한 실수도 있다; 궤양 자체와 함께 육체의 파멸을 불러오는 만성적 궤양을 육체로부터 제거하지 말라; 여기 내가 그에게 답변할 것이 있다.
거짓 기적을 이용하여 진정한 기적에 주어져야 하는 믿음을 당신이 흔들어 놓는 이 모든 거짓 기적은, 복음서의 진실에 당신이 덧붙이는 이 모든 터무니없는 전설은, 가슴 속의 종교를 파괴한다; 자신을 향상시키기를 원하지만 충분히 향상시킬 시간이 없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종교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나를 속였다, 그러므로 종교란 없다; 오류의 품에 안기느니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이 만든 것보다 자연의 법칙에 의지하는 것은 나는 더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도 훨씬 더 멀리 간다: 그들은 사기극이 자신들에게 고삐를 씌운 것을 보아서 심지어 진실의 고삐조차 원하지 않고, 그들은 무신론으로 기운다; 다른 사람들이 사기를 치고 잔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락하게 된다.
그것은 틀림없이 모든 성스러운 사기극과 모든 미신의 결과이다. 평범한 사람은 절반 정도만 이성적으로 사고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매우 열등한 논증이다: “황금 전설(La Légende dorée)의 저자 보라지네(Voragine)와 성인들의 꽃(La Fleur des saints) 편집자인 예수회 리바데네이라(Ribadeneira)는 어리석은 말만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톨릭교도들이 특정 숫자의 위그노교도를 살해했고 또한 위그도교도도 특정 숫자의 가톨릭교도를 암살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하여 신앙고백과 성찬식과 성사(聖事)를 이용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반대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동안 그렇게도 많이 하느님을 잘못 판단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렇게도 많은 범죄를 저지른 이 짧은 삶이 지나고, 그렇게도 많은 끔찍한 불행에 대하여 우리를 위로할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유인즉, 거의 모두 피를 흘렸던 마흔 번의 교황들의 분열인 종교전쟁을 고찰하여; 거의 모두 파멸적이었던 사기극; 의견차이로 인하여 불붙은 화해될 수 없는 증오; 거짓 열정을 유발한 사악함을 보아서, 인간은 이 생애 안에 자신의 지옥을 지니고 있었다.

 

11장

불관용의 남용

그래서 어쩔 것인가! 자신의 이성만을 믿고, 이 올바른 이성이나 그릇된 이성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을 시민들 각자가 생각할 수 있을까?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렇다 (주석 28): 이유인즉 믿고 안 믿고는 사람의 의무가 아니라, 조국의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가 믿는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이 범죄행위라고 당신이 말한다면, 당신 자신이 선조인 초기 기독교도들 비난하고 그 초기 기독교도를 처형했다고 당신이 비난하는 사람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차이점이 크고, 모든 종교는 인간의 작품이지만, 사도들이 세웠고 로마가 받아들인 가톨릭교회만 유일한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당신은 답변한다. 그러나 증거로서 우리의 종교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증오와 분노와 추방과 재산탈취와 감옥과 고문과 살인, 그리고 이 살인을 위하여 하느님께 드린 감사행위에 의하여 우리의 종교가 군림해야 하는가? 기독교가 하느님의 것일수록 인간이 기독교에 명령하는 일은 줄어든다; 하느님이 기독교를 만들었다면, 하느님은 당신 없이도 그 종교를 유지한다. 불관용은 위선자와 반역자만을 야기함을 당신은 안다: 얼마나 파멸적인 선택인가! 마침내 사형집행인들이 파멸시키고, 친절과 인내만을 가르친 하느님의 종교를 당신은 사형집행인을 이용하여 유지하고자 하는가?
당신에게 간청하건대 불관용 주장이 낳은 흉악한 결과를 보라. 그런 정도 하에서 수용된 종교를, 그 정도의 폭으로, 고백하지 않을 시민의 재산을 빼앗고 감옥에 처넣으며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어떤 예외조항이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동일한 처벌을 면제할까? 종교는 군주와 거지를 동등하게 연결한다: 따라서 영국에서 50명 이상의 학자와 성직자들이, 국교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군주를 폐위시키거나 죽이는 것이 허용되었던 이 가공할 폭력을 주장했다; 그래서 영국의회는 가증스러운 신학자들이 내린 이 가증스러운 결정을 끊임없이 금지했다 (주석 29).
파리 고등법원이 왕권의 독립을 기본법으로 확립한 판결을 내렸을 때 앙리 대왕(Henri le Grand)의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뒤페롱(Duperron) 추기경은 앙리 대왕 덕분에 추기경직에 올랐는데 1614년 의회에서 고등법원의 판결에 항의하고 그것을 폐지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모든 신문은 뒤페롱이 연설에서 사용한 용어를 보도한다: “군주가 아리우스(Arius)파 신도가 된다면 우리는 그를 폐위시켜야 할 것이고 그는 말한다.”
분명히 그렇지 않소, 추기경 예하. 우리의 국왕 중 한 명이 종교회의와 교부(敎父)들의 역사를 읽고 게다가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더 위대하시다”라는 말에 감명을 받아,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니케아(Nicée) 종교회의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종교회의 사이에서 주저하며 니코메디아(Nicomédie)의 주교 에우세비오스(Eusèbe: Eusebios)에게 찬성했다는 당신의 환각적 상상을 사람들은 채택하고자 원할 것이요: 나는 나의 왕에게 그 문제에 대하여 덜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나의 왕에게 한 서약에 덜 충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감히 나의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리고 내가 당신을 재판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나는 당신을 대역죄인으로 선언할 것이오.
뒤페롱은 그 논쟁을 더 멀리 확대하지만 나는 그만한다. 그 충격적인 환각을 천착할 장소는 여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했던 이유는 앙리 4세가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출생에서부터 논쟁의 여지가 없던 권리로 인하여 이 군주에게 왕좌가 돌아갔으며 그 군주에게는 자신의 용기와 선함으로써 왕좌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일한 권리에 의하여 모든 시민은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아야 하며,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e Ratbert)에 반대하여 라트람누스(Ratram)에 동조하고 스코투스(Scot)에 반대하여 베렌가리우스(Bérenger)에 동조할 것이라 하여 그 권리를 박탈당하며 사형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교리 모두가 우리의 교회 안에서 항상 명확하게 설명되어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이 어떻게 행사하는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교회와 그리스 정교는 성령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발현한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마침내 로마 교회는 성자(聖子)로부터 발현하는 교리를 첨가한다. 나는, 이 결정 다음날, 옛 교리에 헌신하는 시민은 죽어야 마땅했는지 묻는다. 옛날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늘날 처벌하는 잔인성과 불의(不義)는 심하지 않다는 말인가?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er) 시절에 예수에게는 두 가지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유죄였을까?
무염시태(無染始胎) 교리가 확립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도미니쿠스 신도들은 아직도 그 교리를 믿지 않는다. 어느 세월에 그들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처벌을 받기 시작할까?
우리가 지닌 끊임없는 논쟁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누군가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로부터이다. 성 바울과 성 베드로 사이에는 격렬한 교회분열을 야기할 견해 차이가 있었다. 베드로가 질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바나바(Barnabé)만큼 이중적이었기 때문에, 야고보가 도착하기 전에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고 그 다음에 두 사람이 할례자들을 화나게 할까봐 두려워서 은밀히 물러가서 이방인들과 헤어졌기 때문에, 베드로의 면전에서 반대했다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은 복음서에 따라서 올곧게 걷지 않음을 나는 보았다; 나는 게바(Céphas)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유태인들이 이방인처럼 살고, 유태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왜 너희들은 이방인들에게 유태인처럼 살 것을 강요하는가?
그것이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다. 그것은 새로운 기독교도들이 유태의식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는 문제였다. 성 바울은 당시 심지어 예루살렘의 유태성전에 제물을 바치러 갔다. 예루살렘에 있던 15명의 초기 주교가 할례를 받은 유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유태교의 안식일을 지켰고 금지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오늘날 할례를 받고 유태교의 안식일을 지키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주교는 화형을 당해 불타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사도들 사이에서도 초기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도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평화는 지켜졌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현대의 작가들을 닮았더라면, 서로 싸우기 위한 매우 광대한 영역이 있을 것이다. 성 마태(Matthieu)는 다윗에서 예수까지 28세대로 계산한다; 성 누가(Luc)는 41세대로 계산하며, 이 세대들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사도들 사이에는 이 명백한 반대설명에 대하여 이견이 일어나지 않는데, 교회의 몇몇 교부들에 의하여 매우 잘 절충되었다. 자비심은 상처를 입지 않았고, 평화는 지켜졌다. 우리의 논쟁 속에서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 속에서 우리를 낮추는 이보다 더 큰 교훈은 무엇인가!
성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몇몇 유태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을 모두 할애하여, 믿음만이 영광스럽고 행위로 인해서는 누구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 야고보는 세상에 퍼진 12 지파에게 보낸 편지 2장에서 행위 없이는 누구도 구원될 수 없다고 부단히 말한다. 그것이 우리들 사이에서 두 가지 큰 신앙을 가른 것과 동시에 사도들을 전혀 가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와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성스러운 행동이라면, 가장 이단적인 사람들을 죽게 만든 사람들이 천국의 가장 훌륭한 성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쎙 바르텔레미 대학살 날에 수백 명을 학살했던 광증을 이용하여, 형제를 약탈하고 형제를 투옥하고 만족할 사람은 천국에서 어떤 모습을 지닐 것인가? 여기 그 증거가 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 종교회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 그들은 쎙 바르텔레미 학살을 승인하고 경축하고 신성시했다: 그리하여 그 학살극은 매우 성스러웠다; 그리하여 신앙심에서 동등한 두 명의 암살자 중에서, 24명의 임신한 위그노 교도 여성의 배를 가른 자가 12명의 배를 가른 자보다 두 배로 영광을 받아야 한다. 동일한 이유로 세벤느(Cévennes) 지방의 신교 광신도들은 자신들이 목매달은 신부와 수도자들과 가톨릭 여성 교도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을 위한 기이한 자격이다.


12장
유태교에서 불관용은 신의 율법이었는지, 그 불관용은 항상 적용되었는지

하느님 자신이 내린 율법이 신의 율법이라고 불린다고 나는 믿는다. 유월(逾越)을 기념하여, 유태인은 양상추와 함께 요리한 양고기를 먹고, 손님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서서 그 음식 먹기를 하느님은 원했다; 대제사장 임명식은 그의 오른쪽 귀와 오른쪽 손과 오른쪽 발에 제물의 피를 바르면서 행하여 질 것을 하느님은 명령하는데 그 관습은 우리들에게 기이한 것이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느님은 아사셀(Hazazel) 염소에 사람들의 죄악을 실어 바치길 원했다; 하느님은 비늘 없는 생선, 돼지고기, 토끼, 고슴도치, 부엉이, 독수리, 익시온(ixions: 미상 - 역자 주), 기타 등등을 먹지 말라고 했다.
하느님은 축제와 의식을 정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자의적으로, 실정법과 관례에 따르는 듯이 보였는데, 하느님 자신의 명령을 받고,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유태인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이 되었다.
왜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었던 율법을 새로운 율법으로 대체했는가, 왜 하느님은 조상 아브라함보다 모세에게 더 많은 것을 명령했으며 노아보다 아브라함에게 더 많은 것을 명령했는지 여기서 조사하지 말자 (주석 31). 하느님은 스스로 시대와 인류라는 사람들에게 맞추시는 듯하다: 그것은 부계(父系)의 증가였다; 우리의 주제 범위 안에서 만족하자; 우선 유태인에게서 불관용이었던 것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신앙에 대한 너무 엄격한 율법과 역시 더 엄격한 징벌조항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몇몇 주석가들은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예레미야(Jérémie)와 아모스(Amos)에 나오는 구절과, 사도행전 안에서 언급된 성 스테파노의 유명한 말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한다. 아모스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항상 광야에서 몰록(Moloch), 레판(Rempham), 기윤(Kium) 신을 숭배했다 (주석 32). 예레미야서는 유태인의 조상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하느님이 그 조상들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주석 33). 성 스테파노는 유태인들에게 행한 설법에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들은 하늘의 군대를 찬양했다 (주석 34);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도 제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들은 몰록 신의 신전과 레판(Rempham) 신의 별을 모셨다.”
다른 비판자들은 그렇게 많은 이방 신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모세가 이 신들을 관용했다고 추론하며, 그들은 신명기의 이 말을 증거로 인용한다 (주석 35):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각자가 좋을 대로 했던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 (주석 36).”
비판자들은 광야에서 사람들의 종교적 행동에 대하여 어떤 언급도 없다는 것에 자신들의 견해를 근거한다: 유명한 유월절도 없고, 오순절도 없고, 성막 축제를 경축했다는 언급도 없고, 확립된 공식 기도문도 없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은 징표인 할례도 실행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다시 이용한다. 이 정복자는 유태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석 37): “선택권이 너희들에게 주어졌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라, 너희들이 아모리 땅에서 섬기던 신들을 경배하든 너희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던 신들을 숭배하든.” 이스라엘 민족이 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도나이(Adonaï)를 숭배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대답한다: “너희들 스스로 선택했다; 그러므로 너희들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없애라.”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 휘하에서 아도나이 외의 신들을 논쟁의 여지없이 가지고 있었다.
모세5경이 모세의 의하여 기술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을 여기서 논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 문제에 관하여 오래전부터 모든 것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모세의 책 중에서 작은 부분이 판관이나 제사장의 시대부터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 책들의 영감이나 성스러움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황금 송아지 숭배로 인하여 극심한 처벌이 유태인들에게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오랫동안 완벽한 자유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도 충분히 증명될 듯하다: 아마도 자신의 형이 금송아지를 세운 것에 대하여 모세가 2만 3천명을 학살한 것으로 인해서 모세는 잔인함으로 얻는 것이 없다는 것과, 이방신들에 대한 유태인들의 열정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일찍이 모세도 자신이 내놓은 율법을 어기는 듯하다 (주석 38). 그는 모든 우상을 금지시켰지만 자신이 청동 뱀을 세웠다. 율법에 대한 동일한 예외가 그 후 솔로몬 신전에도 있다: 솔로몬 왕은 신전의 거대한 세례물그릇을 떠받치는 12마리의 황소를 조각하도록 했다; 천사들이 언약궤 속에 안치되었다; 그 천사들은 독수리 머리와 송아지 머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태인들은 당나귀를 숭배한다고 믿도록 만들었던 것은 분명히, 로마 병정들이 신전 안에서 발견한, 서툴게 만들어진 이 송아지 머리이다.
이방신들에 대한 신앙 금지는 실행되지 않는다; 솔로몬은 평화롭게 우상을 숭배한다. 여로보암(Jéroboam)은, 하느님이 왕국의 10개 지파를 주는데, 금송아지 두 마리를 세우도록 하고 군주와 제사장의 위엄을 함께 지니고 22년을 다스린다. 르호보암(Roboam) 통치하에서 작은 유다 왕국은 이방신들의 제단을 세우고 조상(彫像)을 세웠다. 성스러운 왕 아사(Asa)도 그 신전을 파괴하지 않았다 (주석 39). 대제사장 우리야(Urias)는 그 신전 안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 제단의 장소에 아시리아 왕의 제단을 세운다 (주석 40). 한 마디로 말해서 종교에 대한 어떤 통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유태의 왕들은 서로 제거하고 서로 암살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지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예언자들 가운데는 복수를 하면서 하늘에 호소했던 사람도 사실 있었다 (주석 41): 엘리아는 바알(Baal)의 제사장들을 불태우기 위하여 천상의 불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자신을 대머리라고 불렀던 마흔 두 명의 어린 아이를 먹어치우게 하려고 곰을 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문 기적이고, 모방을 원하기에는 다소 힘든 사건들이다.
사람들은 유태민족이 매우 무지해서 매우 야만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미디안(Madianites)과 치른 전쟁에서 (주석 43) 모세는 남자 아기들 모두와 어머니 모두를 죽일 것과 전리품을 나눌 것을 명령했다고 언급된다 (주석 42). 승리자들은 야영지에서 675000마리의 양과 72000 마리의 소와 61000 마리의 당나귀와 32000 명의 소녀를 발견했다; 그것들을 나누어 가졌고, 나머지 모두는 죽였다. 몇몇 비평가들은 심지어 32명의 여자를 주님에게 바쳤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린 자가 삼십 이명이니(Cesserunt in partem Domini triginta duae animae).”
결과적으로 유태인들은 하느님에게 인간을 바쳤는데, 증거로 입다(Jephté)가 딸을 바친 것(주석 44)과 아각(Agag) 왕이 제사장 사무엘의 칼에 의하여 잘려 조각이 난 것이다 (주석 45). 에스겔은 심지어 유태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유태인들이 인간의 살을 먹을 것이라고 유태인들에게 약속한다: “너희들은 말과 기병을 먹을 것이다; 너희들은 왕들의 피를 마실 것이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 예언의 두 구절을 유태인들 자신에게 적용하고, 다른 비평가들은 육식동물들에게 적용한다. 이 민족의 전체 역사 속에서 관용이나 아량이나 자비의 특징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길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 야만성의 구름 안에서도 보편적인 관용의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입다는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하느님에게 자신의 딸을 바쳤는데, 암몬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석 46): “너의 신 그모스(Chamos)가 너희에게 준 것은 권리로 너희들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을 우리가 가짐을 참작하라.” 이 선언은 정확하다: 그 선언은 확대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선언은 하느님이 그모스를 용인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성서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소유한 땅을 그모스 신이 준 것이라고 말하여 그 땅에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는 권리가 있다(tibi jure debentur)”; 그것이 히브리어 구절 Otho thirasch의 진정한 의미이다.
미가(Michas)와 레위인(lévite)의 이야기는 사사기 17장과 18장에 언급되는데, 당시 역시 유태인들에게 인정된 가장 큰 관용과 자유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미가의 어머니는 에브라임(Ephraïm) 지파 출신으로 매우 부유한 여인이었는데 돈 1100량을 잃어버렸다; 미가가 그 금액을 어머니에게 지불했다: 그녀는 그 돈을 주님에게 바쳐서 그 돈으로 신상(神像)들을 만들게 하고는 작은 신당(神堂)을 세웠다. 한 레위인이 매년 은화 10량과 제사용 의복과 외투를, 그리고 식량을 받고 그 신당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미가는 이렇게 소리쳤다 (주석 47): “내가 내 집에 레위파 제사장을 두었으니 하느님이 나에게 지금 복을 주실 것이다.”
그동안 단(Dan) 지파 600명의 남자들이, 나라 안에서 마을을 차지하여 정착하려고 했는데, 레위인 제사장이 없지만 하느님이 그들의 일을 선호하도록 하기 위해선 레위인 제사장이 필요하여, 레위인 제사장이 책망하고 미가와 그 어머니가 고함을 지름에도 불구하고 미가의 집에 가서 미가의 제의(祭衣)와 미가의 신상(神像)과 레위인 제사장을 취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확신에 차서 라이스(Laïs)라는 마을을 공격하러 가서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그 마을에서 모든 것을 불 지르고 죽였다. 그들은 승리를 기념하여 라이스라는 마을에 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제단 위에 미가의 우상을 안치했다; 그리고 매우 두드러진 것은 모세의 손자인 요나단(Jonathan)이 그 신전의 주임 제사장이었으며 그 신전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미가의 신상이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기드온(Gédéon)이 죽은 후 히브리인들은 거의 20년 동안 바알-베리트(Baal-bérith) 신을 숭배하고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았는데 어떤 족장도 판관도 제사장도 복수를 외치지 않았다. 내가 고백하건대 그들의 범죄행위는 컸다; 그러나 이 우상숭배가 심지어 용인되었다면, 참된 신앙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의견차이가 허용되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자신이 전투 중에 자신의 성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탈취당하도록 하여, 여호와는 치질을 닮은 비밀스런 질병으로 때리고 다곤(Dagon) 신상을 뒤엎고 들판에 수많은 쥐를 보내는 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처벌했음을 불관용의 증거로 밝힌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송아지에 젖을 먹이던 두 마리의 암소에 성궤를 묶어 보내면서 주님에게 금으로 된 쥐 다섯 마리와 금으로 된 항문 다섯 개를 바치자, 오히려 성궤를 보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장로 70명과 5만 명의 남자를 죽였다. 주님의 징벌은 신앙 위에 떨어지지 않으며 신앙의 차이 위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우상숭배 위에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사람들은 대답한다.
주님이 우상숭배를 처벌하려고 했다면, 주님의 성궤를 감히 탈취하고 다곤 신을 숭배했던 블레셋 사람 모두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보아서는 안 되는 자신의 성궤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민족 5만 70명을 죽였다: 당시 법과 관습과 경제는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모두와 다르다; 그만큼 하느님의 불가해한 길은 우리들의 길을 초월한다.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엄격함은, 자신의 민족 가운데서 어느 정도까지 하느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지닌 이성의 희미한 빛을 따라서만 하느님의 시각과 의도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보일 따름이다”라고 동 칼메(dom Calmet)는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방 종교를 처벌하지 않지만, 자신을 숭배하는 종교의 신성모독과 무분별한 호기심, 불복종, 아마도 심지어 반항정신을 처벌한다. 그런 처벌은 유태인의 신정(神政)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에 속했다고 우리는 느낀다. 이 시대와 이 관습은 우리 시대와 우리의 관습과 어떤 관련도 없다고 아무리 반복 진술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마침내 후기(後期)에 우상을 믿던 나아만(Naaman)이 자신의 왕을 좇아 (주석 48) 림몬(Remnon) 신전에 들어가서 거기서 엘리사와 함께 숭배해도 되는지를 엘리사에게 물었을 때, 엘리사는 곰을 풀어놓아 아기들을 잡아먹게 만들었던 사람으로 나아만에게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너희들은 편안하게 가라.
더 많은 예가 있다;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명하기를, 목에 줄과 목걸이를 (주석 49) 걸고 멍에를 지고 그것들을 모압(Moab)과 암몬(Ammon)과 에돔(Edom)과 두로(Tyr)와 시돈(Sidon)의 왕에게 보내라;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하느님을 통하여 그들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는 너희들 땅 모두를 나의 종인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에게 주었다 (주석 50).” 여기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이 총애하는 자로 선언된 우상을 숭배하는 왕이 있다.
그 예레미야는, 유대 왕 시드기야(Sédécias)에 의하여 투옥되었는데, 시드기야로부터 사면을 받고 하느님의 편에서 바빌로니아의 왕에게 복종하라고 그에게 충고한다 (주석 51): “당신이 바빌로니아 왕의 관리들에게 복종할 것이라면, 당신의 영혼은 살리라.” 그러므로 하느님은 결국 우상을 숭배하는 왕의 편을 든다; 하느님은 성궤를 그에게 넘겨주는데, 그 성궤를 한 번 보았다고 5만 70명의 유태인의 생명이 없어졌다; 하느님은 그에게 지성소(至聖所: le Saint des saints)와 신전의 나머지를 넘겨주었는데 그 신전을 짓는데 금 10만 8천 달란트와 은 1백 1만 7천 달란트와, 다윗과 그 신하들이 하느님의 전당을 짓기 위해 남겨두었던 금 1만 드라크마가 들어갔다: 솔로몬이 보낸 금액을 계산하지 않고도 오늘날의 가치로 약 190억 6천 2백만에 달하는 금액. 우상숭배가 그 이상 보상을 받은 적은 없다. 아마도 필사(筆寫)하는 사람의 실수가 있어서 나는 이 금액이 과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금액을 반이나 1/4나 심지어 1/8로 줄여도 여러분은 역시 놀랠 것이다. 헤로도투스(Hérodote)가 에페소스(Ephèse) 신전 안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재화가 그만큼 놀라운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눈에는 그 보물이 하찮은 것이고 느부갓네살에게 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은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참된 보물이다.
하느님은 (주석 52) 우리가 키루스(Cyrus)라고 부르는 키르(Kir) 혹은 고레스(Koresh 혹은 Kosroès)에게도 그만큼 호의를 보여준다; 키루스가 기름 부은 자(oint)라는 단어가 지닌 공통적 의미에 따라서 기름을 받지 않았고, 조로아스터교를 따랐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를 자신의 그리스도, 자신의 기름 부은 자라고 부른다; 키루스가 사람들의 눈에는 왕위 찬탈자였지만 하느님은 그를 자신의 목자(牧者)라고 부른다: 성서 전체 안에서 더 큰 편애의 징표는 없다.
말라기에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하느님의 이름이 여러 민족 안에서 크게 되는 것과, 도처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깨끗한 봉헌물을 드리는 것”을 여러분은 본다. 하느님은 유태인들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니느웨 사람들(des Ninivites)을 보살핀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협하고, 용서한다. 멜기세덱(Melchisédech)은 유태인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냈다. 발람(Balaam)은 우상을 숭배했으나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다른 민족 모두를 용인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민족들에 대하여 부성적 보살핌을 지니고 계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히 관용적이 못하다니!

 

13장

유태인의 극단적인 관용

그러므로 모세의 휘하에서도 사사들의 휘하에서도 왕들의 휘하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항상 관용의 사례가 목격된다. 보기는 더 많다 (주석 53): 모세는 “하느님은 아비의 죄 때문에 4대까지 자손을 처벌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느님이 영혼의 불멸성도 내세에서의 징벌과 보상도 계시하지 않은 민족에게는 이 위협이 필요했다. 이 진리들은 십계명 안이나 레위기 및 신명기의 율법 안에서 선언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페르시아인과 바빌로니아인과 이집트인과 그리스인과 크레타인의 교리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유태인의 종교가 전혀 아니었다. 모세는 “천국에 가고 싶으면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고 “땅에서 오래 살기 위하여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했다. 모세는 신체의 질병으로 (주석 54), 마른옴과 화농성 옴으로, 무릎과 장딴지의 악성 종기로, 아내의 부정을 겪는 것으로, 이방인으로부터 고리대금을 빌리는 것으로, 그리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못 받는 것으로, 굶어죽는 것으로, 그리고 자식을 잡아먹을 밖에 없음으로만 그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도 모세는 그들에게 죽은 후에 불멸하는 영혼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거나 환희를 맛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스스로 자신의 민족을 인도하셨는데, 그 민족의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 다음에 즉각 그 민족을 징치하거나 보상하였다. 모든 것이 세속적이었고, 그것이 유태인들의 율법이 하느님이 내린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워버튼(Warburton)이 남용하는 진실이다 (주석 55): 하느님 스스로 그들의 왕이며 위법이나 준수 다음에 즉각 판결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민족을 다스릴 수 없는 시대에 하느님이 유보하고 있던 교리를 그들에게 계시할 필요가 없었다. 무지로 인하여 모세가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성서에 관한 가장 큰 이점 중에서 한 가지를 신약성서에서 제거한다. 모세의 율법이 세속적 징벌을 4세대까지 선언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율법의 정확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4세대까지 징벌할 것이라는 명시된 이 하느님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에스겔(Ezéchiel)은 유태인들에게 완전히 반대로 선언하여 아버지의 부정을 아들이 책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석 56); 그는 심지어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선하지 않은 계율”을 (주석 58) 주었다고 (주석 57) 하느님이 말하도록 만드는 지경까지 간다.
그렇다고 에스겔서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저자들의 성서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 히에로니무스(

 

 

Jérôme: Eusebius Hieronymus)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유태교회는 30세 이전에 에스겔서 읽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에스겔서 16장과 23장에 나오는 오홀라(Oolla)와 오홀리바(Ooliba) 두 자매의 음행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젊은이들이 오용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스겔서는 모세와 공식적으로 반대가 될지라도 항상 수용되었다.
마침내 (주석 59) 영혼의 불멸성이 아마도 바빌론 유폐시대 이래 시작되어 수용된 교리가 되었을 때, 사후(死後)에는 징벌도 보상도 없으며 걷고 소화시키는 힘인 능동적 힘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와 함께 사멸한다고 사두개파는 항상 지속적으로 믿었다. 그들은 천사의 존재를 부인했다. 개신교도가 가톨릭교도와 다른 것보다 사두개파는 다른 유태인들보다 훨씬 더 달랐다; 그래도 그들은 형제들의 종교에 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종파에서 훌륭한 사제를 배출했다.
바리새인들은 숙명론과 (주석 60) 윤회를 (주석 61) 믿었다. 에세네파(Les esséniens)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영혼은 부유한 섬으로 가고 (주석 62), 사악한 사람의 영혼은 일종의 암흑계(Tartare: Tartaros)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들은 특별한 성전 안에서 자기들 끼리 모임을 가졌다. 요컨대 유대교를 세밀하게 조사하고 싶으면 가장 야만스러운 공포 가운데에도 가장 큰 관용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순이다; 거의 모든 민족이 모순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들이 피의 율법을 가지고 있을 때 부드러운 관습을 가져오는 모순은 다행이리라!


14장
예수 그리스도가 불관용을 가르쳤는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피의 율법을 세웠는지, 불관용을 명령했는지, 종교재판의 감옥을 건설하도록 했는지, 화형집행인을 세웠는지 살펴보자.
내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복음서 안에는 박해하는 정신이 불관용과 박해를 합법적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던 구절이 없다. 한 가지는 하늘의 왕국이 자신의 아들의 결혼식에 하객을 초대하는 왕과 비교되는 우화(寓話)이다; 이 군주는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하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주석 63): “나의 황소와 가금류를 잡았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결혼식에 오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초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시골집으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일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왕의 하인들을 모욕하고 죽인다. 왕은 이 살인자들에게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의 마을을 파괴한다; 왕은 큰길로 사람들을 보내어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식에 초대한다: 하객 중 한명이 예복을 입지 않고 만찬자리에 앉아다가 결박을 당하고 어두운 바깥으로 내던져진다.
이 우화가 하늘의 왕국에만 적용되어 어떤 사람도 합당한 결혼예복을 입지 않고 식사를 하러 온 이웃을 재갈을 물리거나 감옥에 넣을 권리를 가져서는 틀림없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고, 역사 속에서 유사한 문제로 신하를 교수형에 처한 어떤 군주도 나는 알지 못한다; 황제가 자신의 가금류를 잡고 만찬에 초대하기 위해 제국의 군왕들에게 사자를 보낼 때 이 군왕들이 그 사자들을 죽일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축제에 초대하는 것은 복음 설교를 상징한다; 군왕이 보낸 사자를 살해하는 것은 지혜와 미덕을 설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를 상징한다.
또 다른 우화는 (주석 64) 자신의 친구들을 큰 만찬에 초대하는 특별한 남자에 관한 것으로, 만찬 준비가 끝나자 그는 자신의 하인을 보내 친구들에게 알린다. 친구 한명은 땅을 사서 보러 가야 한다고 사과한다: 그러나 땅을 보러가는 때는 밤이 아니기에 이 변명은 유효해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 친구는 다섯 쌍의 소를 샀는데 그 소를 살펴보러 갈 예정이다: 만찬 시간에 소를 살펴보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이전 사례와 같이 틀렸다; 세 번째 친구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못 온다고 대답했는데 분명히 그 핑계는 용인될 수 있다. 가장(家長)은 화가 나서 장님과 절름발이를 자신의 잔치에 초대했는데, 여전히 빈자리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큰길로 가서 울타리를 따라서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오라.”
이 우화는 하늘의 왕국에 대한 비유라고 사실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을 강제로 데려오라는 말은 너무 남용되었다; 그러나 한명의 하인이 만나는 사람 모두를 강제로 주인집 만찬에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손님이 강제로 끌려와서 식사가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을 강제로 데려오라는 말은, 가장 신뢰받는 비평가들에 따르면, 다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간구하고, 간청하고, 재촉하고, 승낙을 받으라. 이 간청과 이 만찬은 박해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교회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눈이 멀고 다리를 절며 강제로 인도되어야 할 것인가? 예수는 동일한 우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유한 친구나 친척들에게 만찬을 베풀지 말라”; 그로부터 친척들과 친구들이 조금 재산을 갖자마자 그들과 실제로 만찬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는가?
예수-그리스도는, 만찬의 우화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주석 65):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신의 영혼도 증오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의 제자나 기타 등등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들 가운데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누가 먼저 비용을 생각하지 않겠는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신의 부모를 증오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정도로 충분히 비뚤어진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나와 네가 지닌 가장 귀한 애정 사이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이 말의 의미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가?
성 마태(Matthieu)의 구절을 인용한다 (주석 66):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이교도과 같고 세리(稅吏)와 같다”; 이것은 이교도들과 왕의 징세원들을 박해해야 한다고 절대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적 손에 넘겨지지는 않는다. 시민의 특권을 박탈당하기는커녕 징세원들에게는 가장 큰 특권이 주어졌다; 징세원은 성서에서 비난을 받는 유일한 직업이다, 그리고 정부가 가장 호의를 베푸는 직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징세원들에게 베푸는 참작과 같은 관용을,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들의 형제에게 베풀지 않는가?
사람들이 흔히 남용했던 다른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 아침에 배가 고팠던 예수가, 무화과의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뭇잎만 있던 무화과나무로 갔다: 그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더니 나무는 곧 시들었다.
이 기적에 대하여 몇 가지 다양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박해를 허용하는 한 가지 설명이라도 있는가? 무화과나무는 3월 초순경에 열매를 맺을 수 없었는데 예수는 그 나무를 시들게 만들었다: 그것이 연중 어느 때라도 우리 형제들을 고통으로 시들게 만들 이유가 되는가? 호기심 많고 허영에 찬 우리의 정신 안에서 난제가 태어나는 원인 모두를 성서 속에서 존중하자, 그러나 거칠고 잔인하게 되기 위하여 남용하지는 말자.
박해하는 정신은, 모든 것을 남용하는데, 사원으로부터 상인들이 추방당하는 데서, 그리고 악령이 든 한 사람의 몸에서 쫓겨나 2천 마리의 더러운 동물의 몸으로 들어가는 악마 무리에서 다시 정당성을 찾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례가 하느님 스스로 율법위반에 대하여 행하신 심판임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주님의 전당 앞뜰을 상인의 가게로 바꾸는 것은 주님의 전당에서 존경심이 결여된 것이었다. 유태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le sanhédrin)과 성직자들은 제물을 편리하게 바치기 위하여 가게를 교회 앞뜰에 허용했다.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는 하느님이 틀림없이, 인간의 형상 아래 숨겨져 있을지라도, 그 신성모독을 파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자신이 수호자였던 율법에 철저히 금지된 가축을 나라 안으로 몰고 온 사람들을 하느님은 징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에는 교리에 관한 박해와 최소한의 관련도 없다. 불관용의 정신은 도처에서 가장 허황된 구실을 찾기 때문에 매우 사악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예수-그리스도의 거의 모든 나머지 말과 행동은 온유함과 인내와 관용을 설교한다. 탕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족 중에서 아버지이다; 가장 마지막에 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받는 사람은 일꾼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예수 자신은 금식을 하지 않은 자신의 제자들을 옹호한다; 죄지은 여인을 사면하며 간음한 여인에게 성실성을 권유하여 만족한다; 심지어 예수는 가나(Cana)의 손님들이 지닌 순진한 쾌락에 응하기도 하였는데 그 손님들은 이미 술에 취해서 다시 술을 요구한다: 그는 손님들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고 싶어 하여 물을 술로 바꾸어 준다.
예수는 심지어 유다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데 유다는 그를 배반하려 한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검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예수는 세베대(Zébédée)의 자식들을 꾸짖는데 그 자식들은 어떤 마을에서 세베대에게 숙소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자 엘리야처럼 하늘로부터 불이 그 마을로 내려오도록 만들려고 했다.
마침내 예수는 시기심에 희생되어 죽는다. 성(聖)과 속(俗),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감히 비교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많은 관련이 있다. 이 그리스 철학자는 궤변론자들과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증오에 의하여 죽었다: 기독교 입법가인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성직자들의 증오 아래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기를 원치 않았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해서 스스로를 바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중상모략한 사람들과 편파적인 재판관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를 자신처럼 어느 날 대접해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했다: 예수는 소크라테스보다 무한히 더 훌륭하여 아버지 하느님에게 자신의 적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듯이 보였다면, 예수-그리스도가 느꼈던 고통이 매우 커서 스스로 피가 섞인 땀을 그 고통 속에서 흘렸다면, 그것은 가장 격렬하고 가장 특수한 증상인데, 예수가 걸친 인간의 육체에 존재하는 모든 허약함까지 자신을 낮춘 것이다. 예수의 육체는 흔들리지만 그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예수는 진정한 힘, 진정한 위대함은 우리가 그 아래 무릎을 꿇는 사악함도 견디어내는 것을 포함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은 극단적인 용기이다.
소크라테스는 궤변론자들을 무식쟁이라고 불렀고, 그릇된 믿음을 그들에게 증명해보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권능을 사용하여 율법학자와 (주석 67) 바리새인들을 위선자, 정신병자, 맹인, 사악한 자, 뱀, 독사 인종으로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종파를 세우길 원한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새로운 종파를 소개하기를 원한다고 고소하지 않았다 (주석 68). 제사장들과 공의회 전체가 예수를 죽게 만들기 위하여 예수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구했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그들이 거짓 증거를 구했다면, 그들은 율법에 반하여 공개적으로 설교한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모세의 율법에 복종했다. 모든 다른 아이들처럼 예수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다. 그가 그 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면, 동양의 모든 민족에게서처럼 그것은 유태인에게는 봉헌된 의식이었다. 모든 율법적 오점은 세례에 의하여 씻겼다; 그런 방식으로 제사장들로 몸을 정화했다: 사람들은 엄숙한 속죄일에 물속에 몸을 담갔고,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예수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준수했다: 그는 안식일을 모두 지켰다; 그는 금지된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모든 축제일을 지켰으며 심지어, 죽기 전에, 유월절을 지켰다; 예수는 새로운 견해를 지녔다는 혐의를 받지 않았고 이방인의 의식을 치렀다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 유태인으로 태어나 그는 유태인으로 살았다.
두 명의 증인이 나타나서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고발했다 (주석 69): “내가 성전을 파괴할 수 있으며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런 담론은 세속적인 유태인에게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파를 세우고 싶어 한다는 고발이 아니었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심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할 것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대제사장이 이해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벨리알의 아들(fils de Bélial)이라는 단어를 사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듯이 이 표현을 정의로운 사람을 의미하는 데 사람들은 몇 번 사용했다 (주석 70). 거만한 유태인들에게는 하느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성스러운 신비를 알지 못했다.
예수는 그에게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아들이 하느님의 정의(正義) 오른쪽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당신이 곧 보리라고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이 답변은 화가 난 유대 공의회 산헤드린에게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다. 산헤드린에는 처벌할 권리가 더 이상 없어서 지방 로마 총독에게로 예수를 데려가서 공공질서 파괴자로 중상모략을 하는데,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했으며, 게다가 유태인의 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반역죄로 고소당한 것이 가장 큰 증거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Pilate)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임을 알고 우선 갈릴리의 지방관인 헤롯(Hérode)에게 보냈다. 헤롯은 예수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열망하여 자신이 왕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헤롯은 예수를 경멸하고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는데, 빌라도는 무가치하게 허약한 사람으로 자신에 저항하여 촉발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예수를 기소하며, 요세푸스(Josèphe)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유태인의 저항을 경험했다. 빌라도는 그 후 베스도(Festus) 총독이 지녔던 동일한 관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율법은 관용인지 불관용인지를 질문한다. 당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사형집행인이 아니라 순교자가 되라.


15장

불관용에 반하는 증언

신(神)에 대한 선택을 막는 것은, 종교와 관련하여, 인간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불경스러운 짓이다: 어떤 인간도, 어떤 신도 강요된 예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호교서, 24장)
우리가 신앙을 방어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면, 주교들이 반대할 것이다. (성 힐라리우스[Saint HILAIRE], 1권)
강요된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설득을 해야지 억제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명령을 해서는 안 된다. (락탄티우스[JACTANCE], 3권)
이성으로 설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힘으로, 매질로, 투옥으로 끌려고 하는 것은 비참한 이단행위이다. (성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E], 1권)
종교에 강압보다 더 역행하는 것은 없다. (성 유스티누스[saint JUSTIN], 순교자, 5권)
하느님이 용인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박해하는가? 도나티스트(les donatistes)와의 행한 자신의 논쟁으로 인하여 자신이 엄격해지기 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는 말했다.
유태인에게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말라. (제 4차 톨레도[Tolède] 공의회, 교회법 56항)
충고하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의 편지.)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여 실수를 파괴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루이 3세에게 행한 프랑스 성직자의 말.)
우리는 항상 가혹한 방식에 반대했다. (성직자 총회, 1560년 8월 11일.)
신앙은 설득하는 것이지 명령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님[Nîmes] 시의 주교 플레시에[FLECHIER]의 편지 19.)
우리는 심지어 모욕적인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뒤 벨레[Du BELLAI] 주교, 목사의 지침 중에서.)
영혼의 질병은 억압이나 폭력에 의하여 치유되지 않음을 기억하라. (르 카뮈[LE CAMUS] 추기경, 목사의 지침 1688.)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베풀라. (캉브레[Cambrai] 대주교 페늘롱[FENELON], 부르고뉴[Bourgogne] 공작에게.)
종교로부터 강요된 강압은 그 종교를 인도하는 영혼이 진실에 적대적인 정신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소르본느 신학자 디루아[DIROIS], 6권, 4장.)
폭력은 위선자들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도처에서 위협 소리를 낼 때 아무 것도 설득하지 못한다. (틸몽[TILLEMONT], 교회사 6권.)
고대 교회의 족적을 밟아가는 것은 공정함과 합리적인 이성에 맞는 것처럼 보이는데, 고대 교회는 종교를 설립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파리 고등법원이 앙리 2세에게 주는 경고.)
폭력은 정신이나 기타 등등 안에 뿌리를 둔 사악함을 치유하기보다는 성가시게 하는 능력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운다. (드 투[DE THOU], 앙리 4세에게 보낸 서간체 헌사.)
신앙은 칼날로 생겨나지 않는다. (스리지에[CERISIERS], 앙리 4세와 루이 13세의 통치에 관하여.)
마치 설득이 강압의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종교를 심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만적인 열정이다. (불렝빌리에[BOULAINVILLIERS], 프랑스.)
사랑에 관해서와 같이 종교에 관해서도 이렇다: 명령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강압은 더욱더 그렇다; 사랑하고 믿는 것보다 더 자주적인 것은 없다. (아믈로 드 라 우세[AMELOT DE LA HOUSSAIE], 오사[Ossat]의 추기경의 편지에 대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진실을 보도록 만들기 위하여 하늘이 당신을 충분히 사랑했다면, 당신에게 커다란 은총을 베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하는 일이 유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에게 있는가? (법의 정신, 25권.)
모두 유사한 구절로 구성된 엄청난 책을 우리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역사, 우리들의 담론, 우리들의 설교, 우리들의 도덕에 관한 글들, 우리들의 교리문답은 모두 오늘날 관용으로부터 나온 이 신성한 의무를 발산하며 가르친다. 어떤 불가피성 때문에, 어떤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가 매일 선언하는 이론을 실제에서 우리는 부인하는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도덕을 부인할 때, 그것은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어긋나게 되도록 우리가 만들 어떤 이익이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의 견해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와 그리하여 우리를 증오하도록 그들을 만드는 데는 어떤 이익도 없다. 그러므로 불관용 안에는, 다시 한 번, 터무니없음이 있다. 그러나 양심을 구속하는 데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터무니없지 않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다음 장은 그런 사람들을 겨냥한다.


16장

죽어가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 사이의 대화


지방의 한 마을에서 한 시민이 임종의 고통에 빠졌다; 한 건강한 사람이 그의 임종 순간에 와서 그를 모욕하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구나! 항상 나처럼 생각하게: 이 서류에 서명하게, 당신도 나도 읽지 않은 책 속에 다섯 명제가 있음을 인정하게; 즉각 베렌가리우스(Bérenger)에게 반대하여 랜프랭크(Lanfranc)의 견해를 지니고, 성 보나벤투라(saint Bonaventure)에게 반대하고 성 토마스(saint Thomas)의 견해에 동조하게; 프랑크푸르트(Francfort) 공의회에 반대하고 2차 니케아(Nicée) 공의회를 수용하게;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위대하다”라는 말이 어떻게 명시적으로 “나는 아버지만큼 위대하다”를 의미하는지 지금 나에게 설명하게.
성부(聖父)가 어떻게 성자(聖子)에게 부성(父性)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전하는지 나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육체를 쓰레기더미에 던지겠네; 당신 자식은 당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할 것이고 당신 아내는 결혼지참금을 빼앗길 것이어서 당신 가족은 빵을 구걸할 것이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당신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당신이 나에게 하는 협박은 내 귀에 모호하게 다가오고 나의 영혼을 괴롭히며 나의 죽음을 무섭게 만든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라.
무례한 사람.
불쌍히 여기라! 당신이 나의 의견을 죄다 갖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불쌍히 여길 수 없어.
죽어가는 사람.
슬프다! 이 마지막 순간에 나의 감각은 시들었고, 나의 이해력의 모든 문은 닫혔으며, 나의 아이디어는 도망쳤으며, 나의 사고는 꺼졌다고 당신은 느낀다. 내가 논쟁할 상태에 있는가?
무례한 사람.
음,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죽어가는 사람.
당신을 기쁘게 만들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위증을 할 수 있겠나? 나는 곧 위증을 처벌하는 하느님 앞에 나타나려 하는데.
무례한 사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즐겁게 묘지에 묻힐 것이고, 당신의 아내와 당신의 자식들은 잘 살게 될 것이다. 위선자로 죽게; 위선은 좋은 것이네: 위선은 악이 미덕에게 주는 찬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 생각에 조금 위선적인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죽어가는 사람.
슬프다! 당신은 하느님을 경멸하는구나, 아니면 임종의 순간에 거짓말을 하라고 당신이 요구하기 때문에 당신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하느님으로부터 틀림없이 곧 심판을 받아서 이 거짓말에 대하여 답변을 할 당신.
무례한 사람.
뭐라고, 무례하다! 내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다니!
죽어가는 사람.
형제여, 용서하라,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알지 못할까봐 두렵다. 내가 숭배하는 하느님께서 이 순간 나의 힘을 복원하시어 죽어가는 목소리고 당신에게 말하건대, 당신이 하느님을 믿는다면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하느님은 나에게 아내와 자식을 주었기에 그들이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지 말라. 나의 육신에 대해서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 나의 육신을 당시에게 맡긴다; 그러나 당신에게 간청하건대 하느님을 믿어라.
무례한 사람.
논쟁을 하지 말고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을 행하라; 나는 그것을 원하고 당신에게 명령한다.
죽어가는 사람.
나를 그렇게 괴롭혀서 무슨 소득이 있는가?
무례한 사람.
뭐라고! 무슨 소득? 내가 당신의 서명을 얻는다면 성당 참사회원 직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아! 나의 형제여!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다; 나는 죽는다, 나는 하느님에게 하느님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쳐서 당신을 개종하기를 간구하련다.
무례한 사람.
건방진 놈, 지옥에나 가라, 서명도 하지 않다니! 그놈 대신 내가 서명하여 그놈의 서명을 조작해야겠다 (주석 71).
다음 편지는 동일한 도덕을 확인시킨다.


17장

1714년 5월 6일 어느 신부가 예수회 르 텔리에(LE TELLIER)에게 쓴 편지

신부님,
예수회를 적으로부터 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제시하여, 신부님께서 저에게 내린 명령에 저는 순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백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백 오십 만이라고 말하지만 제가 믿기에 프랑스 왕국 안에는 50만의 위그노 교도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얼마든, 나의 의무에 따라 여기 나의 견해를 매우 정중하게 신부님께 제출합니다.
첫째, 모든 개신교 목사들을 하루에 잡아들여, 공개적으로 본보기를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장관(壯觀)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한 번에 동일한 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쉽습니다.
둘째, 길에서 죽이면 어떤 소요사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개신교 부모들을 침상에서 나는 암살할 것입니다; 몇 명은 심지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만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이 처형은 우리의 원칙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이유인즉, 많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이단자를 죽여야 한다면 모든 이단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지막 전쟁이후에 국가의 인구가 너무 줄어서는 안 됨을 고려하여 나는 다음날 처녀들을 훌륭한 가톨릭교도와 결혼시킬 겁니다; 그러나 14세와 15세의 소년에 관해서는, 이미 나쁜 원리에 젖어 있어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파멸시키지 못하기에 나의 견해인즉 그들 모두를 거세해서 이런 종자가 재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린 소년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예수회의 학교에서 양육될 것이며 그들이 산체스(Sanchez)와 몰리나(Molina)의 작품을 암기할 때까지 매질을 할 것입니다.
넷째, 1704년에 호흐스테트(Hochstedt) 전투에서 우리가 패하던 날 웃던 그 지방 출신의 두 명의 노파를 내가 보았으므로, 수정할 수 있지만, 알자스(Alsace)의 모든 루터교도에게도 동일하게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섯째, 얀센파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다소 더 당혹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나는 얀센파가 적어도 6백만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정신과 같은 정신은 그 숫자에 기겁하지 않겠지요. 나는 프랑스 교회의 독립을 그렇게 치욕적으로 지지하는 모든 법원을 얀센파에 포함시킵니다. 이 적대적인 모든 정신을 귀하께서 억압하는 방법을 평소처럼 신중하게 고찰하는 일은 귀하의 몫입니다. 화약 음모사건은 원하던 성공을 이룩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음모를 꾸민 사람 한 명이 경솔하게 친구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하에게는 친구가 없으므로 그런 불리한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약(pulvis pyrius)이라고 불리는 수도사 슈바르츠(Schwartz)의 발명품을 사용하여 프랑스 왕국의 모든 법원을 폭파하는 것은 귀하에게 매우 쉬울 것입니다. 제가 계산하건대 각 법원에 36통의 화약이 필요하여, 12개 의회를 36통으로 곱하면 432통이 되는데 통 당 100 에퀴(écus)로 합계 129,600 리브르(livres)가 됩니다: 그 금액은 총장 신부님에게는 별 것 아니지요.
법원이 한 번 폭파되면, 귀하는 그들의 직무를 프랑스 왕국의 법률에 정통한 예수회교도에게 넘겨주십시오.
여섯째, 노아유(Noailles) 추기경을 독살하는 일은 쉬울 것인데, 그는 단순하여 아무것도 불신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몇몇 반항적인 주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교화의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들의 주교직은 교황이 교서를 받아서 예수회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주교가 대의(大義)의 한 부분이 되고, 모든 교구가 주교들에 의하여 전문적으로 선택되어, 여기 제가 권유하는 것이 있으니 귀하께서 충분히 혜량하십시오.
일곱째, 얀센파는 적어도 유월절에는 영성체를 한다고 하기에, 헨리 7세에게 정당한 벌을 내리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약을 성체용 빵에 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어떤 비판가는 이런 일을 하면서 몰리나파(molinistes)에게 쥐약을 또한 주는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의견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결점이 없는 계획은 없으며, 어떤 장소에서 파멸을 초래하지 않을 제도도 없습니다. 작은 난제로 인하여 우리가 저지를 당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큰 선(善)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선(善) 다음에 나쁜 결과가 뒤따른다할지라도 결과는 고려할 가치가 없어서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책할 것이 없습니다: 증명된 바와 같이 소위 종교개혁가들과 모든 얀센파는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지옥에 들어가야 할 시간을 가속화 시킬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천국이 몰리나파의 권리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이고 나쁜 의도 없이 그들을 죽게 만들어서, 우리가 그들의 기쁨을 가속화 합니다; 우리는 일석이조로 섭리를 관장하는 사람이 됩니다.
숫자에 다소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번성하던 날부터 1707년까지, 다시 말해서 약 14세기동안 신학(神學)으로 인하여 5천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음을 귀하는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약 650만 명을 교살하거나 참수하거나 독살할 것을 제안함일 따름을.
나의 계산이 공정하지 않다고, 그리고 내가 비례계산법을 어긴다고 아마도 여전히 그들은 우리에게 반대할 것입니다: 이유인즉 1400년 동안 차별과 신학교리 때문에 5천만 명이 죽었다면, 나눗셈으로 매일 35,714명이 죽었는데 그리하여 올해 나눗셈에 의하면 내가 6,464,285명을 너무 많이 죽인다고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이런 말싸움은 매우 유치합니다; 그런 말싸움은 심지어 불경스럽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유인즉, 세상의 끝까지 내가 가톨릭교도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사람들은 나의 행동으로 알지 못합니까? 모든 비판자들에게 답변을 하려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부님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는,
앙굴렘(Angoulême) 태생으로 예수회를 맡고 있는 겸허하고 신앙적이고 친절한 R...로부터.
이 계획은 실행될 수 없었는데 이유인즉, P. 르 텔리에(Le Tellier) 신부가 그 계획에서 몇 가지 난점을 발견했고 다음해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론을박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P. 르 텔리에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의 견해를 부분적으로나마 합법적으로 따를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좋다. 이 계획을 조목조목 실행하는 것은 혹독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열형에 처하거나 교수형에 처하거나 혹은 갤리선(galères)에서 노역을 시켜야 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다음 글의 목표이다.


18장

불관용이 인간적인 권리인 유일한 경우들

정부에게 사람들의 실수를 처벌할 권리가 없으려면, 그 실수가 범죄여서는 안 된다; 그 실수는 사회를 혼란하게 할 때만 범죄가 된다: 그 실수는 광신을 부추기는 순간 그 사회를 혼란케 한다; 그러므로 관용을 받으려면 사람들은 먼저 광신적이어서는 안 된다.
몇 명의 젊은 예수회교도들이, 교회가 버림받은 자들을 미워하는 것과 얀센파가 교황의 교서에 의하여 버림받은 것과 그리하여 얀센파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을 것을 알고, 오라토리아회(oratorien)의 크넬(Quesnel) 신부가 얀센파이기 때문에 오라토리아회(Oratoire)의 신부들이 사는 집을 방화하러 간다면 이 예수회교도들은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회가 죄악의 교리를 만들었다면, 예수회의 규칙이 프랑스 왕국의 법에 위배가 된다면, 예수회를 해체시키고 그 성직자들의 직위를 빼앗아 시민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들에게 상상으로는 악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득인데, 까닭인즉 사제복 대신에 짧은 옷을 입고 노예 대신에 자유인이 되는데 어디에 악이 있다는 말인가? 평화 시에 군부대 전체가 재편되어도 군부대는 불평하지 않는다. 왜 예수회는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예수회를 재편하려고 할 때 그렇게 고함을 치는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성모 마리아를 위한 성스러운 열정에 심취하여, 마리아가 원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들의 교회를 부수러 가면, 거의 예수회 수도사들처럼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파나 칼빈파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양심의 움직임을 따른다, 인간보다는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 우리는 참된 양떼이다, 우리는 늑대를 멸종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늑대라는 것이 명백하다.
광신의 충격적인 보기 하나는 덴마크의 작은 종파였는데, 그 종파의 교리가 세상에서 최고였다. 그 사람들은 형제들에게서 영원한 구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교리의 결과는 기묘했다.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 모든 어린 아이는 지옥에 떨어지며, 세례를 받고 즉시 죽는 축복을 받은 어린 아이는 영원히 영광을 누린다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날 수 있던 새로 세례를 받은 소년소녀들의 목을 졸랐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이 어린이들에게 확보해줄 수 있던 가장 큰 행복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서 이승과 지옥의 죄악과 비참함을 동시에 없애주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어기지 않고 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인자한 사람들은 큰 행복을 얻기 위하여 작은 악을 행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어린 아이들의 생명에 대하여 어떤 권한도 그들에게는 없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충분히 세속적이어서 자녀들이 천국에 가기 위하여 목이 잘리는 것을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곁에 두기를 더 좋아한다는 점과,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한 마디로 판사들은 살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유태인들에게는 우리들로부터 강탈하고 우리들을 죽일 권리가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유인즉 구약성서 속에 백가지 관용의 본보기가 있다할지라도 혹독한 몇 가지 사례와 몇 가지 율법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태인들에게 우상숭배자들을 죽이라고, 그리고 혼기가 된 여자들만 남겨두라고 때때로 명령했다: 유태인들은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간주하여, 오늘날 우리가 유태인들을 관용한다할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의 딸만 세상에 남겨둘 것이다.
유태인들은 우선 모든 투르크인(les Turcs)을 죽이는 필수적인 의무를 지게 될 것인데, 그 의무는 어렵지 않게 진행된다: 투르크인들은 히타이트(Ethéens), 여부스(Jébuséens), 아모리(Amorrhéens), 예세네(Jersénéens), 에베(Hévéens), 아르세(Aracéens), 키네(Cinéens), 하맛(Hamatéens), 사마리아인(Samaréens)들의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민족 모두는 저주를 받았다; 그들의 땅은, 길이가 250리 이상이었는데, 몇 가지 조약에 의하여 유태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 땅은 유태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천년 이상 그 땅을 강제로 소유하고 있다.
유태인들이 오늘날 생각한다면, 그들을 갤리선에서 노동을 하도록 만드는 답변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불관용이 합당하게 보이는 유일한 경우들이다.


19장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란에 관한 설명

강희황제 집권 초년에 광동의 고위관리가 이웃집에서 나는 큰 소음을 자신의 집에서 들었다: 그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 조사했다;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덴마크 회사 소속의 신부와 바타비아에서 온 신부와 예수회 신부라고 사람들은 대답했다; 중국인 고위관리는 그들을 초치하여 다과를 베풀면서 왜 논쟁을 벌이는지 물었다.
예수회 신부는 항상 이성을 지닌 자신이 항상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매우 괴롭다고 중국인 고위관리에게 대답했다; 최고도로 절제해서 논쟁을 벌였으나 마침내 인내심이 소진되었다고 대답했다.
중국인 고위관리는 최대한의 분별력을 발휘하여 논쟁에서 예절이 얼마나 필요한지 느끼도록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무엇에 관한 문제였는지를 그들에게 물었다.
예수회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대인, 판결을 내려주시오; 이 두 분은 트리엔트 공의회(concile de Trente)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 “그것 참 놀랍군요.”라고 중국인 고위관리는 말했다. 그 다음에 고집불통인 두 명의 신부를 향하여 말하였다: “신부님들, 여러분은 큰 모임의 결정을 존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트리엔트 공의회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항상 더 많이 아는 법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그리고 이성이 자신의 머리 속에만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위대한 공자가 가르친 것은 그러합니다; 그래서 귀하들이 나를 믿는다면, 트리엔트 공의회에 의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덴마크인 신부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대인께서 아주 현명하게 말하십니다; 우리는 의무처럼 큰 모임을 존중합니다; 또한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앞서 열린 몇 번의 공의회의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 오! 그렇다면 용서하십시오, 신부님께서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여운 예수회 신부의 의견에 반대해서 신부님과 이 네덜란드 신부님은 같은 견해를 지니신 거지요? 라고 대인은 말했다.
- 전혀 그렇지 않다고 네덜란드 신부가 말했다; 이 분은 예수회 신부의 견해와 거의 동등하게 허황된 견해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회 신부는 여기서 대인과 함께 점잖은 체합니다; 참을 방법이 없습니다.
- 여러분을 이해할 수 없군요, 대인은 말했다; 귀하 세 분 모두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요? 세 분은 우리나라 안에서 기독교를 포교하려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세 분은 동일한 교리를 지녀야 하지 않습니까?
- 대인께서 아시는군요, 예수회 신부가 말했다; 이 두 분은 불구대천의 원수이고, 두 분 모두 나에게 반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 분 모두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과, 나만 옳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그것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중국인 고위관리가 말했다; 아무튼 세 분 모두 틀릴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회 신부는 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동안 덴마큰 신부와 네덜란드 신부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중국인 고위관리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덴마크 신부가 자기 차례에 이야기를 했다; 두 명의 적대적인 신부는 그를 불쌍하게 쳐다보았고, 중국인 고위관리는 더 이해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신부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마침내 세 명의 신부 모두가 함께 이야기를 했고, 서로 크게 욕설을 주고받았다. 정직한 중국인 고위관리는 애를 써서 그들을 말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중국인들이 귀하의 교리를 용인하기를 원하신다면, 처음부터 불관용적이어서도 안 되고 불관용을 받을만해서도 안 됩니다.”
회합이 끝나자 예수회 신부는 도미니쿠스회 선교사 한 명을 만났다; 그 신부는 그 선교사에게 진리는 항상 이긴다고 확신시키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고 선교사에게 알려주었다. 그 선교사는 예수회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당신은 주장을 관철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과 우상숭배를 증명해보였을 거요.” 논쟁이 과열되었다; 도미니쿠스회 선교사와 예수회 신부는 서로 머리를 잡았다. 중국인 고위관리는 그 소문을 듣고 두 명 모두 감옥에 집어넣었다. 중국인 고위관리의 부하가 상관인 재판관에게 말했다: “재판관께서는 얼마동안 저들을 가두어둘까요? - 저들이 의견일치를 이룰 때까지, 재판관이 말했다. - 아! 그렇다면 저들은 일생동안 감옥에 있어야겠군요, 중국인 고위관리의 부하가 말했다. 어이쿠! 저들이 서로 용서할 때까지다, 재판관이 말했다. - 저들은 서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중국인 고위관리의 부하가 말했다; 저는 저들을 알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아이쿠! 저들이 서로 용서하는 체할 때까지다” 중국인 고위관리가 말했다.


20장

사람들을 맹신에 묶어 두는 것이
유용한지

인간이라는 종의 허약함이 그러하고, 또 인간의 괴팍함이 그러해서, 맹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 없이 사는 것보다 의심할 바 없이 가능한 모든 맹신에 의하여 미혹당하는 것이 더 좋다. 인간에게는 항상 고삐가 필요하여, 동물과 숲의 요정과 물의 요정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습다할지라도, 무신론이 빠지는 것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이 환상을 숭배하는 것이 더 합당하고 더 유용했다. 논쟁을 좋아하는 무신론자는 난폭하고 강력하여 피를 부르는 미신숭배자만큼 가혹한 골칫덩어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합당한 개념이 없을 때, 불행한 시대에 진짜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위폐를 사용하는 것처럼, 가짜 개념이 합당한 개념을 대신한다. 거짓 신들에 의하여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이교도는 범죄 저지르기를 두려워했다; 말라바르인(le Malabare)도 사원의 탑에 의하여 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확립된 사회가 있는 곳마다 종교는 필요하다; 법률은 명시적인 범죄를 감시하고, 종교는 은밀한 범죄를 지켜본다.
그러나 한번 사람이 순수하고 성스러운 종교를 수용하게 되면, 맹신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위험해진다. 하느님이 빵을 주시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도토리를 먹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맹신의 종교에 대한 관계는 점성술의 천문학에 대한 관계로, 매우 현명한 어머니의 매우 어리석은 딸이다. 이 두 명의 딸이 오랫동안 지구 전체를 미혹시켰다.
우리의 야만적인 세기에 신약성서를 가진 두 명의 봉건 영주가 드물 때, 통속적인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그 봉건영주들에게, 그 영주의 백치 같은 아내들에게, 그리고 동물과 같은 가신(家臣)들에게 우화를 제시하는 것은 용서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 크리스토포루스(saint Christophe)가 아기 예수를 강 한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옮겼다고 그들이 믿게 만들었다; 그들은 무당과 악령에 홀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흠뻑 빠져들었다; 그들은 성 제누(saint Genou)가 통풍(痛風)을 고쳤고 성 클레르(sainte Claire)가 안질을 치료했다고 쉽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늑대인간을 믿었고, 아버지들은 성 프랑수아(saint François)의 허리끈을 믿었다. 유물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종교가 정화되었을지라도, 그렇게 많은 맹신의 잔재는 특정 시기에 여전히 민족들에게 남아있었다. 샬롱(Châlons)의 주교인 드 노아유(de Noailles) 씨가 예수-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배꼽이라고 주장되는 유물을 불속에 던졌을 때, 샬롱 시 전체가 그를 고발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함만큼 용기를 지니고 있어서 곧, 교회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배꼽을 두지 않고도, 정신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숭배할 수 있음을 샹파뉴 사람들(Champenois)에게 믿게 했다.
얀센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민족정신 속에서 기독교를 욕되게 하던 그릇된 이념의 대부분을 알지 못하게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하는 것을 얻고 벌을 받지 않고 죄를 지으려면 성모 마리아에게 30일 기도를 하면 충분하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백성은 비를 내리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것은 성 주느비에브(sainte Geneviève)가 아니고, 자연원소를 배열하는 이는 하느님 자신임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성인들이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성 프랑수와 하비에르의 생애(la Vie de saint François Xavier)를 쓴 작가들이 다시 세상에 온다면, 이 성인이 아홉 명의 죽은 사람을 부활시켰다고, 그 성인이 바다와 땅에 동시에 존재했다고, 그의 십자가가 바다에 떨어지자 게 한 마리가 그 십자가를 돌려주었다고 감히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종교적 파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바, 로베르(Robert) 왕이 자신의 대모인 베르트(Berthe) 공주와 결혼하여 교황 그레고리(Grégoire) 5세에 의하여 파문을 당했을 때, 그의 가신(家臣)들은 왕에게 바친 고기를 창문을 통하여 던졌고 베르트 왕비가 이 근친상간성 결혼으로 벌을 받아 거위를 낳았다. 파문당한 프랑스 왕의 급사장이 창문을 통하여 왕의 식사를 던졌는지, 그리고 유사한 경우에 왕비가 거위새끼를 낳았는지 오늘날 의심스럽다.
교외 한 구석에 ‘경련하는 자들’이 몇 명 있다면, 그것은 이(蝨)가 전염시키는 질병으로 가장 사악한 민중만 공격을 당할 것이다. 귀족의 저택 안에서처럼 매일 이성(理性)은 프랑스에서 상인의 가게 안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그 열매가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만큼, 이 이성의 열매를 가꾸어야 한다. 프랑스가 파스칼(les Pascal), 니콜(les Nicole), 아르노(les Arnauld), 보쉬에(les Bossuet), 데카르트(les Descartes), 가상디(les Gassendi), 벨(les Bayle), 퐁트넬(les Fontenelle), 기타 등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몽된 이후, 가라스(Garasse)와 므노(Menot)의 시대부터 프랑스가 다스려지던 것처럼 프랑스는 다스려질 수 없다.
인류를 망쳐놓고 그렇게 오랫동안 돈을 받고 명예를 받으며 오류를 저지른 대가들이, 나는 위대한 스승들을 말한다, 씨앗은 새싹을 틔우기 위해 썩어야 함을 오늘날 믿으라고 명령한다면; 지구가 토대 위에서 고정되어 있음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지 않음을; 밀물과 썰물은 중력의 자연적 효과가 아님을, 무지개는 광선 및 기타 등등의 굴절과 반사로 형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자신들의 명령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나온 이해되지 않은 구절들에 의지한다면, 그들은 교양을 갖춘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어떻게 보일까? 금수(禽獸)라는 용어는 너무 거칠까? 그리고 이 현명한 대가들이 자신들의 건방진 무지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힘과 박해를 사용한다면, 금수라는 격렬한 용어가 변할까?
수도사들의 맹신이 경멸을 받을수록, 주교들은 더 존경을 받고 사제직은 더 주목을 받는다; 그들은 이로운 일만 하고, 교황청의 수도승들이 믿는 맹신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모든 맹신 중에서 가장 위험한 맹신은 자신의 견해 때문에 동료를 증오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성스러운 배꼽, 성스러운 음경포피(陰莖包皮), 성모 마리아의 젖과 옷을 숭배하는 것이 자신의 형제를 증오하고 박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합당하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21장

미덕이 과학보다 더 가치가 있다

교리가 적을수록 논쟁도 적다; 그리고 논쟁이 적을수록 불행도 적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틀린 것이다.
종교는 우리를 이승과 저승에서 행복하게 하려고 만들어진다. 저승에서 행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의로워야 한다.
우리의 본성이 지닌 비참함이 허용하는 만큼 이승에서 행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관용적이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에 관하여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광기의 극치일 것이다. 한 도시의 모든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보다 무기로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유클리드는 모든 사람에게 기하학의 진리를 확신시켰다: 왜? 다음 작은 공리는 분명한 추론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2 + 2 = 4. 형이상학과 신학이 뒤섞인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
주교 알렉산드르(Alexandre)와 사제 아리오스(Arios) 혹은 아리우스(Arius)가 로고스(Logos)가 성부로부터 나오는 방식에 대하여 논쟁을 시작했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우선 에우세비오스와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을 써서 그들에게 보냈다: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당신들은 크게 미친 것이다.”
두 명의 당사자가 충분히 현명하여 황제가 옳다고 동의했더라면, 기독교 세계는 300년 동안 피로 물들지 않았으리라.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미쳤고 더 지독한 것이 있는가? : “나의 친구들이여, 충성스러운 백성, 순종적인 아이, 다정한 아버지, 공정한 이웃이 된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모든 미덕을 실행하고 우정을 가꾸며 배은망덕하지 않고 평화롭게 예수-그리스도를 숭배한다고 충분하지 않소: 완전한 영원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당신들은 또한 알아야 하오; 그리고 삼위일체의 위격(位格) 안에서 당신들이 동일본질(l'omousion) 구별하기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영원히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먼저 당신들의 목을 자를 것이다.”
그런 결정을 아르키메데스(Archimède),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바로(Varron), 카토(Caton), 키케로( Cicéron)같은 사람들에게 제시했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결정에서 두 명의 상대방을 침묵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황제는 논리적 추론의 달인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초치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어떤 권위로 세상을 혼란시키느냐고 물을 수 있었다: “당신들은 하느님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간섭할 자격이 있는가? 사람들이 로고스(Logos)에 충실하다면, 사람들이 훌륭한 도덕을 설교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 도덕을 실행한다면 로고스가 만들어졌든 혹은 생겨났던 당신들에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일생동안 잘못을 많이 저질렀고 당신들 역시 그랬다; 당신들은 너무 큰 꿈을 가지고 있고 나 역시 그렇다; 제국 때문에 나는 사기를 치고 잔인한 행동을 했다; 나는 가까운 사람 거의 모두를 암살했다; 나는 그 일을 뉘우친다: 나는 로마제국을 평안하게 만들어서 나의 죄악을 갚고자 한다, 나의 옛날 야만적 행위를 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선행을 막지 말라; 나의 여생을 평화롭게 끝낼 수 있도록 나를 도와 달라.” 아마도 황제는 두 명의 논쟁자를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황제는 긴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종교회의를 주재하도록 아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와서 서양을 덮치는 모든 이 질병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 여기 있다. 그것은 논란의 대상이 된 모든 성서 구절로부터 궤변과 칼로 무장한 분노를 발생시켜 그 궤변과 칼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고 잔인하게 만들었다. 훈족(Les Huns), 헤룰리족(les Hérules), 고트족(les Goths), 그리고 반달족(les Vandales)도 무한히 작은 해악을 끼쳤고, 그들이 끼친 가장 큰 해악이란 결국 그들 자신도 이 살인적인 논쟁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22장

보편적인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

기독교도들이 서로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증명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기교나 빼어난 웅변이 필요하지는 않다. 나는 더 멀리 나아간다: 모든 인간을 우리의 형제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뭐라고! 나의 형제 투르크족이라고? 나의 형제 중국인? 유태인? 샴 사람? 그럼, 틀림없이 그렇다; 우리는 동일한 아버지의 자녀이자 동일한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닌가?
그러나 이 민족들은 우리는 경멸한다; 그리고 그 민족들은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취급한다! 좋다! 나는 그 민족들에게 크게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리라. 내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나는 적어도 이슬람의 이맘이나 불교승려가 지닌 자만심으로 가득한 고집을 경동시킬 수 있는 듯하다:
이 작은 지구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데 우주 안에서, 많은 다른 천체와 같이, 회전한다; 우리는 이 무한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사람은, 약 다섯 자 정도의 크기로, 분명히 창조에서 작은 것이다. 이 인지가 불가능한 존재들 중 하나가 아라비아나 남아프리카에 있는 이웃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하느님께서 ‘땅 위의 우리들처럼 9억의 작은 개미가 있지만, 하느님에게 소중할 나의 개미집만 있고 다른 모든 개미집은 태초부터 하느님에게 증오스럽다; 나의 개미집만 행복하고 다른 모든 개미집은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라고 나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라오.”
그 때에 그들은 나를 막고 이렇게 어리석게 말한 미치광이가 누구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 자신이다.” 그 다음에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제 기독교도들에게 말을 할 것이고, 나는 감히 예를 들어 신앙을 위한 종교재판관인 도미니쿠스회 성직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귀하는 이탈리아의 각 지방이 방언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베네치아(Venise)와 베르가모(Bergame) 사람들이 피렌체(Florence) 사람들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크루스카 아카데미(L'Académie de la Crusca)는 표준어를 정했다; 표준어 사전은 피할 수 없는 규칙이며, 부온마테이 문법(la Grammaire de Buonmattei)은 따라야 하는 확실한 길잡이 이다; 그러나 그 아카데미의 의장과 그 의장의 부재 시에 부온마테이가 자신들의 방어를 고집할 모든 베네치아 사람들과 모든 베르가모 사람들의 혀를 양심상 자를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들은 믿는가?”
종교재판관은 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차이점이 많소; 여기서 당신의 영혼 구원과 관련이 있소: 아무리 사악하여 정의로부터 떨어졌다 할지라도 한 명의 증언으로 종교재판의 재판장이 당신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당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당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호사가 당신에게 없다는 것과, 당신을 고소한 사람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과, 재판관이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가 처벌하는 것과, 재판관이 당신에게 다섯 가지 고문을 가한다는 것과, 당신이 매질을 당하고나 갤리선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화형식에 화형을 당하는 것이 당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요. 이보네(P. Ivonet), 쿠살롱(Cuchalon) 박사, 잔키누스(Zanchinus), 캄페지우스(Campegius), 로이아스(Roias), 펠리누스(Felynus), 고마루스(Gomarus), 디아바루스(Diabarus), 게멜리누스(Gemelinus)는 이점에 엄격한 분들이어서 이 경건한 관행은 부인당할 수 없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자유롭게 말할 것이다: “나의 형제여, 아마도 당신이 옳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베풀고자 하는 이익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없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이 터무니없는 지긋지긋한 사건들이 지구 표면을 항상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흔해서 우리는 복음서들이 비난하는 사건들보다 훨씬 더 큰 책 한 권을 쉽게 작성할 것이다. 이 짧은 생애 안에서 우리들처럼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매우 잔인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언하는 일이 매우 뻔뻔스럽지 않은지 나는 알지 못하기도 한다. 창조주의 심판을 그렇게 경고하는 것이 우리들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할일은 아닌 것으로 나는 본다. 나는 결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이 가르치는 모든 것과 그 말 자체를 존중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모든 하느님의 길과 하느님의 자비의 크기 모두를 알고 있는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하느님을 믿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가? 교회에 충성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각 개인이 하느님의 권리를 찬탈해서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가?
우리가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영국이나 프러시아 왕의 사망에 상복을 입었을 때,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저주받은 자에 대하여 상복을 입는다고 우리는 말하는가? 유럽 안에는 로마 교회에 속하지 않는 4천만 명의 주민이 있고, 그들 각자에게 우리는 “이보시오, 당신이 틀림없이 저주를 받았음을 고려하여 나는 당신과 식사도, 계약도, 대화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가?
프랑스 대사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알현하여 이렇게 중얼거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폐하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영원히 틀림없이 화형을 당할 것입니다. 술탄이 하느님에 대한 불구대천의 원수이어서 하느님이 복수를 하려는 대상이라고 프랑스 대사가 실제로 믿는다면, 술탄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프랑스 대사는 술탄에게 파견되어야 할까? 우리가 저주받은 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실제로 확신한다면, 어떤 사람과 우리는 거래를 할 수 있으며 시민생활의 어떤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오 자비로운 하느님의 종파주의자들이여! 당신이 잔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하느님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모든 율법이 구성되는 하느님을 숭배하면서 당신이 이 순수하고 성스러운 율법에 궤변과 이해되지 않는 논쟁을 덧붙였다면; 어떤 때는 새로운 단어 한 마디 때문에, 어떤 때는 알파벳 한 글자 때문에 당신이 분란에 불을 붙였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던 몇 가지 말과 몇 가지 의식(儀式)의 결여에 영원한 형벌을 가했다면, 인류에게 눈물을 쏟으며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혹은 하느님이 업보에 따라서 각자에게 보상할 날로 나와 함께 당신도 가자.”
“지난 세기와 우리 시대에 죽은 사람들 모두를 하느님이 계신 데 출두함을 나는 본다. 현명하고 덕망이 높은 공자에게, 입법가 솔론(Solon)에게, 피타고라스에게, 잘레쿠스(Zaleucus)에게,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에게, 경건한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선량한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인류의 기쁨인 티투스 황제에게, 에픽테투스(Epicitète)에게, 인간의 귀감이 되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우리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한다고 당신들은 확신하는가: 괴물들아, 가라, 한없이 강하고 무한히 계속되는 벌을 가서 받으라; 너희들의 고통은 나와 같이 영원하리라!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 샤텔(Jean Châtel), 라바야크(Ravaillac), 다미엥(Damiens), 카르투슈(Cartouche), 기타 등등 정해진 규칙에 의하여 죽은 너희들은 나의 오른쪽에서 영원히 나의 왕국과 나의 행복을 나누어 가져라.”
당신들은 이 말에 두려워서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그 말을 내가 언급한 뒤라 당신들에게 말할 것이 나에게는 없다.


23장

하느님에게 올리는 기도

그러므로 내가 말을 건네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모든 인간의 그리고 모든 시대의 하느님이신 당신에게 이다: 모든 것을 주시고 명령이 영원히 불변하는 하느님 당신에게, 무한 속에서 길을 잃고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서 감지되지도 않을 허약한 피조물이 감히 질문을 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우리의 본성에 붙은 오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오류로 인하여 우리가 재앙을 맞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은 우리가 서로 증오하도록 우리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으며, 우리의 목을 베기 위하여 우리에게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럽고 일시적인 삶의 짐을 지탱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로 돕도록, 우리의 허약한 육체를 덮고 있는 의복 사이와 보잘 것 없는 모든 우리의 언어 사이와 모든 터무니없는 우리의 관습 사이와 모든 불완전한 우리의 법률 사이와 모든 제정신이 아닌 우리의 의견 사이와 우리 눈에는 그렇게 불균형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동등한 모든 우리의 상황 사이의 사소한 차이들;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작은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신호가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숭배하기 위하여 정오에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당신의 태양으로부터 나온 광선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돕도록 하소서;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하여 흰색 천을 자신들의 옷에 덮고 있는 사람들이, 검은 양모 외투를 입고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게 하소서; 고대 언어로부터 형성된 방언으로 혹은 더 새로운 방언으로 당신을 숭배하는 것이 동등하게 하소서; 붉은색이나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을 입고 이 세상의 작은 흙더미로 된 작은 땅뙈기 위에서 위세를 부리고 어떤 둥근 금속 몇 조각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이 위대함이나 부유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만하지 않고 즐기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하며 쳐다보지 않도록 하소서: 이유인즉 당신은 이 허영심 안에 부러워할 것도, 뽐낼 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사람들이 노동과 평화로운 생업의 결실을 강제로 도둑질하는 강도짓을 저주하듯이, 영혼에 가해지는 독재를 사람들이 혐오하게 하소서. 전쟁의 재앙이 불가피하다할지라도, 평화의 가슴 속에서 서로 우리는 증오하지 말고, 서로 우리는 분열하지 말고, 샴(Siam)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다양한 천 가지 언어로 우리에게 이 순간을 선사한 당신의 인자함을 찬양하는 데 우리의 존재 순간을 사용하자.


24장

후기


인간을 더 인정이 많고 더 부드럽게 만들려는 의도로 내가 이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의도로 글을 썼다: 이유인즉 각자가 자신의 견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박해에 관한 작은 법전을 출판했는데 제목이 신앙과 인도적 정신의 일치(l'Accord de la religion et de l'humanité)였다 (이것은 인쇄업자의 실수다: 비인도적 정신으로 읽으라).
이 성스러운 풍자 서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그는 온유함을 설교한 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자주 의견을 바꾼 것을 고려하여, 마침내 박해를 설교했다. 그는 또한 모(Meaux)의 주교였던 보쉬에(Bossuet)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 주교는 캉브레(Cambrai)의 유명한 대주교 페늘롱(Fénelon)이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수고의 가치가 하느님에게 충분히 있다고 글로 출판하여 유죄라고 박해했다.
보쉬에는 언변이 좋았다고 나는 인정한다; 히포 레기우스(Hippone)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몇 번 일관적이지 않았지만, 다른 아프리카의 성직자들보다 언변이 좋았다고 나는 다시 인정한다; 그러나 박식한 여자들(Les Femmes savantes)에 나오는 아르망드(Armande)와 함께 나는 이 성스러운 풍자 서적의 저자에게 이렇게 자유롭게 말할 것이다:
누구의 행동을 본받기를 우리가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서 닮아야 한다.
(1장, 1막)
나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예하, 당신은 견해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처음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실제로 나는 그 의견을 더 신뢰합니다.
나는 모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예하, 당신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나는 당신이 적어도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박식하고, 훨씬 더 언변이 좋다고 본다; 그러나 왜 다른 분야에서 당신만큼 언변이 좋았고 당신보다 더 다정했던 당신의 동료를 그렇게 많이 괴롭힙니까?
비인도적 정신에 관하여 쓴 그 성스러운 풍자 서적의 저자는 보쉬에 같은 사람도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도 아니다; 뛰어난 종교재판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주 합당하게 보인다: 나는 그가 고아(Goa)에서 그 아름다운 재판소의 우두머리이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는 정치가이어서 훌륭한 정치 원리를 펼친다. “당신 집에 많은 이교도가 있다면 그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그들을 설득하라; 적은 숫자의 이교도가 있다면 교수대와 갤리선을 사용하면 많이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그가 89쪽 및 90쪽에서 충고하는 것이다.
고맙게도 나는 훌륭한 가톨릭교도이고 위그노교도가 순교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풍자 서적 속에서 그가 뽐내는 듯 보이는 바와 같이, 그가 재상이 된다면 나는 신임장을 받는 날 영국으로 떠남을 경고한다.
그동안 나는 하느님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 항상 나쁘게 생각하도록 허용함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는 불관용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벨(Bayle)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합당하고 영리한 일이다; 그리고 벨이 종파주의자와 악당을 처벌해야 한다고 동의하는 것으로부터 그는 평화로운 훌륭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불과 피로 처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의 저서 거의 전부가 쎙 바르텔레미 학살 옹호를 모방한 것이다. 그 저서는 호교론자의 주장이거나 그 주장을 반영한다. 이런저런 경우에, 그런 스승이나 제자가 국가를 경영하지 않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자가 되는 경우가 생기면 나는 그 성스러운 풍자 서적 93쪽의 2행인 다음 글에 대하여 그들에게 탄원서를 낼 것이다:
“국민의 20분의 1의 행복을 위하여 전체 국민의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가?”
프랑스에서 한 명의 위그노교도에 대하여 실제로 20명의 로마 가톨릭교도가 있다면, 나는 그 위그노교도가 20명의 가톨릭교도를 먹어치울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왜 이 20명의 가톨릭교도는 이 위그노교도를 먹어야 하고 왜 이 위그노교도가 결혼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도피네(Dauphiné)와 제보당(Gévaudan) 안에, 아그드(Agd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쪽에 땅을 가진 주교와 수도원장과 수도승이 없는가? 이 주교와 수도원장과 수도승에게는 불행히도 화체설(和體說: transsubstantiation)을 믿지 않는 소작농이 없는가? 이 소작농에게 다수의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 주교와 수도원장과 수도승과 공공의 이익이 아닌가? 아이를 낳는 것이 허용되는, 단 한 가지 인종으로 영성체를 할 사람들만 존재할 것인가? 실제로 그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낭트(Nantes) 칙령의 폐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불편을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그 칙령 폐지가 초래한 것보다 불편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역사가의 오류는 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적 논쟁을 다루는 사람들의 탓으로 비난하는 악(惡)을 사소한 일로 격하시키는 일은, 종교적 논쟁을 다루는 사람들 모두의 오류이기도 하다. 파리의 박사도 암스테르담의 설교자도 그 문제에 관하여 믿지 말자.
1685년부터 1688년까지 화란 대사를 지낸 아보(Avaux) 백작을 재판관으로 모시자. 그는 5권 181쪽에서 어떤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들이 프랑스 밖으로 빼낸 2천만 리브르 이상의 재화를 밝힐 것을 자청했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어느 책 5권 181쪽인지, 그리고 2천만 이상의 단위가 본문에 없지만 송기형/임미경 옮긴 본에는 “자신의 비망록 5권 181쪽”과 “2천만 리브르가 넘는 재화”로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루이 14세는 아보 씨에게 이렇게 답신을 보낸다: “내가 매일 받는 끝없는 숫자의 개종에 관한 소식으로 인하여, 가장 완고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를 따름을 나는 더 이상의 의심하지 않게 되었소.”
루이 14세의 이 편지에 의하여, 우리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력의 범위에 관하여 매우 신뢰하고 있었음을 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매일 아침 이렇게 말했다: 폐하, 당신은 세상에서 최고의 왕이십니다; 모든 세상은 폐하께서 말씀을 하시자마자 자랑스럽게 폐하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재무대신의 직위에서 부자가 된 펠리송(Pellis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푸케(Fouquet)의 공모자로서 바스티유(la Bastille) 감옥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칼빈교도에서 가톨릭 부사제(副司祭)와 신부가 되었으며, 미사를 위한 기도문과 연가를 (원문 bouquets à Iris가 무지개 화환 또는 붓꽃 화환이라는 의미이나 이 문장에서 그 의미로 쓰일 수 없는데, 송기형/임미경 옮긴 본에는 연가로 번역되어 그 번역으로 씀. - 역자 주) 출판했으며 교회재정담당역과 개종담당역을 차지했다. 펠리송은 건당 7이나 8 에퀴를 주고 개종시킨 커다란 명단을 3개월마다 가져와서, 자신이 원할 때 동일한 가격으로 모든 투르크인을 개종시킬 것이라고 왕이 믿도록 꼬였다. 사람들을 왕을 속이기 위하여 줄을 섰는데 왕이 어떻게 속임수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보 씨 자신은 왕에게 알리길 앙굴렘(Angoulême) 주변에 벵상(Vincent)이라는 사람이 50명 이상의 노동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출국하면 손해가 될 것이라고 한다: 5권, ..쪽.
아보 씨는 오랑주 대공(le prince d'Orange)이 망명한 프랑스 장교를 통하여 이미 양성한 2개 연대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오랑주 대공의 군함에서 복무하기 위하여 3척의 군함에서 탈주한 수병들에 대하여 말한다. 이 2개 연대 외에도 오랑주 대공은 두 명의 대위가 지휘하는 망명한 사관생도로 중대를 또한 만든다, 240쪽. 이 대사는 1686년 5월 9일 드 세늘레(de Seignelai) 씨에게 “나는 프랑스의 공장들이 네덜란드에 세워지는 것은 보면 서 경험하는 고통을 귀하에게 감출 수 없는데 그 공장들은 네덜란드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1699년 프랑스 왕국의 모든 지방장관들의 증언을 이 모든 증언에 넣고, 종교와 인도적 정신의 일치라는 저서의 존경스러운 저자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낭트 칙령의 폐지가 이득보다는 해악을 낳지 않았는지 판단하라.
몇 년 전 탁월한 해학으로 유명한 프랑스군 원수가 이렇게 말했다: “용기병(龍騎兵)으로 위그노 교도를 개종시키는 일이 필요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더 이상 그 정책을 수행하지 말아야한다.”
그 편지 안에서 이 수도회원이 수 톤의 화약을 제안하는 P. 르 텔리에의 친구의 편지를 내가 공개했을 때, 나는 다소 너무 지나쳤다고 믿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나를 믿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이 편지를 조작된 것으로 간주하리라. 내가 종교와 인도적 정신의 일치라는 책 149쪽에서 다음과 같은 부드러운 말을 읽었을 때, 나의 의혹은 다행히도 해소되었다:
“사혈(瀉血) 한번이 체격 좋은 환자를 약화시키지 않는 것처럼 전체 신교도를 멸종시켜도 프랑스는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동정적인 기독교도는, 방금 개신교도가 국가의 20분의 1을 차지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이 20분의 1의 피를 흘리기를 원하고 이 작전을 한 팔레트의 사혈로만 간주한다! 하느님이시여 그와 함께 20분의 3을 구하소서!
그러므로 이 솔직한 사람이 국민의 20분의 1을 죽이자고 제안한다면, 왜 P. 르 텔리에의 친구가 국민의 3분의 1을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목을 치고, 독살할 것을 제안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P. 르 텔리에에게 보낸 편지는 실제로 작성되었다.
그 성스러운 저자는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비난 받지 않았기 때문에” 훌륭한 조치라는 결론을 끝낸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파리 시내의 네 구석에 불을 놓은 사람들도 비난하지 않았다; 이것이 방화범을 종교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이유가 되는가?
그러므로 그렇게, 본성이 한편으로 자신의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를 들려줄 때, 본성의 적(敵)인 광신이 포효를 한다; 그래서 평화가 사람들에 나타날 때, 불관용이 자신의 무기를 만들어낸다. 오 국가의 결정권자로 유럽에 평화를 선사한 당신들이여, 평화적 정신과 살인적 정신 가운데서 결정을 하시라!

25장

귀결 및 결론

우리가 알기로 1763년 3월 7일, 국무위원들이 참석하고 대법관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베르사유에서 열렸고 소원(訴願) 심사관 드 크론(de Crosne) 씨가 그런 회합에서 합당한 유일한 요소인 판사의 공평함과, 완벽하게 교육을 받은 사람의 정확함과, 정치대변인의 간단하고도 진실한 웅변으로써 칼라 사건을 보고했다. 모든 계층의 엄청난 인파가 궁전 회랑에서 국무회의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툴루즈 의회에게 재판 서류와 장 칼라스를 거열형에 처한 판결 동기를 국무회에 보낼 것을 명령했다고 국왕에게 알렸다. 국왕폐하는 국무회의의 결정을 승인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성과 정의감이 있고, 주로 사랑을 받고 존재할 가치가 있는 국왕의 국무회의 안에 인간성과 정의감이 존재한다. 불행한 천한 시민 가족의 사건이 폐하와 폐하의 대신들과 대법관과 국무회의 전체를 사로잡았고, 전쟁과 평화라는 가장 큰 목표와 같이 잘 고찰된 조사를 통하여 토론되었다. 공정성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관심이 모든 재판관들을 이끌었다. 유일하게 공정성과 모든 미덕을 고취하는 자비로운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니!
우리 왕들의 칙령에 반하여, 그리고 모든 국가의 법률에 반하여 가장 약한 증거를 토대로 툴루즈의 8명의 판사가 죽게 만든 이 불행한 칼라스를 우리는 알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 기묘한 죽음으로 인하여 이 8명의 판사가 오류를 저질렀던 그의 아들 마르크-앙트완느도 우리는 알지 못했고, 불행했던 만큼 존경스러웠던 모친도, 그 모친과 함께 2000리 길을 와서 왕의 발아래 자신들이 당한 재앙과 자신들의 미덕을 밝혔던 무고한 딸들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이 하느님은 우리가, 불관용 정신이 죽게 만들었던 장 칼라스의 경우에, 우리가 관용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글로 썼을 때, 정의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우리가 활기찼음을 알고 계신다.
모든 국무위원들이 생각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8명의 판사들이 오판을 했다고 말하면서 툴루즈의 판사들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믿지 않았다: 반대로 우리는 전체 유럽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길을 그들에게 열어주었다. 그 길은 모호한 증거와 정신 나간 군중의 고함이 그들의 법을 경동시켰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망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가족의 고난 속에서 그 가족을 구하는 사람들과 합류하면서 최선을 다해 무고한 한 가족의 전체 파멸을 보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친을 불의하게 죽였다: 이 고아가 된 자녀들이 그들로부터 매우 정의로운 참회의 뜻을 받고자 매우 원한다면, 자녀들에게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 뜻을 표하는 것은 판사들 편에서, 그 의사를 사양하는 것은 그 가족 편에서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가 무고한 사건을 최초로 박해한 사람이라면, 참회의 본보기를 보일 사람은 우선 툴루즈 시행정관인 다비드(David) 씨이다. 그는 사형대 위에서 죽어가는 한 가족의 가장을 모욕했다. 이 잔인성은 매우 악랄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불의를 속죄하는 사람을 역시 용서하여야 한다.
어느 분이 랑그도크로부터 1763년 2월 20일자로 이 편지를 보내왔다.
“관용에 관한 귀한의 작품은 인간성과 진실로 가득 찬 듯합니다; 그러나 그 책은 칼라스 가족에게 이득보다는 해를 끼칠까봐 나는 두렵습니다. 그 책으로 인하여 거열형을 의견으로 낸 8명의 판사들이 원한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법원에 귀하의 저서를 불태우라고 요구할 것이며, 광신자들은 (그들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이성의 목소리에 분노의 고함으로 답변할 것이다, 기타 등등.”
................................................................................................................
여기 나의 답신이 있다:
“좋은 일이라면 툴루즈의 판사 8명은 나의 저서를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시골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les Lettres provinciales)도 불태워졌는데 그 편지는 확실히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각자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서적이나 문서를 자신의 집에서 불태울 수 있습니다.
나의 저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칼라스 가족에게 이득도 주지 않고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공정하고 단호한 국왕의 국무회의는 법률에 따라서, 공평성에 따라서, 칙령에 근거하여, 절차에 근거하여, 그러나 사법적이지 않고 그 주제가 국무회의가 판결하는 사건과 절대적으로 다른 서적에 근거하지 않고, 판결합니다.
우리가 8명의 툴루즈 시 판사들에 찬성하여 혹은 반대하여, 관용에 찬성하여 혹은 반대하여 2절판 책을 출간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고, 국무회도 어떤 법정도 이 책을 재판의 서류로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용에 관한 이 책은 인도적 정신이 권력과 신중성에 매우 겸허하게 제시하는 호소입니다. 나는 어느 날 수확할 수 있는 씨앗 하나를 심습니다. 시간으로부터, 국왕의 관용으로부터, 대신들의 지혜로부터, 그리고 빛을 도처에 전파하기 시작한 이성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다립시다.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땅위에서 촌각 동안 식물처럼 생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너희들의 주검으로부터 땅을 살찌게 만들기 위하여, 나는 너희들 모두를 약하고 무지하게 태어나도록 만들었다. 너희들은 약하기 때문에 서로 도우라; 너희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서로 가르치고 서로 기둥이 되어라. 너희들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가질 때, 이것은 분명히 발생하지 않을 것이지만, 반대의견을 가지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너희들은 그를 용서하여야 한다: 이유인즉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땅을 경작하는 팔을 주었고 너희들이 행동하도록 작은 줄기의 이성을 주었다; 나는 삶을 지탱하기 위하여 서로 돕도록 동정심 씨앗 하나를 너희들 가슴 속에 심었다. 그 씨앗을 질식시키지 말라, 그 씨앗을 썩히지 말라, 그 씨앗이 성스러운 것임을 알고 그 자연의 목소리를 파벌에서 오는 참혹한 분노와 바꾸지 말라.
심지어 오류와 위험과 불행의 무대인 매우 가볍게 자행되는 너희들의 잔인한 전쟁 가운데서, 너희들이 반대해도 너희들의 상호 필요에 의하여 너희들을 다시 통합하는 것은 유일하게 나이다. 한 나라 안에서, 귀족과 사법부 사이에서, 두 계층과 사제 집단 사이에서, 도시시민 자체와 농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분열로 인하여 생기는 치명적인 결과를 중지시키는 것도 유일하게 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한의 모든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반대한다할지라도 결국 그들의 가슴에 대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만이 법정에서 공정성을 유지하는데, 법정에서는 내가 없다면 모든 것이, 흔히 마구잡이로 그리고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지방과 도시마다 다르고 거의 항상 동일한 장소에서도 서로 상충되는 법률의 혼란 덩어리 가운데서, 무판결과 변덕에 좌우될 것이다. 법률은 논쟁만 불러오는 반면, 유일하게 나는 정의를 고취할 수 있다. 내말을 듣는 사람은 판결을 잘 내린다; 그리고 서로 상충되는 의견을 화합시키려고만 노력하는 사람은 길을 잃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 손으로 기초를 놓은 거대한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은 견고하고 단순하며, 모든 사람이 그 건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장한다; 그들은 이 건물에 매우 기묘하고 매우 투박하고 매우 소용없는 장식물을 덧붙이고 싶어 했다; 그 건물은 사방에서 무너져 폐허가 된다. 사람들은 그 건물에 돌을 들어 서로 머리를 향하여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멈추라, 너희들의 작품인 재앙적인 폐허를 버리고 나의 작품인 흔들리지 않는 건물 안에서 평화롭게 나와 함께 살라.


칼라스 가족에게 유리하게 내려진
최종 판결을 설명하는 새로 추가된 글

1763년 3월 7일부터 확정 판결까지 다시 2년이 지났다: 광신이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일은 그만큼 쉽고 이성이 광신을 재판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절차에 필수적으로 덧붙은 불가피한 기간을 감내해야 한다. 칼라스 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이 절차들이 덜 지켜질수록 국무회의에 의하여 그 절차들은 더 엄격해져야 했다. 툴루즈 법원을 조사하여 보고하기 위하여, 그 법원으로 하여금 모든 재판과정을 국무회의에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 1년은 충분하지 않다. 크론 씨가 다시 이 고통스러운 일을 맡았다. 80명 가까운 판사들의 회의가 툴루즈 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재판의 전체적 재심을 명령했다.
당시 다른 중요한 사건들이 프랑스 왕국의 모든 법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회교도들을 추방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예수회교도들의 모임을 금지시켰다: 그들은 불관용적이었고 박해를 했다; 그들은 반대로 박해를 받았다.
사람들이 비밀스런 작성자라고 믿었고 그들 스스로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고해증명서의 남발은 이미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믿기에 부분적으로 사기성이 있던 예수회 선교사 한 명이 일으킨 거대한 파산사건으로 인하여 예수회는 끝장이 났다. 선교사와 파산자라는 두 단어가 함께 연결되기에는 부적당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예수회의 처형에 관한 판결이 내렸다. 마침내 포르 루아얄(Port-Royal)의 폐허와 자신들의 무덤 안에서 모욕을 당하고, 예수회교도들만이 내린 명령에 의해 금세기 초에 무덤에서 파헤쳐진 그렇게 많은 저명인사들의 유해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회교도들이 지닌 죽어가는 신망에 대항하여 궐기했다. 프랑스에서는 예수회교도들의 파멸에 관하여(Sur la Destruction des jésuites en France)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예수회교도들의 추방에 관한 역사를 볼 수 있는데, 그 저서는 철학자의 작품이기 때문에 파스칼이 발휘하는 섬세함과 설득력으로, 특히 파스칼의 작품에서처럼, 종종 위대한 인물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편견에 의하여 가려지지 않는 뛰어난 지성으로 저술된 공정한 저술이다.
예수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모욕을 당했다고 말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교가 복수를 했다고 믿는 이 커다란 사건으로 인하여 몇 개월 동안 군중들은 칼라스 사건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국왕이 궁내 탄원이라고 불리는 재판정에 최종판결을 위임하자 구경거리를 찾아다니는 군중이 예수회 사건을 잊고 칼라스 가족에게 몰두했다.
궁내 탄원법원은 궁정 관리들 사이의 사건과 국왕이 그 법원에 송부한 사건을 판결하기 위하여 탄원심사관들로 구성된 최고법원이다. 칼라스 사건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법정을 우리는 선택할 수 없었다: 재심을 위한 예비재판을 두 번이나 하여 사건의 배경과 양태를 철저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정확하게 이 판사들이었다. 장 칼라스의 미망인과 그 아들들, 그리고 라베스 씨는 다시 투옥되었다: 모든 개연성에 반하여 그들이 아들이자 형제인 사람을 목 졸라 죽였다고 생각하던 시간에 한 순간도 자신의 주인집 사람들을 떠나지 않았던 이 늙은 가톨릭교도 하녀를 그들은 랑그도크의 한 구석으로부터 소환하였다. 장 칼라스를 거열형으로 처형하는 데, 그리고 그의 아들 피에르를 추방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동일한 서류를 그들은 마침내 심사숙고했다.
그러자 설득력을 지닌 드 보몽 씨의 새로운 소견서가 나타났고, 툴루즈의 판사들에 의하여 이 범죄사건에 부당하게 연루된 젊은 라베스 씨가 다른 소견서를 제출했는데 판사들은 모순의 극치로 라베스 씨를 사면하지 않았다. 이 젊은이는 스스로 소견서를 썼는데 드 보몽 씨의 소견서와 같이 제출될 자격이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판단했다. 그에게는 이중의 이점이 있었는데 자신을 변호하는 것과 자신과 고통을 공유했던 한 가족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부모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시간에 잠시 칼라스 가족을 자신이 떠났다는 표현을 하기만 했다면, 자신의 수갑을 풀고 툴루즈 감옥을 나오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처형당한다고 협박을 받았다; 고문과 죽음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말 한마디면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이었을 이 말을 하기 보다는 처형당하는 위험을 선택했다.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의 소견서에 매우 고귀하고 매우 간단하고 과시욕 없이 밝혀서 자신이 설득하려고만 했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도 찬사를 받았다.
유명한 변호사인 그의 아버지는 이 소견서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다: 변호사의 길을 걷지 않은 그는 단번에 아버지와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그동안 고위층 인사들이 칼라스 부인이 갇힌 감옥으로 무리를 지어 왔는데, 그 감옥에는 그녀의 딸들이 함께 갇혀 있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인도적 정신과 관용으로 인하여 그들은 도움을 마구 베풀었다. 사람들이 자비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혜택도 주지 못했다. 자비심은, 게다가 매우 흔히 인색해서 모욕적인데, 독신자들의 몫이며 독신자들은 여전히 칼라스 가족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무죄가 완전히 승리한 날이 (1765년 3월 9일) 왔다. 드 바캉쿠르(de Baquencourt) 씨가 모든 과정을 설명하고 가장 사소한 정황까지 사건을 설명한 후 모든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칼라스 가족이 툴루즈 법원에 의하여 고문을 당하고 가혹하게 재판을 받아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그들은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들은 칼라스 가족과 관련된 사람들 앞에서 판사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그리고 툴루즈의 판사들이 스스로 지불해야 할 비용과 피해액과 이자를 받기 위한 재심청구를 허락하였다.
그것은 파리 안에서 모두가 향유하는 기쁨이었다: 사람들은 공공장소로, 산책길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매우 불행했고, 매우 잘 무죄가 밝혀진 이 가족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판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박수를 쳤고 축복의 말을 퍼부었다. 이 광경을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 것은 3월 9일이 칼라스가 가장 참혹한 형벌로 죽은 바로 그 날이었다 (3년 전).
탄원심사관들은 칼라스 가족에게 완전한 정의를 돌려주었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의무를 행사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의무가 있는데, 선행(善行)의 의무로 공정만을 위하여 사실을 신뢰하는 듯한 법정이 매우 드물게 실천한다. 탄원심사관들은 국왕폐하의 하사금으로 칼라스 가족의 피해를 배상할 것을 폐하에게 간청하기 위하여 폐하에게 단체로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편지는 송부되었다. 국왕은 모친과 자녀에게 3만 6천 리브르를 지불하며 그 편지에 답했다; 그 금액에서 3천 리브르는 자신의 주인들을 방어하면서 부단히 진실을 지켰던 충실한 하녀의 몫이었다.
국왕은 이 선행으로 인하여, 그렇게 많은 다른 행동으로 인함과 같이, 국민의 사랑이 그에게 부여한 별칭을 얻었다. 관용 없이는 광신이 지구를 황폐화시키거나 적어도 지구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관용을 이 사례가 사람들에게서 고취시킬 수 있기를! 우리는 그 사례가 여기서 한 가족에게만 관련되는 것을 알고, 종파의 광풍은 수 천 가족이 죽였음을 안다; 그러나 오늘날 살육의 세기가 지나고 한줄기 평화로 인하여 모든 기독교 사회가 평화롭게 지내는데, 맑은 날의 고요 속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거의 같이, 칼라스 가족의 불행이 매우 큰 인상을 남겨야 하는 것은 이 평화로운 시대에서 이다. 그런 경우는 드물지만 발생하고, 그런 경우는 약한 영혼을 자극해서 범죄를 자신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탓으로라도 돌리는 이 음울한 맹신의 결과이다.

 

 

 

 

 

 

 

 

 

 

 

 

 

볼테르의 주석

주석 1 1761년 10월 12일
주석 2 시체를 시청으로 옮긴 후 코끝에 작은 찰과상과 가슴에 멍이 발견되었는데 시체를 옮기는 도중에 부주의로 생긴 것이었다.
주석 3 종교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살해한 역사 안에서 기소를 당한 아버지의 두 가지 사례만을 나는 알고 있다:
첫 번째 사례는 우리가 성 바르브(sainte Barbe)라고 부르는 성 바르바라(sainte Barbara)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딸의 목욕실에 창문 두 개를 내도로 명령했다; 바르브는 아버지가 없는 사이에 삼위일체를 기려 세 번째 창문을 만들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대리석 기둥에 십자가 표시를 했는데 이 표시가 기둥 안에 깊이 새겨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손에 칼을 들고 그녀를 뒤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산을 가로질러 도망쳤는데 산이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아버지는 산을 우회하여 딸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를 발가벗겨 매질했지만 하느님이 흰 구름으로 그녀를 감쌌다; 마침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목을 베었다. 이것은 성인의 꽃(la Fleur des saints)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사례는 에르메네길드(Herménégilde) 왕자이다. 왕자는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584년에 전투를 벌였는데 패배하여 한 장교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그는 순교자가 되었다.
주석 4 도미니쿠스 수도사 한명이 나의 감옥으로 와서 내가 개종하지 않으면 똑같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것을 나는 하느님 앞에 증언합니다. 1762년 7월 23일 피에르 칼라스.
주석 5 몇몇 도시에서 이 변론이 무단으로 복제되어서, 칼라스 부인은 이 온정의 수익을 얻지 못했다.
주석 6 독신자를 의미하는 Dévot라는 말은 라틴어 devotus에서 왔다. 고대 로마의 독신자들인 devoti는 공화정의 안보를 위하여 헌신하던 사람들이이다: 그들은 쿠르티우스(les Curtius)와 데키우스(les Decius) 황제이다.
주석 7 종교개혁가들은 성체성사에 관한 베렌가리우스(Bérenger)의 견해를 부활시켰다; 그들은 심지어 전능한 신에 의해서도 한 몸이 십만의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들은 주인 없이 속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인했다; 눈으로 보기에, 맛으로, 위에서 빵이고 포도주인 것이 존재하는 순간에 파괴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들은 예전에 베렌가리우스가 비난을 받았던 이 오류를 주장했다. 그들은 초기 교부들의 몇몇 글귀에 의존했는데 무엇보다도 성 유스티누스(saint Justin)의 글귀에 의존하는데 그는 트리폰(Tryphon)에 반대하는 대화에서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좋은 밀가루의 봉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을 기념하여 올리도록 우리에게 명령하는 성체성사의 모습이다.”

(1719년 런던 판, 119쪽, in-8°.)

종교개혁가들은 초기에 사람들이 성물 숭배에 반대하여 말했던 것 모두를 인용했다; 그들은 비길란티우스(Vigilantius)의 이 말을 인용했다: “가치 없는 먼지를 존경하거나 심지어 찬양하는 일이 필요할까? 순교자들의 영혼은 자신들의 재에 여전히 활기를 불어넣는가? 우상숭배자의 관습이 교회 안에 도입되었다: 우리는 대낮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이 기도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성 히에로무니스(saint Jérôme)가 비길란티우스의 이 말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모든 것을 사도의 시대로 돌려놓고자 했고, 교회가 확대되고 강화되었기에, 교리를 반드시 확대하고 강화해야 함을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富)를 비난했는데 그렇지만 재산이란 종교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보였다.
주석 8 진실하고 명망 높은 재판장 드 투(de Thou)는 그래서 매우 무고하고 매우 불행한 이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Homines esse qui trecentis circiter abhinc annis asperum et incultum solum vectigale a dominis acceperint, quod improbo labore et assiduo cultu frugum ferax et aptum pecori reddiderint; patientissimos eos laboris et inediae, a litibus abhorrentes, erga egenos munificos, tributa principi et sua jura dominis sedulo et summa fide pendere; Dei cultum assiduis precibus et morum innocentia prae se ferre, caeterum raro divorum templa adire, nisi si quando ad vicina suis finibus oppida mercandi aut negotiorum causa divertant; quo si quandoque pedem inferant, non Dei divorumque statuis advolvi, nec oereos eis aut donoria ulla ponere; non sacerdotes ab eis rogari ut pro se aut propinquorum manibus rem divinam faciant: non cruce frontem insignire uti aliorum moris est; cum coelum intonat, non se lustrali aqua aspergere, sed sublatis in coelum oculis Dei opem implorare; non religionis ergo peregre proficisci, non per vias ante crucium simulacra caput aperire; sacra alio ritu et populari lingua celebrare; non denique pontifici aut episcopis honorem deferre, sed quosdam e suo numero delectos pro antistitibus et doctoribus habere. Haec uti ad Franciscum relata VI id. feb., anni, etc.” (역사, 6권) (라틴어로 된 이 부문의 의미는 알 수 없음. - 역자 주)
드 상탈(de Cental) 부인은, 황폐화된 땅의 한 부분이 그녀의 소유였고 그 땅위에는 주민들의 시체만 보였는데, 국왕 앙리 2세에게 재판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파리 법원에 그 사건을 송치하였다. 이 학살의 주범인 프로방스의 검찰총장 게렝(Guérin)이라는 사람만 기소당하여 목을 잃었다. 그에게는 궁정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quod aulicorum favore destitueretur) 그 사람 혼자 다른 죄인들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드 투는 말한다.
주석 9 프랑수아 고마르(François Gomar)는 신교도 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동료 아르미니우스(Arminius)에 반대하여, 하느님은 태초부터 인간의 대부분을 영원히 화형당하도록 운명지었다고 주장했다: 이 지옥의 교리는, 당연히, 박해를 통하여 유지되었다. 재상 바르네벨트(Barneveldt)는, 고마르의 반대편에 섰는데, “하느님의 교회를 극도의 슬픔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1619년 5월 13일 7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
주석 10 어느 열변가가, 낭트 칙령의 폐지를 옹호하여, 영국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 종교는 반드시 그런 열매를 맺었다; 하나의 열매가 거기에 남아서 익었는데 이 섬나라 사람들이 그 열매를 수확하는데 그것은 국가들에 대한 경멸이다.” 그 저자는 때를 잘못 택하여 영국인들이 모든 나라로부터 경멸을 받을 수 있고 경멸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다. 내 생각에 한 나라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할 때, 그 나라가 세상 사방에서 승리를 거둘 때, 경멸을 받을 수 있고 경멸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이 기묘한 구절이 발견되는 곳은 불관용에 관한 한 장(章)에서 이다; 불관용을 설교하는 사람을 그렇게 쓸 자격이 있다. 이 가증스러운 저서는, 베르베리(Verberie)의 한 미치광이에 의하여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소명을 저버린 사람의 저서이다: 이유인즉 어떤 목자(牧者)가 그렇게 쓸 것인가? 이 책에서 광포함은 흥분하여 쎙 바르텔레미 학살을 정당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독한 억설로 가득 찬 그런 저술은 적어도 그 기이함 때문에 모든 사람의 손에 잡혀야 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주석 11 리코(Rycaut)의 저술 참조.
주석 12 켐퍼(Kempfer)의 저술과 일본과의 관계 모두를 참조.
주석 13 루앙(Rouen)의 지방장관인 드 라 부르도네(de La Bourdonnaie) 씨는 망명자들의 탈주로 인하여 코드베크(Caudebec)과 뉘샤틀(Neuchâtel) 지방의 모자 제조가 감소했다고 말했다. 캉(Caen)의 지방장관이 푸코(Foucaut) 씨는 거래가 일반적으로 절반 감소했다고 말했다. 푸와티에(Poitiers)의 지방장관 드 모퓌(de Maupeou) 씨는 양탄자 제조가 망했다고 말한다. 보르도의 지방장관인 드 베종(de Bezons) 씨는 클레락(Clérac)과 네락(Nérac)에서 거래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투레느(Touraine)의 지방장관 미로메닐(Miroménil) 씨는 투르(Tours)의 상업은 매년 1천만 프랑 감소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박해 때문이다. (1698년 지방장관들의 보고서 참조)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이익을 얻으며 타군에 복무하러 떠났던 육군과 해군 장교 및 수병들의 수를 세어보라, 그래서 불관용으로 인하여 국가에 피해가 생기지 않았는지 보라.
우리가 인식하기에 재능과 훌륭한 견해를 지닌, 그리고 태생만큼 가슴이 고귀한 대신들에게 우리는 여기서 견해를 제시할 만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해군의 재건에 관하여 우리의 해변에 사는 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한 것임을 충분히 알 것이다.
주석 14 21장 및 24장
주석 15 사도행전 25장 16절
주석 16 사도행전 26장 24절
주석 17 아르케라우스(Archélaüs)가 알로브로게스족(les Allobroges)에게 유폐된 이후 유태인들이 사법권을 갖지 못했고 유대가 로마제국의 한 지방으로 통치되었지만, 로마인들은 유태인들이 열정의 재판을 열 때, 다시 말해서, 갑작스런 폭동 속에서 유태인들이 열정에 의하여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믿는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였을 때, 눈을 감아주었다.
주석 18 울피아누스, 법전 1권 목차 2. “유대의 미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는 것을 허용했다, 기타 등등. (Eis qui judaicam superstitionem sequuntur honores adipisci permiserunt, etc.)”
주석 19 타키투스(Tacite)는 이렇게 말한다 (연대기, XV, 44): “악행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는 사람들을 기독교도라고 불렀다(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appellabat).”
기독교도라는 명칭이 이미 로마에 알려지기는 매우 어려웠다: 타키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Vespasien) 황제와 도미티아누스(Domitien) 황제 치하에서 글을 썼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말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감히 말하지만 odio humani generis convicti라는 구절이 타키투스의 문체에서 ‘인류를 증오한다고 입증된’만큼 ‘인류에게 증오를 받는 것으로 입증된’을 잘 의미할 수 있다.
결국 로마에서 이 최초의 선교사들은 무슨 일을 하였던가? 그들은 몇몇 사람들의 영혼을 얻으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순수한 도덕을 가르쳤다; 그들은 어떤 권력에도 대항하지 않았다; 그들 가슴에 있던 겸손은 그들의 지위와 그들의 상황이 그랬던 것처럼 극단적이었다; 그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증오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인간을 증오한다고 입증될 수 있었는가?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그 화재를 가톨릭교도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화재는 종교전쟁 이후의 일이었고, 그 화재는 존재가치가 없는 몇 명의 가톨릭교도의 유죄가 입증된 화약음모 이후의 일이다.
네로황제 시대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동일한 의미로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의 어둠 속을 뚫기란 매우 어렵다; 타키투스는 네로 자신이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고자 했다는 사람들의 의심에 대하여 근거를 대지 않는다. 사람들이 찰스 2세가 런던을 불태웠다고 의심하면 훨씬 더 합당했을 것이다: 왕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이 보는 사형대에서 처형된 그의 부왕의 피가 적어도 찰스 2세에게 구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로에게는 구실도 핑계도 이해관계도 없다. 이런 정신 나간 소문은 모든 나라에서 군중의 몫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똑같이 정신 나가고 똑같이 부당한 소문을 들었다.
타키투스는, 군주들의 특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항상 허영에 차 있고 격렬하고 일시적인 자신들의 의견에서 항상 과도하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군중의 특성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필론(Philon)은 “세자누스(Séjan)는 티베리우스 황제 휘하에서 그들을 박해했지만, 세자누스 사후에 황제는 그들의 모든 권리를 복원시켰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 De Virtutibus와 Legatione ad Caium). 그들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경멸을 받았지만 로마의 시민이었다; 그들은 밀 분배에서 몫을 받았다; 그리고 심지어 밀 분배가 안식일에 이루질 때, 그들에게는 날짜가 다른 날로 잡혔다: 모든 나라에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돈으로 샀으며 그 신앙으로 자유로부터 그들은 곧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국가에 낸 돈의 액수를 고려하여서 일 것이다.
필론의 이 글은 타키투스의 말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타키투스는 4천명의 유대인과 이집트인들이 사르데뉴(Sardaigne)로 이송되었으며, 나쁜 기후로 인하여 그들이 죽었다면 그것은 가벼운 손실(vile damnum)이라고 말한다 (연대기, II, 85).
필론이 티베리우스 황제를 슬기롭기 정의로운 군주로 보고 있음을 나는 이 말에 덧붙이겠다. 나는 그 정의가 황제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만큼만 정의로웠다고 믿는다; 그러나 필론이 황제에게 건네는 찬사로 인하여 나는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Suétone)가 황제에게서 비난하는 혐오성을 조금 의심하게 되었다. 70세의 쇠약한 노인이 카프리(Caprée) 섬에 은퇴하여, 매우 난폭한 로마의 젊은이들도 심지어 알지 못하던 대중이 갈구하는 방탕에 몰두하는데 나는 개연성이 없다고 본다 (이 문장에서 qui sont t peine dans la nature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t가 à의 오기로 보인다. 그렇다면 “자연 속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문맥상으로 qui étaient même inconnues t la jeunesse de Rome la plus effrénée라는 구절에서도 t가 à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타키투스도 수에토니우스도 이 황제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의 말을 기꺼이 기록했다. 옥타비아누스와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들의 후계자들은, 자유로워야 할 민중을 지배했기 때문에, 혐오스러웠다.: 역사가들은 즐겨 그들을 폄하하였고, 사람들은 그때 보고서나 당시에 관한 일기나 서류가 없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말에 의존하여 역사가들을 믿었다: 또한 어떤 사람의 말도 인용하지 않아서 그들의 말은 반박될 수 없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폄하하였고 후대의 판단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어느 정도까지 이 역사가들의 진실성을 의식해야 하는지, 문명국에서 태어나 진지한 저자들에 의하여 증언된 공공연한 사건에 대하여 어떤 신뢰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 저자들이 증거 없이 보고하는 일화들과 관련된 그들의 경박한 믿음에 어떤 한계를 부여해야 하는지는 현명한 독자에게 달려있다.
주석 20 우리는 물론 교회가 존중하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우리는 성스러운 순교자들에게 기도를 하지만 성 라우렌티우스(saint Laurent)를 존경하면서 성 식스투스(saint Sixte)가 “당신은 사흘 안에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이 짧은 기간 안에 로마총독이 그에게 기독교도들의 돈을 요구했다는 것; 집사인 라우렌티우스에게 마을의 모든 가난한 사람을 모을 시간이 있었다는 것; 그가 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장소로 총독을 안내하기 위하여 총독 앞으로 걸어간 것; 그는 재판을 받았다는 것; 그는 고문을 당했다는 것; 총독이 대장장이에게 명령하여 사람을 포락형(炮烙刑)에 처하기에 충분히 큰 석쇠를 만들라고 명령했다는 것; 로마의 최고행정관이 스스로 이 기묘한 처형에 입회하였다는 것; 성 라우렌티우스가 이 석쇠 위에서 “나의 한편은 충분히 구워졌으니 당신이 나를 먹고자 한다면 다른 쪽으로 나를 돌려놓으시오”라고 말한 것. 처형용 석쇠는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교도 저자가 이 이상한 사건들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석쇠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주석 21 하늘나라의 모든 존재 중에서 최고인 하느님을 로마인들이 인정했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베르길리우스(Virgile)의 작품을 열기만 하면 된다.
... 오! 무서운 벼락으로 왕좌에 앉아 영원한 율법으로
인간의 일과 신의 일을 주관하시는 당신
(... O! qui res hominumque deumque
Aeternis regis imperiis, et fulmine terres.).
(아이네이스, I, 233-234)
오 아버지, 오 인간과 신들의 영원한 권력자여
(O pater, o hominum divumque aeterna potestas, etc.).
(아이네이스, X, 18)
호라티우스(Horace)는 훨씬 더 강력하게 표현한다:
어디에서도 그보다 더 큰 존재는 생겨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것도 그에 버금가는 것도 번성하지 않았다.
(Unde nil majus generatur ipso,
Nec viget quidquam simile, aut secundum.).
(I권, 서정시. XII, 17-18)
그들은 거의 모든 로마인들에게 알려진 신화 속에서 하느님의 일체성만 노래했다. 아름다운 오르페우스(Orphée) 송가를 보라; 막시무스(Maxime de Madaure)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고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백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롱기누스(Longinien)도 이교도였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은 “유일하고, 파악될 수 없으며, 설명될 수 없다”고 편지를 썼다; 락탄티우스(Lactance) 자신은, 너무 관용적이었다고 비난을 받을 수 없는데, 자신의 다섯 번째 책에서 (Divin. Institut., c. III) “로마인들은 모든 신을 최고의 하나님에게 종속시킨다(illos subjicit et mancipat Deo)”라고 동의한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en) 자신은, 자신의 저서 호교서(Apologétique) (24장)에서 제국 전체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은 무한하다(principem mundi, perfectoe potentioe et majestatis)고 동의한다. 무엇보다도 철학에서 키케로의 스승인 플라톤의 저서를 열면, “하느님은 하나다; 그 하느님을 숭배하고 사랑하고, 성스러움과 정의로써 그 하느님을 닮으려고 헌신해야 한다”라는 말을 볼 것이다. 에픽테토스(Epictète)는 노예 신분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Antoine)는 왕좌에 앉아서 도처에서 동일한 말을 한다.
주석 22 34장
주석 23 35장
주석 24 3장
주석 25 이 주장은 검증되어야 한다. 역사가 신화를 계승한 이래 이집트인들이 미신적인만큼 비겁하다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캄비세스(Cambyse)는 한 차례의 전투로 이집트를 차지한다; 알렉산더는 한 차례의 전투도 겪지 않고, 어떤 도시도 감히 포위를 기다리지 않는 이집트에서 명령을 내린다; 프톨레미(les Ptolémées)는 한방 먹이지 않고도 이집트를 차지한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는 역시 손쉽게 이집트를 복속시켰고, 오마르(Omar)는 단 한차례의 전투에서 이집트 전체를 손에 쥔다; 콜치스(la Colchide)와 코카서스(Caucase) 산 근처의 민족이던 마말리크 족(les Mamelucks)이 오마르 뒤에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성 루이(saint Louis)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그 왕을 포로로 잡은 것은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마말리크 족이다. 마침내 마말리크 족도 이집트인이 되어서,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의 원주민처럼, 느리고 비겁하고 태만하고 변덕스러워져서 3개월 만에 셀림 1세(Sélim Ier)의 지배 하에 들어갔는데 셀림 1세는 그들의 통치자를 교수형에 처했고 이 지역을 오스만제국에 병합하도록 했고 나중에 다른 이방인들이 이집트를 차지했다.
헤로도투스는 전설의 시대에 세소스트리스(Sésostris)라는 이집트의 왕이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공식적인 의도로 자신의 나라를 떠났다고 보도한다: 그런 의도는 분명히 피크로콜(Picrochole)이나 돈 키호테에게만 어울리며,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이 이집트식 이름이 아님을 고려하지 않고도, 과거의 모든 사건들처럼 우리는 이 사건을 천일야화 종류로 치부할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서 어떤 비참한 가족이 고대의 제왕에서부터 유래하게 되는 것처럼, 정복당한 민족들이 자신들의 옛날 영화에 근거하여 전설을 펴는 것보다 더 흔한 일은 없다. 이집트의 사제들은 헤로도투스에게 세소스트리스라 불리는 이 왕이 콜치스를 정복하러갔다고 말한다: 이것은 프랑스 왕이 노르웨이를 정복하기 위하여 투렌(la Touraine)을 출발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책 속에서 이 이야기들은 쓸데없이 반복되었고, 그 이야기들에는 개연성이 없다; 코카서스(Caucase) 지역의 강하고 사나운 주민들과 콜키스인들과 다른 스키타인들(Scythes)은, 여러 번 아시아를 파괴하러 왔는데, 이집트까지 침투했으리라; 그리고 콜키스의 제사장들이 그 후 고국에서 할례 방식을 보고했다할지라도, 이것은 그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정복당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세소스트리스가 정복한 모든 왕들은 매년 자신들의 왕국에서 와서 세소스트리스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그리고 세소스트리스는 그들을 마치 마차를 끄는 말처럼 부려먹어 신전에 가기 위하여 자신의 마차에서 고삐를 잡도록 했다고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e de Sicile)는 보고한다. 이런 거인 왕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충실하게 복사되었다. 분명히 이 왕들은 매우 선하여 그렇게 말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 멀리서 왔었을 것이다.
피라미드와 다른 고적에 대해서는, 유일한 자산인 손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지배자의 조악한 허영을 만족시키는 어리석은 민족의 노예상태와 같이, 그것들은 이집트 군주들의 오만과 악취미를 증명할 따름이다. 이 민족의 정부는,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자랑하는 시대에도, 터무니없고 독재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모든 땅이 그들의 제후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노예들이 세계를 정복하다니 옳구나!
이집트 제사장들의 이 심오한 과학은 고대 역사의, 다시 말해서 전설의 커다란 웃음거리 중 하나다. 천백 년 동안 태양이 자체의 운행을 다시 시작하면서 서쪽에서 두 번 떴고 동쪽에서 두 번 졌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리에주 연감(l'Almanach de Liège)의 저자보다 훨씬 하수이다. 이집트를 통치하던 이 제사장의 종교는 미국의 가장 야만적이 종족의 종교에도 비견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알기에 그들은 악어와 원숭이와 고양이와 양파를 숭배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는 그와 같이 터무니없는 종교는 위대한 라마교뿐이다.
그들의 예술은 그들의 종교와 비교해서 조금도 낫지 않다; 용인될만한 고대 조각품이 하나도 없고, 그들이 최고품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미 왕가와 시저의 왕가 지배 하에서 그리스 예술가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기하학을 배우기 위하여 그들에게는 그리스인이 필요했다.
유명한 보쉬에(Bossuet)는 루이 14세의 아들에게 바친 자신의 저서 세계사 서설(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 속에서 이집트의 장점에 매료된다. 그는 젊은 왕자를 현혹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박식한 사람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 책은 매우 웅변적인 장광설이지만 역사가란 웅변가보다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추측으로서만 이집트인을 고찰한다: 우리가 고대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에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주석 26 성 이그나티우스(saint Ignace)의 죽음을 의문시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양식을 지닌 사람은 머리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이 이야기에 관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저자는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도들의 하느님을 자신의 제국에 복속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영광에 결점이 생긴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이 무슨 발상인가! 트라야누스 황제가 신들을 이기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던가? 이그나티우스가 그 황제의 앞에 나타났을 때, 황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누구냐, 불순한 영혼아!” 황제가 죄수에게 말했다는 것과, 황제 스스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 그것은 군주가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그나티우스를 자신의 앞으로 오게 했다할지라도 “너는 누구냐?”라고 묻지 않았다. 황제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불순한 영혼이라는 이 말이 트라야누스 황제와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어느 기독교도가 황제의 입을 빌려 말한 무당의 표현임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제기랄! 그것이 트라야누스 황제의 어법인가?
예수를 자신의 가슴에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테오포르(Théophore)라고 이그나티우스가 황제에게 답변했다고, 그래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그와 함께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자세히 이야기를 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가? 트라야누스는 대화의 끝에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는 이그나티우스를 쇠사슬로 묶을 것을 명령한다, 기타 등등.” 기독교도의 적인 궤변론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을 개연성은 없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에게서 그렇게 사용되어서 왕의 어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라는 말로 기독교의 숭배대상을 지칭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이나 황제가 자신의 판결을 선언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다음에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기독교도들에게 긴 편지를 쓰게 된다: “나는 완전히 쇠사슬에 묶여 당신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분명히, 로마의 기독교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그에게 허용되었다면, 그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받지 않았다; 트라야누스에게는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의 하느님을 자신의 제국에 복속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아니면 이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있었다면 이그나티우스는 매우 큰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 편지를 보냄으로써 기독교도를 드러내는 것이요 기독교도들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스스로 기독교도들을 밀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을 글로 작성한 사람들은 개연성과 적합성에 더 많은 주목을 했어야 할 듯싶다. 성 폴리카르푸스(saint Polycarpe)의 순교는 더 많은 의심을 자아낸다. 이야기에 따르면 하늘 꼭대기에서 한 목소리가 이렇게 소리쳤다: 폴리카르푸스, 용기를 내라! 기독교도들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폴리카르푸스가 말뚝에 묶이고 장작이 타자 불길이 그를 피해 그의 머리 위에서 아치를 그렸으며 그 아치로부터 비둘기 한 마리가 나왔다; 화염이 존경하는 그 성인은 방향식물의 향기를 내뿜어 모인 사람 모두를 향기로 감쌌지만, 불길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그도 칼날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진실보다는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용서하여야 한다.
주석 27 교회사(Histoire ecclésiastique), 8권
주석 28 관용에 관한 로크의 탁월한 편지 참조.
주석 29 예수회교도인 라크루아(Lacroix)가 비평하는 예수회교도 부젠바움(Busembaum)은 “어떤 나라에서 교황이 파문한 군주를 죽이는 것이 허용되는데, 이유인즉 온 세상이 교황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임무를 수용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임무를 수행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지옥에서나 고안되어 예수회교도들에 대하여 프랑스 전체를 가장 흥분시킨 명제이다. 예수회는 그렇게 흔히 자신들이 가르치고 그렇게 자주 부인된 이 교리로 인하여 당시 어느 때보다도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몇 명 도미니쿠스 수도사들의 저술에서 거의 동일한 결정을 제시하면서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었다 (가능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하여 어느 세속인이 신학자에게 보낸 편지[la Lettre d'un homme du monde à un théologien, sur saint Thomas]를 보라; 그것은 1762년 예수회에서 나온 소책자이다). 결국 천사박사이자 신의 의지 해석자인 (이것들은 그의 별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배교한 군주는 왕권을 잃으며 국민들의 복종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를 사형시킬 수 있으며 (2권 2부 12문항), 사람들에게 매우 강력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율리아누스 황제는 사형을 당하지 않았으며 (2권 2부 12문항), 모든 이교도는 당연히 사형당해야 하며 (2권 2부 11-12문항), 독재적으로 군림하는 군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은 매우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주장한다. 우리는 그 학파의 천사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매우 존경한다; 그러나 자신의 동료 자크 클레망(Jacques Clément)과 성 베르나르파인 라바야크(Ravaillac) 시대에 프랑스에 그런 명제를 지지하기 위하여 왔다면, 그는 어떻게 그 학파의 천사로 대접을 받았겠는가?
소르본느 대학의 총장인 장 게르송(Jean Gerson)은 성 토마스보다 한술 더 떴으며, 프란체스코 수도사인 장 프티(Jean Petit)는 게르송보다 무한히 더 악랄하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몇 명은 장 프티의 지독한 주장을 지지했다. 국왕시해에 관한 이 악마 같은 교리는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던, 교황은 지상의 하느님으로 왕의 권좌와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미친 생각으로부터만 나온다. 이점에서 우리는 위대한 라마가 죽지 않는다고 믿는 타타르인들보다 매우 열등했다: 위대한 라마는 타타르인들에게 자신의 구멍 난 의자를 나누어주고 타타르인들은 이 유품들을 경건하게 건조하고 소개하고, 이 유품들에 입을 맞추었다. 나로서는 평화를 축복하기 위하여 교황에게, 그 권력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경우에, 심지어 나의 세속적 권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왕들의 세속적 권한에 대한 최소한의 권한이 있다고 믿기 보다는 나의 목에 그런 유품을 지니고 다니리라.
주석 30 신명기 14장
주석 31 이 작품에 대하여 몇 가지 유용한 비평을 하려고 우리가 지닌 생각 속에서,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은 노아와 모든 동물들과 함께 언약을 맺었다고 언급됨을 주목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노아에게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먹도록 허용한다; 하느님은 피만 제외시키는데 사람들이 먹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모든 동물은 사람에 의해 피를 흘리게 되리라”라고 부언한다 (창세기 9장 5절).
이 구절과 다른 몇 가지 구절로부터, 우리는 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항상 사색했던 것과 합리적인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으로 동물에게도 어떤 의식작용이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하느님은 나무나 돌과 언약을 맺지 않았는데, 그것들에는 의식작용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동물들과 언약을 맺는데 하느님은 동물들에게 흔히 우리 것보다 더 미묘한 감정과 그 감정에 반드시 덧붙은 몇 가지 사고를 부여했다. 결국 피는 생명의 근원이고 결과적으로 감정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동물들의 피를 먹는 야만성을 가지는 것을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이유이다. 동물로부터 피를 모두 빼앗으면 그 동물의 모든 기관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가 도처에서 영혼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민감한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피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옳다; 매우 자연스러운 이 생각은 모든 민족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동물에게 지녀야 하는 동정심이 근거하는 곳은 이 생각이다. 노아의 일족이 받은 일곱 가지 계율은 유대인들에게 수용되었는데, 살아있는 동물의 사지를 먹지 말라는 계율이 있다. 이 계율은 잘린 사지를 먹기 위하여 동물을 찢어 죽이는 잔인성이 사람들에게 있으며, 사람들은 동물들의 몸의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먹기 위하여 동물들을 살려두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인 바쿠스 오마디오스(Bacchus Omadios)족의 키오스(Chio) 섬 희생제에서 목격되는 바와 같이, 이 관습은 실제로 몇몇 야만족에게 존재했다. 하느님은 동물이 우리에게 음식이 되도록 허용하면서 그러므로 동물들에 대하여 어떤 인도적 정신을 권유한다.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만드는 것에는 야만성이 존재한다; 분명히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기른 동물의 목을 따는 자연스런 공포를 줄일 수 있는 관습만 있을 따름이다. 그런 일을 크게 꺼린 민족은 항상 있었다: 이 꺼림은 인도 반도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모든 피타고라스학파는 살코기를 먹는 일을 부단히 삼갔다. 폴리피르(Porphyre)는 자신의 저서 소재(小齋: l'Abstinence)에서 야만적인 미각에 몰두하기 위해서만 교파를 버린 제자를 나무란다.
내가 보기에 짐승들은 기계일 따름이라고 감히 주장하기 위해서 자연의 지혜를 포기해야 했다. 하느님이 짐승들에게 모든 감각기관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하느님이 짐승들에게 감정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내가 여전히 느끼는 바, 동물들에게서 욕구의, 고통의, 즐거움의, 두려움의, 사랑의, 분노의, 그리고 동물들이 지닌 모든 애정의 다양한 목소리를 구분하지 않기 위하여 동물들을 관찰하지 않았어야 한다; 동물들이 자신들이 느끼지 않는 것을 그렇게 잘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리라.
이 말로 인하여 스스로 전능한 손으로 빚어 만든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감정과 생각과 기억력을 부여하신 창조주의 능력과 선의에 대한 의미를 많이 고찰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의 기관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기관들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받는지, 어떤 법칙으로 감정과 생각과 기억력과 의지가 이 생명에 결합되는지 알지 못한다: 깊고 영원하며 우리의 천성에 내재한 무지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서로를 박해하는데,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이 뿔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뿔로 싸움질을 하는 황소와 같다.
주석 32 아모스 5장 26절
주석 33 예레미아 7장 22절
주석 34 사도행전 7장 42-43절
주석 35 신명기 12장 8절
주석 36 몇몇 작가는 이 구절로부터 황금 송아지에 (아피스[Apis] 신일 따름이다) 관한 장은, 몇몇 다른 장처럼, 모세서에 덧붙여졌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벤 에스라(Aben-Hezra)는 모세5경이 왕의 시대부터 작성되었음을 증명하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월러스턴(Wollaston), 콜린스(Collins), 틴들(Tindal), 샤프츠버리(Shaftesbury), 볼링보로크(Bolingbroke),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석판이나 벽돌이나 연판이나 나무 위에 새기는 기술은 당시 기록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모세와 시대부터 칼데아인과 이집트인이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매우 축약된 방식과 상형문자로만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사실의 본질을 새길 수 있었고 자세한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고; 주거를 매우 빈번히 옮겨야 하고, 의복을 제공하고 재단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 신발을 수선할 사람도 없으며, 하느님이 자신의 민족이 입고 신어야 할 의복과 신발을 공급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40년 동안 기적을 (신명기 8장 5절) 행해야 했던 사막에서 커다란 책들을 새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가장 필수적인 기술도 없었고 심지어 빵을 만들 수도 없었던 시절에 글자를 새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을 개연성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성막의 기둥이 청동이었고 기둥머리는 거대한 은덩어리였다고 말하면, 사막에서 그런 주문은 주어질 수 있으나 실제로 실행된 것은 더 행복한 시대가 된 후라고 그들은 답변한다.
천둥번개 가운데서 (출애급기 19장 18-19절), 그리고 천상의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심지어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하는 산기슭에서 숭배하기 위하여 이 가난한 민족이 거대한 황금송아지를 주문했음 (출애급기 32장 1절)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 전날 밤 모든 사람들이 이 거대한 황금송아지를 가지기 위하여 모세의 형에게 말을 했다는 것에 그들은 놀란다. 어떻게 아론은 하루 만에 그 송아지를 만들 수 있었을까 (출애급기 32장 4절)? 그 다음에 모세는 어떻게 그 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었을까 (출애급기 32장 20절)? 3개월 미만에 황금 상을 만든다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그 황금 상을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가루로 만들기 위하여 가장 전문적인 화학 기술도 충분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하여 아론의 그릇된 행동이나 모세의 대응은 두 가지 기적이었으리라.
인도적 정신 즉, 가슴의 선의로 인하여 그들은 기만당하여, 모세가 이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2만 3천명의 목을 잘랐다고 (출애급기 32장 28절) 그들은 믿지 못한다; 세 번째 기적이 아니고서는 2만 3천명이 레위인들에 의하여 그렇게 살육당하도록 내버려졌으리라고 그들은 상상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처벌을 당한 죄악으로부터 주범인 아론은 보상을 받았다는 것과 (출애급기 33장 19절; 레위기 8장 2절), 그의 피 흘리는 형제 2만 3천명이 그가 희생제를 드리기 위하여 갔던 제단 밑에 쌓여있던 반면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미디안(madianite) 여인과 잡힌 이스라엘인 한 명의 과실을 속죄하기 위하여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참살당한 2만 4천명의 이스라엘인들을 (민수기 25장 9절) 그들은 믿지 않는다. 많은 유태인 왕들이, 특히 솔로몬이, 처벌을 받지 않고 이방인과 결혼하여 이 비판가들은 미디안인과의 결혼이 그렇게 중대한 범죄였다고 인정할 수 없다: 룻은 자신의 가족이 베들레헴 출신이었지만 모압인이었다; 성경은 그녀를 항상 모압여인 룻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충고에 의하여 보아스의 침대에 가서 누웠다; 그녀는 그 사건으로 6부셀의 보리를 받았고 그 다음에 그와 결혼했으며 다윗의 선조가 되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을 뿐 아니라 창녀였다; 불가타 성경은 그녀에게 창부라는 이름만 부여한다 (여호수아 6장 17절); 그녀는 유대의 군주 살몬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이 살몬의 자손이다. 심지어 라합은 기독교의 인물로 간주된다: 그것은 몇몇 교부들의 견해이고 특히 오리게네스(Origène)는 여호수아에 관한 자신의 7번째 설교에서 그런 견해를 낸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는데 헷 사람이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족장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다; 그들의 자식들은 아람 족의 다말(Thamar)을 아내로 취했다: 유다가 근친상간인지 모르고 취한 이 여인은 이스라엘 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다섯 분의 이방인이 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의 유태인들에게서 현신하시어 이방민족들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어떤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신다.
율법학자 아벤 에스라(Aben-Hezra)는, 언급된 바와 같이, 모세5경이 모세 이후 오래 시간이 지나서 작성되었다고 감히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몇 가지 구절에 근거를 둔다. “가나안 사람도 (창세기 9장 6절) 당시 이 땅에 있었다. 모리아 산은 (역대기 2권 3장 1절) 하느님의 산으로 불렸다. 바산 족장인 옥(Og)의 침대가 여전히 랍바에 있었으며, 그 족장은 바산의 모든 땅을 야일(Jaïr)의 마을이라고 당시까지 불렀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없었다.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에 에돔에서 왕들이 다스린 곳은 여기이다 (창세기 36장 31절).” 모세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이 언급되는 이 구절들은 모세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반대의견에 대하여 이 구절들은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필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첨부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답변한다.
게다가 존경으로 우리가 이름을 부르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었던 뉴턴은, 자신의 다니엘서와 요한복음의 주해서 서문에서, 모세5경과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성스러운 저자들로부터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창세기 36장에, 사사기의 17-19 및 21장에, 사무엘서 8장에, 역대기 2장에, 룻기 4장에 근거를 둔다. 실제로 창세기 36장과 사사기에 왕들이 언급된다면, 룻기에서 다윗에 대한 언급이 있다면, 이 모든 성서들은 왕들의 시대로부터 작성된 것들로 보인다. 이것은 유명한 르클레르크(Leclerc)를 필두로 한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소수의 추종자만 있는데, 그 추종자들의 호기심은 깊은 곳을 파헤친다. 이 호기심은 분명히 인간의 의무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 군주나 목자(牧者)가 이 짧은 생애를 마치고 내세의 주인 앞에 섰을 때, 우리들 각자는 정의롭고, 인도적이고, 인정 많고, 관대하게 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무도 어느 해에 모세5경이 쓰였음을 알았다고 뽐내지 않을 것이고 율법학자들이 쓰던 해설로부터 원전을 구별했다고 뽐내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탈무드에 반대하여 마소라 학자 편을 들었는지, 카프(caph)를 베트(beth)로 이해했는지, 요드(yod)를 보(vaü)로 이해했는지, 달레트(daleth)를 레스(res)로 이해했는지 우리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하느님은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근거해서 우리를 심판하시리라. 신자의 합당한 의무에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은 교회의 결정에 굳건히 따른다.
황금송아지 숭배 사건 이후 저술된 책인 레위기의 중요한 구절로써 이 비평을 끝내자. 그 구절은 유태인들에게 털난 짐승을 숭배하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유태인들인 사악한 짓을 함께 저질렀던 숫염소들”이다. 우리는 이 기묘한 숭배관습이 미신과 마술의 본고장이 이집트로부터 유래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의 연회에 가서 거기서 숫염소를 숭배하고 숫염소와 함께 생각만 해도 두려운 상상할 수없는 타락을 탐닉하는 소위 악마의 관습은 고대 유태인들로부터 유래한다고 믿는다: 결국 이들은 유럽의 한 부분에서 주술을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아주 혐오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기이한 타락에는 황금송아지가 불러온 것과 유사한 처벌이 당연할 것 같은데 법을 만드는 사람은 단순한 금지조처를 내리는데 만족한다. 우리는 유태민족을 알리기 위해서만 여기로 그 사건을 가져온다: 유태민족은 어떤 입법가에 의해서도 다른 지역에서 예상되지 않은 범죄를 금지하는 법률이 집행된, 알려진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에 유태민족에게서는 수간(獸姦)이 틀림없이 흔했다.
바란(Pharan)과 호렙(Oreb), 그리고 가데스바네아(Cadès-Barné) 사막에서 유태인들이 겪은 피로와 궁핍 안에서 여인들이 남성들보다 더 약하여 죽었다고 믿을 수 있다. 유태인들이 아스팔티트(Asphaltite) 호수 좌우에 있는 성읍이나 마을을 취할 때, 결혼적령기의 처녀들을 남기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항상 내려졌기 때문에 실제로 유태인들에게는 처녀가 틀림없이 부족했다.
아직도 이 사막의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카라반들과 맺는 계약서에서 결혼적령기의 처녀를 달라고 항상 계약을 한다. 칼라브리아(la Calabre)의 몇몇 양치기들에 관하여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 무시무시한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인간 본성의 타락상을 암염소와 수간(獸姦)하는 지경까지 낮춘 것은 그럴 듯하다.
이 수간(獸姦)으로 인하여 괴물이 태어났는지, 그리고 사티로스(satyre)와 파우누스(faune)와 켄타우로스(centaure)와 미노타우로스(minotaure)에 관한 고대 이야기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를 아는 일이 이제 남아 있다;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물리학은 이 괴물의 문제를 아직 밝히지 않았다.
주석 37 여호수아 24장, 15절부터
주석 38 민수기 21장 9절
주석 39 열왕기 3권 15장 14절; 같은 책 22장 44절
주석 40 열왕기 4권, 16장
주석 41 같은 책 3권, 18장 38절 및 40절; 같은 책 4권, 2장 24절
주석 42 민수기 31장
주석 43 미디안은 약속의 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미디안은 페트라 아라비아(l'Arabie Pétrée) 이두메(Idumée)의 작은 주이다; 그곳은 바위지대 한 가운데로 아르논(Arnon) 시냇물 북쪽에서 시작하여 세렛(Zared) 강에서 끝나는데 아스팔티트 호수 동안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는 오늘날 아랍인 작은 무리가 거주한다: 그 지역은 길이가 80리 정도이고 폭은 그보다 조금 적을 수 있다.
주석 44 성서에 의하면 (사사기 11장 39절) 입다(Jephté)가 틀림없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 동 칼메(dom Calmet)는 입다의 언약에 대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이 희생제를 승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희생제를 치르자 하느님은 그들이 실행할 것을 원하는데, 그것은 실행을 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함이나, 혹은 사람들이 실행을 두려하지 않았다면, 실행하면서 사람들이 지녔던 경박함을 억제하기 위함일 따름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거의 모든 교부(敎父)들은 입다의 행동을 비난했다: 성서에 의하면 (사사기 11장 29절) 입다는 하느님의 영혼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성 바울(saint Paul)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32절)에서 입다를 칭찬한다; 바울은 입다를 사무엘이나 다윗과 동일한 위치에 둔다.
성 히에로니무스(Saint Jérôme)는 율리아누스(Julien)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입다는 자신의 딸을 여호와에게 바쳤고, 사도 바울이 그를 성자로 여기는 것은 그 사실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온갖 판단이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판단을 지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우리는 심지어 의견을 지니는 것조차 두려워해야 한다.
주석 45 아각(Agag) 왕의 죽음은 참된 희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울은 아말렉 족의 이 왕을 전쟁포로로 잡게 만들어 온전한 상태로 받았다; 그러나 제사장 사무엘이 아무도 살려두지 말라고 사울에게 명령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분명한 말로 이렇게 말했다 (열왕기 1권 15장 3절): “남녀 모두, 어린 아이와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라.”
“사무엘은 길갈(Galgal)에서 아각 왕을 조각내어 주님에게 바쳤다.”
“열정으로 인하여 이 선지자는 손에 칼을 들고 주님의 영광을 되찾고 사울을 당황시키기 위하여 이 기회로 뛰어들었다”고 동 칼메는 말한다.
이 살인적인 모험에는 헌신과 제사장과 희생자가 보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희생제이다.
우리가 역사로 알고 있는 모든 민족은, 중국인을 제외하고, 신에게 사람을 바쳤다. 플루타르크(Plutarque)는 로마인들도 공화정 시절부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보고한다 (로마에 관한 문항 82).
시저의 주석에는 (갈리아 전기 I, XXIV), 시저가 자신의 승리로 인하여 인질들을 건넸을 때 게르만인들은 시저가 준 인질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음이 보인다.
시저가 보낸 인질들에 대한 이 인권침해와, 지극히 참혹한 일로 여자의 손에 의하여 살해당한 인간제물들로 인하여, 자신의 논문 게르만의 관습에 관하여(De Moribus Germanorum)에서 타키투스가 게르만인에 대하여 한 찬사가 다소 부인된다고 나는 다른 곳에서 비평했다. 이 논문에서 타키투스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게르만인에 대하여 칭찬을 하기보다는 로마인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지나가는 길에 타키투스는 진실보다는 풍자를 훨씬 더 좋아했음을 언급하자. 그는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불쾌하게 만들며, 우리는 중상모략과 재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만큼 그의 악의로 인하여 우리는 즐거워한다.
인간제물에게로 돌아가자. 우리들의 선조는 게르만인만큼 인간제물을 잘 바쳤다: 그것은 방기했을 때 우리의 본성이 지닌 어리석음의 최고 정도이며, 그것은 우리가 지닌 판단력의 허약함이 낳은 결과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에게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쳐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식을 제외하고 가장 귀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신에게 그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어린 아이들을 골라야 한다.
필론은, 가나안 땅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명령하기 이전에 아이들이 여러 번 제물로 바쳐졌다고 말한다.
에우세비오스(Eusèbe)가 인용하는 상코니아톤(Sanchoniathon)은, 페니키아인들이 큰 환란을 당하면 자식들 가운데서 가장 아끼는 아이를 바쳤다고, 그리고 일루스(Ilus)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던 때와 거의 동시에 자신의 아들 예훗(Jéhud)을 제물로 바쳤다고 보고한다; 이 고대의 암흑을 뚫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희생제가 거의 도처에서 시행되었음은 매우 분명할 따름이다; 여러 민족들은 문명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희생제를 없앤다: 문명이 인도적 정신을 낳는다.
주석 46 사사기 11장 24절
주석 47 사사기 17장 마지막 절
주석 48 열왕기 4권 5장 18-19절
주석 49 고대의 관습을 잘 모르고 자신들의 주위에서 보는 것에 따라서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 기묘함에 놀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와 아시아의 대부분에서 사물들 다수가 그림이나 상형문자나 기호나 표본에 의해서 표현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언자들은, 이집트인들과 유태인들에게서 선지자로 불렸는데, 비유로서 자신의 의미를 전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선언하는 사건을 기호로서 형상화했다. 네 명의 위대한 유태 예언자 중 최초의 예언자인 이사야가 두루마리를 잡고 (8장) 거기다가 “샤스바스(Shas bas), 빨리 약탈하라”고 썼던 것처럼;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로 다가간다. 아내는 잉태하여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alas-Has-bas)라고 불리는 아들을 낳는다: 그것은 이집트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이 유태인들에게 할 해코지의 표현이다.
이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7장 15, 16, 18, 20절):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는 나이가 되고 악행을 비난하고 선행을 선택하기를 알기 전에, 너희들이 혐오하는 그 땅은 두 명의 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주님은 이집트의 파리를 부르고 아시리아의 벌을 부를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내어온 삭도(削刀)를 들고 아수르 왕의 모든 수염과 발의 털을 깎을 것이다.”
벌과 수염과, 깎인 발의 털에 관한 예언은, 피리소리나 농기구 소리로 벌떼를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 그의 수염을 자르는 것이었음을; 불두덩의 털이 발의 털로 불렸음을; 이 털은 나병처럼 불결한 병에 걸렸을 때만 깎였음을. 우리들의 문체에는 매우 생소한 이 모든 상징들은 몇 년 안에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압제로부터 구원할 것임을 의미할 따름이다.
또 이사야는 (20장), 아시리아의 왕이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로부터 발가벗은 몸을 덮을 것을 지니지 못할 한 무리의 포로들을 데려갈 것을 말하기 위하여, 전라의 몸으로 걷는다.
에스겔(Ezéchiel)은 자신에게 주어진 양피지 한 권을 먹는다 (4장과 그 후);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빵을 똥으로 덮고, 왼편으로 누워 390일을 지내고 오른편으로 40일을 지내며 유태인들에게 빵이 없을 것임을 이해시키며, 유폐가 견디어야 한 햇수를 의미한다. 그는 쇠사슬로 스스로를 묶어 유태민족이 묶일 쇠사슬임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과 수염을 잘라서 3등분한다: 한 부분은 마을 안에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두 번째 부분은 성벽 주변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세 번째 부분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언자 호세아(Osée)는 은 다섯 량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간음한 여인을 사서 결혼한다 (3장): “너는 나를 며칠 동안 기다려라, 그리고 그 동안 어떤 남자도 너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자손이 오랫동안 왕도, 왕자도, 제사도, 제단도, 제의(祭衣)도 없을 상태이다.”라고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한 마디로 선지자들은 예언된 것을 상징으로 나타내지 않고는 거의 예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레미아가 스스로 줄로 묶고 등에 목걸이와 멍에를 지면서 관습에 따르는 것은 그가 이런 표시를 보내는 사람들이 예속상태가 될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다면, 후세대와 모든 면에서 다른 고대 세상의 시대와 같이 이 시대는 다르다: 시민들의 생활, 법률, 전쟁을 하는 방식, 종교의식,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에게는 상고시대의 민족들과 어떤 유사점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생활방식을 우리의 생활방식과 비교하려고 할 때 우리의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심지어 호머의 저서와 헤로도토스의 저서 1권만 펼치면 된다.
자연 자체도 오늘날의 자연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주술사들은 자연에 대하여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뱀을 홀렸으며, 죽은 자를 불러냈다, 기타 등등. 하느님은 꿈을 보냈고 인간은 그 꿈을 설명했다. 예언능력은 흔했다. 느브갓네살이 황소로 변하고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다섯 마을이 역청 호수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신을 사람들은 보았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인종도 있었다. 거인족인 레파임(Réphaïm), 에님(Enim), 네필림(Néphilim), 에나심(Enacim)이 사라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神國) 5권에서 우리 어금니의 백 개만큼 큰 고대 거인의 이빨을 보았다고 말한다. 에스겔은 (27장 2절) 두로(Tyr) 포위공격에서 싸우던 팔뚝만한 키의 난장이족 가마딤(Gamadim)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거의 이 모든 것에서 성서 작가들의 의견은 이방인 작가들의 의견과 일치한다. 질병과 치료방식도 우리 시대의 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마귀 들린 정신병환자들은 바라드(barad)라고 불리는 뿌리를 고리에 끼워 코 아래 두어서 치료 했다.
결국 이 고대 세상 모두는 우리 세상과 매우 달라서 우리는 고대 세상으로부터 어떤 행동지침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 먼 고대시대에서 인간들이 번갈아 자신들의 신앙에 관하여 박해를 받았고 억압을 당했다할지라도, 우리는 은총의 율법 아래서 그 잔인성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주석 50 예레미아 27장 6절
주석 51 예레미아 28장 17절
주석 52 이사야 44장 및 45장
주석 53 출애급기 20장 5절
주석 54 신명기 28장
주석 55 모세의 계율 안에 한 가지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로 미루어 우리는 모세가 영혼은 육체와 죽지 않는다는 이집트인들을 지배하는 견해를 알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하고 신명기 18장에 있다: “구름을 보고 점을 치고 뱀에게 마술을 걸며 피톤(Python)의 정령에게 비는 점쟁이들과, 사자(死者)들에게 물어서 지식을 구하는 무당들에게 가서 의견을 구하지 말라.”
이 구절로 인하여 사람들이 사자(死者)의 영혼을 불러온다면 이 주술이라는 것은 영혼의 영원성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모세가 언급하는 주술사들은 천박한 사기꾼일 따름이기에, 자신들이 행한다고 믿었던 주술들에 대하여 뚜렷한 개념을 지니고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또한 있다. 자신들의 우스꽝스러운 주술로부터 사람들이 영혼의 불명성이라는 교설을 추론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고, 자신들이 사자(死者)가 말을 하도록 만들며, 자신들의 주술로써 사자(死者)를 살아있던 상태로 되돌려 놓음을 믿게 만들었다. 주술사들은 철학자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항상 바보들 앞에서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였다.
피톤(Python)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 오래 전에, 그 단어가 신명기 속에서 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임을 우리는 다시 주목할 수 있다: 또한 피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도 없어서 우리는 히브리에서 적확한 번역어를 찾지 못한다.
히브리어에선 극복되지 못할 난제들이 있다: 이 언어는 페니키아어, 이집트어, 시리아어, 아랍어가 혼합된 언어이다; 그리고 이 고대 혼합어는 오늘날 크게 변했다. 히브리어는 현재 및 미래라는 두 가지 시제의 동사밖에 없다: 다른 시제는 의미를 통하여 추측하여야 한다. 다양한 모음은 흔히 동일한 글자로 표현되었다; 혹은 그 모음들이 모음을 표현하지 않았고, 마침표를 발명한 사람들은 난제를 확대시키기만 했다. 각 부사에는 20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다. 동일한 단어가 반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혼란에 히브리어의 무미건조함과 빈약함을 덧보태라: 유태인들은, 기법이 없어서,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그리스어에 대한 히브리어의 관계는 학술원 회원의 언어에 대한 농부의 언어의 관계와 같다.
주석 56 에스겔 18장 20절
주석 57 상게서 20장 25절
주석 58 에스겔의 의견은 유대교회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원한 형벌을 믿으면서 하느님이 아비의 사악함을 자손에게 묻는다고 또한 믿었던 유태인들이 있었다: 오늘날 유태인들은 그로 인하여 50세대 동안 벌을 받으며, 아직도 두려워 할 영원한 형벌을 겪는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땅도 없어서 세상의 다른 곳으로 흩어졌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공모자도 아니었던 유태인 자손들이, 자신들의 조상들만큼 죄가 없던 자신들의 자녀에게서 세속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 사람들은 묻는다. 이 세속적 처벌은, 혹은 더 정확하게 다른 민족과 다르게 생활하면서 조국도 없이 상업을 영위하는 이 방식은,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스스로 당하며 진정한 개종에 의해서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영원한 형별과 비교하여 처벌로 간주되지 않는다.
주석 59 모세5경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지옥과 천국의 교리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묘하게 오류에 빠진다: 그들의 오류는 단어에 관한 헛된 논쟁에만 기초한다; 불가타 성경은 구덩이나 묘혈(墓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sheol을 infernum(지하세계)으로 번역하고 라틴어 단어 infernum은 프랑스어 지옥(enfer)으로 번역되어 사람들은 이 모호성을 이용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리스어의 하데스(Hades: Adès: 저승; 사자[死者]의 나라)나 지옥(Tartare)과 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다른 나라는 그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민수기 16장 (31-33절)에서는 고라(Coré)와 다단(Dathan)과 아비람(Abiron)의 장막 아래서 땅이 입을 벌리고 그들의 장막과 재산을 삼켰고 그들은 산채로 지하인 무덤 안으로 던져졌다고 언급된다: 이곳에서는 분명히 세 명의 히브리인의 영혼이나 지옥의 고통이나 영원한 형벌의 문제가 아니다.
백과사전의 지옥(ENFER)이라는 단어에서 고대 히브리인이 그 단어에서 실체를 인정했다고 언급되는 것은 이상하다; 그렇다면 모세5경 안에서 그것은 옹호될 수 없는 모순이리라. 모세가 동떨어지고 독특한 구절에서 사후의 형벌에 관하여 말하고, 자신의 계율에서는 그 형벌에 관하여 말하지 않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사람들은 신명기 32장 (21-24절)을 인용하지만, 그 장은 삭제되어 있다; 그 구절 전체가 여기 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를 섬겨서 나를 화나게 만들었고, 그들은 자만심을 일으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백성이 아니게 만들어 그들을 화나게 만들 것이고 미친 백성을 만들어 그들을 화나게 말들 것이다. 나의 분노에 불이 붙어서 그 불은 땅의 깊은 곳까지 태울 것이며 땅의 근원까지 삼키며, 산의 뿌리까지 태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위에 재앙을 모을 것이며 그들 위에 나의 화살을 퍼부을 것이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쓰러질 것이며, 새들이 날카롭게 쪼아서 그들을 먹어치울 것이다; 나는 땅위에서 화가 나서 기어 다니는 동물의 이빨과 뱀의 이빨을 그들 위에 풀어놓을 것이다.”
이 표현과 지옥의 형벌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우리가 그것들을 상상하는 것과 같이, 최소한의 유사성이라도 있는가? 오히려 이 표현들은 우리가 말하는 지옥이 고대 유태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만 언급되었던 것 같다.
이 항목을 저술한 사람은 욥기의 24장 (15-19절)을 인용한다. “간음자의 눈은 암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눈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릴 것이다; 낮에 그가 말했던 것과 같이 그가 밤에 집에 들어가고, 그들은 빛을 몰랐다; 새벽이 별안간 닥친다할지라도 그들은 새벽을 그림자로 믿을 것이어서 그들은 빛 속에서처럼 암흑 속을 걷는다; 그는 물위에서 가볍다; 그의 몫은 땅위에서 저주받을 것이며, 그는 포도밭 길을 지나지 않을 것이고 눈이 녹은 물로부터 매우 뜨거운 열탕을 지나리라; 그리고 그들은 무덤까지 죄를 지었다”; 혹은: “무덤은 죄지은 자들을 흩어버렸다”, 혹은 (70인역 성서에 따라서), “그들의 죄악은 기억 속에 새겨졌다.”
나는 구절 전체를 직역하여 인용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구절에 대하여 진정한 개념을 형성하기가 항상 불가능하다.
모세가 유태인들에게 사후의 형벌과 보상에 대하여 명백하고도 간단한 교리를 가르쳤다고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단어라고 거기에 있는가?
욥기에는 모세의 계율에 관한 것이 없다. 게다가 욥이 유태인이 아니었을 개연성은 높다; 그것은 성 히에로니무스(saint Jérôme)의 견해로 창세기에 관한 그의 히브리 문항에서 제기된다. 사탄(Sathan)이라는 단어는 욥기에 (1장 1절 6절 12절) 나오는데 유태인들이 알지 못하던 말로 모세5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이 이름을 칼데아(la Chaldée)에서 배웠는데, 유태인의 바빌론 유폐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가브리엘(Gabriel)과 라파엘(Raphaël)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욥은 여기서 매우 부적절하게 인용된다.
사람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다시 인용한다 (23절 24절): “그리고 달마다, 안식일마다 모든 혈육이 나를 경배하러 오리라고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신앙을 저버린 자들의 시체를 길가에서 볼 것이다; 그 시체의 구더기는 죽지 않을 것이고 그 시체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고 그 시체들은 모든 혈육의 눈에 질리도록 보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이 길가에 버려진다면, 그들이 질리도록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면, 그들이 구더기에게 먹힌다면, 그것은 모세가 유태인들에게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눈에 노출된 시체들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당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세의 시절부터 유태인들은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교리를 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할 수 있을까? 히브리 방식의 계산에 따르면 이사야는 3380년에 예언을 했다. 모세는 2500년경에 살았다; 그들 사이에는 800년이 흘러갔다. 인용 허가를 그렇게 남용하는 것과, 800년 후에 나타난 저술가의 한 구절을 통하여 그 견해를 발설하지 않은 어떤 저술가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상식에 대한 모독이거나 순전히 웃음거리이다. 영혼의 불멸성과 사후(死後)의 형벌과 보상은 신약성서에서 선포되고 인정되어 확립되었음은 확실하고, 그런 것들이 모세5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위대한 아르노(Arnauld)가 자신의 포르-루아얄(Port-Royal) 변호에서 명백하고 힘차게 말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그 후 영혼의 불멸성을 믿으면서도 그 영혼성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다른 민족들처럼, 영혼은 가냘프고 공기와 같은 것으로 자신이 활력을 불어넣은 육체의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가벼운 실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유령, 육체의 망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견해는 몇몇 교부(敎父)들의 견해였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en)는 자신의 저서 영혼(l'Ame) 2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혼은 하느님의 숨결에서 태어나서 불멸하고 육체적이고 형상이 있으며 그 본질에서 단순하다고 우리는 정의(定義)한다(Definimus animam Dei flatu natam, immortalem, corporalem, effigiatam, substantia simplicem.).”
성 이레나이우스(Saint Irénée)는 자신의 저서 2권 3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사멸하는 육신에 비하여 비육체적이다(Incorporales sunt animae quantum ad comparationem mortalium corporum.).” 그는 덧붙여 “예수-그리스도는 영혼이 육체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caracterem corporum in quo adoptantur, etc.) 가르쳤다”라고 말한다. 예수-그리스도가 그 교리를 가르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여 성 이레나이우스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어렵다.
성 힐라리우스(Hilaire)는 성 마태에 관한 주석에서 더 공식적이고 긍정적이다: 그는 분명하게 육체적 본질이 영혼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Corpoream naturae suae substantiam sortiuntur.”
성 암브로시우스(Saint Ambroise)는 아브라함에 관한 저서 2권 8장에서 상삼위일체의 본질 말고 물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나쁜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불가해한 본질을 알지 못하여 그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확언하고 영혼이 기독교적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들의 신학은 매우 건전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이란 정신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우리는 정신이라는 것 모두에 대하여 알지 못 한다. 우리는 물질이라는 것도 매우 불완전하게 알고 있기에 물질이 아닌 것에 대하여 뚜렷한 개념을 지닌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우리의 감각에 접촉하는 것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 저 편에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 스스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하여 희미한 개념을 우리들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평범한 우리 언어에서 나오는 몇 가지 말을 형이상학과 이론의 심층으로 우리는 옮겨간다; 가능하다면 이 미지의 지역에서 우리가 지닌 취약한 이해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단어들로 우리를 지탱하고자 우리는 노력한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단어는 물질이 아닌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입김과 숨결이라는 단어에 상응한다; 그리고 입김과 숨결과 정신이라는 단어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를 가냘프고 가벼운 본질이라는 개념으로 데려가는데, 순수한 정신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개념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삭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뚜렷한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심지어 본질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단어는 문자 그대로 밑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하여 그 단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유인즉 결국 밑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밀에 대한 지식은 이승의 몫이 아니다. 이승에서 깊은 어둠에 빠져 우리는 서로 대항하며 싸우는데 이 어둠 한 가운데서, 왜 우리가 싸우는지를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치고 박는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주의 깊게 우리가 숙고할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하여 관용을 지녀야 하고 그 관용을 지닐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합리적인 사람은 없다.
이 모든 말은 인간이 서로 용서해야 하는지를 아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 모든 말이 세월 속에서 우리가 이런저런 면에서 얼마나 틀렸는지를 증명한다면, 모든 세월 속에서 인간은 관용으로 서로를 대했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증명하기 때문이다.
주석 60 숙명론은 오래되고 보편적인 것이다: 호머의 작품에서 숙명론은 항상 발견된다. 주피터는 아들 사르페돈(Sarpédon)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지만 운명이 그 아들에게 죽음을 내렸다: 주피터는 복종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운명은, 철학자들에게서, 자연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원인과 결과의 필수적인 구속이고, 이 구속은 섭리가 명령한다: 이것은 훨씬 더 합리적인 인식이다. 숙명의 모든 체계는 세네카(Annaeus Sénèque)의 시에 포함되어 있다 (편지 107):
운명은 의지가 있는 자를 인도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를 끌고 간다(Ducunt volentem fata, nolentem trahunt).
하느님은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변치 않는 율법으로 우주를 다스린다고 우리는 항상 스스로 동의했다: 이 진리는 자유에 관한 모든 이해 불가능한 논쟁의 근원이었는데, 이유인즉 현명한 로크가 올 때까지 자유에 대한 개념이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크는 자유란 행동하는 능력임을 증명했다. 하느님은 이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한 명령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바퀴이다. 고대인들도 모두 자유에 대하여 논쟁했지만, 우리 시대까지 아무도 그 주제에 관하여 박해를 하지 않았다. 이 논쟁 때문에 프랑스의 빛이었던 아르노(Arnauld)와 사시(Sacy)와 니콜(Nicole)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투옥시키고 추방한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겨운 짓인가!
주석 61 윤회라는 신학적 허구는 인도에서 유래하는데, 우리는 인도로부터 훨씬 더 많은 우화를 받아들였으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다. 이 교설은 오비디우스(Ovide)의 훌륭한 저술 변신 5권에 설명되어 있다. 그 교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수용되었고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의 제사장이 피타고라스의 제자에게 파문 통지서를 보냈음을 알지 못한다.
주석 62 고대 유태인, 이집트인, 그들의 동시대인인 희랍인도 사람의 영혼은 죽은 후에 하늘로 간다고 믿지 않았다. 유태인들은 달과 해가 동일한 궤도 안에서 우리 머리 위 몇 십 리에 있으며. 창공은 물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두껍고 견고한 아치형인데 구멍들을 통하여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고대 희랍인들에게는 신들의 궁전이 올림포스 산 위에 있었다. 호머시대 이래 영웅들의 거처는 바다건너 어느 섬 안에 있었는데, 그것은 에세네파의 견해였다.
호머 이래 사람들은 신들의 별을 지정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달에서 사는 사람들이 신을 지구에 둘 근거가 없는 것처럼 신을 달에 둘 근거가 없었다. 주노(Junon)와 이리스(Iris)는 구름이라는 궁전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발을 둘 장소는 구름이 아니었다. 시바교도들이 보기에는 신은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도 한 개의 별이기 때문에 불의 본성을 지니지 않으면 태양에서 사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이 하늘에 대하여 생각한 것을 묻는 것은 매우 무용한 질문이다: 가장 훌륭한 답변은 고대인들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 63 마태복음 22장 4절
주석 64 누가복음 14장
주석 65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주석 66 마태복음 18장 17절
주석 67 마태복음 23장
주석 68 전게서 26장 59절
주석 69 마태복음 26장 61절
주석 70 실제로 특별한 계시 없이 하느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재림하는 설명될 수 없는 비밀을 이해한다는 것은 유태인들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매우 어려웠다. 창세기에서 (6장) 하느님의 아들은 강력한 분의 아들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시편에서 (79장 11절) 커다란 백향목은 하느님의 백향목으로 불린다. 사무엘은 (열왕기 1권 16장 15절) 하느님의 공포가, 다시 말해서 커다란 공포가 사람들에게 덮쳤다고 말한다; 커다란 바람은 하느님의 바람이다; 사울(Saül)의 병은 하느님의 근심이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로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태인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그 말을 불경죄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유태인들이 처해있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지상을 보내진 재림의 비밀과 하느님의 아들인 하느님 자신에 대한 비밀에 대한, 무지를 다시 증명한다.
주석 71 1762년에 이 글이 쓰였을 때,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회교도들이 불행을 당했다면 저자는 틀림없이 그들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자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보기는, 예수회교도들보다 더 불관용적이어서, 무자비하고 터무니없는 자신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을 자신들의 동료시민들을 어느 날 억압하고 싶어 할 사람들을 전율할게 만들 것이다. [1771년에 첨부된 주석]
주석 72 종교재판 지침(Le Manuel de l'Inquisition)이라는 탁월한 저술 참조.

 

 

 

 

 

 

 

 

 


TRAITESUR LATOLERANCE,A L'OCCASION DE LA MORT DE JEAN CALAS


CHAPITRE I
HISTOIRE ABREGEE DE LA MORT DE JEAN CALAS

Le meurtre de Calas, commis dans Toulouse avec le glaive de la justice, le 9 mars 1762, est un des plus singuliers événements qui méritent l'attention de notre âge et de la postérité. On oublie bientôt cette foule de morts qui a péri dans des batailles sans nombre, non seulement parce que c'est la fatalité inévitable de la guerre, mais parce que ceux qui meurent par le sort des armes pouvaient aussi donner la mort à leurs ennemis, et n'ont point péri sans se défendre. Là où le danger et l'avantage sont égaux, l'étonnement cesse, et la pitié même s'affaiblit; mais si un père de famille innocent est livré aux mains de l'erreur, ou de la passion, ou du fanatisme; si l'accusé n'a de défense que sa vertu: si les arbitres de sa vie n'ont à risquer en l'égorgeant que de se tromper; s'ils peuvent tuer impunément par un arrêt, alors le cri public s'élève, chacun craint pour soi-même, on voit que personne n'est en sûreté de sa vie devant un tribunal érigé pour veiller sur la vie des citoyens, et toutes les voix se réunissent pour demander vengeance.
Il s'agissait, dans cette étrange affaire, de religion, de suicide, de parricide; il s'agissait de savoir si un père et une mère avaient étranglé leur fils pour plaire à Dieu, si un frère avait étranglé son frère, si un ami avait étranglé son ami, et si les juges avaient à se reprocher d'avoir fait mourir sur la roue un père innocent, ou d'avoir épargné une mère, un frère, un ami coupables.
Jean Calas, âgé de soixante-huit ans, exerçait la profession de négociant à Toulouse depuis plus de quarante années, et était reconnu de tous ceux qui ont vécu avec lui pour un bon père. Il était protestant, ainsi que sa femme et tous ses enfants, excepté un, qui avait abjuré l'hérésie, et à qui le père faisait une petite pension. Il paraissait si éloigné de cet absurde fanatisme qui rompt tous les liens de la société qu'il approuva la conversion de son fils Louis Calas, et qu'il avait depuis trente ans chez lui une servante zélée catholique, laquelle avait élevé tous ses enfants.
Un des fils de Jean Calas, nommé Marc-Antoine, était un homme de lettres: il passait pour un esprit inquiet, sombre, et violent. Ce jeune homme, ne pouvant réussir ni à entrer dans le négoce, auquel il n'était pas propre, ni à être reçu avocat, parce qu'il fallait des certificats de catholicité qu'il ne put obtenir, résolut de finir sa vie, et fit pressentir ce dessein à un de ses amis; il se confirma dans sa résolution par la lecture de tout ce qu'on a jamais écrit sur le suicide.
Enfin, un jour, ayant perdu son argent au jeu, il choisit ce jour-là même pour exécuter son dessein. Un ami de sa famille et le sien, nommé Lavaisse, jeune homme de dix-neuf ans, connu par la candeur et la douceur de ses moeurs, fils d'un avocat célèbre de Toulouse, était arrivé de Bordeaux la veille (Note 1); il soupa par hasard chez les Calas. Le père, la mère, Marc-Antoine leur fils aîné, Pierre leur second fils, mangèrent ensemble. Après le souper on se retira dans un petit salon: Marc-Antoine disparut; enfin, lorsque le jeune Lavaisse voulut partir, Pierre Calas et lui, étant descendus, trouvèrent en bas, auprès du magasin, Marc-Antoine en chemise, pendu à une porte, et son habit plié sur le comptoir; sa chemise n'était pas seulement dérangée; ses cheveux étaient bien peignés: il n'avait sur son corps aucune plaie, aucune meurtrissure (Note 2).
On passe ici tous les détails dont les avocats ont rendu compte: on ne décrira point la douleur et le désespoir du père et de la mère; leurs cris furent entendus des voisins. Lavaisse et Pierre Calas, hors d'eux-mêmes, coururent chercher des chirurgiens et la justice.
Pendant qu'ils s'acquittaient de ce devoir, pendant que le père et la mère étaient dans les sanglots et dans les larmes, le peuple de Toulouse s'attroupe autour de la maison. Ce peuple est superstitieux et emporté; il regarde comme des monstres ses frères qui ne sont pas de la même religion que lui. C'est à Toulouse qu'on remercia Dieu solennellement de la mort de Henri III, et qu'on fit serment d'égorger le premier qui parlerait de reconnaître le grand, le bon Henri IV. Cette ville solennise encore tous les ans, par une procession et par des feux de joie, le jour où elle massacra quatre mille citoyens hérétiques, il y a deux siècles. En vain six arrêts du conseil ont défendu cette odieuse fête, les Toulousains l'ont toujours célébrée comme les jeux floraux.
Quelque fanatique de la populace s'écria que Jean Calas avait pendu son propre fils Marc-Antoine. Ce cri, répété, fut unanime en un moment; d'autres ajoutèrent que le mort devait le lendemain faire abjuration; que sa famille et le jeune Lavaisse l'avaient étranglé par haine contre la religion catholique: le moment d'après on n'en douta plus; toute la ville fut persuadée que c'est un point de religion chez les protestants qu'un père et une mère doivent assassiner leur fils dès qu'il veut se convertir.
Les esprits une fois émus ne s'arrêtent point. On imagina que les protestants du Languedoc s'étaient assemblés la veille; qu'ils avaient choisi, à la pluralité des voix, un bourreau de la secte; que le choix était tombé sur le jeune Lavaisse; que ce jeune homme, en vingt-quatre heures, avait reçu la nouvelle de son élection, et était arrivé de Bordeaux pour aider Jean Calas, sa femme, et leur fils Pierre, à étrangler un ami, un fils, un frère.
Le sieur David, capitoul de Toulouse, excité par ces rumeurs et voulant se faire valoir par une prompte exécution, fit une procédure contre les règles et les ordonnances. La famille Calas, la servante catholique, Lavaisse, furent mis aux fers.
On publia un monitoire non moins vicieux que la procédure. On alla plus loin: Marc-Antoine Calas était mort calviniste, et s'il avait attenté sur lui-même, il devait être traîné sur la claie; on l'inhuma avec la plus grande pompe dans l'église Saint-Etienne, malgré le curé, qui protestait contre cette profanation.
Il y a, dans le Languedoc, quatre confréries de pénitents, la blanche, la bleue, la grise, et la noire. Les confrères portent un long capuce, avec un masque de drap percé de deux trous pour laisser la vue libre: ils ont voulu engager M. le duc de Fitz-James, commandant de la province, à entrer dans leurs corps, et il les a refusés. Les confrères blancs firent à Marc-Antoine Calas un service solennel, comme à un martyr. Jamais aucune Eglise ne célébra la fête d'un martyr véritable avec plus de pompe; mais cette pompe fut terrible. On avait élevé au-dessus d'un magnifique catafalque un squelette qu'on faisait mouvoir, et qui représentait Marc-Antoine Calas, tenant d'une main une palme, et de l'autre la plume dont il devait signer l'abjuration de l'hérésie, et qui écrivait en effet l'arrêt de mort de son père.
Alors il ne manqua plus au malheureux qui avait attenté sur soi-même que la canonisation: tout le peuple le regardait comme un saint; quelques-uns l'invoquaient, d'autres allaient prier sur sa tombe, d'autres lui demandaient des miracles, d'autres racontaient ceux qu'il avait faits. Un moine lui arracha quelques dents pour avoir des reliques durables. Une dévote, un peu sourde, dit qu'elle avait entendu le son des cloches. Un prêtre apoplectique fut guéri après avoir pris de l'émétique. On dressa des verbaux de ces prodiges. Celui qui écrit cette relation possède une attestation qu'un jeune homme de Toulouse est devenu fou pour avoir prié plusieurs nuits sur le tombeau du nouveau saint, et pour n'avoir pu obtenir un miracle qu'il implorait.
Quelques magistrats étaient de la confrérie des pénitents blancs. Dès ce moment la mort de Jean Calas parut infaillible.
Ce qui surtout prépara son supplice, ce fut l'approche de cette fête singulière que les Toulousains célèbrent tous les ans en mémoire d'un massacre de quatre mille huguenots; l'année 1762 était l'année séculaire. On dressait dans la ville l'appareil de cette solennité: cela même allumait encore l'imagination échauffée du peuple; on disait publiquement que l'échafaud sur lequel on rouerait les Calas serait le plus grand ornement de la fête; on disait que la Providence amenait elle-même ces victimes pour être sacrifiées à notre sainte religion. Vingt personnes ont entendu ces discours, et de plus violents encore. Et c'est de nos jours! et c'est dans un temps où la philosophie a fait tant de progrès! et c'est lorsque cent académies écrivent pour inspirer la douceur des moeurs! Il semble que le fanatisme, indigné depuis peu des succès de la raison, se débatte sous elle avec plus de rage.
Treize juges s'assemblèrent tous les jours pour terminer le procès. On n'avait, on ne pouvait avoir aucune preuve contre la famille; mais la religion trompée tenait lieu de preuve. Six juges persistèrent longtemps à condamner Jean Calas, son fils, et Lavaisse, à la roue, et la femme de Jean Calas au bûcher. Sept autres plus modérés voulaient au moins qu'on examinât. Les débats furent réitérés et longs. Un des juges, convaincu de l'innocence des accusés et de l'impossibilité du crime, parla vivement en leur faveur: il opposa le zèle de l'humanité au zèle de la sévérité; il devint l'avocat public des Calas dans toutes les maisons de Toulouse, où les cris continuels de la religion abusée demandaient le sang de ces infortunés. Un autre juge, connu par sa violence, parlait dans la ville avec autant d'emportement contre les Calas que le premier montrait d'empressement à les défendre. Enfin l'éclat fut si grand qu'ils furent obligés de se récuser l'un et l'autre; ils se retirèrent à la campagne.
Mais, par un malheur étrange, le juge favorable aux Calas eut la délicatesse de persister dans sa récusation, et l'autre revint donner sa voix contre ceux qu'il ne devait point juger: ce fut cette voix qui forma la condamnation à la roue, car il n'y eut que huit voix contre cinq, un des six juges opposés ayant à la fin, après bien des contestations, passé au parti le plus sévère.
Il semble que quand il s'agit d'un parricide et de livrer un père de famille au plus affreux supplice, le jugement devrait être unanime, parce que les preuves d'un crime si inouï (Note 3) devraient être d'une évidence sensible à tout le monde: le moindre doute dans un cas pareil doit suffire pour faire trembler un juge qui va signer un arrêt de mort. La faiblesse de notre raison et l'insuffisance de nos lois se font sentir tous les jours; mais dans quelle occasion en découvre-t-on mieux la misère que quand la prépondérance d'une seule voix fait rouer un citoyen? Il fallait, dans Athènes, cinquante voix au-delà de la moitié pour oser prononcer un jugement de mort. Qu'en résulte-t-il? Ce que nous savons très inutilement, que les Grecs étaient plus sages et plus humains que nous.
Il paraissait impossible que Jean Calas, vieillard de soixante-huit ans, qui avait depuis longtemps les jambes enflées et faibles, eût seul étranglé et pendu un fils âgé de vingt-huit ans, qui était d'une force au-dessus de l'ordinaire; il fallait absolument qu'il eût été assisté dans cette exécution par sa femme, par son fils Pierre Calas, par Lavaisse, et par la servante. Ils ne s'étaient pas quittés un seul moment le soir de cette fatale aventure. Mais cette supposition était encore aussi absurde que l'autre: car comment une servante zélée catholique aurait-elle pu souffrir que des huguenots assassinassent un jeune homme élevé par elle pour le punir d'aimer la religion de cette servante? Comment Lavaisse serait-il venu exprès de Bordeaux pour étrangler son ami dont il ignorait la conversion prétendue? Comment une mère tendre aurait-elle mis les mains sur son fils? Comment tous ensemble auraient-ils pu étrangler un jeune homme aussi robuste qu'eux tous, sans un combat long et violent, sans des cris affreux qui auraient appelé tout le voisinage, sans des coups réitérés, sans des meurtrissures, sans des habits déchirés.
Il était évident que, si le parricide avait pu être commis, tous les accusés étaient également coupables, parce qu'ils ne s'étaient pas quittés d'un moment; il était évident qu'ils ne l'étaient pas; il était évident que le père seul ne pouvait l'être; et cependant l'arrêt condamna ce père seul à expirer sur la roue.
Le motif de l'arrêt était aussi inconcevable que tout le reste. Les juges qui étaient décidés pour le supplice de Jean Calas persuadèrent aux autres que ce vieillard faible ne pourrait résister aux tourments, et qu'il avouerait sous les coups des bourreaux son crime et celui de ses complices. Ils furent confondus, quand ce vieillard, en mourant sur la roue, prit Dieu à témoin de son innocence, et le conjura de pardonner à ses juges.
Ils furent obligés de rendre un second arrêt contradictoire avec le premier, d'élargir la mère, son fils Pierre, le jeune Lavaisse, et la servante; mais un des conseillers leur ayant fait sentir que cet arrêt démentait l'autre, qu'ils se condamnaient eux-mêmes, que tous les accusés ayant toujours été ensemble dans le temps qu'on supposait le parricide, l'élargissement de tous les survivants prouvait invinciblement l'innocence du père de famille exécuté, ils prirent alors le parti de bannir Pierre Calas son fils. Ce bannissement semblait aussi inconséquent, aussi absurde que tout le reste: car Pierre Calas était coupable ou innocent du parricide; s'il était coupable, il fallait le rouer comme son père; s'il était innocent, il ne fallait pas le bannir. Mais les juges, effrayés du supplice du père et de la piété attendrissante avec laquelle il était mort, imaginèrent de sauver leur honneur en laissant croire qu'ils faisaient grâce au fils, comme si ce n'eût pas été une prévarication nouvelle de faire grâce; et ils crurent que le bannissement de ce jeune homme pauvre et sans appui, étant sans conséquence, n'était pas une grande injustice, après celle qu'ils avaient eu le malheur de commettre.
On commença par menacer Pierre Calas, dans son cachot, de le traiter comme son père s'il n'abjurait pas sa religion. C'est ce que ce jeune homme (Note 4) atteste par serment.
Pierre Calas, en sortant de la ville, rencontra un abbé convertisseur qui le fit rentrer dans Toulouse; on l'enferma dans un couvent de dominicains, et là on le contraignit à remplir toutes les fonctions de la catholicité: c'était en partie ce qu'on voulait, c'était le prix du sang de son père; et la religion, qu'on avait cru venger, semblait satisfaite.
On enleva les filles à la mère; elles furent enfermées dans un couvent. Cette femme, presque arrosée du sang de son mari, ayant tenu son fils aîné mort entre ses bras, voyant l'autre banni, privée de ses filles, dépouillée de tout son bien, était seule dans le monde, sans pain, sans espérance, et mourante de l'excès de son malheur. Quelques personnes, ayant examiné mûrement toutes les circonstances de cette aventure horrible, en furent si frappées qu'elles firent presser la dame Calas, retirée dans une solitude, d'oser venir demander justice au pied du trône. Elle ne pouvait pas alors se soutenir, elle s'éteignait; et d'ailleurs, étant née Anglaise, transplantée dans une province de France dès son jeune âge, le nom seul de la ville de Paris l'effrayait. Elle s'imaginait que la capitale du royaume devait être encore plus barbare que celle du Languedoc. Enfin le devoir de venger la mémoire de son mari l'emporta sur sa faiblesse. Elle arriva à Paris prête d'expirer. Elle fut étonnée d'y trouver de l'accueil, des secours, et des larmes.
La raison l'emporte à Paris sur le fanatisme, quelque grand qu'il puisse être, au lieu qu'en province le fanatisme l'emporte presque toujours sur la raison.
M. de Beaumont, célèbre avocat du parlement de Paris, prit d'abord sa défense, et dressa une consultation qui fut signée de quinze avocats. M. Loiseau, non moins éloquent, composa un mémoire en faveur de la famille. M. Mariette, avocat au conseil, dressa une requête juridique qui portait la conviction dans tous les esprits.
Ces trois généreux défenseurs des lois et de l'innocence abandonnèrent à la veuve le profit des éditions de leurs plaidoyers (Note 5). Paris et l'Europe entière s'émurent de pitié, et demandèrent justice avec cette femme infortunée. L'arrêt fut prononcé par tout le public longtemps avant qu'il pût être signé par le conseil.
La pitié pénétra jusqu'au ministère, malgré le torrent continuel des affaires, qui souvent exclut la pitié, et malgré l'habitude de voir des malheureux, qui peut endurcir le coeur encore davantage. On rendit les filles à la mère. On les vit toutes les trois, couvertes d'un crêpe et baignées de larmes, en faire répandre à leurs juges.
Cependant cette famille eut encore quelques ennemis, car il s'agissait de religion. Plusieurs personnes, qu'on appelle en France dévotes (Note 6), dirent hautement qu'il valait mieux laisser rouer un vieux calviniste innocent que d'exposer huit conseillers de Languedoc à convenir qu'ils s'étaient trompés: on se servit même de cette expression: "Il y a plus de magistrats que de Calas"; et on inférait de là que la famille Calas devait t être immolée à l'honneur de la magistrature. On ne songeait pas que l'honneur des juges consiste, comme celui des autres hommes, à réparer leurs fautes. On ne croit pas en France que le pape, assisté de ses cardinaux, soit infaillible: on pourrait croire de même que huit juges de Toulouse ne le sont pas. Tout le reste des gens sensés et désintéressés disaient que l'arrêt de Toulouse sera t cassé dans toute l'Europe, quand même des considérations particulières empêcheraient qu'il fût cassé dans le conseil.
Tel était l'état de cette étonnante aventure, lorsqu'elle a fait naître à des personnes impartiales, mais sensibles, le dessein de présenter au public quelques réflexions sur la tolérance, sur l'indulgence, sur la commisération, que l'abbé Houtteville appelle dogme monstrueux, dans sa déclamation ampoulée et erronée sur des faits, et que la raison appelle l'apanage de la nature.
Ou les juges de Toulouse, entraînés par le fanatisme de la populace, ont fait rouer un père de famille innocent, ce qui est sans exemple; ou ce père de famille et sa femme ont étranglé leur fils aîné, aidés dans ce parricide par un autre fils et par un ami, ce qui n'est pas dans la nature. Dans l'un ou dans l'autre cas, l'abus de la religion la plus sainte a produit un grand crime. Il est donc de l'intérêt du genre humain d'examiner si la religion doit être charitable ou barbare.

CHAPITRE II
CONSEQUENCES DU SUPPLICE DE JEAN CALAS
Si les pénitents blancs furent la cause du supplice d'un innocent, de la ruine totale d'une famille, de sa dispersion et de l'opprobre qui ne devrait être attaché qu'à l'injustice, mais qui l'est au supplice; si cette précipitation des pénitents blancs à célébrer comme un saint celui qu'on aurait dû traîner sur la claie, suivant nos barbares usages, a fait rouer un père de famille vertueux; ce malheur doit sans doute les rendre pénitents en effet pour le reste de leur vie; eux et les juges doivent pleurer, mais non pas avec un long habit blanc et un masque sur le visage qui cacherait leurs larmes.
On respecte toutes les confréries: elles sont édifiantes; mais quelque grand bien qu'elles puissent faire à l'Etat, égale-t-il ce mal affreux qu'elles ont causé? Elles semblent instituées par le zèle qui anime en Languedoc les catholiques contre ceux que nous nommons huguenots. On dirait qu'on a fait voeu de haïr ses frères, car nous avons assez de religion pour haïr et persécuter, et nous n'en avons pas assez pour aimer et pour secourir. Et que serait-ce si ces confréries étaient gouvernées par des enthousiastes, comme l'ont été autrefois quelques congrégations des artisans et des messieurs, chez lesquels on réduisait en art et en système l'habitude d'avoir des visions, comme le dit un de nos plus éloquents et savants magistrats? Que serait-ce si on établissait dans les confréries ces chambres obscures, appelées chambres de méditation, où l'on faisait peindre des diables armés de cornes et de griffes, des gouffres de flammes, des croix et des poignards, avec le saint nom de Jésus au-dessus du tableau? Quel spectacle dans des yeux déjà fascinés, et pour des imaginations aussi enflammées que soumises à leurs directeurs!
Il y a eu des temps, on ne le sait que trop, où des confréries ont été dangereuses. Les frérots, les flagellants, ont causé des troubles. La Ligue commença par de telles associations. Pourquoi se distinguer ainsi des autres citoyens? S'en croyait-on plus parfait? Cela même est une insulte au reste de la nation. Voulait-on que tous les chrétiens entrassent dans la confrérie? Ce serait un beau spectacle que l'Europe en capuchon et en masque, avec deux petits trous ronds au-devant des yeux! Pense-t-on de bonne foi que Dieu préfère cet accoutrement à un justaucorps? Il y a bien plus: cet habit est un uniforme de controversistes, qui avertit les adversaires de se mettre sous les armes; il peut exciter une espèce de guerre civile dans les esprits, et elle finirait peut-être par de funestes excès si le roi et ses ministres n'étaient aussi sages que les fanatiques sont insensés.
On sait assez ce qu'il en a coûté depuis que les chrétiens disputent sur le dogme: le sang a coulé, soit sur les échafauds, soit dans les batailles, dès le IV e siècle jusqu'à nos jours. Bornons-nous ici aux guerres et aux horreurs que les querelles de la Réforme ont excitées, et voyons quelle en a été la source en France. Peut-être un tableau raccourci et fidèle de tant de calamités ouvrira les yeux de quelques personnes peu instruites, et touchera des coeurs bien faits.


CHAPITRE III
IDEE DE LA REFORME DU XVI e SIECLE
Lorsqu'à la renaissance des lettres les esprits commencèrent à s'éclairer, on se plaignit généralement des abus; tout le monde avoue que cette plainte était légitime.
Le pape Alexandre VI avait acheté publiquement la tiare, et ses cinq bâtards en partageaient les avantages. Son fils, le cardinal duc de Borgia, fit périr, de concert avec le pape son père, les Vitelli, les Urbino, les Gravina, les Oliveretto, et cent autres seigneurs, pour ravir leurs domaines. Jules II, animé du même esprit, excommunia Louis XII, donna son royaume au premier occupant; et lui-même, le casque en tête et la cuirasse sur le dos, mit à feu et à sang une partie de l'Italie. Léon X, pour payer ses plaisirs, trafiqua des indulgences comme on vend des denrées dans un marché public. Ceux qui s'élevèrent contre tant de brigandages n'avaient du moins aucun tort dans la morale. Voyons s'ils en avaient contre nous dans la politique.
Ils disaient que Jésus-Christ n'ayant jamais exigé d'annates ni de réserves, ni vendu des dispenses pour ce monde et des indulgences pour l'autre, on pouvait se dispenser de payer à un prince étranger le prix de toutes ces choses. Quand les annates, les procès en cour de Rome, et les dispenses qui subsistent encore aujourd'hui, ne nous coûteraient que cinq cent mille francs par an, il est clair que nous avons payé depuis François Ier, en deux cent cinquante années, cent vingt-cinq millions; et en évaluant les différents prix du marc d'argent, cette somme en compose une d'environ deux cent cinquante millions d'aujourd'hui. On peut donc convenir sans blasphème que les hérétiques, en proposant l'abolition de ces impôts singuliers dont la postérité s'étonnera, ne faisaient pas en cela un grand mal au royaume, et qu'ils étaient plutôt bons calculateurs que mauvais sujets. Ajoutons qu'ils étaient les seuls qui sussent la langue grecque, et qui connussent l'Antiquité. Ne dissimulons point que, malgré leurs erreurs, nous leur devons le développement de l'esprit humain, longtemps enseveli dans la plus épaisse barbarie.
Mais comme ils niaient le purgatoire, dont on ne doit pas douter, et qui d'ailleurs rapportait beaucoup aux moines; comme ils ne révéraient pas des reliques qu'on doit révérer, mais qui rapportaient encore davantage; enfin comme ils attaquaient des dogmes très respectés (Note 7), on ne leur répondit d'abord qu'en les faisant brûler. Le roi, qui les protégeait et les soudoyait en Allemagne, marcha dans Paris à la tête d'une procession après laquelle on exécuta plusieurs de ces malheureux; et voici quelle fut cette exécution. On les suspendait au bout d'une longue poutre qui jouait en bascule sur un arbre debout; un grand feu était allumé sous eux, on les y plongeait, et on les relevait alternativement: ils éprouvaient les tourments de la mort par degrés, jusqu'à ce qu'ils expirassent par le plus long et le plus affreux supplice que jamais ait inventé la barbarie.
Peu de temps avant la mort de François Ier, quelques membres du parlement de Provence, animés par des ecclésiastiques contre les habitants de Mérindol et de Cabrières, demandèrent au roi des troupes pour appuyer l'exécution de dix-neuf personnes de ce pays condamnées par eux; ils en firent égorger six mille, sans pardonner ni au sexe, ni à la vieillesse, ni à l'enfance; ils réduisirent trente bourgs en cendres. Ces peuples, jusqu'alors inconnus, avaient tort, sans doute, d'être nés Vaudois; c'était leur seule iniquité. Ils étaient établis depuis trois cents ans dans des déserts et sur des montagnes qu'ils avaient rendus fertiles par un travail incroyable. Leur vie pastorale et tranquille retraçait l'innocence attribuée aux premiers âges du monde. Les villes voisines n'étaient connues d'eux que par le trafic des fruits qu'ils allaient vendre, ils ignoraient les procès et la guerre; ils ne se défendirent pas: on les égorgea comme des animaux fugitifs qu'on tue dans une enceinte (Note 8).
Après la mort de François Ier, prince plus connu cependant par ses galanteries et par ses malheurs que par ses cruautés, le supplice de mille hérétiques, surtout celui du conseiller au parlement Dubourg, et enfin le massacre de Vassy, armèrent les persécutés, dont la secte s'était multipliée à la lueur des bûchers et sous le fer des bourreaux; la rage succéda à la patience; ils imitèrent les cruautés de leurs ennemis: neuf guerres civiles remplirent la France de carnage; une paix plus funeste que la guerre produisit la Saint-Barthélémy, dont il n'y avait aucun exemple dans les annales des crimes.
La Ligue assassina Henri III et Henri IV, par les mains d'un frère jacobin et d'un monstre qui avait été frère feuillant. Il y a des gens qui prétendent que l'humanité, l'indulgence, et la liberté de conscience, sont des choses horribles; mais, en bonne foi, auraient-elles produit des calamités comparables?


CHAPITRE IV
SI LA TOLERANCE EST DANGEREUSE,
ET CHEZ QUELS PEUPLES ELLE EST PERMISE
Quelques-uns ont dit que si l'on usait d'une indulgence paternelle envers nos frères errants qui prient Dieu en mauvais français, ce serait leur mettre les armes à la main; qu'on verrait de nouvelles batailles de Jarnac, de Moncontour, de Coutras, de Dreux, de Saint-Denis, etc.: c'est ce que j'ignore, parce que je ne suis pas un prophète; mais il me semble que ce n'est pas raisonner conséquemment que de dire: "Ces hommes se sont soulevés quand je leur ai fait du mal: donc ils se soulèveront quand je leur ferai du bien."
J'oserais prendre la liberté d'inviter ceux qui sont à la tête du gouvernement, et ceux qui sont destinés aux grandes places, à vouloir bien examiner mûrement si l'on doit craindre en effet que la douceur produise les mêmes révoltes que la cruauté a fait naître; si ce qui est arrivé dans certaines circonstances doit arriver dans d'autres; si les temps, l'opinion, les moeurs, sont toujours les mêmes.
Les huguenots, sans doute, ont été enivrés de fanatisme et souillés de sang comme nous; mais la génération présente est-elle aussi barbare que leurs pères? Le temps, la raison qui fait tant de progrès, les bons livres, la douceur de la société, n'ont-ils point pénétré chez ceux qui conduisent l'esprit de ces peuples? et ne nous apercevons-nous pas que presque toute l'Europe a changé de face depuis environ cinquante années?
Le gouvernement s'est fortifié partout, tandis que les moeurs se sont adoucies. La police générale, soutenue d'armées nombreuses toujours existantes, ne permet pas d'ailleurs de craindre le retour de ces temps anarchiques, où des paysans calvinistes combattaient des paysans catholiques enrégimentés à la hâte entre les semailles et les moissons.
D'autres temps, d'autres soins. Il serait absurde de décimer aujourd'hui la Sorbonne parce qu'elle présenta requête autrefois pour faire brûler la Pucelle d'Orléans; parce qu'elle déclara Henri III déchu du droit de régner, qu'elle l'excommunia, qu'elle proscrivit le grand Henri IV. On ne recherchera pas sans doute les autres corps du royaume, qui commirent les mêmes excès dans ces temps de frénésie: cela serait non seulement injuste; mais il y aurait autant de folie qu'à purger tous les habitants de Marseille parce qu'ils ont eu la peste en 1720.
Irons-nous saccager Rome, comme firent les troupes de Charles Quint, parce que Sixte Quint, en 1585, accorda neuf ans d'indulgence à tous les Français qui prendraient les armes contre leur souverain? Et n'est-ce pas assez d'empêcher Rome de se porter jamais à des excès semblables?
La fureur qu'inspirent l'esprit dogmatique et l'abus de la religion chrétienne mal entendue a répandu autant de sang, a produit autant de désastres, en Allemagne, en Angleterre, et même en Hollande, qu'en France: cependant aujourd'hui la différence des religions ne cause aucun trouble dans ces Etats; le juif, le catholique, le grec, le luthérien, le calviniste, l'anabaptiste, le socinien, le mennonite, le morave, et tant d'autres, vivent en frères dans ces contrées, et contribuent également au bien de la société.
On ne craint plus en Hollande que les disputes d'un Gomar (Note 9) sur la prédestination fassent trancher la tête au grand pensionnaire. On ne craint plus à Londres que les querelles des presbytériens et des épiscopaux, pour une liturgie et pour un surplis, répandent le sang d'un roi sur un échafaud (Note 10). L'Irlande peuplée et enrichie ne verra plus ses citoyens catholiques sacrifier à Dieu pendant deux mois ses citoyens protestants, les enterrer vivants, suspendre les mères à des gibets, attacher les filles au cou de leurs mères, et les voir expirer ensemble; ouvrir le ventre des femmes enceintes, en tirer les enfants à demi formés, et les donner à manger aux porcs et aux chiens; mettre un poignard dans la main de leurs prisonniers garrottés, et conduire leurs bras dans le sein de leurs femmes, de leurs pères, de leurs mères, de leurs filles, s'imaginant en faire mutuellement des parricides, et les damner tous en les exterminant tous. C'est ce que rapporte Rapin-Thoiras, officier en Irlande, presque contemporain; c'est ce que rapportent toutes les annales, toutes les histoires d'Angleterre, et ce qui sans doute ne sera jamais imité. La philosophie, la seule philosophie, cette soeur de la religion, a désarmé des mains que la superstition avait si longtemps ensanglantées; et l'esprit humain, au réveil de son ivresse, s'est étonné des excès où l'avait emporté le fanatisme.
Nous-mêmes, nous avons en France une province opulente où le luthéranisme l'emporte sur le catholicisme. L'université d'Alsace est entre les mains des luthériens; ils occupent une partie des charges municipales: jamais la moindre querelle religieuse n'a dérangé le repos de cette province depuis qu'elle appartient à nos rois. Pourquoi? C'est qu'on n'y a persécuté personne. Ne cherchez point à gêner les coeurs, et tous les coeurs seront à vous.
Je ne dis pas que tous ceux qui ne sont point de la religion du prince doivent partager les places et les honneurs de ceux qui sont de la religion dominante. En Angleterre, les catholiques, regardés comme attachés au parti du prétendant, ne peuvent parvenir aux emplois: ils payent même double taxe; mais ils jouissent d'ailleurs de tous les droits des citoyens.
On a soupçonné quelques évêques français de penser qu'il n'est ni de leur honneur ni de leur intérêt d'avoir dans leur diocèse des calvinistes, et que c'est là le plus grand obstacle à la tolérance; je ne le puis croire. Le corps des évêques, en France, est composé de gens de qualité qui pensent et qui agissent avec une noblesse digne de leur naissance; ils sont charitables et généreux, c'est une justice qu'on doit leur rendre; ils doivent penser que certainement leurs diocésains fugitifs ne se convertiront pas dans les pays étrangers, et que, retournés auprès de leurs pasteurs, ils pourraient être éclairés par leurs instructions et touchés par leurs exemples: il y aurait de l'honneur à les convertir, le temporel n'y perdrait pas, et plus il y aurait de citoyens, plus les terres des prélats rapporteraient.
Un évêque de Varmie, en Pologne, avait un anabaptiste pour fermier, et un socinien pour receveur; on lui proposa de chasser et de poursuivre l'un, parce qu'il ne croyait pas la consubstantialité, et l'autre, parce qu'il ne baptisait son fils qu'à quinze ans: il répondit qu'ils seraient éternellement damnés dans l'autre monde, mais que, dans ce monde-ci, ils lui étaient très nécessaires.
Sortons de notre petite sphère, et examinons le reste de notre globe. Le Grand Seigneur gouverne en paix vingt peuples de différentes religions; deux cent mille Grecs vivent avec sécurité dans Constantinople; le muphti même nomme et présente à l'empereur le patriarche grec; on y souffre un patriarche latin. Le sultan nomme des évêques latins pour quelques îles de la Grèce (Note 11), et voici la formule dont il se sert: "Je lui commande d'aller résider évêque dans l'île de Chio, selon leur ancienne coutume et leurs vaines cérémonies." Cet empire est rempli de jacobites, de nestoriens, de monothélites; il y a des cophtes, des chrétiens de Saint-Jean, des juifs, des guèbres, des banians. Les annales turques ne font mention d'aucune révolte excitée par aucune de ces religions.
Allez dans l'Inde, dans la Perse, dans la Tartarie, vous y verrez la même tolérance et la même tranquillité. Pierre le Grand a favorisé tous les cultes dans son vaste empire; le commerce et l'agriculture y ont gagné, et le corps politique n'en a jamais souffert.
Le gouvernement de la Chine n'a jamais adopté, depuis plus de quatre mille ans qu'il est connu, que le culte des noachides, l'adoration simple d'un seul Dieu: cependant il tolère les superstitions de Fô. et une multitude de bonzes qui serait dangereuse si la sagesse des tribunaux ne les avait pas toujours contenus.
Il est vrai que le grand empereur Young-tching, le plus sage et le plus magnanime peut-être qu'ait eu la Chine, a chassé les jésuites; mais ce n'était pas parce qu'il était intolérant, c'était, au contraire, parce que les jésuites l'étaient. Ils rapportent eux-mêmes, dans leurs Lettres curieuses, les paroles que leur dit ce bon prince: "Je sais que votre religion est intolérante; je sais ce que vous avez fait aux Manilles et au Japon; vous avez trompé mon père, n'espérez pas me tromper moi-même." Qu'on lise tout le discours qu'il daigna leur tenir, on le trouvera le plus sage et le plus clément des hommes. Pouvait-il, en effet, retenir des physiciens d'Europe qui, sous le prétexte de montrer des thermomètres et des éolipyles à la cour, avaient soulevé déjà un prince du sang? Et qu'aurait dit cet empereur, s'il avait lu nos histoires, s'il avait connu nos temps de la Ligue et de la conspiration des poudres?
C'en était assez pour lui d'être informé des querelles indécentes des jésuites, des dominicains, des capucins, des prêtres séculiers, envoyés du bout du monde dans ses Etats: ils venaient prêcher la vérité, et ils s'anathématisaient les uns les autres. L'empereur ne fit donc que renvoyer des perturbateurs étrangers; mais avec quelle bonté les renvoya-t-il! quels soins paternels n'eut-il pas d'eux pour leur voyage et pour empêcher qu'on ne les insultât sur la route! Leur bannissement même fut un exemple de tolérance et d'humanité.
Les Japonais (Note 12) étaient les plus tolérants de tous les hommes: douze religions paisibles étaient établies dans leur empire; les jésuites vinrent faire la treizième, mais bientôt, n'en voulant pas souffrir d'autre, on sait ce qui en résulta: une guerre civile, non moins affreuse que celle de la Ligue, désola ce pays. La religion chrétienne fut noyée enfin dans des flots de sang; les Japonais fermèrent leur empire au reste du monde, et ne nous regardèrent que comme des bêtes farouches, semblables à celles dont les Anglais ont purgé leur île. C'est en vain que le ministre Colbert, sentant le besoin que nous avions des Japonais, qui n'ont nul besoin de nous, tenta d'établir un commerce avec leur empire: il les trouva inflexibles.
Ainsi donc notre continent entier nous prouve qu'il ne faut ni annoncer ni exercer l'intolérance.
Jetez les yeux sur l'autre hémisphère; voyez la Caroline, dont le sage Locke fut le législateur: il suffit de sept pères de famille pour établir un culte public approuvé par la loi; cette liberté n'a fait naître aucun désordre. Dieu nous préserve de citer cet exemple pour engager la France à l'imiter! on ne le rapporte que pour faire voir que l'excès le plus grand où puisse aller la tolérance n'a pas été suivi de la plus légère dissension; mais ce qui est très utile et très bon dans une colonie naissante n'est pas convenable dans un ancien royaume.
Que dirons-nous des primitifs, que l'on a nommés quakers par dérision, et qui, avec des usages peut-être ridicules, ont été si vertueux et ont enseigné inutilement la paix au reste des hommes? Ils sont en Pennsylvanie au nombre de cent mille; la discorde. la controverse, sont ignorées dans l'heureuse patrie qu'ils se sont faite, et le nom seul de leur ville de Philadelphie, qui leur rappelle à tout moment que les hommes sont frères, est l'exemple et la honte des peuples qui ne connaissent pas encore la tolérance.
Enfin cette tolérance n'a jamais excité de guerre civile; l'intolérance a couvert la terre de carnage. Qu'on juge maintenant entre ces deux rivales, entre la mère qui veut qu'on égorge son fils, et la mère qui le cède pourvu qu'il vive!
Je ne parle ici que de l'intérêt des nations; et en respectant, comme je le dois, la théologie, je n'envisage dans cet article que le bien physique et moral de la société. Je supplie tout lecteur impartial de peser ces vérités, de les rectifier, et de les étendre. Des lecteurs attentifs, qui se communiquent leurs pensées, vont toujours plus loin que l'auteur (Note 13).


CHAPITRE V
COMMENT LA TOLERANCE PEUT ETRE ADMISE
J'ose supposer qu'un ministre éclairé et magnanime, un prélat humain et sage, un prince qui sait que son intérêt consiste dans le grand nombre de ses sujets, et sa gloire dans leur bonheur, daigne jeter les yeux sur cet écrit informe et défectueux: il y supplée par ses propres lumières; il se dit à lui-même: Que risquerai-je à voir la terre cultivée et ornée par plus de mains laborieuses, les tributs augmentés, l'Etat plus florissant?
L'Allemagne serait un désert couvert des ossements des catholiques, évangéliques, réformés, anabaptistes, égorgés les uns par les autres, si la paix de Westphalie n'avait pas procuré enfin la liberté de conscience.
Nous avons des juifs à Bordeaux, à Metz, en Alsace; nous avons des luthériens, des molinistes, des jansénistes: ne pouvons-nous pas souffrir et contenir des calvinistes à peu près aux mêmes conditions que les catholiques sont tolérés à Londres? Plus il y a de sectes, moins chacune est dangereuse; la multiplicité les affaiblit; toutes sont réprimées par de justes lois qui défendent les assemblées tumultueuses, les injures, les séditions, et qui sont toujours en vigueur par la force coactive.
Nous savons que plusieurs chefs de famille, qui ont élevé de grandes fortunes dans les pays étrangers, sont prêts à retourner dans leur patrie; ils ne demandent que la protection de la loi naturelle, la validité de leurs mariages, la certitude de l'état de leurs enfants, le droit d'hériter de leurs pères, la franchise de leurs personnes; point de temples publics, point de droit aux charges municipales, aux dignités: les catholiques n'en ont ni à Londres ni en plusieurs autres pays. Il ne s'agit plus de donner des privilèges immenses, des places de sûreté à une faction, mais de laisser vivre un peuple paisible, d'adoucir des édits autrefois peut-être nécessaires, et qui ne le sont plus. Ce n'est pas à nous d'indiquer au ministère ce qu'il peut faire; il suffit de l'implorer pour des infortunés.
Que de moyens de les rendre utiles, et d'empêcher qu'ils ne soient jamais dangereux! La prudence du ministère et du conseil, appuyée de la force, trouvera bien aisément ces moyens, que tant d'autres nations emploient si heureusement.
Il y a des fanatiques encore dans la populace calviniste; mais il est constant qu'il y en a davantage dans la populace convulsionnaire. La lie des insensés de Saint-Médard est comptée pour rien dans la nation, celle des prophètes calvinistes est anéantie. Le grand moyen de diminuer le nombre des maniaques, s'il en reste, est d'abandonner cette maladie de l'esprit au régime de la raison, qui éclaire lentement, mais infailliblement, les hommes. Cette raison est douce, elle est humaine, elle inspire l'indulgence, elle étouffe la discorde, elle affermit la vertu, elle rend aimable l'obéissance aux lois, plus encore que la force ne les maintient. Et comptera-t-on pour rien le ridicule attaché aujourd'hui à l'enthousiasme par tous les honnêtes gens? Ce ridicule est une puissante barrière contre les extravagances de tous les sectaires. Les temps passés sont comme s'ils n'avaient jamais été. Il faut toujours partir du point où l'on est, et de celui où les nations sont parvenues.
Il a été un temps où l'on se crut obligé de rendre des arrêts contre ceux qui enseignaient une doctrine contraire aux catégories d'Aristote, à l'horreur du vide, aux quiddités, et à l'universel de la part de la chose. Nous avons en Europe plus de cent volumes de jurisprudence sur la sorcellerie, et sur la manière de distinguer les faux sorciers des véritables. L'excommunication des sauterelles et des insectes nuisibles aux moissons a été très en usage, et subsiste encore dans plusieurs rituels. L'usage est passé; on laisse en paix Aristote, les sorciers et les sauterelles. Les exemples de ces graves démences, autrefois si importantes, sont innombrables: il en revient d'autres de temps en temps; mais quand elles ont fait leur effet, quand on en est rassasié, elles s'anéantissent. Si quelqu'un s'avisait aujourd'hui d'être carpocratien, ou eutychéen, ou monothélite, monophysite, nestorien, manichéen, etc., qu'arriverait-il? On en rirait, comme d'un homme habillé à l'antique, avec une fraise et un pourpoint.
La nation commençait à entrouvrir les yeux lorsque les jésuites Le Tellier et Doucin fabriquèrent la bulle Unigenitus, qu'ils envoyèrent à Rome: ils crurent être encore dans ces temps d'ignorance où les peuples adoptaient sans examen les assertions les plus absurdes. Ils osèrent proscrire cette proposition, qui est d'une vérité universelle dans tous les cas et dans tous les temps: "La crainte d'une excommunication injuste ne doit point empêcher de faire son devoir." C'était proscrire la raison, les libertés de l'Eglise gallicane, et le fondement de la morale; c'était dire aux hommes: Dieu vous ordonne de ne jamais faire votre devoir, dès que vous craindrez l'injustice. On n'a jamais heurté le sens commun plus effrontément. Les consulteurs de Rome n'y prirent pas garde. On persuada à la cour de Rome que cette bulle était nécessaire, et que la nation la désirait; elle fut signée, scellée, et envoyée: on en sait les suites; certainement, si on les avait prévues, on aurait mitigé la bulle. Les querelles ont été vives; la prudence et la bonté du roi les ont enfin apaisées.
Il en est de même dans une grande partie des points qui divisent les protestants et nous: il y en a quelques-uns qui ne sont d'aucune conséquence; il y en a d'autres plus graves, mais sur lesquels la fureur de la dispute est tellement amortie que les protestants eux-mêmes ne prêchent aujourd'hui la controverse en aucune de leurs églises.
C'est donc ce temps de dégoût, de satiété, ou plutôt de raison, qu'on peut saisir comme une époque et un gage de la tranquillité publique. La controverse est une maladie épidémique qui est sur sa fin, et cette peste, dont on est guéri, ne demande plus qu'un régime doux. Enfin l'intérêt de l'Etat est que des fils expatriés reviennent avec modestie dans la maison de leur père: l'humanité le demande, la raison le conseille, et la politique ne peut s'en effrayer.


CHAPITRE VI
SI L'INTOLERANCE EST DE DROIT NATUREL
ET DE DROIT HUMAIN
Le droit naturel est celui que la nature indique à tous les hommes. Vous avez élevé votre enfant, il vous doit du respect comme à son père, de la reconnaissance comme à son bienfaiteur. Vous avez droit aux productions de la terre que vous avez cultivée par vos mains. Vous avez donné et reçu une promesse, elle doit être tenue.
Le droit humain ne peut être fondé en aucun cas que sur ce droit de nature; et le grand principe, le principe universel de l'un et de l'autre, est, dans toute la terre: "Ne fais pas ce que tu ne voudrais pas qu'on te fît." Or on ne voit pas comment, suivant ce principe, un homme pourrait dire à un autre: "Crois ce que je crois, et ce que tu ne peux croire, ou tu périras." C'est ce qu'on dit en Portugal, en Espagne, à Goa. On se contente à présent, dans quelques autres pays, de dire: "Crois, ou je t'abhorre; crois, ou je te ferai tout le mal que je pourrai; monstre, tu n'as pas ma religion, tu n'as donc point de religion: il faut que tu sois en horreur à tes voisins, à ta ville, à ta province."
S'il était de droit humain de se conduire ainsi, il faudrait donc que le Japonais détestât le Chinois, qui aurait en exécration le Siamois; celui-ci poursuivrait les Gangarides, qui tomberaient sur les habitants de l'Indus; un Mogol arracherait le coeur au premier Malabare qu'il trouverait; le Malabare pourrait égorger le Persan, qui pourrait massacrer le Turc: et tous ensemble se jetteraient sur les chrétiens, qui se sont si longtemps dévorés les uns les autres.
Le droit de l'intolérance est donc absurde et barbare: c'est le droit des tigres, et il est bien horrible, car les tigres ne déchirent que pour manger, et nous nous sommes exterminés pour des paragraphes.


CHAPITRE VII
SI L'INTOLERANCE A ETE CONNUE DES GRECS
Les peuples dont l'histoire nous a donné quelques faibles connaissances ont tous regardé leurs différentes religions comme des noeuds qui les unissaient tous ensemble: c'était une association du genre humain. Il y avait une espèce de droit d'hospitalité entre les dieux comme entre les hommes. Un étranger arrivait-il dans une ville, il commençait par adorer les dieux du pays. On ne manquait jamais de vénérer les dieux même de ses ennemis. Les Troyens adressaient des prières aux dieux qui combattaient pour les Grecs.
Alexandre alla consulter dans les déserts de la Libye le dieu Ammon, auquel les Grecs donnèrent le nom de Zeus, et les Latins, de Jupiter, quoique les uns et les autres eussent leur Jupiter et leur Zeus chez eux. Lorsqu'on assiégeait une ville, on faisait un sacrifice et des prières aux dieux de la ville pour se les rendre favorables. Ainsi, au milieu même de la guerre, la religion réunissait les hommes, et adoucissait quelquefois leurs fureurs, si quelquefois elle leur commandait des actions inhumaines et horribles.
Je peux me tromper; mais il me paraît que de tous les anciens peuples policés, aucun n'a gêné la liberté de penser. Tous avaient une religion; mais il me semble qu'ils en usaient avec les hommes comme avec leurs dieux: ils reconnaissaient tous un dieu suprême, mais ils lui associaient une quantité prodigieuse de divinités inférieures; ils n'avaient qu'un culte, mais ils permettaient une foule de systèmes particuliers.
Les Grecs, par exemple, quelque religieux qu'ils fussent, trouvaient bon que les épicuriens niassent la Providence et l'existence de l'âme. Je ne parle pas des autres sectes, qui toutes blessaient les idées saines qu'on doit avoir de l'Etre créateur, et qui toutes étaient tolérées.
Socrate, qui approcha le plus près de la connaissance du Créateur, en porta, dit-on, la peine, et mourut martyr de la Divinité; c'est le seul que les Grecs aient fait mourir pour ses opinions. Si ce fut en effet la cause de sa condamnation, cela n'est pas à l'honneur de l'intolérance, puisqu'on ne punit que celui qui seul rendit gloire à Dieu, et qu'on honora tous ceux qui donnaient de la Divinité les notions les plus indignes. Les ennemis de la tolérance ne doivent pas, à mon avis, se prévaloir de l'exemple odieux des juges de Socrate.
Il est évident d'ailleurs qu'il fut la victime d'un parti furieux animé contre lui. Il s'était fait des ennemis irréconciliables des sophistes, des orateurs, des poètes, qui enseignaient dans les écoles, et même de tous les précepteurs qui avaient soin des enfants de distinction. Il avoue lui-même, dans son discours rapporté par Platon, qu'il allait de maison en maison prouver à ces précepteurs qu'ils n'étaient que des ignorants. Cette conduite n'était pas digne de celui qu'un oracle avait déclaré le plus sage des hommes. On déchaîna contre lui un prêtre et un conseiller des Cinq-cents, qui l'accusèrent; j'avoue que je ne sais pas précisément de quoi, je ne vois que du vague dans son Apologie; on lui fait dire en général qu'on lui imputait d'inspirer aux jeunes gens des maximes contre la religion et le gouvernement. C'est ainsi qu'en usent tous les jours les calomniateurs dans le monde; mais il faut dans un tribunal des faits avérés, des chefs d'accusation précis et circonstanciés: c'est ce que le procès de Socrate ne nous fournit point; nous savons seulement qu'il eut d'abord deux cent vingt voix pour lui. Le tribunal des Cinq-cents possédait donc deux cent vingt philosophes: c'est beaucoup; je doute qu'on les trouvât ailleurs. Enfin la pluralité fut pour la ciguë; mais aussi songeons que les Athéniens, revenus à eux-mêmes, eurent les accusateurs et les juges en horreur; que Mélitus, le principal auteur de cet arrêt, fut condamné à mort pour cette injustice; que les autres furent bannis, et qu'on éleva un temple à Socrate. Jamais la philosophie ne fut si bien vengée ni tant honorée. L'exemple de Socrate est au fond le plus terrible argument qu'on puisse alléguer contre l'intolérance. Les Athéniens avaient un autel dédié aux dieux étrangers, aux dieux qu'ils ne pouvaient connaître. Y a-t-il une plus forte preuve non seulement d'indulgence pour toutes les nations, mais encore de respect pour leurs cultes?
Un honnête homme, qui n'est ennemi ni de la raison, ni de la littérature, ni de la probité, ni de la patrie, en justifiant depuis peu la Saint-Barthélémy, cite la guerre des Phocéens, nommée la guerre sacrée, comme si cette guerre avait été allumée pour le culte, pour le dogme, pour des arguments de théologie; il s'agissait de savoir à qui appartiendrait un champ: c'est le sujet de toutes les guerres. Des gerbes de blé ne sont pas un symbole de croyance; jamais aucune ville grecque ne combattit pour des opinions. D'ailleurs, que prétend cet homme modeste et doux? Veut-il que nous fassions une guerre sacrée?


CHAPITRE VIII
SI LES ROMAINS ONT ETE TOLERANTS
Chez les anciens Romains, depuis Romulus jusqu'aux temps où les chrétiens disputèrent avec les prêtres de l'empire, vous ne voyez pas un seul homme persécuté pour ses sentiments. Cicéron douta de tout, Lucrèce nia tout; et on ne leur en fit pas le plus léger reproche. La licence même alla si loin que Pline le Naturaliste commence son livre par nier un Dieu, et par dire qu'il en est un, c'est le soleil. Cicéron dit, en parlant des enfers: "Non est anus tam excors quae credat, il n'y a pas même de vieille imbécile pour les croire." Juvénal dit: "Nec pueri credunt (satire II, vers 152); les enfants n'en croient rien." On chantait sur le théâtre de Rome:
Post mortem nihil est, ipsaque mors nihil.
(SENEQUE, Troade; choeur à la fin du second acte.)
Rien n'est après la mort, la mort même n'est rien.
Abhorrons ces maximes, et, tout au plus, pardonnons-les à un peuple que les évangiles n'éclairaient pas: elles sont fausses, elles sont impies; mais concluons que les Romains étaient très tolérants, puisqu'elles n'excitèrent jamais le moindre murmure.
Le grand principe du sénat et du peuple romain était: "Deorum offensae diis curae; c'est aux dieux seuls à se soucier des offenses faites aux dieux." Ce peuple roi ne songeait qu'à conquérir, à gouverner et à policer l'univers. Ils ont été nos législateurs, comme nos vainqueurs; et jamais César, qui nous donna des fers, des lois, et des jeux, ne voulut nous forcer à quitter nos druides pour lui, tout grand pontife qu'il était d'une nation notre souveraine.
Les Romains ne professaient pas tous les cultes, ils ne donnaient pas à tous la sanction publique; mais ils les permirent tous. Ils n'eurent aucun objet matériel de culte sous Numa, point de simulacres, point de statues; bientôt ils en élevèrent aux dieux majorum gentium, que les Grecs leur firent connaître. La loi des douze tables, Deos peregrinos ne colunto, se réduisit à n'accorder le culte public qu'aux divinités supérieures approuvées par le sénat. Isis eut un temple dans Rome, jusqu'au temps où Tibère le démolit, lorsque les prêtres de ce temple, corrompus par l'argent de Mundus, le firent coucher dans le temple, sous le nom du dieu Anubis, avec une femme nommée Pauline. Il est vrai que Josèphe est le seul qui rapporte cette histoire; il n'était pas contemporain, il était crédule et exagérateur. Il y a peu d'apparence que, dans un temps aussi éclairé que celui de Tibère, une dame de la première condition eût été assez imbécile pour croire avoir les faveurs du dieu Anubis.
Mais que cette anecdote soit vraie ou fausse, il demeure certain que la superstition égyptienne avait élevé un temple à Rome avec le consentement public. Les Juifs y commerçaient dès le temps de la guerre punique; ils y avaient des synagogues du temps` d'Auguste, et ils les conservèrent presque toujours, ainsi que dans Rome moderne. Y a-t-il un plus grand exemple que la tolérance était regardée par les Romains comme la loi la plus sacrée du droit des gens?
On nous dit qu'aussitôt que les chrétiens parurent, ils furent persécutés par ces mêmes Romains qui ne persécutaient personne. Il me paraît évident que ce fait est très faux; je n'en veux pour preuve que saint Paul lui-même. Les Actes des apôtres nous apprennent que (Note 14), saint Paul étant accusé par les Juifs de vouloir détruire la loi mosaïque par Jésus-Christ, saint Jacques proposa à saint Paul de se faire raser la tête, et d'aller se purifier dans le temple avec quatre Juifs, "afin que tout le monde sache que tout ce qu'on dit de vous est faux, et que vous continuez à garder la loi de Moïse".
Paul, chrétien, alla donc s'acquitter de toutes les cérémonies judaïques pendant sept jours; mais les sept jours n'étaient pas encore écoulés quand des Juifs d'Asie le reconnurent; et, voyant qu'il était entré dans le temple, non seulement avec des Juifs, mais avec des Gentils, ils crièrent à la profanation: on le saisit, on le mena devant le gouverneur Félix, et ensuite on s'adressa au tribunal de Festus. Les Juifs en foule demandèrent sa mort; Festus leur répondit (Note 15): "Ce n'est point la coutume des Romains de condamner un homme avant que l'accusé ait ses accusateurs devant lui, et qu'on lui ait donné la liberté de se défendre."
Ces paroles sont d'autant plus remarquables dans ce magistrat romain qu'il paraît n'avoir eu nulle considération pour saint Paul, n'avoir senti pour lui que du mépris: trompé par les fausses lumières de sa raison, il le prit pour un fou; il lui dit à lui-même qu'il était en démence (Note 16): Multae te litterae ad insaniam convertunt. Festus n'écouta donc que l'équité de la loi romaine en donnant sa protection à un inconnu qu'il ne pouvait estimer.
Voilà le Saint-Esprit lui-même qui déclare que les Romains n'étaient pas persécuteurs, et qu'ils étaient justes. Ce ne sont pas les Romains qui se soulevèrent contre saint Paul, ce furent les Juifs. Saint Jacques, frère de Jésus, fut lapidé par l'ordre d'un Juif saducéen, et non d'un Romain. Les Juifs seuls lapidèrent saint Etienne (Note 17); et lorsque saint Paul gardait les manteaux des exécuteurs, certes il n'agissait pas en citoyen romain.
Les premiers chrétiens n'avaient rien sans doute à démêler avec les Romains; ils n'avaient d'ennemis que les Juifs, dont ils commençaient à se séparer. On sait quelle haine implacable portent tous les sectaires à ceux qui abandonnent leur secte. Il y eut sans doute du tumulte dans les synagogues de Rome. Suétone dit, dans la Vie de Claude (chap. XXV): Judaeos, impulsore Christo assidue tumultuantes, Roma expulit. Il se trompait, en disant que c'était à l'instigation de Christ: il ne pouvait pas être instruit des détails d'un peuple aussi méprisé à Rome que l'était le peuple juif; mais il ne se trompait pas sur l'occasion de ces querelles. Suétone écrivait sous Adrien, dans le second siècle; les chrétiens n'étaient pas alors distingués des Juifs aux yeux des Romains. Le passage de Suétone fait voir que les Romains, loin d'opprimer les premiers chrétiens, réprimaient alors les Juifs qui les persécutaient. Ils voulaient que la synagogue de Rome eût pour ses frères séparés la même indulgence que le sénat avait pour elle, et les Juifs chassés revinrent bientôt après; ils parvinrent même aux honneurs, malgré les lois qui les en excluaient: c'est Dion Cassius et Ulpien qui nous l'apprennent (Note 18). Est-il possible qu'après la ruine de Jérusalem les empereurs eussent prodigué des dignités aux Juifs, et qu'ils eussent persécuté, livré aux bourreaux et aux bêtes, des chrétiens qu'on regardait comme une secte de Juifs?
Néron, dit-on, les persécuta. Tacite nous apprend qu'ils furent accusés de l'incendie de Rome, a qu'on les abandonna à la fureur du peuple. S'agissait-il de leur croyance dans une telle accusation? non, sans doute. Dirons-nous que les Chinois que les Hollandais égorgèrent, il y a quelques années, dans les faubourgs de Batavia, furent immolés à la religion? Quelque envie qu'on ait de se tromper, il est impossible d'attribuer à l'intolérance le désastre arrivé sous Néron à quelques malheureux demi-juifs et demi-chrétiens (Note 19).


CHAPITRE IX
DES MARTYRS
Il y eut dans la suite des martyrs chrétiens. Il est bien difficile de savoir précisément pour quelles raisons ces martyrs furent condamnés; mais j'ose croire qu'aucun ne le fut, sous les premiers Césars, pour sa seule religion: on les tolérait toutes; comment aurait-on pu rechercher et poursuivre des hommes obscurs, qui avaient un culte particulier, dans le temps qu'on permettait tous les autres?
Les Titus, les Trajan, les Antonins, les Décius, n'étaient pas des barbares: peut-on imaginer qu'ils auraient privé les seuls chrétiens d'une liberté dont jouissait toute la terre? Les aurait-on seulement osé accuser d'avoir des mystères secrets, tandis que les mystères d'Isis, ceux de Mithra, ceux de la déesse de Syrie, tous étrangers au culte romain, étaient permis sans contradiction? Il faut bien que la persécution ait eu d'autres causes, et que les haines particulières, soutenues par la raison d'Etat, aient répandu le sang des chrétiens.
Par exemple, lorsque saint Laurent refuse au préfet de Rome, Cornelius Secularis, l'argent des chrétiens qu'il avait en sa garde, il est naturel que le préfet et l'empereur soient irrités: ils ne savaient pas que saint Laurent avait distribué cet argent aux pauvres, et qu'il avait fait une oeuvre charitable et sainte; ils le regardèrent comme un réfractaire, et le firent périr (Note 20).
Considérons le martyre de saint Polyeucte. Le condamna-t-on pour sa religion seule? Il va dans le temple, où l'on rend aux dieux des actions de grâces pour la victoire de l'empereur Décius; il y insulte les sacrificateurs, il renverse et brise les autels et les statues: quel est le pays au monde où l'on pardonnerait un pareil attentat? Le chrétien qui déchira publiquement l'édit de l'empereur Dioclétien, et qui attira sur ses frères la grande persécution dans les deux dernières années du règne de ce prince, n'avait pas un zèle selon la science, et il était bien malheureux d'être la cause du désastre de son parti. Ce zèle inconsidéré, qui éclata souvent et qui fut même condamné par plusieurs Pères de l'Eglise, a été probablement la source de toutes les persécutions.
Je ne compare point sans doute les premiers sacramentaires aux premiers chrétiens: je ne mets point l'erreur à côté de la vérité; mais Farel, prédécesseur de Jean Calvin, fit dans Arles la même chose que saint Polyeucte avait faite en Arménie. On portait dans les rues la statue de saint Antoine l'ermite en procession; Farel tombe avec quelques-uns des siens sur les moines qui portaient saint Antoine, les bat, les disperse, et jette saint Antoine dans la rivière. Il méritait la mort, qu'il ne reçut pas, parce qu'il eut le temps de s'enfuir. S'il s'était contenté de crier à ces moines qu'il ne croyait pas qu'un corbeau eût apporté la moitié d'un pain à saint Antoine l'ermite, ni que saint Antoine eût eu des conversations avec des centaures et des satyres, il aurait mérité une forte réprimande, parce qu'il troublait l'ordre; mais si le soir, après la procession, il avait examiné paisiblement l'histoire du corbeau, des centaures, et des satyres, on n'aurait rien eu à lui reprocher.
Quoi! les Romains auraient souffert que l'infâme Antinoüs fût mis au rang des seconds dieux, et ils auraient déchiré, livré aux bêtes, tous ceux auxquels on n'aurait reproché que d'avoir paisiblement adoré un juste! Quoi! ils auraient reconnu un Dieu suprême (Note 21), un Dieu souverain, maître de tous les dieux secondaires, attesté par cette formule: Deus optimus maximus; et ils auraient recherché ceux qui adoraient un Dieu unique!
Il n'est pas croyable que jamais il y eut une inquisition contre les chrétiens sous les empereurs, c'est-à-dire qu'on soit venu chez eux les interroger sur leur croyance. On ne troubla jamais sur cet article ni Juif, ni Syrien, ni Egyptien, ni bardes, ni druides, ni philosophes. Les martyrs furent donc ceux qui s'élevèrent contre les faux dieux. C'était une chose très sage, très pieuse de n'y pas croire; mais enfin si, non contents d'adorer un Dieu en esprit et en vérité, ils éclatèrent violemment contre le culte reçu, quelque absurde qu'il pût être, on est forcé d'avouer qu'eux-mêmes étaient intolérants.
Tertullien, dans son Apologétique, avoue (Note 22) qu'on regardait les chrétiens comme des factieux: l'accusation était injuste, mais elle prouvait que ce n'était pas la religion seule des chrétiens qui excitait le zèle des magistrats. Il avoue (Note 23) que les chrétiens refusaient d'orner leurs portes de branches de laurier dans les réjouissances publiques pour les victoires des empereurs: on pouvait aisément prendre cette affectation condamnable pour un crime de lèse-majesté.
La première sévérité juridique exercée contre les chrétiens fut celle de Domitien; mais elle se borna à un exil qui ne dura pas une année: "Facile coeptum repressit, restitutis etiam quos relegaverat", dit Tertullien (chap. V). Lactance, dont le style est si emporté, convient que, depuis Domitien jusqu'à Décius, l'Eglise fut tranquille et florissante (Note 24). Cette longue paix, dit-il, fut interrompue quand cet exécrable animal Décius opprima l'Eglise: "Exstitit enim post annos plurimos exsecrabile animal Decius, qui vexaret Ecclesiam." (Apol., chap. IV.)
On ne veut point discuter ici le sentiment du savant Dodwell sur le petit nombre des martyrs; mais si les Romains avaient tant persécuté la religion chrétienne, si le sénat avait fait mourir tant d'innocents par des supplices inusités, s'ils avaient plongé des chrétiens dans l'huile bouillante, s'ils avaient exposé des filles toutes nues aux bêtes dans le cirque, comment auraient-ils laissé en paix tous les premiers évêques de Rome? Saint Irénée ne compte pour martyr parmi ces évoques que le seul Télesphore, dans l'an 139 de l'ère vulgaire, et on n'a aucune preuve que ce Télesphore ait été mis à mort (이 문장에서 évoques는 évêques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Zéphirin gouverna le troupeau de Rome pendant dix-huit années, et mourut paisiblement l'an 219. Il est vrai que, dans les anciens martyrologes, on place presque tous les premiers papes (이 문장에서 martyrologes는 martyrologies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mais le mot de martyre n'était pris alors que suivant sa véritable signification: martyre voulait dire témoignage, et non pas supplice.
Il est difficile d'accorder cette fureur de persécution avec la liberté qu'eurent les chrétiens d'assembler cinquante-six conciles que les écrivains ecclésiastiques comptent dans les trois premiers siècles.
Il y eut des persécutions; mais si elles avaient été aussi violentes qu'on le dit, il est vraisemblable que Tertullien, qui écrivit avec tant de force contre le culte reçu, ne serait pas mort dans son lit. On sait bien que les empereurs ne lurent pas son Apologétique; qu'un écrit obscur, composé en Afrique, ne parvient pas à ceux qui sont chargés du gouvernement du monde; mais il devait être connu de ceux qui approchaient le proconsul d'Afrique: il devait attirer beaucoup de haine à l'auteur; cependant il ne souffrit point le martyre.
Origène enseigna publiquement dans Alexandrie, et ne fut point mis à mort. Ce même Origène, qui parlait avec tant de liberté aux païens et aux chrétiens, qui annonçait Jésus aux uns, qui niait un Dieu en trois personnes aux autres, avoue expressément, dans son troisième livre contre Celse, "qu'il y a eu très peu de martyrs, et encore de loin à loin. Cependant, dit-il, les chrétiens ne négligent rien pour faire embrasser leur religion par tout le monde; ils courent dans les villes, dans les bourgs, dans les villages".
Il est certain que ces courses continuelles pouvaient être aisément accusées de sédition par les prêtres ennemis; et pourtant ces missions sont tolérées, malgré le peuple égyptien, toujours turbulent, séditieux et lâche: peuple qui avait déchiré un Romain pour avoir tué un chat, peuple en tout temps méprisable, quoi qu'en disent les admirateurs des pyramides (Note 25).
Qui devait plus soulever contre lui les prêtres et le gouvernement que saint Grégoire Thaumaturge, disciple d'Origène? Grégoire avait vu pendant la nuit un vieillard envoyé de Dieu, accompagné d'une femme resplendissante de lumière: cette femme était la sainte Vierge, et ce vieillard était saint Jean l'évangéliste. Saint Jean lui dicta un symbole que saint Grégoire alla prêcher. Il passa, en allant à Néocésarée, prés d'un temple où l'on rendait des oracles et où la pluie l'obligea de passer la nuit; il y fit plusieurs signes de croix. Le lendemain le grand sacrificateur du temple fut étonné que les démons, qui lui répondaient auparavant, ne voulaient plus rendre d'oracles; il les appela: les diables vinrent pour lui dire qu'ils ne viendraient plus; ils lui apprirent qu'ils ne pouvaient plus habiter ce temple, parce que Grégoire y avait passé la nuit, et qu'il y avait fait des signes de croix.
Le sacrificateur fit saisir Grégoire, qui lui répondit: "Je peux chasser les démons d'où je veux, et les faire entrer où il me plaira. - Faites-les donc rentrer dans mon temple", dit le sacrificateur. Alors Grégoire déchira un petit morceau d'un volume qu'il tenait à la main, et y traça ces paroles: "Grégoire à Satan: Je te commande de rentrer dans ce temple." On mit ce billet sur l'autel: les démons obéirent, et rendirent ce jour-là leurs oracles comme à l'ordinaire; après quoi ils cessèrent, comme on le sait.
C'est saint Grégoire de Nysse qui rapporte ces faits dans la vie de saint Grégoire Thaumaturge. Les prêtres des idoles devaient sans doute être animés contre Grégoire, et, dans leur aveuglement, le déférer au magistrat: cependant leur plus grand ennemi n'essuya aucune persécution.
Il est dit dans l'histoire de saint Cyprien qu'il fut le premier évêque de Carthage condamné à la mort. Le martyre de saint Cyprien est de l'an 258 de notre ère: donc pendant un très long temps aucun évêque de Carthage ne fut immolé pour sa religion. L'histoire ne nous dit point quelles calomnies s'élevèrent contre saint Cyprien, quels ennemis il avait, pourquoi le proconsul d'Afrique fut irrité contre lui. Saint Cyprien écrit à Cornélius, évêque de Rome: "Il arriva depuis peu une émotion populaire à Carthage, et on cria par deux fois qu'il fallait me jeter aux lions." Il est bien vraisemblable que les emportements du peuple féroce de Carthage furent enfin cause de la mort de Cyprien; et il est bien sûr que ce ne fut pas l'empereur Gallus qui le condamna de si loin pour sa religion, puisqu'il laissait en paix Corneille, qui vivait sous ses yeux (이 문장에서 Corneille는 Cornélius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Tant de causes secrètes se mêlent souvent à la cause apparente, tant de ressorts inconnus servent à persécuter un homme, qu'il est impossible de démêler dans les siècles postérieurs la source cachée des malheurs des hommes les plus considérables, à plus forte raison celle du supplice d'un particulier qui ne pouvait être connu que par ceux de son parti.
Remarquez que saint Grégoire Thaumaturge et saint Denis, évêque d'Alexandrie, qui ne furent point suppliciés, vivaient dans le temps de saint Cyprien. Pourquoi, étant aussi connus pour le moins que cet évêque de Carthage, demeurèrent-ils paisibles? Et pourquoi saint Cyprien fut-il livré au supplice? N'y a-t-il pas quelque apparence que l'un succomba sous des ennemis personnels et puissants, sous la calomnie, sous le prétexte de la raison d'Etat, qui se joint si souvent à la religion, et que les autres eurent le bonheur d'échapper à la méchanceté des hommes?
Il n'est guère possible que la seule accusation de christianisme ait fait périr saint Ignace sous le clément et juste Trajan, puisqu'on permit aux chrétiens de l'accompagner et de le consoler, quand on le conduisit à Rome (Note 26). Il y avait eu souvent des séditions dans Antioche, ville toujours turbulente, où Ignace était évêque secret des chrétiens: peut-être ces séditions, malignement imputées aux chrétiens innocents, excitèrent l'attention du gouvernement, qui fut trompé, comme il est trop souvent arrivé.
Saint Siméon, par exemple, fut accusé devant Sapor d'être l'espion des Romains. L'histoire de son martyre rapporte que le roi Sapor lui proposa d'adorer le soleil; mais on sait que les Perses ne rendaient point de culte au soleil: ils le regardaient comme un emblème du bon principe, d'Oromase, ou Orosmade, du Dieu créateur qu'ils reconnaissaient.
Quelque tolérant que l'on puisse être, on ne peut s'empêcher de sentir quelque indignation contre ces déclamateurs qui accusent Dioclétien d'avoir persécuté les chrétiens depuis qu'il fut sur le trône; rapportons-nous-en à Eusèbe de Césarée: son témoignage ne peut être récusé; le favori, le panégyriste de Constantin, l'ennemi violent des empereurs précédents, doit en être cru quand il les justifie. Voici ses paroles (Note 27): "Les empereurs donnèrent longtemps aux chrétiens de grandes marques de bienveillance; ils leur confièrent des provinces; plusieurs chrétiens demeurèrent dans le palais; ils épousèrent même des chrétiennes. Dioclétien prit pour son épouse Prisca, dont la fille fut femme de Maximien Galère, etc."
Qu'on apprenne donc de ce témoignage décisif à ne plus calomnier; qu'on juge si la persécution excitée par Galère, après dix-neuf ans d'un règne de clémence et de bienfaits, ne doit pas avoir sa source dans quelque intrigue que nous ne connaissons pas.
Qu'on voie combien la fable de la légion thébaine ou thébéenne, massacrée, dit-on, tout entière pour la religion, est une fable absurde. Il est ridicule qu'on ait fait venir cette légion d'Asie par le grand Saint-Bernard; il est impossible qu'on l'eût appelée d'Asie pour venir apaiser une sédition dans les Gaules, un an après que cette sédition avait été réprimée; il n'est pas moins impossible qu'on ait égorgé six mille hommes d'infanterie et sept cents cavaliers dans un passage où deux cents hommes pourraient arrêter une armée entière. La relation de cette prétendue boucherie commence par une imposture évidente: "Quand la terre gémissait sous la tyrannie de Dioclétien, le ciel se peuplait de martyrs." Or cette aventure, comme or l'a dit, est supposée en 286, temps où Dioclétien favorisait le plus les chrétiens, et où l'empire romain fut le plus heureux. Enfin ce qui devrait épargner toutes ces discussions, c'est qu'il n'y eut jamais de légion thébaine: les Romains étaient trop fiers et trop sensés pour composer une légion de ces Egyptiens qui ne servaient à Rome que d'esclaves, Verna Canopi: c'est comme s'ils avaient eu une légion juive. Nous avons les noms des trente-deux légions qui faisaient les principales forces de l'empire romain; assurément la légion thébaine ne s'y trouve pas. Rangeons donc ce conte avec les vers acrostiches des sibylles qui prédisaient les miracles de Jésus-Christ, et avec tant de pièces supposées qu'un faux zèle prodigua pour abuser la crédulité.


CHAPITRE X
DU DANGER DES FAUSSES LEGENDES
ET DE LA PERSECUTION
Le mensonge en a trop longtemps imposé aux hommes; il est temps qu'on connaisse le peu de vérités qu'on peut démêler à travers ces nuages de fables qui couvrent l'histoire romaine depuis Tacite et Suétone, et qui ont presque toujours enveloppé les annales des autres nations anciennes.
Comment peut-on croire, par exemple, que les Romains, ce peuple grave et sévère de qui nous tenons nos lois, aient condamné des vierges chrétiennes, des filles de qualité, à la prostitution? C'est bien mal connaître l'austère dignité de nos législateurs, qui punissaient si sévèrement les faiblesses des vestales. Les Actes sincères de Ruinart rapportent ces turpitudes; mais doit-on croire aux Actes de Ruinart comme aux Actes des apôtres? Ces Actes sincères disent, après Bollandus, qu'il y avait dans la ville d'Ancyre sept vierges chrétiennes, d'environ soixante et dix ans chacune, que le gouverneur Théodecte les condamna à passer par les mains des jeunes gens de la ville; mais que ces vierges ayant été épargnées, comme de raison, il les obligea de servir toutes nues aux mystères de Diane, auxquels pourtant on n'assista jamais qu'avec un voile. Saint Théodote, qui, à la vérité, était cabaretier, mais qui n'en était pas moins zélé, pria Dieu ardemment de vouloir bien faire mourir ces saintes filles, de peur qu'elles ne succombassent à la tentation. Dieu l'exauça; le gouverneur les fit jeter dans un lac avec une pierre au cou: elles apparurent aussitôt à Théodote, et le prièrent de ne pas souffrir que leurs corps fussent mangés des poissons; ce furent leurs propres paroles.
Le saint cabaretier et ses compagnons allèrent pendant la nuit au bord du lac gardé par des soldats; un flambeau céleste marcha toujours devant eux, et quand ils furent au lieu où étaient les gardes, un cavalier céleste, armé de toutes pièces, poursuivit ces gardes la lance à la main. Saint Théodote retira du lac les corps des vierges: il fut mené devant le gouverneur, et le cavalier céleste n'empêcha pas qu'on ne lui tranchât la tête. Ne cessons de répéter que nous vénérons les vrais martyrs, mais qu'il est difficile de croire cette histoire de Bollandus et de Ruinart.
Faut-il rapporter ici le conte du jeune saint Romain? On le jeta dans le feu, dit Eusèbe, et des Juifs qui étaient présents insultèrent à Jésus-Christ qui laissait brûler ses confesseurs, après que Dieu avait tiré Sidrach, Misach, et Abdenago, de la fournaise ardente. A peine les Juifs eurent-ils parlé que saint Romain sortit triomphant du bûcher: l'empereur ordonna qu'on lui pardonnât, et dit au juge qu'il ne voulait rien avoir à démêler avec Dieu; étranges paroles pour Dioclétien! Le juge, malgré l'indulgence de l'empereur, commanda qu'on coupât la langue à saint Romain, et, quoiqu'il eût des bourreaux, il fit faire cette opération par un médecin. Le jeune Romain, né bègue, parla avec volubilité dès qu'il eut la langue coupée. Le médecin essuya une réprimande, et, pour montrer que l'opération était faite selon les règles de l'art, il prit un passant et lui coupa juste autant de langue qu'il en avait coupé à saint Romain, de quoi le passant mourut sur-le-champ: car, ajoute savamment l'auteur, l'anatomie nous apprend qu'un homme sans langue ne saurait vivre. En vérité, si Eusèbe a écrit de pareilles fadaises, si on ne les a point ajoutées à ses écrits, quel fond peut-on faire sur son Histoire?
On nous donne le martyre de sainte Félicité et de ses sept enfants, envoyés, dit-on, à la mort par le sage et pieux Antonin, sans nommer l'auteur de la relation.
Il est bien vraisemblable que quelque auteur plus zélé que vrai a voulu imiter l'histoire des Maccabées. C'est ainsi que commence la relation: "Sainte Félicité était romaine, elle vivait sous le règne d'Antonin"; il est clair, par ces paroles, que l'auteur n'était pas contemporain de sainte Félicité. Il dit que le préteur les jugea sur son tribunal dans le champ de Mars; mais le préfet de Rome tenait son tribunal au Capitole, et non au champ de Mars, qui, après avoir servi à tenir les comices, servait alors aux revues des soldats, aux courses, aux jeux militaires: cela seul démontre la supposition.
Il est dit encore qu'après le jugement, l'empereur commit à différents juges le soin de faire exécuter l'arrêt: ce qui est entièrement contraire à toutes les formalités de ces temps-là et à celles de tous les temps.
Il y a de même un saint Hippolyte, que l'on suppose traîné par des chevaux, comme Hippolyte, fils de Thésée. Ce supplice ne fut jamais connu des anciens Romains, et la seule ressemblance du nom a fait inventer cette fable.
Observez encore que dans les relations des martyres, composées uniquement par les chrétiens mêmes, on voit presque toujours une foule de chrétiens venir librement dans la prison du condamné, le suivre au supplice, recueillir son sang, ensevelir son corps, faire des miracles avec les reliques. Si c'était la religion seule qu'on eût persécutée, n'aurait-on pas immolé ces chrétiens déclarés qui assistaient leurs frères condamnés, et qu'on accusait d'opérer des enchantements avec les restes des corps martyrisés? Ne les aurait-on pas traités comme nous avons traité les vaudois, les albigeois, les hussites, les différentes sectes des protestants? Nous les avons égorgés, brûlés en foule, sans distinction ni d'âge ni de sexe. Y a-t-il, dans les relations avérées des persécutions anciennes, un seul trait qui approche de la Saint-Barthélémy et des massacres d'Irlande? Y en a-t-il un seul qui ressemble à la fête annuelle qu'on célèbre encore dans Toulouse, fête cruelle, fête abolissable à jamais, dans laquelle un peuple entier remercie Dieu en procession, et se félicite d'avoir égorgé, il y a deux cents ans, quatre mille de ses concitoyens?
Je le dis avec horreur, mais avec vérité: c'est nous, chrétiens, c'est nous qui avons été persécuteurs, bourreaux, assassins! Et de qui? de nos frères. C'est nous qui avons détruit cent villes, le crucifix ou la Bible à la main, et qui n'avons cessé de répandre le sang et d'allumer des bûchers, depuis le règne de Constantin jusqu'aux fureurs des cannibales qui habitaient les Cévennes: fureurs qui, grâces au ciel, ne subsistent plus aujourd'hui.
Nous envoyons encore quelquefois à la potence de pauvres gens du Poitou, du Vivarais, de Valence, de Montauban. Nous avons pendu, depuis 1745, huit personnages de ceux qu'on appelle prédicants ou ministres de l'Evangile, qui n'avaient d'autre crime que d'avoir prié Dieu pour le roi en patois, et d'avoir donné une goutte de vin et un morceau de pain levé à quelques paysans imbéciles. On ne sait rien de cela dans Paris, où le plaisir est la seule chose importante, où l'on ignore tout ce qui se passe en province et chez les étrangers. Ces procès se font en une heure, et plus vite qu'on ne juge un déserteur. Si le roi en était instruit, il ferait grâce.
On ne traite ainsi les prêtres catholiques en aucun pays protestant. Il y a plus de cent prêtres catholiques en Angleterre et en Irlande; on les connaît, on les a laissés vivre très paisiblement dans la dernière guerre.
Serons-nous toujours les derniers à embrasser les opinions saines des autres nations? Elles se sont corrigées: quand nous corrigerons-nous? Il a fallu soixante ans pour nous faire adopter ce que Newton avait démontré; nous commençons à peine à oser; sauver la vie à nos enfants par l'inoculation; nous ne pratiquons que depuis très peu de temps les vrais principes de l'agriculture; quand commencerons-nous à pratiquer les vrais principes de l'humanité? et de quel front pouvons-nous reprocher aux païens d'avoir fait des martyrs, tandis que nous avons été coupables de la même cruauté dans les mêmes circonstances?
Accordons que les Romains ont fait mourir une multitude de chrétiens pour leur seule religion: en ce cas, les Romains ont été très condamnables. Voudrions-nous commettre la même injustice? Et quand nous leur reprochons d'avoir persécuté, voudrions-nous être persécuteurs?
S'il se trouvait quelqu'un assez dépourvu de bonne foi, ou assez fanatique, pour me dire ici: Pourquoi venez-vous développer nos erreurs et nos fautes? pourquoi détruire nos faux miracles et nos fausses légendes? Elles sont l'aliment de la piété de plusieurs personnes; il y a des erreurs nécessaires; n'arrachez pas du corps un ulcère invétéré qui entraînerait avec lui la destruction du corps, voici ce que je lui répondrais (이 문장에서 voici 앞의 쉼표는 세미콜론이어야 할 것이다 - 역자 주).
Tous ces faux miracles par lesquels vous ébranlez la foi qu'on doit aux véritables, toutes ces légendes absurdes que vous ajoutez aux vérités de l'Evangile, éteignent la religion dans les coeurs; trop de personnes qui veulent s'instruire, et qui n'ont pas le temps de s'instruire assez, disent: Les maîtres de ma religion m'ont trompé, il n'y a donc point de religion; il vaut mieux se jeter dans les bras de la nature que dans ceux de l'erreur; j'aime mieux dépendre de la loi naturelle que des inventions des hommes. D'autres ont le malheur d'aller encore plus loin: ils voient que l'imposture leur a mis un frein, et ils ne veulent pas même du frein de la vérité, ils penchent vers l'athéisme; on devient dépravé parce que d'autres ont été fourbes et cruels.
Voilà certainement les conséquences de toutes les fraudes pieuses et de toutes les superstitions. Les hommes d'ordinaire ne raisonnent qu'à demi; c'est un très mauvais argument que de dire: Voragine, l'auteur de La Légende dorée, et le jésuite Ribadeneira, compilateur de La Fleur des saints, n'ont dit que des sottises: donc il n'y a point de Dieu; les catholiques ont égorgé un certain nombre de huguenots, et les huguenots à leur tour ont assassiné un certain nombre de catholiques: donc il n'y a point de Dieu; on s'est servi de la confession, de la communion, et de tous les sacrements, pour commettre les crimes les plus horribles: donc il n'y a point de Dieu. Je conclurais au contraire: donc il y a un Dieu qui, après cette vie passagère, dans laquelle nous l'avons tant méconnu, et tant commis de crimes en son nom, daignera nous consoler de tant d'horribles malheurs: car, à considérer les guerres de religion, les quarante schismes des papes, qui ont presque tous été sanglants; les impostures, qui ont presque toutes été funestes; les haines irréconciliables allumées par les différentes opinions; à voir tous les maux qu'a produits le faux zèle, les hommes ont eu longtemps leur enfer dans cette vie.


CHAPITRE XI
ABUS DE L'INTOLERANCE
Mais quoi! sera-t-il permis à chaque citoyen de ne croire que sa raison, et de penser ce que cette raison éclairée ou trompée lui dictera? Il le faut bien (Note 28), pourvu qu'il ne trouble point l'ordre: car il ne dépend pas de l'homme de croire ou de ne pas croire, mais il dépend de lui de respecter les usages de sa patrie; et si vous disiez que c'est un crime de ne pas croire à la religion dominante, vous accuseriez donc vous-même les premiers chrétiens vos pères, et vous justifieriez ceux que vous accusez de les avoir livrés aux supplices.
Vous répondez que la différence est grande, que toutes les religions sont les ouvrages des hommes, et que l'Eglise catholique, apostolique et romaine, est seule l'ouvrage de Dieu. Mais en bonne foi, parce que notre religion est divine doit-elle régner par la haine, par les fureurs, par les exils, par l'enlèvement des biens, les prisons, les tortures, les meurtres, et par les actions de grâces rendues à Dieu pour ces meurtres? Plus la religion chrétienne est divine, moins il appartient à l'homme de la commander; si Dieu l'a faite, Dieu la soutiendra sans vous. Vous savez que l'intolérance ne produit que des hypocrites ou des rebelles: quelle funeste alternative! Enfin voudriez-vous soutenir par des bourreaux la religion d'un Dieu que des bourreaux ont fait périr, et qui n'a prêché que la douceur et la patience?
Voyez, je vous prie, les conséquences affreuses du droit de l'intolérance. S'il était permis de dépouiller de ses biens, de jeter dans les cachots, de tuer un citoyen qui, sous un tel degré de latitude, ne professerait pas la religion admise sous ce degré, quelle exception exempterait les premiers de l'Etat des mêmes peines? La religion lie également le monarque et les mendiants: aussi plus de cinquante docteurs ou moines ont affirmé cette horreur monstrueuse qu'il était permis de déposer, de tuer les souverains qui ne penseraient pas comme l'Eglise dominante; et les parlements du royaume n'ont cessé de proscrire ces abominables décisions d'abominables théologiens (Note 29).
Le sang de Henri le Grand fumait encore quand le parlement de Paris donna un arrêt qui établissait l'indépendance de la couronne comme une loi fondamentale. Le cardinal Duperron, qui devait la pourpre à Henri le Grand, s'éleva, dans les états de 1614, contre l'arrêt du parlement, et le fit supprimer. Tous les journaux du temps rapportent les termes dont Duperron se servit dans ses harangues: "Si un prince se faisait arien, dit-il, on serait bien obligé de le déposer."
Non assurément, monsieur le cardinal. On veut bien adopter votre supposition chimérique qu'un de nos rois, ayant lu l'histoire des conciles et des pères, frappé d'ailleurs de ces paroles: Mon père est plus grand que moi, les prenant trop à la lettre et balançant entre le concile de Nicée et celui de Constantinople, se déclarât pour Eusèbe de Nicomédie: je n'en obéirai pas moins à mon roi, je ne me croirai pas moins lié par le serment que je lui ai fait; et si vous osiez vous soulever contre lui, et que je fusse un de vos juges, je vous déclarerais criminel de lèse-majesté.
Duperron poussa plus loin la dispute, et je l'abrège. Ce n'est pas ici le lieu d'approfondir ces chimères révoltantes; je me bornerai à dire, avec tous les citoyens, que ce n'est point parce que Henri IV fut sacré à Chartres qu'on lui devait obéissance, mais parce que le droit incontestable de la naissance donnait la couronne à ce prince, qui la méritait par son courage et par sa bonté.
Qu'il soit donc permis de dire que tout citoyen doit hériter, par le même droit, des biens de son père, et qu'on ne voit pas qu'il mérite d'en être privé, et d'être traîné au gibet, parce qu'il sera du sentiment de Ratram contre Paschase Ratbert, et de Bérenger contre Scot.
On sait que tous nos dogmes n'ont pas toujours été clairement expliqués et universellement reçus dans notre Eglise. Jésus-Christ ne nous ayant point dit comment procédait le Saint-Esprit, l'Eglise latine crut longtemps avec la grecque qu'il ne procédait que du Père: enfin elle ajouta au symbole qu'il procédait aussi du Fils. Je demande si, le lendemain de cette décision, un citoyen qui s'en serait tenu au symbole de la veille eût été digne de mort? La cruauté, l'injustice, seraient-elles moins grandes de punir aujourd'hui celui qui penserait comme on pensait autrefois? Etait-on coupable, du temps d'Honorius Ier, de croire que Jésus n'avait pas deux volontés?
Il n'y a pas longtemps que l'immaculée conception est établie: les dominicains n'y croient pas encore. Dans quel temps les dominicains commenceront-ils à mériter des peines dans ce monde et dans l'autre?
Si nous devons apprendre de quelqu'un à nous conduire dans nos disputes interminables, c'est certainement des apôtres et des évangélistes. Il y avait de quoi exciter un schisme violent entre saint Paul et saint Pierre. Paul dit expressément dans son Epître aux Galates qu'il résista en face à Pierre parce que Pierre était répréhensible, parce qu'il usait de dissimulation aussi bien que Barnabé, parce qu'ils mangeaient avec les Gentils avant l'arrivée de Jacques, et qu'ensuite ils se retirèrent secrètement, et se séparèrent des Gentils de peur d'offenser les circoncis. "Je vis, ajoute-t-il, qu'ils ne marchaient pas droit selon l'Evangile; je dis à Céphas: Si vous, Juif, vivez comme les Gentils, et non comme les Juifs, pourquoi obligez-vous les Gentils à judaïser?"
C'était là un sujet de querelle violente. Il s'agissait de savoir si les nouveaux chrétiens judaïseraient ou non. Saint Paul alla dans ce temps-là même sacrifier dans le temple de Jérusalem. On sait que les quinze premiers évêques de Jérusalem furent des Juifs circoncis, qui observèrent le sabbat, et qui s'abstinrent des viandes défendues. Un évêque espagnol ou portugais qui se ferait circoncire, et qui observerait le sabbat, serait brûlé dans un autodafé. Cependant la paix ne fut altérée, pour cet objet fondamental, ni parmi les apôtres, ni parmi les premiers chrétiens.
Si les évangélistes avaient ressemblé aux écrivains modernes, ils avaient un champ bien vaste pour combattre les uns contre les autres. Saint Matthieu compte vingt-huit générations depuis David jusqu'à Jésus; saint Luc en compte quarante et une, et ces générations sont absolument différentes. On ne voit pourtant nulle dissension s'élever entre les disciples sur ces contrariétés apparentes, très bien conciliées par plusieurs Pères de l'Eglise. La charité ne fut point blessée, la paix fut conservée. Quelle plus grande leçon de nous tolérer dans nos disputes, et de nous humilier dans tout ce que nous n'entendons pas!
Saint Paul, dans son Epître à quelques juifs de Rome convertis au christianisme, emploie toute la fin du troisième chapitre à dire que la seule foi glorifie, et que les oeuvres ne justifient personne. Saint Jacques, au contraire, dans son Epître aux douze tribus dispersées par toute la terre, chapitre II, ne cesse de dire qu'on ne peut être sauvé sans les oeuvres. Voilà ce qui a séparé deux grandes communions parmi nous, et ce qui ne divisa point les apôtres.
Si la persécution contre ceux avec qui nous disputons était une action sainte, il faut avouer que celui qui aurait fait tuer le plus d'hérétiques serait le plus grand saint du paradis. Quelle figure y ferait un homme qui se serait contenté de dépouiller ses frères, et de les plonger dans des cachots, auprès d'un zélé qui en aurait massacré des centaines le jour de la Saint-Barthélémy? En voici la preuve. Le successeur de saint Pierre et son consistoire ne peuvent errer; ils approuvèrent, célébrèrent, consacrèrent, l'action de la Saint-Barthélémy: donc cette action était très sainte; donc de deux assassins égaux en piété, celui qui aurait éventré vingt-quatre femmes grosses huguenotes doit être élevé en gloire du double de celui qui n'en aura éventré que douze. Par la même raison, les fanatiques des Cévennes devaient croire qu'ils seraient élevés en gloire à proportion du nombre des prêtres, des religieux, et des femmes catholiques qu'ils auraient égorgés. Ce sont là d'étranges titres pour la gloire éternelle.


CHAPITRE XII
SI L'INTOLERANCE FUT DE DROIT DIVIN DANS LE JUDAISME,
ET SI ELLE FUT TOUJOURS MISE EN PRATIQUE
On appelle, je crois, droit divin les préceptes que Dieu a donnés lui-même. Il voulut que les Juifs mangeassent un agneau cuit avec des laitues, et que les convives le mangeassent debout, un bâton à la main, en commémoration du Phasé; il ordonna que la consécration du grand prêtre se ferait en mettant du sang à son oreille droite, à sa main droite et à son pied droit, coutumes extraordinaires pour nous, mais non pas pour l'Antiquité; il voulut qu'on chargeât le bouc Hazazel des iniquités du peuple; il défendit qu'on se nourrît (Note 30) de poissons sans écailles, de porcs, de lièvres, de hérissons, de hiboux, de griffons, d'ixions, etc.
Il institua les fêtes, les cérémonies. Toutes ces choses, qui semblaient arbitraires aux autres nations, et soumises au droit positif, à l'usage, étant commandées par Dieu même, devenaient un droit divin pour les Juifs, comme tout ce que Jésus-Christ, fils de Marie, fils de Dieu, nous a commandé, est de droit divin pour nous.
Gardons-nous de rechercher ici pourquoi Dieu a substitué une loi nouvelle à celle qu'il avait donnée à Moïse, et pourquoi il avait commandé à Moïse plus de choses qu'au patriarche Abraham, et plus à Abraham qu'à Noé (Note 31). Il semble qu'il daigne se proportionner aux temps et à la population du genre humain: c'est une gradation paternelle; mais ces abîmes sont trop profonds pour notre débile vue. Tenons-nous dans les bornes de notre sujet; voyons d'abord ce qu'était l'intolérance chez les Juifs.
Il est vrai que, dans l'Exode, les Nombres, le Lévitique, le Deutéronome, il y a des lois très sévères sur le culte, et des châtiments plus sévères encore. Plusieurs commentateurs ont de la peine à concilier les récits de Moïse avec les passages de Jérémie et d'Amos, et avec le célèbre discours de saint Etienne, rapporté dans les Actes des apôtres. Amos dit (Note 32) que les Juifs adorèrent toujours dans le désert Moloch, Rempham, et Kium. Jérémie dit expressément (Note 33) que Dieu ne demanda aucun sacrifice à leurs pères quand ils sortirent d'Egypte. Saint Etienne, dans son discours aux Juifs, s'exprime ainsi: "Ils adorèrent l'armée du ciel (Note 34); ils n'offrirent ni sacrifices ni hosties dans le désert pendant quarante ans; ils portèrent le tabernacle du dieu Moloch, et l'astre de leur dieu Rempham."
D'autres critiques infèrent du culte de tant de dieux étrangers que ces dieux furent tolérés par Moïse, et ils citent en preuves ces paroles du Deutéronome (Note 35): "Quand vous serez dans la terre de Chanaan, vous ne ferez point comme nous faisons aujourd'hui, où chacun fait ce qui lui semble bon (Note 36)."
Ils appuient leur sentiment sur ce qu'il n'est parlé d'aucun acte religieux du peuple dans le désert: point de pâque célébrée, point de pentecôte, nulle mention qu'on ait célébré la fête des tabernacles, nulle prière publique établie; enfin la circoncision, ce sceau de l'alliance de Dieu avec Abraham, ne fut point pratiquée.
Ils se prévalent encore de l'histoire de Josué. Ce conquérant dit aux Juifs (Note 37): "L'option vous est donnée: choisissez quel parti il vous plaira, ou d'adorer les dieux que vous avez servis dans le pays des Amorrhéens, ou ceux que vous avez reconnus en Mésopotamie." Le peuple répond: "Il n'en sera pas ainsi, nous servirons Adonaï." Josué leur répliqua: "Vous avez choisi vous-mêmes; ôtez donc du milieu de vous les dieux étrangers." Ils avaient donc eu incontestablement d'autres dieux qu'Adonaï sous Moïse.
Il est très inutile de réfuter ici les critiques qui pensent que le Pentateuque ne fut pas écrit par Moïse; tout a été dit dès longtemps sur cette matière; et quand même quelque petite partie des livres de Moïse aurait été écrite du temps des juges ou des pontifes, ils n'en seraient pas moins inspirés et moins divins.
C'est assez, ce me semble, qu'il soit prouvé par la sainte Ecriture que, malgré la punition extraordinaire attirée aux Juifs par le culte d'Apis, ils conservèrent longtemps une liberté entière: peut-être même que le massacre que fit Moïse de vingt-trois mille hommes pour le veau érigé par son frère lui fit comprendre qu'on ne gagnait rien par la rigueur, et qu'il fut obligé de fermer les yeux sur la passion du peuple pour les dieux étrangers.
Lui-même (Note 38) semble bientôt transgresser la loi qu'il a donnée. Il a défendu tout simulacre, cependant il érige un serpent d'airain. La même exception à la loi se trouve depuis dans le temple de Salomon: ce prince fait sculpter douze boeufs qui soutiennent le grand bassin du temple; des chérubins sont posés dans l'arche; ils ont une tête d'aigle et une tête de veau; et c'est apparemment cette tête de veau mal faite, trouvée dans le temple par des soldats romains, qui fit croire longtemps que les Juifs adoraient un âne.
En vain le culte des dieux étrangers est défendu; Salomon est paisiblement idolâtre. Jéroboam, à qui Dieu donna dix parts du royaume, fait ériger deux veaux d'or, et règne vingt-deux ans, en réunissant en lui les dignités de monarque et de pontife. Le petit royaume de Juda dresse sous Roboam des autels étrangers et des statues. Le saint roi Asa ne détruit point les hauts lieux (Note 39). Le grand prêtre Urias érige dans le temple, à la place de l'autel des holocaustes, un autel du roi de Syrie (Note 40). On ne voit, en un mot, aucune contrainte sur la religion. Je sais que la plupart des rois juifs s'exterminèrent, s'assassinèrent les uns les autres; mais ce fut toujours pour leur intérêt, et non pour leur croyance.
Il est vrai (Note 41) que parmi les prophètes il y en eut qui intéressèrent le ciel à leur vengeance: Elie fit descendre le feu céleste pour consumer les prêtres de Baal; Elisée fit venir des ours pour dévorer quarante-deux petits enfants qui l'avaient appelé tête chauve; mais ce sont des miracles rares, et des faits qu'il serait un peu dur de vouloir imiter.
On nous objecte encore que le peuple juif fut très ignorant et très barbare. Il est dit (Note 42) que, dans la guerre qu'il fit aux Madianites (Note 43), Moïse ordonna de tuer tous les enfants mâles et toutes les mères, et de partager le butin. Les vainqueurs trouvèrent dans le camp 675000 brebis, 72000 boeufs, 61000 ânes, et 32000 jeunes filles; ils en firent le partage, et tuèrent tout le reste. Plusieurs commentateurs même prétendent que trente-deux filles furent immolées au Seigneur: "Cesserunt in partem Domini triginta duae animae."
En effet, les Juifs immolaient des hommes à la Divinité, témoin le sacrifice de Jephté (Note 44), témoin le roi Agag (Note 45) coupé en morceaux par le prêtre Samuel. Ezéchiel même leur promet, pour les encourager, qu'ils mangeront de la chair humaine: "Vous mangerez, dit-il, le cheval et le cavalier; vous boirez le sang des princes." Plusieurs commentateurs appliquent deux versets de cette prophétie aux Juifs mêmes, et les autres aux animaux carnassiers. On ne trouve, dans toute l'histoire de ce peuple, aucun trait de générosité, de magnanimité, de bienfaisance; mais il s'échappe toujours, dans le nuage de cette barbarie si longue et si affreuse, des rayons d'une tolérance universelle.
Jephté, inspiré de Dieu, et qui lui immola sa fille, dit aux Ammonites (Note 46): "Ce que votre dieu Chamos vous a donné ne vous appartient-il pas de droit? Souffrez donc que nous prenions la terre que notre Dieu nous a promise." Cette déclaration est précise: elle peut mener bien loin; mais au moins elle est une preuve évidente que Dieu tolérait Chamos. Car la sainte Ecriture ne dit pas: Vous pensez avoir droit sur les terres que vous dites vous avoir été données par le dieu Chamos; elle dit positivement: "Vous avez droit, tibi jure debentur"; ce qui est le vrai sens de ces paroles hébraïques: Otho thirasch.
L'histoire de Michas et du lévite, rapportée aux XVII e et XVIII e chapitres du livre des Juges est bien encore une preuve incontestable de la tolérance et de la liberté la plus grande, admise alors chez les Juifs. La mère de Michas, femme fort riche d'Ephraïm, avait perdu onze cents pièces d'argent; son fils les lui rendit: elle voua cet argent au Seigneur, et en fit faire des idoles; elle bâtit une petite chapelle. Un lévite desservit la chapelle, moyennant dix pièces d'argent, une tunique, un manteau par année, et sa nourriture; et Michas s'écria (Note 47): "C'est maintenant que Dieu me fera du bien, puisque j'ai chez moi un prêtre de la race de Lévi."
Cependant six cents hommes de la tribu de Dan, qui cherchaient à s'emparer de quelque village dans le pays, et à s'y établir, mais n'ayant point de prêtre lévite avec eux, et en ayant besoin pour que Dieu favorisât leur entreprise, allèrent chez Michas, et prirent son éphod, ses idoles, et son lévite, malgré les remontrances de ce prêtre, et malgré les cris de Michas et de sa mère. Alors ils allèrent avec assurance attaquer le village nommé Laïs, et y mirent tout à feu et à sang selon leur coutume. Ils donnèrent le nom de Dan à Laïs, en mémoire de leur victoire; ils placèrent l'idole de Michas sur un autel; et, ce qui est bien plus remarquable, Jonathan, petit-fils de Moïse, fut le grand prêtre de ce temple, où l'on adorait le Dieu d'Israël et l'idole de Michas.
Après la mort de Gédéon, les Hébreux adorèrent Baal-bérith pendant prés de vingt ans, et renoncèrent au culte d'Adonaï, sans qu'aucun chef, aucun juge, aucun prêtre, criât vengeance. Leur crime était grand, je l'avoue; mais si cette idolâtrie même fut tolérée, combien les différences dans le vrai culte ont-elles dû l'être!
Quelques-uns donnent pour une preuve d'intolérance que le Seigneur lui-même ayant permis que son arche fût prise par les Philistins dans un combat, il ne punit les Philistins qu'en les frappant d'une maladie secrète ressemblant aux hémorroïdes, en renversant la statue de Dagon, et en envoyant une multitude de rats dans leurs campagnes; mais, lorsque les Philistins, pour apaiser sa colère, eurent renvoyé l'arche attelée de deux vaches qui nourrissaient leurs veaux, et offert à Dieu cinq rats d'or, et cinq anus d'or, le Seigneur fit mourir soixante et dix anciens d'Israël et cinquante mille hommes du peuple pour avoir regardé l'arche. On répond que le châtiment du Seigneur ne tombe point sur une croyance, sur une différence dans le culte, ni sur aucune idolâtrie.
Si le Seigneur avait voulu punir l'idolâtrie, il aurait fait périr tous les Philistins qui osèrent prendre son arche, et qui adoraient Dagon; mais il fit périr cinquante mille soixante et dix hommes de son peuple, uniquement parce qu'ils avaient regardé son arche, qu'ils ne devaient pas regarder: tant les lois, les moeurs de ce temps, l'économie judaïque, diffèrent de tout ce que nous connaissons; tant les voies inscrutables de Dieu sont au-dessus des nôtres. "La rigueur exercée, dit le judicieux dom Calmet, contre ce grand nombre d'hommes ne paraîtra excessive qu'à ceux qui n'ont pas compris jusqu'à quel point Dieu voulait être craint et respecté parmi son peuple, et qui ne jugent des vues et des desseins de Dieu qu'en suivant les faibles lumières de leur raison."
Dieu ne punit donc pas un culte étranger, mais une profanation du sien, une curiosité indiscrète, une désobéissance, peut-être même un esprit de révolte. On sent bien que de tels châtiments n'appartiennent qu'à Dieu dans la théocratie judaïque. On ne peut trop redire que ces temps et ces moeurs n'ont aucun rapport aux nôtres.
Enfin lorsque, dans les siècles postérieurs, Naaman l'idolâtre demanda à Elisée s'il lui était permis de suivre son roi (Note 48) dans le temple de Remnon, et d'y adorer avec lui, ce même Elisée, qui avait fait dévorer les enfants par les ours, ne lui répondit-il pas: Allez en paix?
Il y a bien plus; le Seigneur ordonna à Jérémie de se mettre des cordes au cou, des colliers (Note 49), et des jougs, de les envoyer aux roitelets ou melchim de Moab, d'Ammon, d'Edom, de Tyr, de Sidon; et Jérémie leur fait dire par le Seigneur: "J'ai donné toutes vos terres à Nabuchodonosor, roi de Babylone, mon serviteur (Note 50)." Voilà un roi idolâtre déclaré serviteur de Dieu et son favori.
Le même Jérémie, que le melk ou roitelet juif Sédécias avait fait mettre au cachot, ayant obtenu son pardon de Sédécias, lui conseille, de la part de Dieu, de se rendre au roi de Babylone (Note 51): "Si vous allez vous rendre à ses officiers, dit-il, votre âme vivra." Dieu prend donc enfin le parti d'un roi idolâtre; il lui livre l'arche, dont la seule vue avait coûté la vie à cinquante mille soixante et dix Juifs; il lui livre le Saint des saints, et le reste du temple, qui avait coûté à bâtir cent huit mille talents d'or, un million dix-sept mille talents en argent, et dix mille drachmes d'or, laissés par David et ses officiers pour la construction de la maison du Seigneur: ce qui, sans compter les deniers employés par Salomon, monte à la somme de dix-neuf milliards soixante-deux millions, ou environ, au cours de ce jour. Jamais idolâtrie ne fut plus récompensée. Je sais que ce compte est exagéré, qu'il y a probablement erreur de copiste; mais réduisez la somme à la moitié, au quart, au huitième même, elle vous étonnera encore. On n'est guère moins surpris des richesses qu'Hérodote dit avoir vues dans le temple d'Ephèse. Enfin les trésors ne sont rien aux yeux de Dieu, et le nom de son serviteur, donné à Nabuchodonosor, est le vrai trésor inestimable.''
Dieu (Note 52) ne favorise pas moins le Kir, ou Koresh, ou Kosroès, que nous appelons Cyrus; il l'appelle son christ, son oint, quoiqu'il ne fût pas oint, selon la signification commune de ce mot, et qu'il suivît la religion de Zoroastre; il l'appelle son pasteur, quoiqu'il fût usurpateur aux yeux des hommes: il n'y a pas dans toute la sainte Ecriture une plus grande marque de prédilection.
Vous voyez dans Malachie que "du levant au couchant le nom de Dieu est grand dans les nations, et qu'on lui offre partout des oblations pures". Dieu a soin des Ninivites idolâtres comme des Juifs; il les menace, et il leur pardonne. Melchisédech, qui n'était point juif, était sacrificateur de Dieu. Balaam, idolâtre, était prophète. L'Ecriture nous apprend donc que non seulement Dieu tolérait tous les autres peuples, mais qu'il en avait un soin paternel: et nous osons être intolérants!


CHAPITRE XIII
EXTREME TOLERANCE DES JUIFS
Ainsi donc, sous Moïse, sous les juges, sous les rois, vous voyez toujours des exemples de tolérance. Il y a bien plus (Note 53): Moïse dit plusieurs fois que "Dieu punit les pères dans les enfants jusqu'à la quatrième génération"; cette menace était nécessaire à un peuple à qui Dieu n'avait révélé ni l'immortalité de l'âme, ni les peines et les récompenses dans une autre vie. Ces vérités ne lui furent annoncées ni dans le Décalogue, ni dans aucune loi du Lévitique et du Deutéronome. C'étaient les dogmes des Perses, des Babyloniens, des Egyptiens, des Grecs, des Crétois; mais ils ne constituaient nullement la religion des Juifs. Moïse ne dit point: "Honore ton père et ta mère, si tu veux aller au ciel"; mais: "Honore ton père et ta mère, afin de vivre longtemps sur la terre." Il ne les menace que de maux corporels (Note 54), de la gale sèche, de la gale purulente, d'ulcères malins dans les genoux et dans le gras des jambes, d'être exposés aux infidélités de leurs femmes, d'emprunter à usure des étrangers, et de ne pouvoir prêter à usure; de périr de famine, et d'être obligés de manger leurs enfants; mais en aucun lieu il ne leur dit que leurs âmes immortelles subiront des tourments après la mort, ou goûteront des félicités. Dieu, qui conduisait lui-même son peuple, le punissait ou le récompensait immédiatement après ses bonnes ou ses mauvaises actions. Tout était temporel, et c'est une vérité dont Warburton abuse pour prouver que la loi des Juifs était divine (Note 55): parce que Dieu même étant leur roi, rendant justice immédiatement après la transgression ou l'obéissance, n'avait pas besoin de leur révéler une doctrine qu'il réservait au temps où il ne gouvernerait plus son peuple. Ceux qui, par ignorance, prétendent que Moïse enseignait l'immortalité de l'âme, ôtent au Nouveau Testament un de ses plus grands avantages sur l'Ancien. Il est constant que la loi de Moïse n'annonçait que des châtiments temporels jusqu'à la quatrième génération. Cependant, malgré l'énoncé précis de cette loi, malgré cette déclaration expresse de Dieu qu'il punirait jusqu'à la quatrième génération, Ezéchiel annonce tout le contraire aux Juifs, et leur dit (Note 56) que le fils ne portera point l'iniquité de son père; il va même jusqu'à faire dire à Dieu qu'il leur avait donné (Note 57) "des préceptes qui n'étaient pas bons" (Note 58).
Le livre d'Ezéchiel n'en fut pas moins inséré dans le canon des auteurs inspirés de Dieu: il est vrai que la synagogue n'en permettait pas la lecture avant l'âge de trente ans, comme nous l'apprend saint Jérôme; mais c'était de peur que la jeunesse n'abusât des peintures trop naïves qu'on trouve dans les chapitres XVI et XXIII du libertinage des deux soeurs Oolla et Ooliba. En un mot, son livre fut toujours reçu, malgré sa contradiction formelle avec Moïse.
Enfin (Note 59), lorsque l'immortalité de l'âme fut un dogme reçu, ce qui probablement avait commencé dès le temps de la captivité de Babylone, la secte des saducéens persista toujours à croire qu'il n'y avait ni peines ni récompenses après la mort, et que la faculté de sentir et de penser périssait avec nous, comme la force active, le pouvoir de marcher et de digérer. Ils niaient l'existence des anges. Ils différaient beaucoup plus des autres Juifs que les protestants ne diffèrent des catholiques; ils n'en demeurèrent pas moins dans la communion de leurs frères: on vit même des grands prêtres de leur secte.
Les pharisiens croyaient à la fatalité (Note 60) et à la métempsycose (Note 61). Les esséniens pensaient que les âmes des justes allaient dans les îles fortunées (Note 62), et celles des méchants dans une espèce de Tartare. Ils ne faisaient point de sacrifices; ils s'assemblaient entre eux dans une synagogue particulière. En un mot, si l'on veut examiner de près le judaïsme, on sera étonné de trouver la plus grande tolérance au milieu des horreurs les plus barbares. C'est une contradiction, il est vrai; presque tous les peuples se sont gouvernés par des contradictions. Heureuse celle qui amène des moeurs douces quand on a des lois de sang!


CHAPITRE XIV
SI L'INTOLERANCE
A ETE ENSEIGNEE PAR JESUS-CHRIST
Voyons maintenant si Jésus-Christ a établi des lois sanguinaires, s'il a ordonné l'intolérance, s'il fit bâtir les cachots de l'Inquisition, s'il institua les bourreaux des autodafé.
Il n'y a, si je ne me trompe, que peu de passages dans les Evangiles dont l'esprit persécuteur ait pu inférer que l'intolérance, la contrainte, sont légitimes. L'un est la parabole dans laquelle le royaume des cieux est comparé à un roi qui invite des convives aux noces de son fils; ce monarque leur fait dire par ses serviteurs (Note 63): "J'ai tué mes boeufs et mes volailles; tout est prêt, venez aux noces." Les uns, sans se soucier de l'invitation, vont à leurs maisons de campagne, les autres à leur négoce; d'autres outragent les domestiques du roi, et les tuent. Le roi fait marcher ses armées contre ces meurtriers, et détruit leur ville; il envoie sur les grands chemins convier au festin tous ceux qu'on trouve: un d'eux s'étant mis à table sans avoir mis la robe nuptiale est chargé de fers, et jeté dans les ténèbres extérieures.
Il est clair que cette allégorie ne regardant que le royaume des cieux, nul homme assurément ne doit en prendre le droit de garrotter ou de mettre au cachot son voisin qui serait venu souper chez lui sans avoir un habit de noces convenable, et je ne connais dans l'histoire aucun prince qui ait fait pendre un courtisan pour un pareil sujet; il n'est pas non plus à craindre que, quand l'empereur, ayant tué ses volailles, enverra ses pages à des princes de l'empire pour les prier à souper, ces princes tuent ces pages. L'invitation au festin signifie la prédication du salut; le meurtre des envoyés du prince figure la persécution contre ceux qui prêchent la sagesse et la vertu.
L'autre (Note 64) parabole est celle d'un particulier qui invite ses amis à un grand souper, et lorsqu'il est prêt de se mettre à table, il envoie son domestique les avertir. L'un s'excuse sur ce qu'il a acheté une terre, et qu'il va la visiter: cette excuse ne paraît pas valable, ce n'est pas pendant la nuit qu'on va voir sa terre; un autre dit qu'il a acheté cinq paires de boeufs, et qu'il les doit éprouver: il a le même tort que l'autre, on n'essaye pas des boeufs à l'heure du souper; un troisième répond qu'il vient de se marier, et assurément son excuse est très recevable. Le père de famille, en colère, fait venir à son festin les aveugles et les boiteux, et, voyant qu'il reste encore des places vides, il dit à son valet: "Allez dans les grands chemins et le long des haies, et contraignez les gens d'entrer."
Il est vrai qu'il n'est pas dit expressément que cette parabole soit une figure du royaume des cieux. On n'a que trop abusé de ces paroles: Contrains-les d'entrer; mais il est visible qu'un seul valet ne peut contraindre par la force tous les gens qu'il rencontre à venir souper chez son maître; et d'ailleurs, des convives ainsi forcés ne rendraient pas le repas fort agréable. Contrains-les d'entrer ne veut dire autre chose, selon les commentateurs les plus accrédités, sinon: priez, conjurez, pressez, obtenez. Quel rapport, je vous prie, de cette prière et de ce souper à la persécution?
Si on prend les choses à la lettre, faudra-t-il être aveugle, boiteux, et conduit par force, pour être dans le sein de l'Eglise? Jésus dit dans la même parabole: "Ne donnez à dîner ni à vos amis ni à vos parents riches"; en a-t-on jamais inféré qu'on ne dot point en effet dîner avec ses parents et ses amis dès qu'ils ont un peu de fortune?
Jésus-Christ, après la parabole du festin, dit (Note 65): "Si quelqu'un vient à moi, et ne hait pas son père, sa mère, ses frères, ses soeurs, et même sa propre âme, il ne peut être mon disciple, etc. Car qui est celui d'entre vous qui, voulant bâtir une tour, ne suppute pas auparavant la dépense?" Y a-t-il quelqu'un, dans le monde, assez dénaturé pour conclure qu'il faut haïr son père et sa mère? Et ne comprend-on pas aisément que ces paroles signifient: Ne balancez pas entre moi et vos plus chères affections?
On cite le passage de saint Matthieu (Note 66): "Qui n'écoute point l'Eglise soit comme un païen et comme un receveur de la douane"; cela ne dit pas absolument qu'on doive persécuter les païens et les fermiers des droits du roi: ils sont maudits, il est vrai, mais ils ne sont point livrés au bras séculier. Loin d'ôter à ces fermiers aucune prérogative de citoyen, on leur a donné les plus grands privilèges; c'est la seule profession qui soit condamnée dans L'Ecriture, et c'est la plus favorisée par les gouvernements. Pourquoi donc n'aurions-nous pas pour nos frères errants autant d'indulgence que nous prodiguons de considération à nos frères les traitants?
Un autre passage dont on a fait un abus grossier est celui de saint Matthieu et de saint Marc, où il est dit que Jésus, ayant faim le matin, approcha d'un figuier où il ne trouva que des feuilles, car ce n'était pas le temps des figues: il maudit le figuier qui se sécha aussitôt.
On donne plusieurs explications différentes de ce miracle; mais y en a-t-il une seule qui puisse autoriser la persécution? Un figuier n'a pu donner des figues vers le commencement de mars, on l'a séché: est-ce une raison pour faire sécher nos frères de douleur dans tous les temps de l'année? Respectons dans l'écriture tout ce qui peut faire naître des difficultés dans nos esprits curieux et vains, mais n'en abusons pas pour être durs et implacables.
L'esprit persécuteur, qui abuse de tout, cherche encore sa justification dans l'expulsion des marchands chassés du temple, et dans la légion de démons envoyée du corps d'un possédé dans le corps de deux mille animaux immondes. Mais qui ne voit que ces deux exemples ne sont autre chose qu'une justice que Dieu daigne faire lui-même d'une contravention à la loi? C'était manquer de respect à la maison du Seigneur que de changer son parvis en une boutique de marchands. En vain le sanhédrin et les prêtres permettaient ce négoce pour la commodité des sacrifices: le Dieu auquel on sacrifiait pouvait sans doute, quoique caché sous la figure humaine, détruire cette profanation; il pouvait de même punir ceux qui introduisaient dans le pays des troupeaux entiers défendus par une loi dont il daignait lui-même être l'observateur. Ces exemples n'ont pas le moindre rapport aux persécutions sur le dogme. Il faut que l'esprit d'intolérance soit appuyé sur de bien mauvaises raisons, puisqu'il cherche partout les plus vains prétextes.
Presque tout le reste des paroles et des actions de Jésus-Christ prêche la douceur, la patience, l'indulgence. C'est le père de famille qui reçoit l'enfant prodigue; c'est l'ouvrier qui vient à la dernière heure, et qui est payé comme les autres; c'est le samaritain charitable; lui-même justifie ses disciples de ne pas jeûner; il pardonne à la pécheresse; il se contente de recommander la fidélité à la femme adultère; il daigne même condescendre à l'innocente joie des convives de Cana, qui, étant déjà échauffés de vin, en demandent encore: il veut bien faire un miracle en leur faveur, il change pour eux l'eau en vin.
Il n'éclate pas même contre Judas, qui doit le trahir il ordonne à Pierre de ne se jamais servir de l'épée; il réprimande. les enfants de Zébédée, qui, à l'exemple d'Elie, voulaient faire descendre le feu du ciel sur une ville qui n'avait pas voulu le loger.
Enfin il meurt victime de l'envie. Si l'on ose comparer le sacré avec le profane, et un Dieu avec un homme, sa mort, humainement parlant, a beaucoup de rapport avec celle de Socrate. Le philosophe grec périt par la haine des sophistes, des prêtres, et des premiers du peuple: le législateur des chrétiens succomba sous la haine des scribes, des pharisiens, et des prêtres. Socrate pouvait éviter la mort, et il ne le voulut pas: Jésus-Christ s'offrit volontairement. Le philosophe grec pardonna non seulement à ses calomniateurs et à ses juges iniques, mais il les pria de traiter un jour ses enfants comme lui-même, s'ils étaient assez heureux pour mériter leur haine comme lui: le législateur des chrétiens, infiniment supérieur, pria son père de pardonner à ses ennemis.
Si Jésus-Christ sembla craindre la mort, si l'angoisse qu'il ressentit fut si extrême qu'il en eut une sueur mêlée de sang, ce qui est le symptôme le plus violent et le plus rare, c'est qu'il daigna s'abaisser à toute la faiblesse du corps humain, qu'il avait revêtu. Son corps tremblait, et son âme était inébranlable; il nous apprenait que la vraie force, la vraie grandeur, consistent à supporter des maux sous lesquels notre nature succombe. Il y a un extrême courage à courir à la mort en la redoutant.
Socrate avait traité les sophistes d'ignorants, et les avait convaincus de mauvaise foi: Jésus, usant de ses droits divins, traita les scribes (Note 67) et les pharisiens d'hypocrites, d'insensés, d'aveugles, de méchants, de serpents, de race de vipères.
Socrate ne fut point accusé de vouloir fonder une secte nouvelle: on n'accusa point Jésus-Christ d'en avoir voulu introduire une (Note 68). Il est dit que les princes des prêtres et tout le conseil cherchaient un faux témoignage contre Jésus pour le faire périr.
Or, s'ils cherchaient un faux témoignage, ils ne lui reprochaient donc pas d'avoir prêché publiquement contre la loi. Il fut en effet soumis à la loi de Moïse depuis son enfance jusqu'à sa mort. On le circoncit le huitième jour, comme tous les autres enfants. S'il fut depuis baptisé dans le Jourdain, c'était une cérémonie consacrée chez les Juifs, comme chez tous les peuples de l'Orient. Toutes les souillures légales se nettoyaient par le baptême; c'est ainsi qu'on consacrait les prêtres: on se plongeait dans l'eau à la fête de l'expiation solennelle, on baptisait les prosélytes.
Jésus observa tous les points de la loi: il fêta tous les jours de sabbat; il s'abstint des viandes défendues; il célébra toutes les fêtes, et même, avant sa mort, il avait célébré la pâque; on ne l'accusa ni d'aucune opinion nouvelle, ni d'avoir observé aucun rite étranger. Né Israélite, il vécut constamment en Israélite.
Deux témoins qui se présentèrent l'accusèrent d'avoir dit (Note 69): "qu'il pourrait détruire le temple et le rebâtir en trois jours". Un tel discours était incompréhensible pour les Juifs charnels; mais ce n'était pas une accusation de vouloir fonder une nouvelle secte.
Le grand prêtre l'interrogea, et lui dit: "Je vous commande par le Dieu vivant de nous dire si vous êtes le Christ fils de Dieu." On ne nous apprend point ce que le grand prêtre entendait par fils de Dieu. On se servait quelquefois de cette expression pour signifier un juste (Note 70), comme on employait les mots de fils de Bélial pour signifier un méchant. Les Juifs grossiers n'avaient aucune idée du mystère sacré d'un fils de Dieu, Dieu lui-même venant sur la terre.
Jésus lui répondit: "Vous l'avez dit; mais je vous dis que vous verrez bientôt le fils de l'homme assis à la droite de la vertu de Dieu, venant sur les nuées du ciel."
Cette réponse fut regardée par le sanhédrin irrité comme un blasphème. Le sanhédrin n'avait plus le droit du glaive; ils traduisirent Jésus devant le gouverneur romain de la province, et l'accusèrent calomnieusement d'être un perturbateur du repos public, qui disait qu'il ne fallait pas payer le tribut à César, et qui de plus se disait roi des Juifs. Il est donc de la plus grande évidence qu'il fut accusé d'un crime d'Etat.
Le gouverneur Pilate, ayant appris qu'il était Galiléen, le renvoya d'abord à Hérode, tétrarque de Galilée. Hérode crut qu'il était impossible que Jésus pût aspirer à se faire chef de parti, et prétendre à la royauté; il le traita avec mépris, et le renvoya à Pilate, qui eut l'indigne faiblesse de le condamner pour apaiser le tumulte excité contre lui-même, d'autant plus qu'il avait essuyé déjà une révolte des Juifs, à ce que nous apprend Josèphe. Pilate n'eut pas la même générosité qu'eut depuis le gouverneur Festus.
Je demande à présent si c'est la tolérance ou l'intolérance qui est de droit divin? Si vous voulez ressembler à Jésus-Christ, soyez martyrs, et non pas bourreaux.


CHAPITRE XV
TEMOIGNAGES CONTRE L'INTOLERANCE
C'est une impiété d'ôter, en matière de religion, la liberté aux hommes, d'empêcher qu'ils ne fassent choix d'une divinité: aucun homme, aucun dieu, ne voudrait d'un service forcé. (Apologétique, ch. XXIV.)
Si on usait de violence pour la défense de la foi, les évêques s'y opposeraient. (Saint HILAIRE, liv. Ier.)
La religion forcée n'est plus religion: il faut persuader, et non contraindre. La religion ne se commande point. (JACTANCE, liv. III.)
C'est une exécrable hérésie de vouloir attirer par la force, par les coups, par les emprisonnements, ceux qu'on n'a pu convaincre par la raison. (Saint ATHANASE, liv. Ier.)
Rien n'est plus contraire à la religion que la contrainte. (Saint JUSTIN, martyr, liv. V.)
Persécuterons-nous ceux que Dieu tolère? dit saint Augustin, avant que sa querelle avec les donatistes l'eût rendu trop sévère.
Qu'on ne fasse aucune violence aux Juifs. (Quatrième concile de Tolède, cinquante-sixième canon.)
Conseillez, et ne forcez pas. (Lettre de saint Bernard.)
Nous ne prétendons point détruire les erreurs par la violence. (Discours du clergé de France à Louis XIII.)
Nous avons toujours désapprouvé les voies de rigueur. (Assemblée du clergé, 11 auguste 1560.)
Nous savons que la foi se persuade et ne se commande point. (FLECHIER, évêque de Nîmes, lettre 19.)
On ne doit pas même user de termes insultants. (L'évêque Du BELLAI, dans une Instruction pastorale.)
Souvenez-vous que les maladies de l'âme ne se guérissent point par contrainte et par violence. (Le cardinal LE CAMUS, Instruction pastorale de 1688.)
Accordez à tous la tolérance civile. (FENELON, archevêque de Cambrai, au duc de Bourgogne.)
L'exaction forcée d'une religion est une preuve évidente que l'esprit qui la conduit est un esprit ennemi de la vérité. (DIROIS, docteur de Sorbonne, livre VI, chap. IV.)
La violence peut faire des hypocrites; on ne persuade point quand on fait retentir partout les menaces. (TILLEMONT, Histoire ecclésiastique, tome VI.)
Il nous a paru conforme à l'équité et à la droite raison de marcher sur les traces de l'ancienne Eglise, qui n'a point usé de violence pour établir et étendre la religion. (Remontrance du parlement de Paris à Henri II.)
L'expérience nous apprend que la violence est plus capable d'irriter que de guérir un mal qui a sa racine dans l'esprit, etc. (DE THOU, Epître dédicatoire à Henri IV.)
La foi ne s'inspire pas à coups d'épée. (CERISIERS, Sur les règnes de Henri IV et de Louis XIII.)
C'est un zèle barbare que celui qui prétend planter la religion dans les coeurs, comme si la persuasion pouvait être l'effet de la contrainte. (BOULAINVILLIERS, Etat de la France.)
Il en est de la religion comme de l'amour: le commandement n'y peut rien, la contrainte encore moins; rien de plus indépendant que d'aimer et de croire. (AMELOT DE LA HOUSSAIE, sur les Lettres du cardinal d'Ossat.)
Si le ciel vous a assez aimés pour vous faire voir la vérité, il vous a fait une grande grâce; mais est-ce aux enfants qui ont l'héritage de leur père, de haïr ceux qui ne l'ont pas eu? (Esprit des Lois, liv. XXV.)
On pourrait faire un livre énorme, tout composé de pareils passages. Nos histoires, nos discours, nos sermons, nos ouvrages de morale, nos catéchismes, respirent tous, enseignent tous aujourd'hui ce devoir sacré de l'indulgence. Par quelle fatalité, par quelle inconséquence démentirions-nous dans la pratique une théorie que nous annonçons tous les jours? Quand nos actions démentent notre morale, c'est que nous croyons qu'il y a quelque avantage pour nous à faire le contraire de ce que nous enseignons; mais certainement il n'y a aucun avantage à persécuter ceux qui ne sont pas de notre avis, et à nous en faire haïr. Il y a donc, encore une fois, de l'absurdité dans l'intolérance. Mais, dira-t-on, ceux qui ont intérêt à gêner les consciences ne sont point absurdes. C'est à eux que s'adresse le chapitre suivant.


CHAPITRE XVI
DIALOGUE ENTRE UN MOURANT
ET UN HOMME QUI SE PORTE BIEN
Un citoyen était à l'agonie dans une ville de province; un homme en bonne santé vint insulter à ses derniers moments, et lui dit:
Misérable! pense comme moi tout à l'heure: signe cet écrit, confesse que cinq propositions sont dans un livre que ni toi ni moi n'avons jamais lu; sois tout à l'heure du sentiment de Lanfranc contre Bérenger, de saint Thomas contre saint Bonaventure; embrasse le second concile de Nicée contre le concile de Francfort; explique-moi dans l'instant comment ces paroles: "Mon Père est plus grand que moi" signifient expressément: "Je suis aussi grand que lui."
Dis-moi comment le Père communique tout au Fils, excepté la paternité, ou je vais faire jeter ton corps à la voirie; tes enfants n'hériteront point de toi, ta femme sera privée de sa dot, et ta famille mendiera du pain, que mes pareils ne lui donneront pas.
LE MOURANT.
J'entends à peine ce que vous me dites; les menaces que vous me faites parviennent confusément à mon oreille, elles troublent mon âme, elles rendent ma mort affreuse. Au nom de Dieu, ayez pitié de moi.
LE BARBARE.
De la pitié! je n'en puis avoir si tu n'es pas de mon avis en tout.
LE MOURANT.
Hélas! vous sentez qu'à ces derniers moments tous mes sens sont flétris, toutes les portes de mon entendement sont fermées, mes idées s'enfuient, ma pensée s'éteint. Suis-je en état de disputer?
LE BARBARE.
Hé bien, si tu ne peux pas croire ce que je veux, dis que tu le crois, et cela me suffit.
LE MOURANT.
Comment puis-je me parjurer pour vous plaire? Je vais paraître dans un moment devant le Dieu qui punit le parjure.
LE BARBARE.
N'importe; tu auras le plaisir d'être enterré dans un cimetière, et ta femme, tes enfants, auront de quoi vivre. Meurs en hypocrite; l'hypocrisie est une bonne chose: c'est, comme on dit, un hommage que le vice rend à la vertu. Un peu d'hypocrisie, mon ami, qu'est-ce que cela coûte?
LE MOURANT.
Hélas! vous méprisez Dieu, ou vous ne le reconnaissez pas, puisque vous me demandez un mensonge à l'article de la mort, vous qui devez bientôt recevoir votre jugement de lui, et qui répondrez de ce mensonge.
LE BARBARE.
Comment, insolent! je ne reconnais point de Dieu!
LE MOURANT.
Pardon, mon frère, je crains que vous n'en connaissiez pas. Celui que j'adore ranime en ce moment mes forces pour vous dire d'une voix mourante que, si vous croyez en Dieu, vous devez user envers moi de charité. Il m'a donné ma femme et mes enfants, ne les faites pas périr de misère. Pour mon corps, faites-en ce que vous voudrez: je vous l'abandonne; mais croyez en Dieu, je vous en conjure.
LE BARBARE.
Fais, sans raisonner, ce que je t'ai dit; je le veux, je te l'ordonne.
LE MOURANT.
Et quel intérêt avez-vous à me tant tourmenter?
LE BARBARE.
Comment! quel intérêt? Si j'ai ta signature, elle me vaudra un bon canonicat.
LE MOURANT.
Ah! mon frère! voici mon dernier moment; je meurs, je vais prier Dieu qu'il vous touche et qu'il vous convertisse.
LE BARBARE.
Au diable soit l'impertinent, qui n'a point signé! Je vais signer pour lui et contrefaire son écriture (Note 71).
La lettre suivante est une confirmation de la même morale.


CHAPITRE XVII
LETTRE ECRITE AU JESUITE LE TELLIER,
PAR UN BENEFICIER, LE 6 MAI 1714
MON REVEREND PERE,
J'obéis aux ordres que Votre Révérence m'a donnés de lui présenter les moyens les plus propres de délivrer Jésus et sa Compagnie de leurs ennemis. Je crois qu'il ne reste plus que cinq cent mille huguenots dans le royaume, quelques-uns disent un million, d'autres quinze cent mille; mais en quelque nombre qu'ils soient, voici mon avis, que je soumets très humblement au vôtre, comme je le dois.
1° Il est aisé d'attraper en un jour tous les prédicants et de les pendre tous à la fois dans une même place, non seulement pour l'édification publique, mais pour la beauté du spectacle.
2° Je ferais assassiner dans leurs lits tous les pères et mères, parce que si on les tuait dans les rues, cela pourrait causer quelque tumulte; plusieurs même pourraient se sauver, ce qu'il faut éviter sur toute chose. Cette exécution est un corollaire nécessaire de nos principes: car, s'il faut tuer un hérétique, comme tant de grands théologiens le prouvent, il est évident qu'il faut les tuer tous.
3° Je marierais le lendemain toutes les filles à de bons catholiques, attendu qu'il ne faut pas dépeupler trop l'Etat après la dernière guerre; mais à l'égard des garçons de quatorze et quinze ans, déjà imbus de mauvais principes, qu'on ne peut se flatter de détruire, mon opinion est qu'il faut les châtrer tous, afin que cette engeance ne soit jamais reproduite. Pour les autres petits garçons, ils seront élevés dans vos collèges, et on les fouettera jusqu'à ce qu'ils sachent par coeur les ouvrages de Sanchez et de Molina.
4° Je pense, sauf correction, qu'il en faut faire autant à tous les luthériens d'Alsace, attendu que, dans l'année 1704, j'aperçus deux vieilles de ce pays-là qui riaient le jour de la bataille d'Hochstedt.
5° L'article des jansénistes paraîtra peut-être un peu plus embarrassant: je les crois au nombre de six millions au moins; mais un esprit tel que le vôtre ne doit pas s'en effrayer. Je comprends parmi les jansénistes tous les parlements, qui soutiennent si indignement les libertés de l'Eglise gallicane. C'est à Votre Révérence de peser, avec sa prudence ordinaire, les moyens de vous soumettre tous ces esprits revêches. La conspiration des poudres n'eut pas le succès désiré, parce qu'un des conjurés eut l'indiscrétion de vouloir sauver la vie à son ami; mais, comme vous n'avez point d'ami, le même inconvénient n'est point à craindre: il vous sera fort aisé de faire sauter tous les parlements du royaume avec cette invention du moine Schwartz, qu'on appelle pulvis pyrius. Je calcule qu'il faut, l'un portant l'autre, trente-six tonneaux de poudre pour chaque parlement, et ainsi, en multipliant douze parlements par trente-six tonneaux, cela ne compose que quatre cent trente-deux tonneaux, qui, à cent écus pièce, font la somme de cent vingt-neuf mille six cents livres: c'est une bagatelle pour le révérend père général.
Les parlements une fois sautés, vous donnerez leurs charges à vos congréganistes, qui sont parfaitement instruits des lois du royaume.
6° Il sera aisé d'empoisonner M. le cardinal de Noailles, qui est un homme simple, et qui ne se défie de rien.
Votre Révérence emploiera les mêmes moyens de conversion auprès de quelques évêques rénitents; leurs évêchés seront mis entre les mains des jésuites, moyennant un bref du pape: alors tous les évêques étant du parti de la bonne cause, et tous les curés étant habilement choisis par les évêques, voici ce que je conseille, sous le bon plaisir de Votre Révérence.
7° Comme on dit que les jansénistes communient au moins à Pâques, il ne serait pas mal de saupoudrer les hosties de la drogue dont on se servit pour faire justice de l'empereur Henri VII. Quelque critique me dira peut-être qu'on risquerait, dans cette opération, de donner aussi la mort-aux-rats aux molinistes: cette objection est forte; mais il n'y a point de projet qui n'ait des inconvénients, point de système qui ne menace ruine par quelque endroit. Si on était arrête par ces petites difficultés, on ne viendrait jamais à bout de rien; et d'ailleurs, comme il s'agit de procurer le plus grand bien qu'il soit possible, il ne faut pas se scandaliser si ce grand bien entraîne après lui quelques mauvaises suites, qui ne sont de nulle considération.
Nous n'avons rien à nous reprocher: il est démontré que tous les prétendus réformés, tous les jansénistes, sont dévolus à l'enfer; ainsi nous ne faisons que hâter le moment où ils doivent entrer en possession.
Il n'est pas moins clair que le paradis appartient de droit aux molinistes: donc, en les faisant périr par mégarde et sans aucune mauvaise intention, nous accélérons leur joie; nous sommes dans l'un et l'autre cas les ministres de la Providence.
Quant à ceux qui pourraient être un peu effarouchés du nombre, Votre Paternité pourra leur faire remarquer que depuis les jours florissants de l'Eglise jusqu'à 1707, c'est-à-dire depuis environ quatorze cents ans, la théologie a procuré le massacre de plus de cinquante millions d'hommes; et que je ne propose d'en étrangler, ou égorger, ou empoisonner, qu'environ six millions cinq cent mille.

On nous objectera peut-être encore que mon compte n'est pas juste, et que je viole la règle de trois: car, dira-t-on, si en quatorze cents ans il n'a péri que cinquante millions d'hommes pour des distinctions, des dilemmes et des antilemmes théologiques, cela ne fait par année que trente-cinq mille sept cent quatorze personnes avec fraction, et qu'ainsi je tue six millions quatre cent soixante-quatre mille deux cent quatre-vingt-cinq personnes de trop avec fraction pour la présente année.
Mais, en vérité, cette chicane est bien puérile; on peut même dire qu'elle est impie: car ne voit-on pas, par mon procédé, que je sauve la vie à tous les catholiques jusqu'à la fin du monde? On n'aurait jamais fait, si on voulait répondre à toutes les critiques. Je suis avec un profond respect de Votre Paternité,
Le très humble, très dévot et très doux R...,
natif d'Angoulême, préfet de la Congrégation.
Ce projet ne put être exécuté, parce que le P. Le Tellier y trouva quelques difficultés, et que Sa Paternité fut exilée l'année suivante. Mais comme il faut examiner le pour et le contre, il est bon de rechercher dans quels cas on pourrait légitimement suivre en partie les vues du correspondant du P. Le Tellier. Il paraît qu'il serait dur d'exécuter ce projet dans tous ses points; mais il faut voir dans quelles occasions on doit rouer ou pendre, ou mettre aux galères les gens qui ne sont pas de notre avis: c'est l'objet de l'article suivant.


CHAPITRE XVIII
SEULS CAS OU L'INTOLERANCE
EST DE DROIT HUMAIN
Pour qu'un gouvernement ne soit pas en droit de punir les erreurs des hommes, il est nécessaire que ces erreurs ne soient pas des crimes; elles ne sont des crimes que quand elles troublent la société: elles troublent cette société, dès qu'elles inspirent le fanatisme; il faut donc que les hommes commencent par n'être pas fanatiques pour mériter la tolérance.
Si quelques jeunes jésuites, sachant que l'Eglise a les réprouvés en horreur, que les jansénistes sont condamnés par une bulle, qu'ainsi les jansénistes sont réprouvés, s'en vont brûler une maison des Pères de l'Oratoire parce que Quesnel l'oratorien était janséniste, il est clair qu'on sera bien obligé de punir ces jésuites.
De même, s'ils ont débité des maximes coupables, si leur institut est contraire aux lois du royaume, on ne peut s'empêcher de dissoudre leur compagnie, et d'abolir les jésuites pour en faire des citoyens: ce qui au fond est un mal imaginaire, et un bien réel pour eux, car où est le mal de porter un habit court au lieu d'une soutane, et d'être libre au lieu d'être esclave? On réforme à la paix des régiments entiers, qui ne se plaignent pas: pourquoi les jésuites poussent-ils de si hauts cris quand on les réforme pour avoir la paix?
Que les cordeliers, transportés d'un saint zèle pour la vierge Marie, aillent démolir l'église des jacobins, qui pensent que Marie est née dans le péché originel, on sera obligé alors de traiter les cordeliers à peu près comme les jésuites.
On en dira autant des luthériens et des calvinistes. Ils auront beau dire: Nous suivons les mouvements de notre conscience, il vaut mieux obéir à Dieu qu'aux hommes; nous sommes le vrai troupeau, nous devons exterminer les loups; il est évident qu'alors ils sont loups eux-mêmes.
Un des plus étonnants exemples de fanatisme a été une petite secte en Danemark, dont le principe était le meilleur du monde. Ces gens-là voulaient procurer le salut éternel à leurs frères; mais les conséquences de ce principe étaient singulières. Ils savaient que tous les petits enfants qui meurent sans baptême sont damnés, et que ceux qui ont le bonheur de mourir immédiatement après avoir reçu le baptême jouissent de la gloire éternelle: ils allaient égorgeant les garçons et les filles nouvellement baptisés qu'ils pouvaient rencontrer; c'était sans doute leur faire le plus grand bien qu'on pût leur procurer: on les préservait à la fois du péché, des misères de cette vie, et de l'enfer; on les envoyait infailliblement au ciel. Mais ces gens charitables ne considéraient pas qu'il n'est pas permis de faire un petit mal pour un grand bien; qu'ils n'avaient aucun droit sur la vie de ces petits enfants; que la plupart des pères et mères sont assez charnels pour aimer mieux avoir auprès d'eux leurs fils et leurs filles que de les voir égorger pour aller en paradis, et qu'en un mot, le magistrat doit punir l'homicide, quoiqu'il soit fait à bonne intention.
Les Juifs sembleraient avoir plus de droit que personne de nous voler et de nous tuer: car bien qu'il y ait cent exemples de tolérance dans l'Ancien Testament, cependant il y a aussi quelques exemples et quelques lois de rigueur. Dieu leur a ordonné quelquefois de tuer les idolâtres, et de ne réserver que les filles nubiles: ils nous regardent comme idolâtres, et, quoique nous les tolérions aujourd'hui, ils pourraient bien, s'ils étaient les maîtres, ne laisser au monde que nos filles.
Ils seraient surtout dans l'obligation indispensable d'assassiner tous les Turcs, cela va sans difficulté: car les Turcs possèdent le pays des Ethéens, des Jébuséens, des Amorrhéens, Jersénéens, Hévéens, Aracéens, Cinéens, Hamatéens, Samaréens: tous ces peuples furent dévoués à l'anathème; leur pays, qui était de plus de vingt-cinq lieues de long, fut donné aux Juifs par plusieurs pactes consécutifs; ils doivent rentrer dans leur bien; les mahométans en sont les usurpateurs depuis plus de mille ans.
Si les Juifs raisonnaient ainsi aujourd'hui, il est clair qu'il n'y aurait d'autre réponse à leur faire que de les mettre aux galères.
Ce sont à peu près les seuls cas où l'intolérance paraît raisonnable.


CHAPITRE XIX
RELATION D'UNE DISPUTE DE CONTROVERSE A LA CHINE
Dans les premières années du règne du grand empereur Kang-hi, un mandarin de la ville de Kanton entendit de sa maison un grand bruit qu'on faisait dans la maison voisine: il s'informa si l'on ne tuait personne; on lui dit que c'était l'aumônier de la compagnie danoise, un chapelain de Batavia, et un jésuite qui disputaient; il les fit venir, leur fit servir du thé et des confitures, et leur demanda pourquoi ils se querellaient.
Le jésuite lui répondit qu'il était bien douloureux pour lui, qui avait toujours raison, d'avoir affaire à des gens qui avaient toujours tort; que d'abord il avait argumenté avec la plus grande retenue, mais qu'enfin la patience lui avait échappé.
Le mandarin leur fit sentir, avec toute la discrétion possible, combien la politesse est nécessaire dans la dispute, leur dit qu'on ne se fâchait jamais à la Chine, et leur demanda de quoi il s'agissait.
Le jésuite lui répondit: "Monseigneur, je vous en fais juge; ces deux messieurs refusent de se soumettre aux décisions du concile de Trente."
- "Cela m'étonne, dit le mandarin." Puis se tournant vers les deux réfractaires: "Il me paraît, leur dit-il, messieurs, que vous devriez respecter les avis d'une grande assemblée: je ne sais pas ce que c'est que le concile de Trente; mais plusieurs personnes sont toujours plus instruites qu'une seule. Nul ne doit croire qu'il en sait plus que les autres, et que la raison n'habite que dans sa tête; c'est ainsi que l'enseigne notre grand Confucius; et si vous m'en croyez, vous ferez très bien de vous en rapporter au concile de Trente."
Le Danois prit alors la parole, et dit: "Monseigneur parle avec la plus grande sagesse; nous respectons les grandes assemblées comme nous le devons; aussi sommes-nous entièrement de l'avis de plusieurs assemblées qui se sont tenues avant celle de Trente.
- Oh! si cela est ainsi, dit le mandarin, je vous demande pardon, vous pourriez bien avoir raison. Ca, vous êtes donc du même avis, ce Hollandais et vous, contre ce pauvre jésuite?
- Point du tout, dit le Hollandais; cet homme-ci a des opinions presque aussi extravagantes que celles de ce jésuite, qui fait ici le doucereux avec vous; il n'y a pas moyen d'y tenir.
- Je ne vous conçois pas, dit le mandarin; n'êtes-vous pas tous trois chrétiens? Ne venez-vous pas tous trois enseigner le christianisme dans notre empire? Et ne devez-vous pas par conséquent avoir les mêmes dogmes?
- Vous voyez, monseigneur, dit le jésuite; ces deux gens-ci sont ennemis mortels, et disputent tous deux contre moi: il est donc évident qu'ils ont tous les deux tort, et que la raison n'est que de mon côté.
- Cela n'est pas si évident, dit le mandarin; il se pourrait faire à toute force que vous eussiez tort tous trois; je serais curieux de vous entendre l'un après l'autre."
Le jésuite fit alors un assez long discours, pendant lequel le Danois et le Hollandais levaient les épaules; le mandarin n'y comprit rien. Le Danois parla à son tour; ses deux adversaires le regardèrent en pitié, et le mandarin n'y comprit pas davantage. Le Hollandais eut le même sort. Enfin ils parlèrent tous trois ensemble, ils se dirent de grosses injures. L'honnête mandarin eut bien de la peine à mettre le holà, et leur dit: "Si vous voulez qu'on tolère ici votre doctrine, commencez par n'être ni intolérants ni intolérables."
Au sortir de l'audience, le jésuite rencontra un missionnaire jacobin; il lui apprit qu'il avait gagné sa cause, l'assurant que la vérité triomphait toujours. Le jacobin lui dit: "Si j'avais été là, vous ne l'auriez pas gagnée; je vous aurais convaincu de mensonge et d'idolâtrie." La querelle s'échauffa; le jacobin et le jésuite se prirent aux cheveux. Le mandarin, informé du scandale, les envoya tous deux en prison. Un sous-mandarin dit au juge: "Combien de temps Votre Excellence veut-elle qu'ils soient aux arrêts? - Jusqu'à ce qu'ils soient d'accord, dit le juge. - Ah! dit le sous-mandarin, ils seront donc en prison toute leur vie. - Hé bien! dit le juge, jusqu'à ce qu'ils se pardonnent. - Ils ne se pardonneront jamais, dit l'autre; je les connais. - Hé bien donc! dit le mandarin, jusqu'à ce qu'ils fassent semblant de se pardonner."


CHAPITRE XX
S'IL EST UTILE D'ENTRETENIR LE PEUPLE
DANS LA SUPERSTITION
Telle est la faiblesse du genre humain, et telle est sa perversité, qu'il vaut mieux sans doute pour lui d'être subjugué par toutes les superstitions possibles, pourvu qu'elles ne soient point meurtrières, que de vivre sans religion. L'homme a toujours eu besoin d'un frein, et quoiqu'il fût ridicule de sacrifier aux faunes, aux sylvains, aux naïades, il était bien plus raisonnable et plus utile d'adorer ces images fantastiques de la Divinité que de se livrer à l'athéisme. Un athée qui serait raisonneur, violent et puissant, serait un fléau aussi funeste qu'un superstitieux sanguinaire.
Quand les hommes n'ont pas de notions saines de la Divinité, les idées fausses y suppléent, comme dans les temps malheureux on trafique avec de la mauvaise monnaie, quand on n'en a pas de bonne. Le païen craignait de commettre un crime, de peur d'être puni par les faux dieux; le Malabare craint d'être puni par sa pagode. Partout où il y a une société établie, une religion est nécessaire; les lois veillent sur les crimes connus, et la religion sur les crimes secrets.
Mais lorsqu'une fois les hommes sont parvenus à embrasser une religion pure et sainte, la superstition devient non seulement inutile, mais très dangereuse. On ne doit pas chercher à nourrir de gland ceux que Dieu daigne nourrir de pain.
La superstition est à la religion ce que l'astrologie est à l'astronomie, la fille très folle d'une mère très sage. Ces deux filles ont longtemps subjugué toute la terre.
Lorsque, dans nos siècles de barbarie, il y avait à peine deux seigneurs féodaux qui eussent chez eux un Nouveau Testament, il pouvait être pardonnable de présenter des fables au vulgaire, c'est-à-dire à ces seigneurs féodaux, à leurs femmes imbéciles, et aux brutes leurs vassaux; on leur faisait croire que saint Christophe avait porté l'enfant Jésus du bord d'une rivière à l'autre; on les repaissait d'histoires de sorciers et de possédés; ils imaginaient aisément que saint Genou guérissait de la goutte, et que sainte Claire guérissait les yeux malades. Les enfants croyaient au loup-garou, et les pères au cordon de saint François. Le nombre des reliques était innombrable.
La rouille de tant de superstitions a subsisté encore quelque temps chez les peuples, lors même qu'enfin la religion fut épurée. On sait que quand M. de Noailles, évêque de Châlons, fit enlever et jeter au feu la prétendue relique du saint nombril de Jésus-Christ, toute la ville de Châlons lui fit un procès; mais il eut autant de courage que de piété, et il parvint bientôt à faire croire aux Champenois qu'on pouvait adorer Jésus-Christ en esprit et en vérité, sans avoir son nombril dans une église.
Ceux qu'on appelait jansénistes ne contribuèrent pas peu à déraciner insensiblement dans l'esprit de la nation la plupart des fausses idées qui déshonoraient la religion chrétienne. On cessa de croire qu'il suffisait de réciter l'oraison des trente jours à la vierge Marie pour obtenir tout ce qu'on voulait et pour pécher impunément.
Enfin la bourgeoisie a commencé à soupçonner que ce n'était pas sainte Geneviève qui donnait ou arrêtait la pluie, mais que c'était Dieu lui-même qui disposait des éléments. Les moines ont été étonnés que leurs saints ne fissent plus de miracles; et si les écrivains de la Vie de saint François Xavier revenaient au monde, ils n'oseraient pas écrire que ce saint ressuscita neuf morts, qu'il se trouva en même temps sur mer et sur terre, et que son crucifix étant tombé dans la mer, un cancre vint le lui rapporter.
Il en a été de même des excommunications. Nos historiens nous disent que lorsque le roi Robert eut été excommunié par le pape Grégoire V, pour avoir épousé la princesse Berthe sa commère, ses domestiques jetaient par les fenêtres les viandes qu'on avait servies au roi, et que la reine Berthe accoucha d'une oie en punition de ce mariage incestueux. On doute aujourd'hui que les maîtres d'hôtel d'un roi de France excommunié jetassent son dîner par la fenêtre, et que la reine mît au monde un oison en pareil cas.
S'il y a quelques convulsionnaires dans un coin d'un faubourg, c'est une maladie pédiculaire dont il n'y a que la plus vile populace qui soit attaquée. Chaque jour la raison pénètre en France, dans les boutiques des marchands comme dans les hôtels des seigneurs. Il faut donc cultiver les fruits de cette raison, d'autant plus qu'il est impossible de les empêcher d'éclore. On ne peut gouverner la France, après qu'elle a été éclairée par les Pascal, les Nicole, les Arnauld, les Bossuet, les Descartes, les Gassendi, les Bayle, les Fontenelle, etc., comme on la gouvernait du temps des Garasse et des Menot.
Si les maîtres d'erreurs, je dis les grands maîtres, si longtemps payés et honorés pour abrutir l'espèce humaine, ordonnaient aujourd'hui de croire que le grain doit pourrir pour germer; que la terre est immobile sur ses fondements, qu'elle ne tourne point autour du soleil; que les marées ne sont pas un effet naturel de la gravitation, que l'arc-en-ciel n'est pas formé par la réfraction et la réflexion des rayons de la lumière, etc., et s'ils se fondaient sur des passages mal entendus de la sainte Ecriture pour appuyer leurs ordonnances, comment seraient-ils regardés par tous les hommes instruits? Le terme de bêtes serait-il trop fort? Et si ces sages maîtres se servaient de la force et de la persécution pour faire régner leur ignorance insolente, le terme de bêtes farouches serait-il déplacé?
Plus les superstitions des moines sont méprisées, plus les évêques sont respectés, et les curés considérés; ils ne font que du bien, et les superstitions monacales ultramontaines feraient beaucoup de mal. Mais de toutes les superstitions, la plus dangereuse, n'est-ce pas celle de haïr son prochain pour ses opinions? Et n'est-il pas évident qu'il serait encore plus raisonnable d'adorer le saint nombril, le saint prépuce, le lait et la robe de la vierge Marie, que de détester et de persécuter son frère?


CHAPITRE XXI
VERTU VAUT MIEUX QUE SCIENCE
Moins de dogmes, moins de disputes; et moins de disputes, moins de malheurs: si cela n'est pas vrai, j'ai tort.
La religion est instituée pour nous rendre heureux dans cette vie et dans l'autre. Que faut-il pour être heureux dans la vie à venir? être juste.
Pour être heureux dans celle-ci, autant que le permet la misère de notre nature, que faut-il? être indulgent.
Ce serait le comble de la folie de prétendre amener tous les hommes à penser d'une manière uniforme sur la métaphysique. On pourrait beaucoup plus aisément subjuguer l'univers entier par les armes que subjuguer tous les esprits d'une seule ville.
Euclide est venu aisément à bout de persuader à tous les hommes les vérités de la géométrie: pourquoi? parce qu'il n'y en a pas une qui ne soit un corollaire évident de ce petit axiome: deux et deux font quatre. Il n'en est pas tout à fait de même dans le mélange de la métaphysique et de la théologie.
Lorsque l'évêque Alexandre et le prêtre Arios ou Arius commencèrent à disputer sur la manière dont le Logos était une émanation du Père, l'empereur Constantin leur écrivit d'abord ces paroles rapportées par Eusèbe et par Socrate: "Vous êtes de grands fous de disputer sur des choses que vous ne pouvez entendre."
Si les deux partis avaient été assez sages pour convenir que l'empereur avait raison, le monde chrétien n'aurait pas été ensanglanté pendant trois cents années.
Qu'y a-t-il en effet de plus fou et de plus horrible que de dire aux hommes: "Mes amis, ce n'est pas assez d'être des sujets fidèles, des enfants soumis, des pères tendres, des voisins équitables, de pratiquer toutes les vertus, de cultiver l'amitié, de fuir l'ingratitude, d'adorer Jésus-Christ en paix: il faut encore que vous sachiez comment on est engendré de toute éternité; et si vous ne savez pas distinguer l'omousion dans l'hypostase, nous vous dénonçons que vous serez brûlés à jamais; et, en attendant, nous allons commencer par vous égorger"?
Si on avait présenté une telle décision à un Archimède, à un Posidonius, à un Varron, à un Caton, à un Cicéron, qu'auraient-ils répondu?
Constantin ne persévéra point dans sa résolution d'imposer silence aux deux partis: il pouvait faire venir les chefs de l'ergotisme dans son palais; il pouvait leur demander par quelle autorité ils troublaient le monde: "Avez-vous les titres de la famille divine? Que vous importe que le Logos soit fait ou engendré, pourvu qu'on lui soit fidèle, pourvu qu'on prêche une bonne morale, et qu'on la pratique si on peut? J'ai commis bien des fautes dans ma vie, et vous aussi; vous êtes ambitieux, et moi aussi; l'empire m'a coûté des fourberies et des cruautés; j'ai assassiné presque tous mes proches; je m'en repens: je veux expier mes crimes en rendant l'empire romain tranquille, ne m'empêchez pas de faire le seul bien qui puisse faire oublier mes anciennes barbaries; aidez-moi à finir mes jours en paix." Peut-être n'aurait-il rien gagné sur les disputeurs; peut-être fut-il flatté de présider à un concile en long habit rouge, la tête chargée de pierreries.
Voilà pourtant ce qui ouvrit la porte à tous ces fléaux qui vinrent de l'Asie inonder l'Occident. Il sortit de chaque verset contesté une furie armée d'un sophisme et d'un poignard, qui rendit tous les hommes insensés et cruels. Les Huns, les Hérules, les Goths et les Vandales, qui survinrent, firent infiniment moins de mal, et le plus grand qu'ils firent fut de se prêter enfin eux-mêmes à ces disputes fatales.


CHAPITRE XXII
DE LA TOLERANCE UNIVERSELLE
Il ne faut pas un grand art, une éloquence bien recherchée, pour prouver que des chrétiens doivent se tolérer les uns les autres. Je vais plus loin: je vous dis qu'il faut regarder tous les hommes comme nos frères. Quoi! mon frère le Turc? mon frère le Chinois? le Juif? le Siamois? Oui, sans doute; ne sommes-nous pas tous enfants du même père, et créatures du même Dieu?
Mais ces peuples nous méprisent; mais ils nous traitent d'idolâtres! Hé bien! je leur dirai qu'ils ont grand tort. Il me semble que je pourrais étonner au moins l'orgueilleuse opiniâtreté d'un iman ou d'un talapoin, si je leur parlais à peu près ainsi:
"Ce petit globe, qui n'est qu'un point, roule dans l'espace, ainsi que tant d'autres globes; nous sommes perdus dans cette immensité. L'homme, haut d'environ cinq pieds, est assurément peu de chose dans la création. Un de ces êtres imperceptibles dit à quelques-uns de ses voisins, dans l'Arabie ou dans la Cafrerie: "Ecoutez-moi, car le Dieu de tous ces mondes m'a éclairé: il y a neuf cents millions de petites fourmis comme nous sur la terre, mais il n'y a que ma fourmilière qui soit chère à Dieu; toutes les autres lui sont en horreur de toute éternité; elle sera seule heureuse, et toutes les autres seront éternellement infortunées."
Ils m'arrêteraient alors, et me demanderaient quel est le fou qui a dit cette sottise. Je serais obligé de leur répondre: "C'est vous-mêmes." Je tâcherais ensuite de les adoucir; mais cela serait bien difficile.
Je parlerais maintenant aux chrétiens, et j'oserais dire, par exemple, à un dominicain inquisiteur pour la foi: "Mon frère, vous savez que chaque province d'Italie a son jargon, et qu'on ne parle point à Venise et à Bergame comme à Florence. L'Académie de la Crusca a fixé la langue; son dictionnaire est une règle dont on ne doit pas s'écarter, et la Grammaire de Buonmattei est un guide infaillible qu'il faut suivre; mais croyez-vous que le consul de l'Académie, et en son absence Buonmattei, auraient pu en conscience faire couper la langue à tous les Vénitiens et à tous les Bergamasques qui auraient persisté dans leur patois?"
L'inquisiteur me répond: "Il y a bien de la différence; il s'agit ici du salut de votre âme: c'est pour votre bien que le directoire de l'Inquisition ordonne qu'on vous saisisse sur la déposition d'une seule personne, fût-elle infâme et reprise de justice; que vous n'ayez point d'avocat pour vous défendre; que le nom de votre accusateur ne vous soit pas seulement connu; que l'inquisiteur vous promette grâce, et ensuite vous condamne; qu'il vous applique à cinq tortures différentes, et qu'ensuite vous soyez ou fouetté, ou mis aux galères, ou brûlé en cérémonie (Note 72) (이 문장에서 soyez 다음의 ou는 오기로 들어간 듯하다. - 역자 주). Le P. Ivonet, le docteur Cuchalon, Zanchinus, Campegius, Roias, Felynus, Gomarus, Diabarus, Gemelinus, y sont formels et cette pieuse pratique ne peut souffrir de contradiction."
Je prendrais la liberté de lui répondre: "Mon frère, peut-être avez-vous raison; je suis convaincu du bien que vous voulez me faire; mais ne pourrais-je pas être sauvé sans tout cela?"
Il est vrai que ces horreurs absurdes ne souillent pas tous les jours la face de la terre; mais elles ont été fréquentes, et on en composerait aisément un volume beaucoup plus gros que les évangiles qui les réprouvent. Non seulement il est bien cruel de persécuter dans cette courte vie ceux qui ne pensent pas comme nous, mais je ne sais s'il n'est pas bien hardi de prononcer leur damnation éternelle. Il me semble qu'il n'appartient guère à des atomes d'un moment, tels que nous sommes, de prévenir ainsi les arrêts du Créateur. Je suis bien loin de combattre cette sentence: "Hors de l'Eglise point de salut"; je la respecte, ainsi que tout ce qu'elle enseigne, mais, en vérité, connaissons-nous toutes les voies de Dieu et toute l'étendue de ses miséricordes? N'est-il pas permis d'espérer en lui autant que de le craindre? N'est-ce pas assez d'être fidèles à l'Eglise? Faudra-t-il que chaque particulier usurpe les droits de la Divinité, et décide avant elle du sort éternel de tous les hommes?
Quand nous portons le deuil d'un roi de Suède, ou de Danemark, ou d'Angleterre, ou de Prusse, disons-nous que nous portons le deuil d'un réprouvé qui brûle éternellement en enfer? Il y a dans l'Europe quarante millions d'habitants qui ne sont pas de l'Eglise de Rome, dirons-nous à chacun d'eux: "Monsieur, attendu que vous êtes infailliblement damné, je ne veux ni manger, ni contracter, ni converser avec vous?"
Quel est l'ambassadeur de France qui, étant présenté à l'audience du Grand Seigneur, se dira dans le fond de son coeur: Sa Hautesse sera infailliblement brûlée pendant toute l'éternité, parce qu'elle est soumise à la circoncision? S'il croyait réellement que le Grand Seigneur est l'ennemi mortel de Dieu, et l'objet de sa vengeance, pourrait-il lui parler? devrait-il être envoyé vers lui? Avec quel homme pourrait-on commercer, quel devoir de la vie civile pourrait-on jamais remplir, si en effet on était convaincu de cette idée que l'on converse avec des réprouvés?
O sectateurs d'un Dieu clément! si vous aviez un coeur cruel; si, en adorant celui dont toute la loi consistait en ces paroles: "Aimez Dieu et votre prochain", vous aviez surchargé cette loi pure et sainte de sophismes et de disputes incompréhensibles; si vous aviez allumé la discorde, tantôt pour un mot nouveau, tantôt pour une seule lettre de l'alphabet; si vous aviez attaché des peines éternelles à l'omission de quelques paroles, de quelques cérémonies que d'autres peuples ne pouvaient connaître, je vous dirais, en répandant des larmes sur le genre humain: "Transportez-vous avec moi au jour où tous les hommes seront jugés, et où Dieu rendra à chacun selon ses oeuvres."
"Je vois tous les morts des siècles passés et du nôtre comparaître en sa présence. Etes-vous bien sûrs que notre Créateur et notre Père dira au sage et vertueux Confucius, au législateur Solon, à Pythagore, à Zaleucus, à Socrate, à Platon, aux divins Antonins, au bon Trajan, à Titus, les délices du genre humain, à Epicitète, à tant d'autres hommes, les modèles des hommes: Allez, monstres, allez subir des châtiments infinis en intensité et en durée; que votre supplice soit éternel comme moi! Et vous, mes bien-aimés, Jean Châtel, Ravaillac, Damiens, Cartouche, etc., qui êtes morts avec les formules prescrites, partagez à jamais à ma droite mon empire et ma félicité."
Vous reculez d'horreur à ces paroles; et, après qu'elles me sont échappées, je n'ai plus rien à vous dire.


CHAPITRE XXIII
PRIERE A DIEU
Ce n'est donc plus aux hommes que je m'adresse; c'est à toi, Dieu de tous les êtres, de tous les mondes et de tous les temps: s'il est permis à de faibles créatures perdues dans l'immensité, et imperceptibles au reste de l'univers, d'oser te demander quelque chose, à toi qui as tout donné, à toi dont les décrets sont immuables comme éternels, daigne regarder en pitié les erreurs attachées à notre nature; que ces erreurs ne fassent point nos calamités. Tu ne nous as point donné un coeur pour nous haïr, et des mains pour nous égorger; fais que nous nous aidions mutuellement à supporter le fardeau d'une vie pénible et passagère; que les petites différences entre les vêtements qui couvrent nos débiles corps, entre tous nos langages insuffisants, entre tous nos usages ridicules, entre toutes nos lois imparfaites, entre toutes nos opinions insensées, entre toutes nos conditions si disproportionnées à nos yeux, et si égales devant toi; que toutes ces petites nuances qui distinguent les atomes appelés hommes ne soient pas des signaux de haine et de persécution; que ceux qui allument des cierges en plein midi pour te célébrer supportent ceux qui se contentent de la lumière de ton soleil; que ceux qui couvrent leur robe d'une toile blanche pour dire qu'il faut t'aimer ne détestent pas ceux qui disent la même chose sous un manteau de laine noire; qu'il soit égal de t'adorer dans un jargon formé d'une ancienne langue, ou dans un jargon plus nouveau; que ceux dont l'habit est teint en rouge ou en violet, qui dominent sur une petite parcelle d'un petit tas de la boue de ce monde, et qui possèdent quelques fragments arrondis d'un certain métal, jouissent sans orgueil de ce qu'ils appellent grandeur et richesse, et que les autres les voient sans envie: car tu sais qu'il n'y a dans ces vanités ni de quoi envier, ni de quoi s'enorgueillir.
Puissent tous les hommes se souvenir qu'ils sont frères! Qu'ils aient en horreur la tyrannie exercée sur les âmes, comme ils ont en exécration le brigandage qui ravit par la force le fruit du travail et de l'industrie paisible. Si les fléaux de la guerre sont inévitables, ne nous haïssons pas, ne nous déchirons pas les uns les autres dans le sein de la paix, et employons l'instant de notre existence à bénir également en mille langages divers, depuis Siam jusqu'à la Californie, ta bonté qui nous a donné cet instant.


CHAPITRE XXIV
POST-SCRIPTUM
Tandis qu'on travaillait à cet ouvrage, dans l'unique dessein de rendre les hommes plus compatissants et plus doux, un autre homme écrivait dans un dessein tout contraire: car chacun a son opinion. Cet homme faisait imprimer un petit code de persécution, intitulé l'Accord de la religion et de l'humanité (c'est une faute de l'imprimeur: lisez de l'inhumanité).
L'auteur de ce saint libelle s'appuie sur saint Augustin, qui, après avoir prêché la douceur, prêcha enfin la persécution, attendu qu'il était alors le plus fort, et qu'il changeait souvent d'avis. Il cite aussi l'évêque de Meaux, Bossuet, qui persécuta le célèbre Fénelon, archevêque de Cambrai, coupable d'avoir imprimé que Dieu vaut bien la peine qu'on l'aime pour lui-même.
Bossuet était éloquent, je l'avoue; l'évêque d'Hippone, quelquefois inconséquent, était plus disert que ne sont les autres Africains, je l'avoue encore; mais je prendrai la liberté de dire à l'auteur de ce saint libelle, avec Armande, dans Les Femmes savantes:
Quand sur une personne on prétend se régler,
C'est par les beaux côtés qu'il lui faut ressembler.
(Acte I, scène 1)
Je dirai à l'évêque d'Hippone: Monseigneur, vous avez changé d'avis, permettez-moi de m'en tenir à votre première opinion; en vérité, je la crois meilleure.
Je dirai à l'évêque de Meaux: Monseigneur, vous êtes un grand homme: je vous trouve aussi savant, pour le moins, que saint Augustin, et beaucoup plus éloquent; mais pourquoi tant tourmenter votre confrère, qui était aussi éloquent que vous dans un autre genre, et qui était plus aimable?
L'auteur du saint libelle sur l'inhumanité n'est ni un Bossuet ni un Augustin; il me parait tout propre à faire un excellent inquisiteur: je voudrais qu'il fût à Goa à la tête de ce beau tribunal. Il est, de plus, homme d'Etat, et il étale de grands principes de politique. "S'il y a chez vous, dit-il, beaucoup d'hétérodoxes, ménagez-les, persuadez-les; s'il n'y en a qu'un petit nombre, mettez en usage la potence et les galères, et vous vous en trouverez fort bien"; c'est ce qu'il conseille, à la page 89 et 90.
Dieu merci, je suis bon catholique, je n'ai point à craindre ce que les huguenots appellent le martyre; mais si cet homme est jamais premier ministre, comme il paraît s'en flatter dans son libelle, je l'avertis que je pars pour l'Angleterre le jour qu'il aura ses lettres patentes.
En attendant, je ne puis que remercier la Providence de ce qu'elle permet que les gens de son espèce soient toujours de mauvais raisonneurs. Il va jusqu'à citer Bayle parmi les partisans de l'intolérance: cela est sensé et adroit; et de ce que Bayle accorde qu'il faut punir les factieux et les fripons, notre homme en conclut qu'il faut persécuter à feu et à sang les gens de bonne foi qui sont paisibles.
Presque tout son livre est une imitation de l'Apologie de la Saint-Barthélémy. C'est cet apologiste ou son écho. Dans l'un ou dans l'autre cas, il faut espérer que ni le maître ni le disciple ne gouverneront l'Etat.
Mais s'il arrive qu'ils en soient les maîtres, je leur présente de loin cette requête, au sujet de deux lignes de la page 93 du saint libelle:
"Faut-il sacrifier au bonheur du vingtième de la nation le bonheur de la nation entière?"
Supposé qu'en effet il y ait vingt catholiques romains en France contre un huguenot, je ne prétends point que le huguenot mange les vingt catholiques; mais aussi pourquoi ces vingt catholiques mangeraient-ils ce huguenot, et pourquoi empêcher ce huguenot de se marier? N'y a-t-il pas des évêques, des abbés, des moines, qui ont des terres en Dauphiné, dans le Gévaudan, devers Agde, devers Carcassonne? Ces évêques, ces abbés, ces moines, n'ont-ils pas des fermiers qui ont le malheur de ne pas croire à la transsubstantiation? N'est-il pas de l'intérêt des évêques, des abbés, des moines et du public, que ces fermiers aient de nombreuses familles? N'y aura-t-il que ceux qui communieront sous une seule espèce à qui il sera permis de faire des enfants? En vérité cela n'est ni juste ni honnête.
"La révocation de l'édit de Nantes n'a point autant produit d'inconvénients qu'on lui en attribue", dit l'auteur.
Si en effet on lui en attribue plus qu'elle n'en a produit, on exagère, et le tort de presque tous les historiens est d'exagérer; mais c'est aussi le tort de tous les controversistes de réduire à rien le mal qu'on leur reproche. N'en croyons ni les docteurs de Paris ni les prédicateurs d'Amsterdam.
Prenons pour juge M. le comte d'Avaux, ambassadeur en Hollande depuis 1685 jusqu'en 1688. Il dit, page, 181, tome V, qu'un seul homme avait offert de découvrir plus de vingt millions que les persécutés faisaient sortir de France. Louis XIV répond à M. d'Avaux: "Les avis que je reçois tous les jours d'un nombre infini de conversions ne me laissent plus douter que les plus opiniâtres ne suivent l'exemple des autres."
On voit, par cette lettre de Louis XIV, qu'il était de très bonne foi sur l'étendue de son pouvoir. On lui disait tous les matins: Sire, vous êtes le plus grand roi de l'univers; tout l'univers fera gloire de penser comme vous dès que vous aurez parlé. Pellisson, qui s'était enrichi dans la place de premier commis des finances; Pellisson, qui avait été trois ans à la Bastille comme complice de Fouquet; Pellisson, qui de calviniste était devenu diacre et bénéficier, qui faisait imprimer des prières pour la messe et des bouquets à Iris, qui avait obtenu la place des économats et de convertisseur; Pellisson, dis-je, apportait tous les trois mois une grande liste d'abjurations à sept ou huit écus la pièce, et faisait accroire à son roi que, quand il voudrait, il convertirait tous les Turcs au même prix. On se relayait pour le tromper; pouvait-il résister à la séduction?
Cependant le même M. d'Avaux mande au roi qu'un nommé Vincent maintient plus de cinq cents ouvriers auprès d'Angoulême, et que sa sortie causera du préjudice: tome V, page..
Le même M. d'Avaux parle de deux régiments que le prince d'Orange fait déjà lever par les officiers français réfugiés; il parle de matelots qui désertèrent de trois vaisseaux pour servir sur ceux du prince d'Orange. Outre ces deux régiments, le prince d'Orange forme encore une compagnie de cadets réfugiés, commandés par deux capitaines, page 240. Cet ambassadeur écrit encore, le 9 mai 1686, à M. de Seignelai, "qu'il ne peut lui dissimuler la peine qu'il a de voir les manufactures de France s'établir en Hollande, d'où elles ne sortiront jamais".
Joignez à tous ces témoignages ceux de tous les intendants du royaume en 1699, et jugez si la révocation de l'édit de Nantes n'a pas produit plus de mal que de bien, malgré l'opinion du respectable auteur de l'Accord de la religion et de l'inhumanité.
Un maréchal de France connu par son esprit supérieur disait, il y a quelques années: "Je ne sais pas si la dragonnade a été nécessaire; mais il est nécessaire de n'en plus faire."
J'avoue que j'ai cru aller un peu trop loin, quand j'ai rendu publique la lettre du correspondant du P. Le Tellier, dans laquelle ce congréganiste propose des tonneaux de poudre. Je me disais à moi-même: On ne m'en croira pas, on regardera cette lettre comme une pièce supposée. Mes scrupules heureusement ont été levés quand j'ai lu dans l'Accord de la religion et de l'inhumanité, page 149, ces douces paroles:
"L'extinction totale des protestants en France n'affaiblirait pas plus la France qu'une saignée n'affaiblit un malade bien constitué."
Ce chrétien compatissant, qui a dit tout à l'heure que les protestants composent le vingtième de la nation, veut donc qu'on répande le sang de cette vingtième partie, et ne regarde cette opération que comme une saignée d'une palette! Dieu nous préserve avec lui des trois vingtièmes!
Si donc cet honnête homme propose de tuer le vingtième de la nation, pourquoi l'ami du P. Le Tellier n'aurait-il pas proposé de faire sauter en l'air, d'égorger et d'empoisonner le tiers? Il est donc très vraisemblable que la lettre au P. Le Tellier a été réellement écrite.
Le saint auteur finit enfin par conclure que l'intolérance est une chose excellente, "parce qu'elle n'a pas été, dit-il, condamnée expressément par Jésus-Christ". Mais Jésus-Christ n'a pas condamné non plus ceux qui mettraient le feu aux quatre coins de Paris; est-ce une raison pour canoniser les incendiaires?
Ainsi donc, quand la nature fait entendre d'un côté sa voix douce et bienfaisante, le fanatisme, cet ennemi de la nature, pousse des hurlements; et lorsque la paix se présente aux hommes, l'intolérance forge ses armes. O vous, arbitre des nations, qui avez donné la paix à l'Europe, décidez entre l'esprit pacifique et l'esprit meurtrier!


CHAPITRE XXV
SUITE ET CONCLUSION
Nous apprenons que le 7 mars 1763, tout le conseil d'Etat assemblé à Versailles, les ministres d'Etat y assistant, le chancelier y présidant, M. de Crosne, maître des requêtes, rapporta l'affaire des Calas avec l'impartialité d'un juge, l'exactitude d'un homme parfaitement instruit, l'éloquence simple et vraie d'un orateur homme d'Etat, la seule qui convienne dans une telle assemblée. Une foule prodigieuse de personnes de tout rang attendait dans la galerie du château la décision du conseil. On annonça bientôt au roi que toutes les voix, sans en excepter une, avaient ordonné que le parlement de Toulouse enverrait au conseil les pièces du procès, et les motifs de son arrêt qui avait fait expirer Jean Calas sur la roue. Sa Majesté approuva le jugement du conseil.
Il y a donc de l'humanité et de la justice chez les hommes, et principalement dans le conseil d'un roi aimé et digne de l'être. L'affaire d'une malheureuse famille de citoyens obscurs a occupé Sa Majesté, ses ministres, le chancelier et tout le conseil, et a été discutée avec un examen aussi réfléchi que les plus grands objets de la guerre et de la paix peuvent l'être. L'amour de l'équité, l'intérêt du genre humain, ont conduit tous les juges. Grâces en soient rendues à ce Dieu de clémence, qui seul inspire l'équité et toutes les vertus!
Nous attestons que nous n'avons jamais connu ni cet infortuné Calas que les huit juges de Toulouse firent périr sur les indices les plus faibles, contre les ordonnances de nos rois, et contre les lois de toutes les nations; ni son fils Marc-Antoine, dont la mort étrange a jeté ces huit juges dans l'erreur; ni la mère, aussi respectable que malheureuse; ni ses innocentes filles, qui sont venues avec elle de deux cents lieues mettre leur désastre et leur vertu au pied du trône.
Ce Dieu sait que nous n'avons été animés que d'un esprit de justice, de vérité, et de paix, quand nous avons écrit ce que nous pensons de la tolérance, à l'occasion de Jean Calas, que l'esprit d'intolérance a fait mourir.
Nous n'avons pas cru offenser les huit juges de Toulouse en disant qu'ils se sont trompés, ainsi que tout le conseil l'a présumé: au contraire, nous leur avons ouvert une voie de se justifier devant l'Europe entière. Cette voie est d'avouer que des indices équivoques et les cris d'une multitude insensée ont surpris leur justice; de demander pardon à la veuve, et de réparer, autant qu'il est en eux, la ruine entière d'une famille innocente, en se joignant à ceux qui la secourent dans son affliction. Ils ont fait mourir le père injustement: c'est à eux de tenir lieu de père aux enfants, supposé que ces orphelins veuillent bien recevoir d'eux une faible marque d'un très juste repentir. Il sera beau aux juges de l'offrir, et à la famille de la refuser.
C'est surtout au sieur David, capitoul de Toulouse, s'il a été le premier persécuteur de l'innocence, à donner l'exemple des remords. Il insulta un père de famille mourant sur l'échafaud. Cette cruauté est bien inouïe; mais puisque Dieu pardonne, les hommes doivent aussi pardonner à qui répare ses injustices.
On m'a écrit du Languedoc cette lettre du 20 février 1763.
"Votre ouvrage sur la tolérance me paraît plein d'humanité et de vérité; mais je crains qu'il ne fasse plus de mal que de bien à la famille des Calas. Il peut ulcérer les huit juges qui ont opiné à la roue; ils demanderont au parlement qu'on brûle votre livre, et les fanatiques (car il y en a toujours) répondront par des cris de fureur à la voix de la raison, etc."
...............................................................................................................
Voici ma réponse:
"Les huit juges de Toulouse peuvent faire brûler mon livre, s'il est bon; il n'y a rien de plus aisé: on a bien brûlé les Lettres provinciales, qui valaient sans doute beaucoup mieux; chacun peut brûler chez lui les livres et papiers qui lui déplaisent.
"Mon ouvrage ne peut faire ni bien ni mal aux Calas, que je ne connais point. Le conseil du roi, impartial et ferme, juge suivant les lois, suivant l'équité, sur les pièces, sur les procédures, et non sur un écrit qui n'est point juridique, et dont le fond est absolument étranger à l'affaire qu'il juge.
"On aurait beau imprimer des in-folio pour ou contre les huit juges de Toulouse, et pour ou contre la tolérance, ni le conseil, ni aucun tribunal ne regardera ces livres comme des pièces du procès.
"Cet écrit sur la tolérance est une requête que l'humanité présente très humblement au pouvoir et à la prudence. Je sème un grain qui pourra un jour produire une moisson. Attendons tout du temps, de la bonté du roi, de la sagesse de ses ministres, et de l'esprit de raison qui commence à répandre partout sa lumière.
"La nature dit à tous les hommes: Je vous ai tous fait naître faibles et ignorants, pour végéter quelques minutes sur la terre, et pour l'engraisser de vos cadavres. Puisque vous êtes faibles, secourez-vous; puisque vous êtes ignorants, éclairez-vous et supportez-vous. Quand vous seriez tous du même avis, ce qui certainement n'arrivera jamais, quand il n'y aurait qu'un seul homme d'un avis contraire, vous devriez lui pardonner: car c'est moi qui le fais penser comme il pense. Je vous ai donné des bras pour cultiver la terre, et une petite lueur de raison pour vous conduire; j'ai mis dans vos coeurs un germe de compassion pour vous aider les uns les autres à supporter la vie. N'étouffez pas ce germe, ne le corrompez pas, apprenez qu'il est divin, et ne substituez pas les misérables fureurs de l'école à la voix de la nature.
"C'est moi seule qui vous unis encore malgré vous par vos besoins mutuels, au milieu même de vos guerres cruelles si légèrement entreprises, théâtre éternel des fautes, des hasards, et des malheurs. C'est moi seule qui, dans une nation, arrête les suites funestes de la division interminable entre la noblesse et la magistrature, entre ces deux corps et celui du clergé, entre le bourgeois même et le cultivateur. Ils ignorent tous les bornes de leurs droits; mais ils écoutent tous malgré eux, à la longue, ma voix qui parle à leur coeur. Moi seule je conserve l'équité dans les tribunaux, où tout serait livré sans moi à l'indécision et aux caprices, au milieu d'un amas confus de lois faites souvent au hasard et pour un besoin passager, différentes entre elles de province en province, de ville en ville, et presque toujours contradictoires entre elles dans le même lieu. Seule je peux inspirer la justice, quand les lois n'inspirent que la chicane. Celui qui m'écoute juge toujours bien; et celui qui ne cherche qu'à concilier des opinions qui se contredisent est celui qui s'égare.
"Il y a un édifice immense dont j'ai posé le fondement de mes mains: il était solide et simple, tous les hommes pouvaient y entrer en sûreté; ils ont voulu y ajouter les ornements les plus bizarres, les plus grossiers, et les plus inutiles; le bâtiment tombe en ruine de tous les côtés; les hommes en prennent les pierres, et se les jettent à la tête; je leur crie: Arrêtez, écartez ces décombres funestes qui sont votre ouvrage, et demeurez avec moi en paix dans l'édifice inébranlable qui est le mien."


ARTICLE NOUVELLEMENT AJOUTE,
DANS LEQUEL ON REND COMPTE
DU DERNIER ARRET RENDU
EN FAVEUR DE LA FAMILLE DES CALAS.
Depuis le 7 mars 1763 jusqu'au jugement définitif, il se passa encore deux années: tant il est facile au fanatisme d'arracher la vie à l'innocence, et difficile à la raison de lui faire rendre justice. Il fallut essuyer des longueurs inévitables, nécessairement attachées aux formalités. Moins ces formalités avaient été observées dans la condamnation de Calas, plus elles devaient l'être rigoureusement par le conseil d'Etat. Une année entière ne suffit pas pour forcer le parlement de Toulouse à faire parvenir au conseil toute la procédure, pour en faire l'examen, pour le rapporter. M. de Crosne fut encore chargé de ce travail pénible. Une assemblée de prés de quatre-vingts juges cassa l'arrêt de Toulouse, et ordonna la révision entière du procès.
D'autres affaires importantes occupaient alors presque tous les tribunaux du royaume. On chassait les jésuites; on abolissait leur société en France: ils avaient été intolérants et persécuteurs; ils furent persécutés à leur tour.
L'extravagance des billets de confession, dont on les crut les auteurs secrets, et dont ils étaient publiquement les partisans, avait déjà ranimé contre eux la haine de la nation. Une banqueroute immense d'un de leurs missionnaires, banqueroute que l'on crut en partie frauduleuse, acheva de les perdre. Ces seuls mots de missionnaires et de banqueroutiers, si peu faits pour être joints ensemble, portèrent dans tous les esprits l'arrêt de leur condamnation. Enfin les ruines de Port-Royal et les ossements de tant d'hommes célèbres insultés par eux dans leurs sépultures, et exhumés au commencement du siècle par des ordres que les jésuites seuls avaient dictés, s'élevèrent tous contre leur crédit expirant. On peut voir l'histoire de leur proscription dans l'excellent livre intitulé Sur la Destruction des jésuites en France, ouvrage impartial, parce qu'il est d'un philosophe, écrit avec la finesse et l'éloquence de Pascal, et surtout avec une supériorité de lumières qui n'est pas offusquée, comme dans Pascal, par des préjugés qui ont quelquefois séduit de grands hommes.
Cette grande affaire, dans laquelle quelques partisans des jésuites disaient que la religion était outragée, et où le plus grand nombre la croyait vengée, fit pendant plusieurs mois perdre de vue au public le procès des Calas; mais le roi ayant attribué au tribunal qu'on appelle les requêtes de l'hôtel le jugement définitif, le même public, qui aime à passer d'une scène à l'autre, oublia les jésuites, et les Calas saisirent toute son attention.
La chambre des requêtes de l'hôtel est une cour souveraine composée de maîtres des requêtes, pour juger les procès entre les officiers de la cour et les causes que le roi leur renvoie. On ne pouvait choisir un tribunal plus instruit de l'affaire: c'étaient précisément les mêmes magistrats qui avaient jugé deux fois les préliminaires de la révision, et qui étaient parfaitement instruits du fond et de la forme. La veuve de Jean Calas, son fils, et le sieur de Lavaisse, se remirent en prison: on fit venir du fond du Languedoc cette vieille servante catholique qui n'avait pas quitté un moment ses maîtres et sa maîtresse, dans le temps qu'on supposait, contre toute vraisemblance, qu'ils étranglaient leur fils et leur frère. On délibéra enfin sur les mêmes pièces qui avaient servi à condamner Jean Calas à la roue, et son fils Pierre au bannissement.
Ce fut alors que parut un nouveau mémoire de l'éloquent M. de Beaumont, et un autre du jeune M. de Lavaisse, si injustement impliqué dans cette procédure criminelle par les juges de Toulouse, qui, pour comble de contradiction, ne l'avaient pas déclaré absous. Ce jeune homme fit lui-même un factum qui fut jugé digne par tout le monde de paraître à côté de celui de M. de Beaumont. Il avait le double avantage de parler pour lui-même et pour une famille dont il avait partagé les fers. Il n'avait tenu qu'à lui de briser les siens et de sortir des prisons de Toulouse, s'il avait voulu seulement dire qu'il avait quitté un moment les Calas dans le temps qu'on prétendait que le père et la mère avaient assassiné leur fils. On l'avait menacé du supplice; la question et la mort avaient été présentées à ses yeux; un mot lui aurait pu rendre sa liberté: il aima mieux s'exposer au supplice que de prononcer ce mot, qui aurait été un mensonge. Il exposa tout ce i détail dans son factum, avec une candeur si noble, si simple, si éloignée de toute ostentation, qu'il toucha tous ceux qu'il ne voulait que convaincre, et qu'il se fit admirer sans prétendre à la réputation.
Son père, fameux avocat, n'eut aucune part à cet ouvrage: il se vit tout d'un coup égalé par son fils, qui n'avait jamais suivi le barreau.
Cependant les personnes de la plus grande considération venaient en foule dans la prison de Mme Calas, où ses filles s'étaient renfermées avec elle. On s'y attendrissait jusqu'aux larmes. L'humanité, la générosité, leur prodiguaient des secours. Ce qu'on appelle la charité ne leur en donnait aucun. La charité, qui d'ailleurs est si souvent mesquine et insultante, est le partage des dévots, et les dévots tenaient encore contre les Calas.
Le jour arriva (9 mars 1765) où l'innocence triompha pleinement. M. de Baquencourt ayant rapporté toute la procédure, et ayant instruit l'affaire jusque dans les moindres circonstances, tous les juges, d'une voix unanime, déclarèrent la famille innocente, tortionnairement et abusivement jugée par le parlement de Toulouse. Ils réhabilitèrent la mémoire du père. Ils permirent à la famille de se pourvoir devant qui il appartiendrait pour prendre ses juges à partie, et pour obtenir les dépens, dommages et intérêts que les magistrats toulousains auraient dû offrir d'eux-mêmes.
Ce fut dans Paris une joie universelle: on s'attroupait dans les places publiques, dans les promenades; on accourait pour voir cette famille si malheureuse et si bien justifiée; on battait des mains en voyant passer les juges, on les comblait de bénédictions. Ce qui rendait encore ce spectacle plus touchant, c'est que ce jour, neuvième mars, était le jour même où Calas avait péri par le plus cruel supplice (trois ans auparavant).
Messieurs les maîtres des requêtes avaient rendu à la famille Calas une justice complète, et en cela ils n'avaient fait que leur devoir. Il est un autre devoir, celui de la bienfaisance, plus rarement rempli par les tribunaux, qui semblent se croire faits pour être seulement équitables. Les maîtres des requêtes arrêtèrent qu'ils écriraient en corps à Sa Majesté pour la supplier de réparer par ses dons la ruine de la famille. La lettre fut écrite. Le roi y répondit en faisant délivrer trente-six mille livres à la mère et aux enfants; et de ces trente-six mille livres, il y en eut trois mille pour cette servante vertueuse qui avait constamment défendu la vérité en défendant ses maîtres.
Le roi, par cette bonté, mérita, comme par tant d'autres actions, le surnom que l'amour de la nation lui a donné. Puisse cet exemple servir à inspirer aux hommes la tolérance, sans laquelle le fanatisme désolerait la terre, ou du moins l'attristerait toujours! Nous savons qu'il ne s'agit ici que d'une seule famille, et que la rage des sectes en a fait périr des milliers; mais aujourd'hui qu'une ombre de paix laisse reposer toutes les sociétés chrétiennes, après des siècles de carnage, c'est dans ce temps de tranquillité que le malheur des Calas doit faire une plus grande impression, à peu prés comme le tonnerre qui tombe dans la sérénité d'un beau jour. Ces cas sont rares, mais ils arrivent, et ils sont l'effet de cette sombre superstition qui porte les âmes faibles à imputer des crimes à quiconque ne pense pas comme elles.

 

NOTES DE VOLTAIRE
Note 1 12 octobre 1761.
Note 2 On ne lui trouva, après le transport du cadavre à l'hôtel de ville, qu'une petite égratignure au bout du nez, et une petite tache sur la poitrine, causée par quelque inadvertance dans le transport du corps.
Note 3 Je ne connais que deux exemples de pères accusés dans l'histoire d'avoir assassiné leurs fils pour la religion:
Le premier est du père de sainte Barbara, que nous nommons sainte Barbe. Il avait commandé deux fenêtres dans sa salle de bains; Barbe, en son absence, en fit une troisième en l'honneur de la sainte Trinité; elle fit, du bout du doigt, le signe de la croix sur des colonnes de marbre, et ce signe se grava profondément dans les colonnes. Son père, en colère, courut après elle l'épée à la main; mais elle s'enfuit à travers une montagne qui s'ouvrit pour elle. Le père fit le tour de la montagne, et rattrapa sa fille; on la fouetta toute nue, mais Dieu la couvrit d'un nuage blanc; enfin son père lui trancha la tête. Voilà ce que rapporte la Fleur des saints.
Le second exemple est le prince Herménégilde. Il se révolta contre le roi son père, lui donna bataille en 584, fut vaincu et tué par un officier: on en a fait un martyr, parce que son père était arien.
Note 4 Un jacobin vint dans mon cachot, et me menaça du même genre de mort si je n'abjurais pas: c'est ce que j'atteste devant Dieu. 23 juillet 1762. PIERRE CALAS.
Note 5 On les a contrefaits dans plusieurs villes, et la dame Calas a perdu le fruit de cette générosité.
Note 6 Dévot vient du mot latin devotus. Les devoti de l'ancienne Rome étaient ceux qui se dévouaient pour le salut de la république: c'étaient les Curtius, les Decius.
Note 7 Ils renouvelaient le sentiment de Bérenger sur l'Eucharistie; ils niaient qu'un corps pût être en cent mille endroits différents, même par la toute-puissance divine; ils niaient que les attributs pussent subsister sans sujet; ils croyaient qu'il était absolument impossible que ce qui est pain et vin aux yeux, au goût, à l'estomac, fût anéanti dans le moment même qu'il existe; ils soutenaient toutes ces erreurs, condamnées autrefois dans Bérenger. Ils se fondaient sur plusieurs passages des premiers Pères de l'Eglise, et surtout de saint Justin, qui dit expressément dans son dialogue contre Tryphon: "L'oblation de la fine farine... est la figure de l'eucharistie que Jésus-Christ nous ordonne de faire en mémoire de sa Passion." (Page 119, Edit. Londinensis, 1719, in-8°.)

Ils appelaient tout ce qu'on avait dit dans les premiers siècles contre le culte des reliques; ils citaient ces paroles de Vigilantius: "Est-il nécessaire que vous respectiez ou même que vous adoriez une vile poussière? Les âmes des martyrs animent-elles encore leurs cendres? Les coutumes des idolâtres se sont introduites dans l'Eglise: on commence à allumer des flambeaux en plein midi. Nous pouvons pendant notre vie prier les uns pour les autres; mais après la mort, à quoi servent ces prières?"
Mais ils ne disaient pas combien saint Jérôme s'était élevé contre ces paroles de Vigilantius. Enfin ils voulaient tout rappeler aux temps apostoliques, et ne voulaient pas convenir que, l'Eglise s'étant étendue et fortifiée, il avait fallu nécessairement étendre et fortifier sa discipline: ils condamnaient les richesses, qui semblaient pourtant nécessaires pour soutenir la majesté du culte.
Note 8 Le véridique et respectable président de Thou parle ainsi de ces hommes si innocents et si infortunés: "Homines esse qui trecentis circiter abhinc annis asperum et incultum solum vectigale a dominis acceperint, quod improbo labore et assiduo cultu frugum ferax et aptum pecori reddiderint; patientissimos eos laboris et inediae, a litibus abhorrentes, erga egenos munificos, tributa principi et sua jura dominis sedulo et summa fide pendere; Dei cultum assiduis precibus et morum innocentia prae se ferre, caeterum raro divorum templa adire, nisi si quando ad vicina suis finibus oppida mercandi aut negotiorum causa divertant; quo si quandoque pedem inferant, non Dei divorumque statuis advolvi, nec oereos eis aut donoria ulla ponere; non sacerdotes ab eis rogari ut pro se aut propinquorum manibus rem divinam faciant: non cruce frontem insignire uti aliorum moris est; cum coelum intonat, non se lustrali aqua aspergere, sed sublatis in coelum oculis Dei opem implorare; non religionis ergo peregre proficisci, non per vias ante crucium simulacra caput aperire; sacra alio ritu et populari lingua celebrare; non denique pontifici aut episcopis honorem deferre, sed quosdam e suo numero delectos pro antistitibus et doctoribus habere. Haec uti ad Franciscum relata VI id. feb., anni, etc." (THUANI, Hist., lib. VI.)
Mme de Cental, à qui appartenait une partie des terres ravagées, et sur lesquelles on ne voyait que les cadavres de ses habitants, demanda justice au roi Henri II, qui la renvoya au parlement de Paris. L'avocat général de Provence, nommé Guérin, principal auteur des massacres, fut seul condamné à perdre la tête. De Thou dit qu'il porta seul la peine des autres coupables, quod aulicorum favore destitueretur, parce qu'il n'avait pas d'amis à la cour.
Note 9 François Gomar était un théologien protestant; il soutint, contre Arminius son collègue, que Dieu a destiné de toute éternité la plus grande partie des hommes à être brûlés éternellement: ce dogme infernal fut soutenu, comme il devait l'être, par la persécution. Le grand pensionnaire Barneveldt, qui était du parti contraire à Gomar, eut la tête tranchée à l'âge de soixante-douze ans, le 13 mai 1619, "pour avoir contristé au possible l'Eglise de Dieu".
Note 10 Un déclamateur, dans l'apologie de la révocation de l'édit de Nantes, dit en parlant de l'Angleterre: "Une fausse religion devait produire nécessairement de tels fruits; il en restait un à mûrir, ces insulaires le recueillent, c'est le mépris des nations." Il faut avouer que l'auteur prend bien mal son temps pour dire que les Anglais sont méprisables et méprisés de toute la terre. Ce n'est pas, ce me semble, lorsqu'une nation signale sa bravoure et sa générosité, lorsqu'elle est victorieuse dans les quatre parties du monde, qu'on est bien reçu à dire qu'elle est méprisable et méprisée. C'est dans un, chapitre sur l'intolérance qu'on trouve ce singulier passage; ceux qui prêchent l'intolérance méritent d'écrire ainsi. Cet abominable livre, qui semble fait par le fou de Verberie, est d'un homme sans mission: car quel pasteur écrirait ainsi? La fureur est poussée dans ce livre jusqu'à justifier la Saint-Barthélémy. On croirait qu'un tel ouvrage, rempli de si affreux paradoxes, devrait être entre les mains de tout le monde, au moins par sa singularité; cependant à peine est-il connu.
Note 11 Voyez Rycaut.
Note 12 Voyez Kempfer et toutes les relations du Japon.
Note 13 M. de La Bourdonnaie, intendant de Rouen, dit que la manufacture de chapeaux est tombée à Caudebec et à Neuchâtel par la fuite des réfugiés. M. Foucaut, intendant de Caen, dit que le commerce est tombé de moitié dans la généralité. M. de Maupeou, intendant de Poitiers, dit que la manufacture de droguet est anéantie. M. de Bezons, intendant de Bordeaux, se plaint que le commerce de Clérac et de Nérac ne subsiste presque plus. M. de Miroménil, intendant de Touraine, dit que le commerce de Tours est diminué de dix millions par année; et tout cela, par la persécution. (Voyez les Mémoires des intendants, en 1698.) Comptez surtout le nombre des officiers de terre et de mer, et des matelots, qui ont été obligés d'aller servir contre la France, et souvent avec un funeste avantage, et voyez si l'intolérance n'a pas causé quelque mal à l'Etat.
On n'a pas ici la témérité de proposer des vues à des ministres dont on connaît le génie et les grands sentiments, et dont le coeur est aussi noble que la naissance: ils verront assez que le rétablissement de la marine demande quelque indulgence pour les habitants de nos côtes.
Note 14 Chapitres XXI et XXIV.
Note 15 Actes, chapitre XXV, v. 16.
Note 16 Actes, chapitre XXVI v. 24.
Note 17 Quoique les Juifs n'eussent pas le droit du glaive depuis qu'Archélaüs avait été relégué chez les Allobroges, et que la Judée était gouvernée en province de l'empire, cependant les Romains fermaient souvent les yeux quand les Juifs exerçaient le jugement du zèle, c'est-à-dire quand, dans une émeute subite, ils lapidaient par zèle celui qu'ils croyaient avoir blasphémé.
Note 18 Ulpianus, Digest., lib. I, tit. II. "Eis qui judaicam superstitionem sequuntur honores adipisci permiserunt, etc."
Note 19 Tacite dit (Annales, XV, 44):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appellabat."
Il était bien difficile que le nom de chrétien fût déjà connu à Rome: Tacite écrivait sous Vespasien et sous Domitien; il parlait des chrétiens comme on en parlait de son temps. J'oserais dire que ces mots odio humani generis convicti pourraient bien signifier, dans le style de Tacite, convaincus d'être haïs du genre humain, autant que convaincus de haïr le genre humain.
En effet, que faisaient à Rome ces premiers missionnaires? Ils tâchaient de gagner quelques âmes, ils leur enseignaient la morale la plus pure; ils ne s'élevaient contre aucune puissance; l'humilité de leur coeur était extrême comme celle de leur état et de leur situation; à peine étaient-ils connus; à peine étaient-ils séparés des autres Juifs: comment le genre humain, qui les ignorait, pouvait-il les haïr? Et comment pouvaient-ils être convaincus de détester le genre humain?
Lorsque Londres brûla, on en accusa les catholiques; mais c'était après des guerres de religion, c'était après la conspiration des poudres, dont plusieurs catholiques, indignes de l'être, avaient été convaincus.
Les premiers chrétiens du temps de Néron ne se trouvaient pas assurément dans les mêmes termes. Il est très difficile de percer dans les ténèbres de l'histoire; Tacite n'apporte aucune raison du soupçon qu'on eut que Néron lui-même eût voulu mettre Rome en cendres. On aurait été bien mieux fondé de soupçonner Charles II d'avoir brûlé Londres: le sang du roi son père, exécuté sur un échafaud aux yeux du peuple qui demandait sa mort, pouvait au moins servir d'excuse à Charles II; mais Néron n'avait ni excuse, ni prétexte, ni intérêt. Ces rumeurs insensées peuvent être en tout pays le partage du peuple: nous en avons entendu de nos jours d'aussi folles et d'aussi injustes.
Tacite, qui connaît si bien le naturel des princes, devait connaître celui du peuple, toujours vain, toujours outré dans ses opinions violentes et passagères, incapable de rien voir, et capable de tout dire, de tout croire, et de tout oublier.
Philon (De Virtutibus, et Legatione ad Caium) dit que "Séjan les persécuta sous Tibère, mais qu'après la mort de Séjan l'empereur les rétablit dans tous leurs droits". Ils avaient celui des citoyens romains, tout méprisés qu'ils étaient des citoyens romains; ils avaient part aux distributions de blé; et même, lorsque la distribution se faisait un jour de sabbat, on remettait la leur à un autre jour: c'était probablement en considération des sommes d'argent qu'ils avaient données à l'Etat, car en tout pays ils ont acheté la tolérance, et se sont dédommagés bien vite de ce qu'elle avait coûté.
Ce passage de Philon explique parfaitement celui de Tacite, qui dit qu'on envoya quatre mille Juifs ou Egyptiens en Sardaigne, et que si l'intempérie du climat les eût fait périr, c'eût été une perte légère, vile damnum (Annales, II, 85).
J'ajouterai à cette remarque que Philon regarde Tibère comme un prince sage et juste. Je crois bien qu'il n'était juste qu'autant que cette justice s'accordait avec ses intérêts; mais le bien que Philon en dit me fait un peu douter des horreurs que Tacite et Suétone lui reprochent. Il ne me parait point vraisemblable qu'un vieillard infirme, de soixante et dix ans, se soit retiré dans l'île de Caprée pour s'y livrer à des débauches recherchées, qui sont t peine dans la nature, et qui étaient même inconnues t la jeunesse de Rome la plus effrénée; ni Tacite ni Suétone n'avaient connu cet empereur; ils recueillaient avec plaisir des bruits populaires. Octave, Tibère, et leurs successeurs, avaient été odieux, parce qu'ils régnaient sur un peuple qui devait être libre: les historiens se plaisaient à les diffamer, et on croyait ces historiens sur leur parole parce qu'alors on manquait de mémoires, de journaux du temps, de documents: aussi les historiens ne citent personne; on ne pouvait les contredire; ils diffamaient qui ils voulaient, et décidaient à leur gré du jugement de la postérité. C'est au lecteur sage de voir jusqu'à quel point on doit se défier de la véracité des historiens, quelle créance on doit avoir pour des faits publics attestés par des auteurs graves, nés dans une nation éclairée, et quelles bornes on doit mettre à sa crédulité sur des anecdotes que ces mêmes auteurs rapportent sans aucune preuve.
Note 20 Nous respectons assurément tout ce que 1'Eglise rend respectable; nous invoquons les saints martyrs, mais en révérant saint Laurent, ne peut on pas douter que saint Sixte lui ait dit: Vous me suivrez dans trois jours; que dans ce court intervalle le préfet de Rome lui ait fait demander l'argent des chrétiens; que le diacre Laurent ait eu le temps de faire assembler tous les pauvres de la ville; qu'il ait marché devant le préfet pour le mener à l'endroit où étaient ces pauvres; qu'on lui ait fait son procès; qu'il ait subi la question; que le préfet ait commandé à un forgeron un gril assez grand pour y rôtir un homme; que le premier magistrat de Rome ait assisté lui-même à cet étrange supplice; que saint Laurent sur ce gril ait dit: "Je suis assez cuit d'un côté, fais moi retourner de l'autre si tu veux me manger?" Ce gril n'est guère dans le génie des Romains; et comment se peut-il faire qu'aucun auteur païen n'ait parlé d'aucune de ces aventures?
Note 21 Il n'y a qu'à ouvrir Virgile pour voir que les Romains reconnaissaient un Dieu suprême, souverain de tous les êtres célestes.
... O! qui res hominumque deumque
Aeternis regis imperiis, et fulmine terres.
(Aen., I, 233-34.)
O pater, o hominum divumque aeterna potestas, etc.
(Aen., X, 18.)
Horace s'exprime bien plus fortement:
Unde nil majus generatur ipso,
Nec viget quidquam simile, aut secundum.
(Lib. I, od. XII, 17-18.)
On ne chantait autre chose que l'unité de Dieu dans les mystères auxquels presque tous les Romains étaient initiés. Voyez le bel hymne d'Orphée; lisez la lettre de Maxime de Madaure à saint Augustin, dans laquelle il dit "qu'il n'y a que des imbéciles qui puissent ne pas reconnaître un Dieu souverain". Longinien étant païen écrit au même saint Augustin que Dieu "est unique, incompréhensible, ineffable"; Lactance lui-même, qu'on ne peut accuser d'être trop indulgent, avoue, dans son livre V (Divin. Institut., c. III), que "les Romains soumettent tous les dieux au Dieu suprême; illos subjicit et mancipat Deo". Tertullien même, dans son Apologétique (c. XXIV), avoue que tout l'empire reconnaissait un Dieu maître du monde, dont la puissance et la majesté sont infinies, principem mundi, perfectoe potentioe et majestatis. Ouvrez surtout Platon, le maître de Cicéron dans la philosophie, vous y verrez "qu'il n'y a qu'un Dieu; qu'il faut l'adorer, l'aimer, travailler à lui ressembler par la sainteté et par la justice". Epictète dans les fers, Marc-Antoine sur le trône, disent la même chose en cent endroits.
Note 22 Chapitre XXXIX.
Note 23 Chapitre XXXV.
Note 24 Chapitre III.
Note 25 Cette assertion doit être prouvée. Il faut convenir que, depuis que l'histoire a succédé à la fable, on ne voit dans les Egyptiens qu'un peuple aussi lâche que superstitieux. Cambyse s'empare de l'Egypte par une seule bataille; Alexandre y donne des lois sans essuyer un seul combat, sans qu'aucune ville ose attendre un siège; les Ptolémées s'en emparent sans coup férir; César et Auguste la subjuguent aussi aisément, Omar prend toute l'Egypte en une seule campagne; les Mamelucks, peuple de la Colchide et des environs du mont Caucase, en sont les maîtres après Omar; ce sont eux, et non les Egyptiens, qui défont l'armée de saint Louis, et qui prennent ce roi prisonnier. Enfin, les Mamelucks étant devenus Egyptiens, c'est-à-dire mous, lâches, inappliqués, volages, comme les habitants naturels de ce climat, ils passent en trois mois sous le joug de Sélim Ier, qui fait pendre leur soudan, et qui laisse cette province annexée à l'empire des Turcs, jusqu'à ce que d'autres barbares s'en emparent un jour.
Hérodote rapporte que, dans les temps fabuleux, un roi égyptien nommé Sésostris sortit de son pays dans le dessein formel de conquérir l'univers: il est visible qu'un tel dessein n'est digne que de Picrochole ou de don Quichotte, et sans compter que le nom de Sésostris n'est point égyptien, on peut mettre cet événement, ainsi que tous les faits antérieurs, au rang des Mille et Une Nuits. Rien n'est plus commun chez les peuples conquis que de débiter des fables sur leur ancienne grandeur, comme, dans certains pays, certaines misérables familles se font descendre d'antiques souverains. Les prêtres d'Egypte contèrent à Hérodote que ce roi qu'il appelle Sésostris était allé subjuguer la Colchide: c'est comme si l'on disait qu'un roi de France partit de la Touraine pour aller subjuguer la Norvège.
On a beau répéter tous ces contes dans mille et mille volumes, ils n'en sont pas plus vraisemblables; il est bien plus naturel que les habitants robustes et féroces du Caucase, les Colchidiens, et les autres Scythes, qui vinrent tant de fois ravager l'Asie, aient pénétré jusqu'en Egypte; et si les prêtres de Colchos rapportèrent ensuite chez eux la mode de la circoncision, ce n'est pas une preuve qu'ils aient été subjugués par les Egyptiens. Diodore de Sicile rapporte que tous les rois vaincus par Sésostris venaient tous les ans du fond de leurs royaumes lui apporter leurs tributs, et que Sésostris se servait d'eux comme de chevaux de carrosse, qu'il les faisait atteler à son char pour aller au temple. Ces histoires de Gargantua sont tous les jours fidèlement copiées. Assurément ces rois étaient bien bons de venir de si loin servir ainsi de chevaux.
Quant aux pyramides et aux autres antiquités, elles ne prouvent autre chose que l'orgueil et le mauvais goût des princes d'Egypte, ainsi que l'esclavage d'un peuple imbécile, employant ses bras, qui étaient son seul bien, à satisfaire la grossière ostentation de ses maîtres. Le gouvernement de ce peuple, dans les temps mêmes que l'on vante si fort, paraît absurde et tyrannique; on prétend que toutes les terres appartenaient à leurs monarques. C'était bien à de pareils esclaves à conquérir le monde!
Cette profonde science des prêtres égyptiens est encore un des plus énormes ridicules de l'histoire ancienne, c'est-à-dire de la fable. Des gens qui prétendaient que dans le cours d'onze mille années le soleil s'était levé deux fois au couchant, et couché deux fois au levant, en recommençant son cours, étaient sans doute, bien au-dessous de l'auteur de l'Almanach de Liège. La religion de ces prêtres, qui gouvernaient l'Etat, n'était pas comparable à celle des peuples les plus sauvages de l'Amérique: on sait qu'ils adoraient des crocodiles, des singes, des chats, des oignons; et il n'y a peut-être aujourd'hui dans toute la terre que le culte du grand lama qui soit aussi absurde.
Leurs arts ne valent guère mieux que leur religion; il n'y a pas une seule ancienne statue égyptienne qui soit supportable, et tout ce qu'ils ont eu de bon a été fait dans Alexandrie, sous les Ptolémées et sous les Césars, par des artistes de Grèce: ils ont eu besoin d'un Grec pour apprendre la géométrie.
L'illustre Bossuet s'extasie sur le mérite égyptien, dans son 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 adressé au fils de Louis XIV. Il peut éblouir un jeune prince; mais il contente bien peu les savants: c'est une très éloquente déclamation, mais un historien doit être plus philosophe qu'orateur. Au reste, on ne donne cette réflexion sur les Egyptiens que comme une conjecture: quel autre nom peut-on donner à tout ce qu'on dit de l'Antiquité?
Note 26 On ne révoque point en doute la mort de saint Ignace; mais qu'on lise la relation de son martyre, un homme de bon sens ne sentira-t-il pas quelques doutes s'élever dans son esprit? L'auteur inconnu de cette relation dit que "Trajan crut qu'il manquerait quelque chose à sa gloire s'il ne soumettait à son empire le dieu des chrétiens". Quelle idée! Trajan était-il un homme qui voulût triompher des dieux? Lorsque Ignace parut devant l'empereur, ce prince lui dit: "Qui es-tu, esprit impur?" Il n'est guère vraisemblable qu'un empereur ait parlé à un prisonnier, et qu'il l'ait condamné lui-même; ce n'est pas ainsi que les souverains en usent. Si Trajan fit venir Ignace devant lui il ne lui demanda pas: Qui es-tu? il le savait bien. Ce mot esprit impur a-t-il pu être prononcé par un homme comme Trajan? Ne voit-on pas que c'est une expression d'exorciste, qu'un chrétien met dans la bouche d'un empereur? Est-ce là, bon Dieu! le style de Trajan?
Peut-on imaginer qu'Ignace lui ait répondu qu'il se nommait Théophore, parce qu'il portait Jésus dans son coeur, et que Trajan eût disserté avec lui sur Jésus-Christ? On fait dire à Trajan, à la fin de la conversation: "Nous ordonnons qu'Ignace, qui se glorife de porter en lui le crucifié, sera mis aux fers, etc." Un sophiste ennemi des chrétiens, pouvait appeler Jésus-Christ le crucifié; mais il n'est guère probable que, dans un arrêt, on se fût servi de ce terme. Le supplice de la croix était si usité chez les Romains qu'on ne pouvait, dans le style des lois, désigner par le crucifié l'objet du culte des chrétiens; et ce n'est pas ainsi que les lois et les empereurs prononcent leurs jugements.
On fait ensuite écrire une longue lettre par saint Ignace aux chrétiens de Rome: "Je vous écris, dit-il, tout enchaîné que je suis." Certainement, s'il lui fut permis d'écrire aux chrétiens de Rome, ces chrétiens n'étaient donc pas recherchés; Trajan n'avait donc pas dessein de soumettre leur Dieu à son empire; ou si ces chrétiens étaient sous le fléau de la persécution, Ignace commettait une très grande imprudence en leur écrivant: c'était les exposer, les livrer, c'était se rendre leur délateur.
Il semble que ceux qui ont rédigé ces actes devaient avoir plus d'égards aux vraisemblances et aux convenances. Le martyre de saint Polycarpe fait naître plus de doutes. Il est dit qu'une voix cria du haut du ciel: Courage, Polycarpe! que les chrétiens l'entendirent, mais que les autres n'entendirent rien: il est dit que quand on eut lié Polycarpe au poteau, et que le bûcher fut en flammes, ces flammes s'écartèrent de lui, et formèrent un arc au-dessus de sa tête; qu'il en sortit une colombe; que le saint, respecté par le feu, exhala une odeur d'aromate qui embauma toute l'assemblée, mais que celui dont le feu n'osait approcher ne put résister au tranchant du glaive. Il faut avouer qu'on doit pardonner à ceux qui trouvent dans ces histoires plus de piété que de vérité.
Note 27 Histoire ecclésiastique, liv. VIII.
Note 28 Voyez l'excellente Lettre de Locke sur la tolérance.
Note 29 Le jésuite Busembaum, commenté par le jésuite Lacroix, dit "qu'il est permis de tuer un prince excommunié par le pape, dans quelque pays qu'on trouve ce prince, parce que l'univers appartient au pape, et que celui qui accepte cette commission fait une oeuvre charitable". C'est cette proposition, inventée dans les petites maisons de l'enfer, qui a le plus soulevé toute la France contre les jésuites. On leur a reproché alors plus que jamais ce dogme, si souvent enseigné par eux, et si souvent désavoué. Ils ont cru se justifier en montrant à peu prés les mêmes décisions dans saint Thomas et dans plusieurs jacobins (voyez, si vous pouvez, la Lettre d'un homme du monde à un théologien, sur saint Thomas; c'est une brochure de jésuite, de 1762). En effet, saint Thomas d'Aquin, docteur angélique, interprète de la volonté divine (ce sont ses titres), avance qu'un prince apostat perd son droit à la couronne, et qu'on ne doit plus lui obéir; que l'Eglise peut le punir de mort (livre II,,part. 2, quest. 12); qu'on n'a toléré 1'empereur Julien que parce qu'on n'était pas le plus fort (livre II, part. 2, quest. 12); que de droit on doit tuer tout hérétique (livre II, part. 2, quest. 11 et 12); que ceux qui délivrent le peuple d'un prince qui gouverne tyranniquement sont très louables, etc. etc. On respecte fort l'ange de l'école; mais si, dans les temps de Jacques Clément, son confrère, et du feuillant Ravaillac, il était venu soutenir en France de telles propositions, comment aurait-on traité l'ange de l'école?
Il faut avouer que Jean Gerson, chancelier de l'Université, alla encore plus loin que saint Thomas, et le cordelier Jean Petit, infiniment plus loin que Gerson. Plusieurs cordeliers soutinrent les horribles thèses de Jean Petit. Il faut avouer que cette doctrine diabolique du régicide vient uniquement de la folle idée où ont été longtemps presque tous les moines que le pape est un Dieu en terre, qui peut disposer à son gré du trône et de la vie des rois. Nous avons été en cela fort au-dessous de ces Tartares qui croient le grand-lama immortel: il leur distribue sa chaise percée; ils font sécher ces reliques, les enchâssent, et les baisent dévotement. Pour moi, j'avoue que j'aimerais mieux, pour le bien de la paix, porter à mon cou de telles reliques que de croire que le pape ait le moindre droit sur le temporel des rois, ni même sur le mien, en quelque cas que ce puisse être.
Note 30 Deutéronome, ch. XIV.
Note 31 Dans l'idée que nous avons de faire sur cet ouvrage quelques notes utiles, nous remarquerons ici qu'il est dit que Dieu fait une alliance avec Noé et avec tous les animaux; et cependant il permet à Noé de manger de tout ce qui a vie et mouvement; il excepte seulement le sang, dont il ne permet pas qu'on se nourrisse. Dieu ajoute (Genèse, IX, 5) "qu'il tirera vengeance de tous les animaux qui ont répandu le sang de l'homme".
On peut inférer de ces passages et de plusieurs autres ce que toute l'Antiquité a toujours pensé jusqu'à nos jours, et ce que tous les hommes sensés pensent, que les animaux ont quelque connaissance. Dieu ne fait point un pacte avec les arbres et avec les pierres, qui n'ont point de sentiment; mais il en fait un avec les animaux, qu'il a daigné douer d'un sentiment souvent plus exquis que le nôtre, et de quelques idées nécessairement attachées à ce sentiment. C'est pourquoi il ne veut pas qu'on ait la barbarie de se nourrir de leur sang, parce qu'en effet le sang est la source de la vie, et par conséquent du sentiment. Privez un animal de tout son sang, tous ses organes restent sans action. C'est donc avec très grande raison que l'Ecriture dit en cent endroits que l'âme, c'est-à-dire ce qu'on appelait l'âme sensitive, est dans le sang; et cette idée si naturelle a été celle de tous les peuples.
C'est sur cette idée qu'est fondée la commisération que nous devons avoir pour les animaux. Des sept préceptes des Noachides, admis chez les Juifs, il y en a un qui défend de manger le membre d'un animal en vie. Ce précepte prouve que les hommes avaient eu la cruauté de mutiler les animaux pour manger leurs membres coupés, et qu'ils les laissaient vivre pour se nourrir successivement des parties de leurs corps. Cette coutume subsista en effet chez quelques peuples barbares, comme on le voit par les sacrifices de l'île de Chio, à Bacchus Omadios, le mangeur de chair crue. Dieu, en permettant que les animaux nous servent de pâture, recommande donc quelque humanité envers eux. Il faut convenir qu'il y a de la barbarie à les faire souffrir; il n'y a certainement que l'usage qui puisse diminuer en nous l'horreur naturelle d'égorger un animal que nous avons nourri de nos mains. Il y a toujours eu des peuples qui s'en sont fait un grand scrupule: ce scrupule dure encore dans la presqu'île de l'Inde; toute la secte de Pythagore, en Italie et en Grèce, s'abstint constamment de manger de la chair. Porphyre, dans son livre de l'Abstinence, reproche à son disciple de n'avoir quitté sa secte que pour se livrer à son appétit barbare.
Il faut, ce me semble, avoir renoncé à la lumière naturelle, pour oser avancer que les bêtes ne sont que des machines. Il y a une contradiction manifeste à convenir que Dieu a donné aux bêtes tous les organes du sentiment, et à soutenir qu'il ne leur a point donné de sentiment.
Il me paraît encore qu'il faut n'avoir jamais observé les animaux pour ne pas distinguer chez eux les différentes voix du besoin, de la souffrance, de la joie, de la crainte, de l'amour, de la colère, et de toutes leurs affections; il serait bien étrange qu'ils exprimassent si bien ce qu'ils ne sentiraient pas.
Cette remarque peut fournir beaucoup de réflexions aux esprits exercés sur le pouvoir et la bonté du Créateur, qui daigne accorder la vie, le sentiment, les idées, la mémoire, aux êtres que lui-même a organisés de sa main toute-puissante. Nous ne savons ni comment ces organes se sont formés, ni comment ils se développent, ni comment on reçoit la vie, ni par quelles lois les sentiments, les idées, la mémoire, la volonté, sont attachés à cette vie: a dans cette profonde et éternelle ignorance, inhérente à notre nature, nous disputons sans cesse, nous nous persécutons les uns les autres, comme les taureaux qui se battent avec leurs cornes sans savoir pourquoi et comment ils ont des cornes.
Note 32 Amos, ch. V, v. 26.
Note 33 Jérém., ch. VII, v. 22.
Note 34 Act., ch. VII, v. 42-43.
Note 35 Deutér., ch. XII, v. 8.
Note 36 Plusieurs écrivains conclurent témérairement de ce passage que le chapitre concernant le veau d'or (qui n'est autre chose que le dieu Apis) a été ajouté aux livres de Moïse, ainsi que plusieurs autres chapitres.
Aben-Hezra fut le premier qui crut prouver que le Pentateuque avait été rédigé du temps des rois. Wollaston, Collins, Tindal, Shaftesbury, Bolingbroke, et beaucoup d'autres, ont allégué que l'art de graver ses pensées sur la pierre polie, sur la brique, sur le plomb ou sur le bois, était alors la seule manière d'écrire ils disent que du temps de Moïse les Chaldéens et les Egyptiens n'écrivaient pas autrement; qu'on ne pouvait alors graver que d'une manière très abrégée, et en hiéroglyphes, la substance des choses qu'on voulait transmettre à la postérité, et non pas des histoires détaillées; qu'il n'était pas possible de graver de gros livres dans un désert où l'on changeait si souvent de demeure, où l'on n'avait personne qui pût ni fournir les vêtements, ni les tailler, ni même raccommoder les sandales, et où Dieu fut obligé de faire un miracle de quarante années (Deutéronome, VIII, 5) pour conserver les vêtements et les chaussures de son peuple. Ils disent qu'il n'est pas vraisemblable qu'on eût tant de graveurs de caractères, lorsqu'on manquait des arts les plus nécessaires, et qu'on ne pouvait même faire du pain; et si on leur dit que les colonnes du tabernacle étaient d'airain, et les chapiteaux d'argent massif, ils répondent que l'ordre a pu en être donné dans le désert, mais qu'il ne fut exécuté que dans des temps plus heureux.
Ils ne peuvent concevoir que ce peuple pauvre ait demandé un veau d'or massif (Exode, XXXII, 1) pour l'adorer au pied de la montagne même où Dieu parlait à Moïse, au milieu des foudres et des éclairs que ce peuple voyait (Exode, XIX, 18-19), et au son de la trompette céleste qu'il entendait. Ils s'étonnent que la veille du jour même où Moïse descendit de la montagne, tout ce peuple se soit adressé au frère de Moïse pour avoir ce veau d'or massif. Comment Aaron le jeta-t-il en fonte en un seul jour (Exode, XXXII, 4)? comment ensuite Moise le réduisit-il en poudre (Exode, XXXII, 20)? Ils disent qu'il est impossible à tout artiste de faire en moins de trois mois une statue d'or, et que, pour la réduire en poudre qu'on puisse avaler, l'art de la chimie la plus savante ne suffit pas: ainsi la prévarication d'Aaron et l'opération de Moïse aurait été deux miracles.
L'humanité, la bonté du coeur, qui les trompent, les empêchent de croire que Moïse ait fait égorger vingt-trois mille personnes (Exode, XXXII, 28) pour expier ce péché; ils n'imaginent pas que vingt-trois mille hommes se soient ainsi laissés massacrer par des lévites, à moins d'un troisième miracle. Enfin ils trouvent étranges qu'Aaron, le plus coupable de tous, ait été récompensé du crime dont les autres étaient si horriblement punis (Exode, XXXIII, 19; et Lévitique, VIII, 2), et qu'il ait été fait grand prêtre, tandis que les cadavres de vingt-trois mille de ses frères sanglants étaient entassés au pied de l'autel où il allait sacrifier.
Ils font les mêmes difficultés sur les vingt-quatre mille Israélites massacrés par l'ordre de Moïse (Nombres, XXV, 9), pour expier la faute d'un seul qu'on avait surpris avec une fille madianite. On voit tant de rois juifs, et surtout Salomon, épouser impunément des étrangères que ces critiques ne peuvent admettre que l'alliance d'une Madianite ait été un si grand crime: Ruth était Moabite, quoique sa famille fût originaire de Bethléem; la sainte Ecriture l'appelle toujours Ruth la Moabite: cependant elle alla se mettre dans le lit de Booz par le conseil de sa mère; elle en reçut six boisseaux d'orge, l'épousa ensuite, et fut l'aïeule de David. Rahab était non seulement étrangère, mais une femme publique; la Vulgate ne lui donne d'autre titre que celui de meretrix (Josué, VI, 17); elle épousa Salmon, prince de Juda; et c'est encore de ce Salmon que David descend. On regarde même Rahab comme la figure de l'Eglise chrétienne: c'est le sentiment de plusieurs Pères, et surtout d'Origène dans sa septième homélie sur Josué.
Bethsabée, femme d'Urie, de laquelle David eut Salomon, était Ethéenne. Si vous remontez plus haut, le patriarche Juda épousa une femme chananéenne; ses enfants eurent pour femme Thamar de la race d'Aram: cette femme, avec laquelle Juda commit, sans lé savoir, un inceste, n'était pas de la race d'Israël.
Ainsi notre Seigneur Jésus-Christ daigna s'incarner chez les Juifs dans une famille dont cinq étrangères étaient la tige, pour faire voir que les nations étrangères auraient part à son héritage.
Le rabbin Aben-Hezra fut, comme on l'a dit, le premier qui osa prétendre que le Pentateuque avait été rédigé longtemps après Moïse: il se fonde sur plusieurs passages. "Le Chananéen (Genèse IX, 6) était alors dans ce pays. La montagne de Moria (II. Paralip., III, 1), appelée la montagne de Dieu. Le lit de Og, roi de Bazan, se voit encore en Rabath, et il appela tout ce pays de Bazan les villages de Jaïr, jusqu'aujourd'hui. Il ne s'est jamais vu de prophète en Israël comme Moïse. Ce sont ici les rois qui ont régné en Edom (Genèse, XXXVI, 31) avant qu'aucun roi régnât sur Israël." Il prétend que ces passages où il est parlé de choses arrivées après Moise, ne peuvent être de Moïse. On répond à ces objections que ces passages sont des notes ajoutées longtemps après par les copistes.
Newton, de qui d'ailleurs on ne doit prononcer le nom qu'avec respect, mais qui a pu se tromper puisqu'il était homme, attribue, dans son introduction à ses commentaires sur Daniel et sur saint Jean, les livres de Moïse, de Josué, et des Juges, à des auteurs sacrés très postérieurs: il se fonde sur le chap. XXXVI de la Genèse; sur quatre chapitres des Juges, XVII, XVIII, XIX, XXI; sur Samuel, chap. VIII sur les Chroniques, chap. II; sur le livre de Ruth, chap. IV, en effet, si dans le chap. XXXVI de la Genèse il est parlé des rois, s'il en est fait mention dans les livres des Juges, si dans le livre de Ruth il est parlé de David, il semble que tous ces livres aient été rédigés du temps des rois. C'est aussi le sentiment de quelques théologiens, à la tête desquels est le fameux Leclerc. Mais cette opinion n'a qu'un petit nombre de sectateurs dont la curiosité sonde ces abîmes. Cette curiosité, sans doute, n'est pas au rang des devoirs de l'homme. Lorsque les savants et les ignorants, les princes et les bergers paraîtront après cette courte vie devant le maître de l'éternité, chacun de nous alors voudra être juste, humain, compatissant, généreux; nul ne se vantera d'avoir su précisément en quelle année le Pentateuque fut écrit, et d'avoir démêlé le texte de notes qui étaient en usage chez les scribes. Dieu ne nous demandera pas si nous avons pris parti pour les Massorètes contre le Talmud, si nous n'avons jamais pris un caph pour un beth, un yod pour un vaü, un daleth pour un res: certes, il nous jugera sur nos actions, et non sur l'intelligence de la langue hébraïque. Nous nous en tenons fermement à la décision de l'Eglise, selon le devoir raisonnable d'un fidèle.
Finissons cette note par un passage important du Lévitique, livre composé après l'adoration du veau d'or. Il ordonna aux Juifs de ne plus adorer les velus, "les boucs, avec lesquels même ils ont commis des abominations infâmes". On ne sait si cet étrange culte venait d'Egypte, patrie de la superstition et du sortilège; mais on croit que la coutume de nos prétendus sorciers d'aller au sabbat, d'y adorer un bouc, et de s'abandonner avec lui à des turpitudes inconcevables, dont l'idée fait horreur, est venue des anciens Juifs: en effet, ce furent eux qui enseignèrent dans une partie de l'Europe la sorcellerie. Quel peuple! Une si étrange infamie semblait mériter un châtiment pareil à celui que le veau d'or leur attira, et pourtant le législateur se contente de leur faire une simple défense. On ne apporte ici ce fait que pour faire connaître la nation juive: il faut que la bestialité ait été commune chez elle, puisqu'elle est la seule nation connue chez qui les lois aient été forcées de prohiber un crime qui n'a été soupçonné ailleurs par aucun législateur.
Il est à croire que dans les fatigues et dans la pénurie que les Juifs avaient essuyées dans les déserts de Pharan, d'Oreb, et de Cadès-Barné, l'espèce féminine, plus faible que l'autre, avait succombé. Il faut bien qu'en effet les Juifs manquassent de filles, puisqu'il leur est toujours ordonné, quand ils s'emparent d'un bourg ou d'un village, soit à gauche, soit à droite du lac Asphaltite, de tuer tout, excepté les filles nubiles.
Les Arabes qui habitent encore une partie de ces déserts stipulent toujours, dans les traités qu'ils font avec les caravanes, qu'on leur donnera des filles nubiles. Il est vraisemblable que les jeunes gens, dans ce pays affreux, poussèrent la dépravation de la nature humaine jusqu'à s'accoupler avec des chèvres, comme on le dit de quelques bergers de la Calabre.
Il reste maintenant à savoir si ces accouplements avaient produit des monstres, et s'il y a quelque fondement aux anciens contes des satyres, des faunes, des centaures, et des minotaures; I'histoùe le dit, la physique ne nous a pas encore éclairé sur cet article monstrueux (이 문장에서 I'histoùe는 l'histoire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Note 37 Josué, chap. XXIV, v. 15 et suiv.
Note 38 Nomb., chap. XXI, v. 9.
Note 39 Rois, liv. III, chap. XV, v. 14; ibid., chap. XXII, v. 44.
Note 40 Rois, liv. IV, chap. XVI.
Note 41 Ibid., liv. III, chap. XVIII, V. 38 et 40; ibid., liv. IV, chap. II, v. 24.
Note 42 Nomb., chap. XXXI.
Note 43 Madian n'était point compris dans la terre promise: c'est un petit canton de l'Idumée, dans l'Arabie Pétrée; il commence vers le septentrion au torrent d'Arnon, et finit au torrent de Zared, au milieu des rochers, et sur le rivage oriental du lac Asphaltite. Ce pays est habité aujourd'hui par une petite horde d'Arabes: il peut avoir huit lieues ou environ de long, et un peu moins en largeur.
Note 44 Il est certain par le texte (Juges, XI, 39) que Jephté immola sa fille. "Dieu n'approuve pas ces dévouements, dit dom Calmet dans sa Dissertation sur le voeu de Jephté; mais lorsqu'on les a faits, il veut qu'on les exécute, ne fût-ce que pour punir ceux qui les faisaient, ou pour réprimer la légèreté qu'on aurait eue à les faire, si on n'en avait pas craint l'exécution." Saint Augustin et presque tous les Pères condamnent l'action de Jephté: il est vrai que l'Ecriture (Juges, XI, 29) dit qu'il fut rempli de l'esprit de Dieu; et saint Paul, dans son Epître aux Hébreux, chap. XI (verset 32), fait l'éloge de Jephté; il le place avec Samuel et David.
Saint Jérôme, dans son Epître à Julien, dit: "Jephté immola sa fille au Seigneur, et c'est pour cela que l'apôtre le compte parmi les saints." Voilà de part et d'autre des jugements sur lesquels il ne nous est pas permis de porter le nôtre; on doit craindre même d'avoir un avis.
Note 45 On peut regarder la mort du roi Agag comme un vrai sacrifice. Saül avait fait ce roi des Amalécites prisonnier de guerre, et l'avait reçu à composition; mais le prêtre Samuel lui avait ordonné de ne rien épargner; il lui avait dit en propres mots (I. Rois, XV, 3): "Tuez tout, depuis l'homme jusqu'à la femme, jusqu'aux petits enfants, et ceux qui sont encore à la mamelle.
"Samuel coupa le roi Agag en morceaux, devant le Seigneur, à Galgal.
"Le zèle dont ce prophète était animé, dit dom Calmet, lui mit l'épée en main dans cette occasion pour venger la gloire du Seigneur et pour confondre Saül."
On voit, dans cette fatale aventure, un dévouement, un prêtre, une victime: c'était donc un sacrifice.
Tous les peuples dont nous avons l'histoire ont sacrifié des hommes à la Divinité, excepté les Chinois. Plutarque (Quest. rom. LXXXII) rapporte que les Romains même en immolèrent du temps de la république.
On voit, dans les Commentaires de César (De Bello gall., I, XXIV), que les Germains allaient immoler les otages qu'il leur avait donnés, lorsqu'il délivra ces otages par sa victoire.
J'ai remarqué ailleurs que cette violation du droit des gens envers les otages de César, et ces victimes humaines immolées, pour comble d'horreur, par la main des femmes, dément un peu le panégyrique que Tacite fait des Germains, dans son traité De Moribus Germanorum. Il paraît que, dans ce traité, Tacite songe plus à faire la satire des Romains que l'éloge des Germains, qu'il ne connaissait pas.
Disons ici en passant que Tacite aimait encore mieux la satire que la vérité. Il veut rendre tout odieux, jusqu'aux actions indifférentes, et sa malignité nous plaît presque autant que son style, parce que nous aimons la médisance et l'esprit.
Revenons aux victimes humaines. Nos pères en immolaient aussi bien que les Germains: c'est le dernier degré de la stupidité de notre nature abandonnée à elle-même, et c'est un des fruits de la faiblesse de notre jugement. Nous dîmes: Il faut offrir à Dieu ce qu'on a de plus précieux et de plus beau; nous n'avons rien de plus précieux que nos enfants; il faut donc choisir les plus beaux et les plus jeunes pour les sacrifier à la Divinité.
Philon dit que, dans la terre de Chanaan, on immolait quelquefois ses enfants avant que Dieu eût ordonné à Abraham de lui sacrifier son fils unique Isaac, pour éprouver sa foi.
Sanchoniathon, cité par Eusèbe, rapporte que les Phéniciens sacrifiaient dans les grands dangers le plus cher de leurs enfants, et qu'Ilus immola son fils Jéhud à peu près dans le temps que Dieu mit la foi d'Abraham à l'épreuve. Il est difficile de percer dans les ténèbres de cette antiquité; mais il n'est que trop vrai que ces horribles sacrifices ont été presque partout en usage; les peuples ne s'en sont défaits qu'à mesure qu'ils se sont policés: la politesse amène l'humanité.
Note 46 Juges, chap. XI, v. 24.
Note 47 Juges, chap. XVII, verset dernier.
Note 48 Rois, liv. IV, ch. V, v. 18 et 19.
Note 49 Ceux qui sont peu au fait des usages de l'Antiquité, et qui ne jugent que d'après ce qu'ils voient autour d'eux, peuvent être étonnés de ces singularités; mais il faut songer qu'alors dans l'Egypte, et dans une grande partie de l'Asie, la plupart des choses s'exprimaient par des figures, des hiéroglyphes, des signes, des types.
Les prophètes, qui s'appelaient les voyants chez les Egyptiens et chez les Juifs, non seulement s'exprimaient en allégories, mais ils figuraient par des signes les événements qu'ils annonçaient. Ainsi Isaïe, le premier des quatre grands prophètes juifs, prend un rouleau (chap. VIII), et y écrit: "Shas bas, butinez vite"; puis il s'approche de la prophétesse. Elle conçoit, et met au monde un fils qu'il appelle Maher-Salas-Has-bas: c'est une figure des maux que les peuples d'Egypte et d'Assyrie feront aux Juifs.
Ce prophète dit (VII, 15, 16, 18, 20): "Avant que l'enfant soit en âge de manger du beurre et du miel, et qu'il sache réprouver le mauvais et choisir le bon, la terre détestée par vous sera délivrée des deux rois; le Seigneur sifflera aux mouches d'Egypte et aux abeilles d'Assur; le Seigneur prendra un rasoir de louage, et en rasera toute la barbe et les poils des pieds du roi d'Assur."
Cette prophétie des abeilles, de la barbe, et du poil des pieds rasés, ne peut être entendue que par ceux qui savent que c'était la coutume d'appeler les essaims au son du flageolet ou de quelque autre instrument champêtre; que le plus grand affront qu'on pût faire à un homme était de lui couper la barbe; qu'on appelait le poil des pieds, le poil du pubis; que l'on ne rasait ce poil que dans les maladies immondes, comme celle de la lèpre. Toutes ces figures si étrangères à notre style ne signifient autre chose sinon que le Seigneur, dans quelques années, délivrera son peuple d'oppression.
Le même Isaïe (chap. XX) marche tout nu, pour marquer que le roi d'Assyrie emmènera d'Egypte et d'Ethiopie une foule de captifs qui n'auront pas de quoi couvrir leur nudité.
Ezéchiel (chap. IV et suiv.) mange le volume de parchemin qui lui est présenté; ensuite il couvre son pain d'excréments, et demeure couché sur son côté gauche trois cent quatre-vingt-dix jours, et sur le côté droit quarante jours, pour faire entendre que les Juifs manqueront de pain, et pour signifier les années que devait durer la captivité. Il se charge de chaînes, qui figurent celles du peuple; il coupe ses cheveux et sa barbe, et les partage en trois parties: le premier tiers désigne ceux qui doivent périr dans la ville; le second, ceux qui seront mis à mort autour des murailles; le troisième, ceux qui doivent être emmenés à Babylone.
Le prophète Osée (chap. III) s'unit à une femme adultère, qu'il achète quinze pièces d'argent et un chomer et demi d'orge: "Vous m'attendrez, lui dit-il, plusieurs jours, et pendant ce temps nul homme n'approchera de vous: c'est l'état où les enfants d'Israël seront longtemps sans rois, sans princes, sans sacrifice, sans autel, sans éphod." En un mot, les nabis, les voyants, les prophètes, ne prédisent presque jamais sans figurer par un signe la chose prédite.
Jérémie ne fait donc que se conformer à l'usage, en se liant de cordes, et en se mettant des colliers et des jougs sur le dos, pour signifier l'esclavage de ceux auxquels il envoie ces types. Si on veut y prendre garde, ces temps-là sont comme ceux d'un ancien monde, qui diffère en tout du nouveau: la vie civile, les lois, la manière de faire la guerre, les cérémonies de la religion, tout est absolument différent. Il n'y a même qu'à ouvrir Homère et le premier livre d'Hérodote pour se convaincre que nous n'avons aucune ressemblance avec les peuples de la Haute Antiquité, et que nous devons nous défier de notre jugement quand nous cherchons à comparer leurs moeurs avec les nôtres.
La nature même n'était pas ce qu'elle est aujourd'hui. Les magiciens avaient sur elle un pouvoir qu'ils n'ont plus: ils enchantaient les serpents, ils évoquaient les morts, etc. Dieu envoyait des songes, et des hommes les expliquaient. Le don de prophétie était commun. On voyait des métamorphoses telles que celles de Nabuchodonosor changé en boeuf, de la femme de Loth en statue de sel, de cinq villes en un lac bitumineux.
Il y avait des espèces d'hommes qui n'existent plus. La race de géants Réphaïm, Enim, Néphilim, Enacim, a disparu. Saint Augustin, au liv. V de La Cité de Dieu, dit avoir vu la dent d'un ancien géant grosse comme cent de nos molaires. Ezéchiel (XXVII, II) parle des pygmées Gamadim, hauts d'une coudée, qui combattaient au siège de Tyr: et en presque tout cela les auteurs sacrés sont d'accord avec les profanes. Les maladies et les remèdes n'étaient point les mêmes que de nos jours: les possédés étaient guéris avec la racine nommée barad, enchâssée dans un anneau qu'on leur mettait sous le nez.
Enfin tout cet ancien monde était si différent du nôtre qu'on ne peut en tirer aucune règle de conduite; et si, dans cette Antiquité reculée, les hommes s'étaient persécutés et opprimés tour à tour au sujet de leur culte, on ne devrait pas imiter cette cruauté sous la loi de grâce.
Note 50 Jérém., chap. XXVII, v. 6.
Note 51 Jérémie, chap. XXVIII, v. 17.
Note 52 Isaïe, ch. XLIV et XLV.
Note 53 Exode, chap. XX, v. 5.
Note 54 Deutéronome, XXVIII.
Note 55 Il n'y a qu'un seul passage dans les lois de Moise d'où l'on pût conclure qu'il était instruit de l'opinion régnante chez les Egyptiens, que l'âme ne meurt point avec le corps; ce passage est très important, c'est dans le chapitre XVIII du Deutéronome: "Ne consultez point les devins qui prédisent par l'inspection des nuées, qui enchantent les serpents, qui consultent l'esprit de Python, les voyants, les connaisseurs qui interrogent les morts et leur demandent la vérité."
Il paraît, par ce passage, que si l'on évoquait les âmes des morts, ce sortilège prétendu supposait la permanence des âmes. Il se peut aussi que les magiciens dont parle Moïse, n'étant que des trompeurs grossiers, n'eussent pas une idée distincte du sortilège qu'ils croyaient opérer. Ils faisaient accroire qu'ils forçaient des morts à parler, qu'ils les remettaient, par leur magie, dans l'état où ces corps avaient été de leur vivant, sans examiner seulement si l'on pouvait inférer ou non de leurs opérations ridicules le dogme de l'immortalité de l'âme. Les sorciers n'ont jamais été philosophes, ils ont été toujours des jongleurs qui jouaient devant des imbéciles.
On peut remarquer encore qu'il est bien étrange que le mot de Python se trouve dans le Deutéronome, longtemps avant que ce mot grec pût être connu des Hébreux: aussi le Python n'est point dans l'hébreu, dont nous n'avons aucune traduction exacte.
Cette langue a des difficultés insurmontables: c'est un mélange de phénicien, d'égyptien, de syrien, et d'arabe; et cet ancien mélange est très altéré aujourd'hui. L'hébreu n'eut jamais que deux modes aux verbes, le présent et le futur: il faut deviner les autres modes par le sens. Les voyelles différentes étaient souvent exprimées par les mêmes caractères; ou plutôt ils n'exprimaient pas les voyelles, et les inventeurs des points n'ont fait qu'augmenter la difficulté. Chaque adverbe a vingt significations différentes. Le même mot est pris en des sens contraires.
Ajoutez à cet embarras la sécheresse et la pauvreté du langage: les Juifs, privés des arts, ne pouvaient exprimer ce qu'ils ignoraient. En un mot, l'hébreu est au grec ce que le langage d'un paysan est à celui d'un académicien.
Note 56 Ezéchiel, chap. XVIII, v. 20.
Note 57 Ibid., ch. XX, v. 25.
Note 58 Le sentiment d'Ezéchiel prévalut enfin dans la synagogue; mais il y eut des Juifs qui, en croyant aux peines éternelles, croyaient aussi que Dieu poursuivait sur les entants les iniquités des pères (이 문장에서 entants는 enfants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주): aujourd'hui ils sont punis, par-delà la cinquantième génération, et ont encore les peines éternelles à craindre. On demande comment les descendants des Juifs, qui n'étaient pas complices de la mort de Jésus-Christ, ceux qui étant dans Jérusalem n'y eurent aucune part, et ceux qui étaient répandus sur le reste de la terre, peuvent être temporellement punis dans leurs enfants, aussi innocents que leurs pères. Cette punition temporelle, ou plutôt cette manière d'exister différente des autres peuples, et de faire le commerce sans avoir de patrie, peut n'être point regardée comme un châtiment en comparaison des peines éternelles qu'ils s'attirent par leur incrédulité, et qu'ils peuvent éviter par une conversion sincère.
Note 59 Ceux qui ont voulu trouver dans le Pentateuque la doctrine de l'enfer et du paradis, tels que nous les concevons, se sont étrangement abusés: leur erreur n'est fondée que sur une vaine dispute de mots; la Vulgate ayant traduit le mot hébreu, sheol, la fosse, par infernum, et le mot latin infernum ayant été traduit en français par enfer, on s'est servi de cette équivoque pour faire croire que les anciens Hébreux avaient la notion de l'Adès et du Tartare des Grecs, que les autres nations avaient connus auparavant sous d'autres noms. Il est rapporté au chapitre XVI des Nombres (31-33) que la terre ouvrit sa bouche sous les tentes de Coré, de Dathan, et d'Abiron, qu'elle les dévora avec leurs tentes et leur substance, et qu'ils furent précipités vivants dans la sépulture, dans le souterrain: il n'est certainement question dans cet endroit ni des âmes de ces trois Hébreux, ni des tourments de l'enfer, ni d'une punition éternelle.
Il est étrange que, dans le Dictionnaire encyclopédique, au mot ENFER, on dise que les anciens Hébreux en ont reconnu la réalité; si cela était, ce serait une contradiction insoutenable dans le Pentateuque. Comment se pourrait-il faire que Moïse eût parlé dans un passage isolé et unique des peines après la mort, et qu'il n'en eût point parlé dans ses lois? On cite le trente-deuxième chapitre du Deutéronome (versets 21-24), mais on le tronque; le voici entier: "Ils m'ont provoqué en celui qui n'était pas Dieu, et ils m'ont irrité dans leur vanité; et moi je les provoquerai dans celui qui n'est pas peuple, et je les irriterai dans la nation insensée. Et il s'est allumé un feu dans ma fureur, et il brûlera jusqu'au fond de la terre; il dévorera la terre jusqu'à son germe, et il brûlera les fondements des montagnes; et j'assemblerai sur eux les maux, et je remplirai mes flèches sur eux; ils seront consumés par la faim, les oiseaux les dévoreront par des morsures amères; je lâcherai sur eux les dents des bêtes qui se traînent avec fureur sur la terre, et des serpents."
Y a-t-il le moindre rapport entre ces expressions et l'idée des punitions infernales telles que nous les concevons? Il semble plutôt que ces paroles n'aient été rapportées que pour faire voir évidemment que notre enfer était ignoré des anciens Juifs.
L'auteur de cet article cite encore le passage de Job, au chap. XXIV (15-19). "L'oeil de l'adultère observe l'obscurité, disant: L'oeil ne me verra point, et il couvrira son visage; il perce les maisons dans les ténèbres, comme il l'avait dit dans le jour, et ils ont ignoré la lumière; si l'aurore apparaît subitement, ils la croient l'ombre de la mon, et ainsi ils marchent dans les ténèbres comme dans la lumière (이 문장에서 la mon의 의미는 미상이다. - 역자 주); il est léger sur la surface de l'eau; que sa part soit maudite sur la terre, qu'il ne marche point par la voie de la vigne, qu'il passe des eaux de neige à une trop grande chaleur; et ils ont péché jusqu'au tombeau"; ou bien: "le tombeau a dissipé ceux qui pèchent", ou bien (selon les Septante), "leur péché a été rappelé en mémoire".
Je cite les passages entiers, et littéralement, sans quoi il est toujours impossible de s'en former une idée vraie.
Y a-t-il là, je vous prie, le moindre mot dont on puisse conclure que Moïse avait enseigné aux Juifs la doctrine claire et simple des peines et des récompenses après la mort?
Le livre de Job n'a nul rapport avec les lois de Moise. De plus, il est très vraisemblable que Job n'était point juif; c'est l'opinion de saint Jérôme dans ses questions hébraïques sur la Genèse. Le mot Sathan, qui est dans Job (I, 1, 6, 12), n'était point connu des Juifs, et vous ne le trouvez jamais dans le Pentateuque. Les Juifs n'apprirent ce nom que dans la Chaldée, ainsi que les noms de Gabriel et de Raphaël, inconnus avant leur esclavage à Babylone. Job est donc cité ici très mal à propos.
On rapporte encore le chapitre dernier d'Isaïe (23, 24): "Et de mois en mois, et de sabbat en sabbat, toute chair viendra m'adorer, dit le Seigneur; et ils sortiront, et ils verront à la voirie les cadavres de ceux qui ont prévariqué; leur ver ne mourra point, leur feu ne s'éteindra point, et ils seront exposés aux yeux de toute chair jusqu'à satiété."
Certainement, s'ils sont jetés à la voirie, s'ils sont exposés à la vue des passants jusqu'à satiété, s'ils sont mangés des vers, cela ne veut pas dire que Moïse enseigna aux Juifs le dogme de l'immortalité de l'âme; et ces mots: Le feu ne s'éteindra point, ne signifient pas que des cadavres qui sont exposés à la vue du peuple subissent les peines éternelles de l'enfer.
Comment peut-on citer un passage Isaïe pour prouver que les Juifs du temps de Moïse avaient reçu le dogme de l'immortalité de l'âme? Isaïe prophétisait, selon la computation hébraïque, l'an du monde 3380. Moise vivait vers l'an 2500; il s'est écoulé huit siècles entre l'un et l'autre. C'est une insulte au sens commun, ou une pure plaisanterie, que d'abuser ainsi de la permission de citer, et de prétendre prouver qu'un auteur a eu une telle opinion, par un passage d'un auteur venu huit cents ans après, et qui n'a point parlé de cette opinion. Il est indubitable que l'immortalité de l'âme, les peines et les récompenses après la mort, sont annoncées, reconnues, constatées dans le Nouveau Testament, et il est indubitable qu'elles ne se trouvent en aucun endroit du Pentateuque; et c'est ce que le grand Arnauld dit nettement et avec force dans son apologie de Port-Royal.
Les Juifs, en croyant depuis l'immortalité de l'âme, ne furent point éclairés sur sa spiritualité; ils pensèrent, comme presque toutes les autres nations, que l'âme est quelque chose de délié, d'aérien, une substance légère, qui retenait quelque apparence du corps qu'elle avait animé; c'est ce qu'on appelle les ombres, les mânes des corps. Cette opinion fut celle de plusieurs Pères de l'Eglise. Tertullien, dans son chapitre XXII de l'Ame, s'exprime ainsi: "Definimus animam Dei flatu natam, immortalem, corporalem, effigiatam, substantia simplicem. - Nous définissons l'âme née du souffle de Dieu, immortelle, corporelle, figurée, simple dans sa substance."
Saint Irénée dit, dans son liv. II, chap. XXXIV: "Incorporales sunt animae quantum ad comparationem mortalium corporum. - Les âmes sont incorporelles en comparaison des corps mortels." Il ajoute que "Jésus-Christ a enseigné que les âmes conservent les images du corps, - caracterem corporum in quo adoptantur, etc." On ne voit pas que Jésus-Christ ait jamais enseigné cette doctrine, et il est difficile de deviner le sens de saint Irénée.
Saint Hilaire est plus formel et plus positif dans son commentaire sur saint Matthieu: il attribue nettement une substance corporelle à l'âme: "Corpoream naturae suae substantiam sortiuntur."
Saint Ambroise, sur Abraham, liv. II, chap. VIII, prétend qu'il n'y a rien de dégagé de la matière, si ce n'est la substance de la Sainte Trinité.
On pourrait reprocher à ces hommes respectables d'avoir une mauvaise philosophie; mais il est à croire qu'au fond leur théologie était fort saine, puisque, ne connaissant pas la nature incompréhensible de l'âme, ils l'assuraient immortelle, et la voulaient chrétienne.
Nous savons que l'âme est spirituelle, mais nous ne savons point du tout ce que c'est qu'esprit. Nous connaissons très imparfaitement la matière, et il nous est impossible d'avoir une idée distincte de ce qui n'est pas matière. Très peu instruits de ce qui touche nos sens, nous ne pouvons rien connaître par nous-mêmes de ce qui est au-delà des sens. Nous transportons quelques paroles de notre langage ordinaire dans les abîmes de la métaphysique et de la théologie, pour nous donner quelque légère idée des choses que nous ne pouvons ni concevoir ni exprimer; nous cherchons à nous étayer de ces mots, pour soutenir, s'il se peut, notre faible entendement dans ces régions ignorées.
Ainsi nous nous servons du mot esprit, qui répond à souffle, et vent, pour exprimer quelque chose qui n'est pas matière; et ce mot souffle, vent, esprit, nous ramenant malgré nous à l'idée d'une substance déliée et légère, nous en retranchons encore ce que nous pouvons, pour parvenir à concevoir la spiritualité pure; mais nous ne parvenons jamais à une notion distincte: nous ne savons même ce que nous disons quand nous prononçons le mot substance; il veut dire, à la lettre, ce qui est dessous, et par cela même il nous avertit qu'il est incompréhensible: car qu'est-ce en effet que ce qui est dessous? La connaissance des secrets de Dieu n'est pas le partage de cette vie. Plongés ici dans des ténèbres profondes, nous nous battons les uns contre les autres, et nous frappons au hasard au milieu de cette nuit, sans savoir précisément pour quoi nous combattons.
Si l'on veut bien réfléchir attentivement sur tout cela, il n'y a point d'homme raisonnable qui ne conclût que nous devons avoir de l'indulgence pour les opinions des autres, et en mériter.
Toutes ces remarques ne sont point étrangères au fond de la question, qui consiste à savoir si les hommes doivent se tolérer: car si elles prouvent combien on s'est trompé de part et d'autre dans tous les temps, elles prouvent aussi que les hommes ont dû, dans tous les temps, se traiter avec indulgence.
Note 60 Le dogme de la fatalité est ancien et universel: vous le trouver toujours dans Homère. Jupiter voudrait sauver la vie à son fils Sarpédon; mais le destin l'a condamné à la mort: Jupiter ne peut qu'obéir. Le destin était, chez les philosophes, ou l'enchaînement nécessaire des causes et des effets nécessairement produits par la nature, ou ce même enchaînement ordonné par la Providence: ce qui est bien plus raisonnable. Tout le système de la fatalité est contenu dans ce vers d'Annaeus Sénèque (épît. CVII):
Ducunt volentem fata, nolentem trahunt.
On est toujours convenu que Dieu gouvernait l'univers par des lois éternelles, universelles, immuables: cette vérité fut la source de toutes ces disputes inintelligibles sur la liberté, parce qu'on n'a jamais défini la liberté, jusqu'à ce que le sage Locke soit venu; il a prouvé que la liberté est le pouvoir d'agir. Dieu donne ce pouvoir; et l'homme, agissant librement selon les ordres éternels de Dieu, est une des roues de la grande machine du monde. Toute l'Antiquité disputa sur la liberté, mais personne ne persécuta sur ce sujet jusqu'à nos jours. Quelle horreur absurde d'avoir emprisonné, exilé pour cette dispute, un Arnauld, un Sacy, un Nicole, et tant d'autres qui ont été la lumière de la France!
Note 61 Le roman théologique de la métempsycose vient de l'Inde, dont nous avons reçu beaucoup plus de fables qu'on ne croit communément. Ce dogme est expliqué dans l'admirable quinzième livre des Métamorphoses d'Ovide. Il a été reçu presque dans toute la terre; il a été toujours combattu; mais nous ne voyons point qu'aucun prêtre de l'Antiquité ait jamais fait donner une lettre de cachet à un disciple de Pythagore.
Note 62 Ni les anciens Juifs, ni les Egyptiens, ni les Grecs leurs contemporains, ne croyaient que l'âme de l'homme allât dans le ciel après sa mort. Les Juifs pensaient que la lune et le soleil étaient à quelques lieues au-dessus de nous, dans le même cercle, et que le firmament était une voûte épaisse et solide qui soutenait le poids des eaux, lesquelles s'échappaient par quelques ouvertures. Le palais des dieux, chez les anciens Grecs, était sur le mont Olympe. La demeure des héros après la mort était, du temps d'Homère, dans une île au-delà de l'Océan, et c'était l'opinion des esséniens.
Depuis Homère, on assigna des planètes aux dieux, mais il n'y avait pas plus de raison aux hommes de placer un dieu dans la lune qu'aux habitants de la lune de mettre un dieu dans la planète de la terre. Junon et Iris n'eurent d'autres palais que les nuées; il n'y avait pas là où reposer son pied. Chez les Sabéens, chaque dieu eut son étoile; mais une étoile étant un soleil, il n'y a pas moyen d'habiter là, à moins d'être de la nature du feu. C'est donc une question fort inutile de demander ce que les anciens pensaient du ciel: la meilleure réponse est qu'ils ne pensaient pas.
Note 63 Saint Matthieu, chap. XXII, v. 4.
Note 64 Saint Luc, chap. XIV.
Note 65 Saint Luc, chap. XIV, v. 26 et suiv.
Note 66 Saint Matthieu, chap. XVIII, v. 17.
Note 67 Saint Matthieu, chap. XXIII.
Note 68 Ibid., chap. XXVI, v. 59.
Note 69 Matthieu, chap. XXVI, v. 61.
Note 70 Il était en effet très difficile aux Juifs, pour ne pas dire impossible, de comprendre, sans une révélation particulière, ce mystère ineffable de l'incarnation du Fils de Dieu, Dieu lui-même. La Genèse (chap. VI) appelle fils de Dieu les fils des hommes puissants: de même, les grands cèdres, dans les psaumes (LXXIX, 11), sont appelés les cèdres de Dieu. Samuel (I. Rois, XVI, 15) dit qu'une frayeur de Dieu tomba sur le peuple, c'est-à-dire une grande frayeur; un grand vent, un vent de Dieu; la maladie de Saül, mélancolie de Dieu. Cependant il paraît que les Juifs entendirent à la lettre que Jésus se dit fils de Dieu dans le sens propre; mais s'ils regardèrent ces mots comme un blasphème, c'est peut-être encore une preuve de l'ignorance où ils étaient du mystère de l'incarnation, et de Dieu, fils de Dieu, envoyé sur la terre pour le salut des hommes.
Note 71 Lorsqu'on écrivait ainsi, en 1762, l'ordre des jésuites n'était pas aboli en France. S'ils avaient été malheureux, l'auteur les aurait assurément respectés. Mais qu'on se souvienne à jamais qu'ils n'ont été persécutés que parce qu'ils avaient été persécuteurs; et que leur exemple fasse trembler ceux qui, étant plus intolérants que les jésuites, voudraient opprimer un jour leurs concitoyens qui n'embrasseraient pas leurs opinions dures et absurdes. [Note ajoutée en 1771]
Note 72 Voyez l'excellent livre intitulé Le Manuel de l'Inquisition.

 

 

'Voltai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Letters on England  (0) 202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