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라는 용어의 허실
‘자본주의(capitalism)’이라는 용어는 너무 많이 모호하게 사용되어서 확정된 역사기간의 명칭으로서 사용될 수 없다.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원래 폄훼적 의미에서 사용되어서 그 용어는 이 의미를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하여 얻어진 큰 이익을 선호하는 체제’) 대중적인 용법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용어가 중립적인 과학적 의미에서도 사용되었지만 많은 다양한 의미들을 지녔다. 마르크스에 따라서 생산수단의 모든 축적이 ‘자본’으로 지칭되는 한, ‘자본주의’는 특정 의미에서 ‘산업주의’와 동의어라고 우리는 심지어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를 아주 옳게 기술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사회에서 국가가 모든 자본을 ‘국가-자본주의’로서 소유한다. 이 이유들 때문에, 마르크스가 분석하여 ‘자본주의’로 지칭한 저 기간에 대하여 ‘무제한적인 자본주의(unrestrained capitalism)’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우리 자신의 기간에 대하여 개입주의(interventionism)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개입주의’라는 명칭은 정말로 우리 시대에서 사회공학의 세 가지 주요 유형들을 포괄할 수 있을 터이다: 러시아의 집단주의적 개입주의; 스웨덴과 ‘더 작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개입주의 그리고 미국에서 뉴딜(New Deal) 정책; 그리고 심지어 엄격히 통제된 파시스트 방법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로 ㅡ 다시 말해서, 무제한적인 자본주의 ㅡ 지칭한 것은 19세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335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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