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주의에 대한 논박
20. 역사관련 예측과 지식의 성장.
그러므로 나로부터 여하한 예언도 기대하지 말라: 사람이 내일
발견할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우선권을 확보하려고 오래전에
그것을 공표했을 터이다.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과 별도로, 비결정론을 선호하는 두 가지 긍정적 논증을 내가 지금까지 토론했다: 과학적 지식의 근사치적 특징으로부터 논증과 과거와 미래의 비대칭으로부터 논증을 토론했다.
이제 나는 위 두 가지 논증 중 어느 것보다 혹시 덜 근본적이지만, 여전히 매우 중요한 (23절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세 번째 논증으로 왔고 특히 왜냐하면 ‘과학적’ 결정론을 공식적으로 반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그 논증을 인간적 용어로 서술하겠다. 놀랍게도, 그 논증은 순전히 물리학적 용어로 완벽하게 다시 서술될 ㅡ 게다가 사실상, 더 정확하게 서술될 ㅡ 수 있다.
그 논증의 핵심은, 우리 자신이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자신에 관한 특정한 것들이 있다는 고찰이다; 더욱 특히, 우리 자신의 지식 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결과들을, 과학적으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어린이의 지식 성장을 예측할 수 있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더 현명한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지식 성장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그들 자신이 내일에만 알 것을 오늘에 예측하거나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식화로 인하여, 우리가 내일에만 알 것을 오늘 예측한다는 관념에 포함된 실재적 모순이 있을 것이라고 밝혀진다; 그리고 정말 그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이 우리의 정식화 때문만 아니라고 그리고 그 모순에 의하여 완벽한 자기-예측 가능성이 실제로 막힌다고 확신하기 쉽지 않다. 그 모순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고 다음 두 절에서 밝혀질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기 자신의 모든 예측 결과 모두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자가 있을 리 없다는 명제의 결과 중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 결과 중 하나는 그 과학자가 자기 자신의 미래 상태 중 몇 가지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 ‘근방’의 모든 상태 즉, 그가 눈에 띄게 영향을 미치는 자기 환경의 저 부분의 모든 상태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유인즉 그가 내일 알 것을 그 자신이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내일 행동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방 상태는 ㅡ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관찰자들이 눈에 띄게 그에게 간섭하지도 않고 그의 근방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 관찰자들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예측될 수 있을지라도 ㅡ 그 자신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예측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물리 체계도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예측될 수 없다고 (그리고 태양계와 같은 행성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11절의 용어사용법으로 외부로부터 예측 가능성으로서 기술되어야 한다고) 귀결된다.
그 논증은 역사주의라는 교설(the doctrine of historicism)을 ㅡ 사회과학의 과제가 인간 역사의 과정을 예측하는 것이라는 교설 ㅡ 논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다음과 같이 논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측기의 복잡성이 무엇이든 완벽한 자기-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밝혀질 수 있다면,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여하한 예측기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또한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예측기들의 여하한 ‘모임’도 그 모임의 미래 지식 상태를 예측할 수 없다.
(2) 인간 역사의 흐름은 인간 지식의 성장에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받는다. (이 가정의 진실성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우리의 과학적 관념을 포함하는 우리의 관념에서 이런저런 종류의 물질적 발전이라는 부산물만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틀림없이 인정된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역사의 미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 아무튼 인간 역사의 미래 흐름에 있는 면모 중에서, 우리의 지식 성장에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저 면모들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이 논증은 물론 모든 사회적 예측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논증은 사회적 이론을 ㅡ 예를 들어, 경제이론 (그러나 ‘역사관련 이론’은 아니다) ㅡ 시험하는 가능성과 완벽하게 양립될 수 있고, 그 시험하는 방법은 특정 발전이 특정 조건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예측을 그 이론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고 이 예측을 시험하는 것이다.
21. 이론적 지식의 성장 예측하기.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대한 예측이 무엇을 포함할지 더 가까이 고찰하자. 그 예측은 다음 능력을 포함할 것이다; 어떤 미래 날짜에 우리가 (a) 현재 수용되지 않아서 혹시 현재 알려지지 않은 특정 이론들을 잘 시험된 것으로서 수용할 (물론, 잠정적으로) 것이라고 지금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 또는 (b) 초기조건과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연접하여, 지금 수용되거나 나중에 수용되는 이론들로부터 지금 알려지지 않은 특정 설명이나 예측을 우리가 도출할 것이라고 지금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
현재 절에서 나는 이론적 지식의 성장에 대한 예측을, 즉 문제 (a)을 다루겠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전에 수용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험들에 근거한 어떤 이론의 수용을 우리가 혹시 예측할 수 있을지 이다. 부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예비적 질문이다: 혹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론의 내용을 ㅡ 어떤 사람에게 떠오를 것이거나 어떤 사람에 의하여 제기될 새로운 관념 ㅡ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지.
이것이 부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내가 말하는 이유는, 흔히 어떤 이론이 새로이 수용된다는 의미에서 새로울 때 그 이론이 보이는 만큼 그렇게 전혀 새롭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심지어 오래전에 제기되어 잊혔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이론을 선호하는 증거가 없거나 그 이론이 요구되는 문제나 그 이론이 해결할 수 있던 문제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하여, 새로운 관념들의 성장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수용된’ 지식의 성장에 우리가 주로 관심을 둔다면, 중요한 것이 새로운 문제들이나 새로운 증거를 토대로 어떤 이론의 잠정적 수용이라고 밝혀진다.
이제 먼저 우리의 새로운 이론적 관념들의 성장이라는 예비적 질문을 고찰하자. 심리학자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생리학자는 어린이가 (혹은 동물) 특정 환경적 자극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하고 특정 시험들을 거쳐서 수용할 이론이나 기대를 예측할 것이다: 화상을 입은 어린이는 (혹은 고양이) 불을 무서워한다. 우리의 심리학적 (혹은 생리학적이나 물리학적 또는 경제적...) 지식이 매우 훌륭하다면 우리가 유사한 방법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우리가 아마도 상상할 것이고, 특정 환경적 자극의 ㅡ 가령 3주 내로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할 (우리의 물리적이거나 경제적 환경에 대한 우리 지식에 따라서) ㅡ 영향을 받아서 가령 한 달 내로 우리에게 최초로 떠오를 이론들을 오늘 예측할 수 있다고 우리가 아마도 상상할 것이다.
이제 그 문제를 표현하는 이 방식에 터무니없는 것이 있다. 이유인즉, 어떤 이론들이 최초로 한 달 앞서서 우리에게 떠오를지를 우리가 오늘 안다면 이런저런 의미에서 그 이론은 물론 한 달 내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떠오를 터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식의 미래 성장으로서 기술될 여하한 것도 우리가 미리 알지 못했다.
내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이 논증에 대항하여, 다음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어떤 관념이 한 달이라는 시간 내에 어떤 사람에게 떠오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 관념이 그때만 알려져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리가 오늘 예언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예측은 비밀로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은, 내부로부터라기보다 외부로부터 그 체계를 우리가 예측했음을 함의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그 체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조치를 (비밀)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가 예측을 실행한 그 체계에 우리 자신이 정말로 속한다고 심지어 가정하기에 우리가 얻은 결과를 비밀로 지키기로 우리는 결심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을 우리가 실행할 것임을 ㅡ 특히 우리 지식의 기대되지 않은 성장 때문에, 상황이 변할지라도 ㅡ 우리가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우리는 순진하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의 그런 것들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는 가정은 문제가 되고 있는 질문을 ㅡ 자기-예측이 가능한지 ㅡ 회피하는 것에 해당할 터이다.
또 다른 반론은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그 반론은, 우리가 예측하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지식의 성장을 우리가 예측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전달하려고 의도하는 모든 것이나 심지어 여하한 것도 이해하지 않고 가령 흰 종이 위에 적을 수 있는 검은 형태들과 역사에 미치는 그 형태들의 영향을 우리는 예측할 것이다. 이 경우 그 이론들을 예측함으로써 우리가 그 이론들에 앞섰다(have anticipated)고 언급될 수 없다.
그 답변은 다시, 우리가 이 검은 형태들을 예측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이 검은 형태들을 기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예측을 인식하는 우리나 여하한 사람도 이 검은 형태들을 지금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검은 형태들의 창시(創始: genesis)가 미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 창시(創始: genesis)가 지금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이 검은 형태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른 효과를 낼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우리에게 관련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관련되는 유일한 것은, 그 체계 내부로부터 새로운 관념들의 창시(創始: genesis)를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면 상당히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새로운 증거의 영향을 받는 어떤 이론의 수용에 대한 예측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로 이제 내가 왔다.
이전과 같은 동일한 골칫거리에 들지 않기 위하여, 문제의 그 새로운 증거가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없다고 우리는 틀림없이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측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에 해당할 터이다; 아직 수용되지 않은 이론을 선호하는 증거가 지금 있다고 지적하는 것과 그 이론이 마땅히 지금 수용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예측은 다시 지식의 미래 성장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에 대한 서술일 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지식을 토대로, 즉 지금 수용된 이론들을 토대로 아직 관찰되지 않은 사건들을 ㅡ 관찰될 때 아직 수용되지 않은 어떤 이론을 승인하는 증거를 제공하여 그 이론의 수용으로 이어질 ㅡ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현재 지식을 토대로 예측될 수 있는 증거가 발생할지라도, 새로운 이론의 수용은 그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할 될 수 없다. 이유인즉 현재 지식의 도움을 받아서 예측될 수 있는 증거는 종류에서 새롭지 않거나, 혹은 새롭다면 우리의 현재 이론을 확인하는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수용하도록 유도하기보다) 시험에 해당할 터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론의 수용을 정당화할 증거의 종류는, 우리의 현재 지식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새로운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예측될 수 있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그 증거에 틀림없이 결정적(crucial) 증거의 특징이 있다.
나에게 이 논증은 완전히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정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ㅡ 이유인즉 그 논증이, 모든 이론이 자체의 진실성을 함의하므로 자체의 배척을 포함하는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 이 논증은 역사주의라는 영향력 있는 교설을 반증하기에 충분하다; 이유인즉 이 논증으로 인하여, 우리의 이론적 지식 성장을 우리가 과학적 과정을 통하여 예측할 수 없다고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의 지식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다고 ㅡ 우리의 현재 이론들이 모두 참이고 완벽하다고 ㅡ 여하한 시간에도 우리가 예측할 수 있을 터이다.)
이 모든 것 때문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여전히 열린 채 남는다. 우리의 이론적 지식 성장이 끝나서 우리의 이론들이 완벽할 뿐 아니라 참이라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될지라도 특정 종류의 성장이 여전히 허용될 터이다; 이유인즉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른 초기조건에 우리의 이론을 적용하는 끝없는 과제가 여전히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라플라스의 악마라면 ㅡ 우리가 모든 보편법칙과 또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모든 유의미한 초기조건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ㅡ, 우리 자신의 미래 예측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을 터인가?
ㅡ 칼 포퍼 저, 윌리엄 바틀리 III세, ‘열린 우주,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 2000년, 62-7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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