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적이 있다. 5년 전 히말라야 라다크를 트레킹할 때다. 히말라야에서 30여년째 사는 청전 스님이 오지 마을과 사원들에 해마다 영양제와 약, 돋보기 등을 지프차 가득 싣고 가 전해주는 길에 동행한 것이다. 보시 길의 최후 목적지는 지상 최후의 오지 푹탈사원이었다. 비포장도로도 끊긴 뒤 천 길 낭떠러지 위의 위태위태한 외길을 꼬박 이틀을 걷자 까마득한 벼랑 끝에 벌집처럼 붙어 있는 푹탈사원이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그 희유한 사원의 나신에 심취해 물집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틀 뒤 반대편 산행길엔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급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감에만 의존한 채 급류들을 수차례 건너자 이번엔 거대한 벽이 가로막았다. 세계 최고 도보 고갯길이라는 해발 5080미터의 싱고라였다. 배낭은 모두 노새에 지워 보냈지만 며칠째 반찬 하나 없는 라다크 수제비만 먹고, 전날 밤 비박 때 등에 괴인 자갈과 추위 때문에 잠을 설친 때문인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더구나 안내책자엔 일주일 걸린다는 코스를 이틀에 넘었으니 이만저만한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눈부신 정상의 설경과 호수들은 별천지였다.
하산길도 별났다. 길은 눈사태에 휩쓸려가 초장부터 난관이었다. 50대 후반의 청전 스님, 70대 초반과 60대 등 세 동행 모두 산엔 이골이 난 분들이었다. 그때까지도 기자랍시고, 카메라와 비디오를 메고 있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숟가락마저 던져버리고만 싶었다. 더구나 몸엔 빵 한 조각, 사탕 하나가 없었다. 동행들은 이미 몇 시간 전, 시야 너머로 사라졌는데 가장 나이 적은 나만이 홀로 처졌다. 결국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는데, 하산할 당시엔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걸음만 같았다.
한나절을 내려올 때쯤 배낭을 멘 사람이 보였다. 몸을 비틀고 다리까지 저는 60대 여성이었다. 중풍을 맞아 반신불수인 듯했다. 저 몸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그가 짐을 져달라는 것도 아닌데 속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왜 “혼자냐”니까, “남편과 함께 왔는데 먼저 내려갔다”고 했다. 먼저 가버린 남편에게 화가 났다. 휭하니 가버린 동행들도 덩달아 미웠다. 그래서 뒤통수가 너무도 당겼지만, 그에게 손을 흔들고선 웃어주지도 못하고 뒤돌아서버렸다.
그렇게 두 시간쯤 내려왔을까. 도무지 한 사람의 짐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큰 배낭과 텐트까지 지고 가는 백발의 신사를 만났다. 남편이었다. 체코에서 왔다는 그는 “아내의 죽기 전 소원이 이곳에 오는 것이어서 왔다”며 “해 지기 전에 야영할 장소를 잡아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하려고 먼저 내려왔다”고 했다. 미안했다. 미워한 것이.
세월호 유족들도 1년 동안 싱고라의 그처럼 절며 절며 왔다. 울고 통곡하고 기함한 세월이었다. 모두가 함께 울어줘도 감내하기 어려운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것이 더한 아픔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싱고라의 나 같지는 않았다. 목숨을 건 단식을 한 유민 아빠 곁에서 함께 32일간 단식하고, 이번에 세월호 인양과,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며 다시 단식에 나선 도철 스님과 불자들, 유민 아빠의 뒤를 이어 40여일을 단식한 방인성·김홍술 목사, 현장 미사를 드리며 곁을 지킨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과 수녀들, 촛불교회 최헌국 목사를 비롯해 농성장을 지키며 말없이 헌신해온 수많은 이들 외에도 무려 5만여명이 팽목항과 안산에서 자원봉사에 나섰고, 220여만명이 분향소에 조문했고, 600여만명이 세월호특별법 제정 청원에 서명했다. 모두 살아가기에 바쁘고, 내 갈 길이 바빴음에도.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싱고라에서 나도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어 겸연쩍었더라도 용기를 냈어야 했다. 갈 길이 바빠도 10여분이나마 곁에 앉아 땀을 씻으며 함께했어야 했다. 비록 도와주지 못할망정 미워하기보다는 적어도 따스한 말을 건네고 손이라도 잡아 위로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월호 참사 뒤 유족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1년 이후’에도 그렇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사람들처럼 말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