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목민관 황준량의 눈물어린 상소문 / 유홍준/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8. 09:13

사설.칼럼칼럼

[특별기고] 목민관 황준량의 눈물어린 상소문 / 유홍준

등록 :2015-05-07 18:32

 

 

“상소 내용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어 내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단양의 조세와 부역을 앞으로 10년간 감면한다.”(조선왕조실록, 명종 11년 5월17일) 실로 감격적인 결정이었다. 황준량의 공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이다.
민속촌에 가면 옛 관아 건물에는 으레 오라줄에 묶인 백성이 형틀 앞에서 문초를 받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있다. 이는 옛날에 원님, 사또로 불린 지방 수령은 한 고을의 행정, 사법권을 모두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건 정말로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지방관이란 모름지기 한 고을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牧民官)이었다. 그럼에도 춘향전의 변사또처럼 못된 탐관오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상 모범을 보인 참된 목민관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답사길에 올랐다가 단양 수몰지구에서 옮겨다 놓은 황준량(黃俊良) 군수의 공덕비를 보고 있자니 우리 역사에 이처럼 훌륭한 목민관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때는 16세기 중엽, 조선 명종 연간 이야기다. 을사사화를 비롯하여 온갖 변란이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기에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여 도망가는 유망(流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임꺽정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황준량은 고을의 참상을 살피고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신(臣)이 군수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단양은 본디 원주의 조그마한 고을이었는데 외적을 섬멸한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된 곳입니다. 그러나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쪽은 큰 강이 흘러 농토는 본래 척박해서 홍수와 가뭄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했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갈 길이 날로 옹색해지자 백성들이 다 도망가고 이제는 부역에 나아갈 수 있는 민가가 겨우 40호에 불과합니다. 경지 면적도 (옛날의 4분의 1인) 300결도 되지 않아 징수할 곡식의 반밖에 받아내지 못했는데 그나마도 피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역의 재촉과 가혹한 세금 때문에 가난한 자는 더욱 곤궁해지고, 곤궁한 자는 이미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아, 새들도 남쪽 가지에 둥지를 틀고, 이리도 자기가 살아가던 언덕을 향하여 머리를 돌린다고 하는데, 고향을 떠나기 싫기는 사람이 더욱 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백성들이 농토와 마을을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살을 에어내고 골수를 우려내는 참혹한 형벌 때문에 잠시도 편안히 살 수가 없어 마침내 온 고을이 폐허가 되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비상한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신이 외람되게 세 가지 계책을 진달하겠사오니 삼가 전하께서는 살펴주시옵소서.”

그리고 황준량 군수는 세 가지 계책으로 상책, 중책, 하책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요구였다.

“지금부터 10년간 모든 부역을 완전히 면제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백성들이 즐거이 살면서 일하게 한다면 모두들 돌아올 것이고, 황폐해진 100리 땅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은 10년이 너무 길다고 하겠지만 이는 근본을 아는 자의 말이 아닙니다. 10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면 100년을 보장할 수 있지만 3년, 5년에 그친다면 도로 피폐하게 될 것이니 원대한 계획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요구하면서 만약 이것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중책이라도 받아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단양만 10년 동안 면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군에서 강등시켜 원주목에 예속된 고을로 만들어 아직 남아 있는 백성들이라도 참혹한 피해를 면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마저 들어줄 수 없다면 최후의 하책으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큰 폐단 열 가지라도 제거해야 한다며 이를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

“첫째로 조정에 공납해야 할 목재가 큰 것만 400, 작은 것이 수만개에 달하는데 40호의 인구로 험한 산을 오르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 운반하자면 남녀가 모두 기진하고 소와 말이 죽는 일도 생기니 이를 줄여 주십시오.

둘째로 종이 만드는 부역은 다른 일보다 배나 힘든데 유독 이 고을에만 배당량이 많아 200여권이나 되니 이를 견감하여 주십시오.

셋째로 사냥하여 1년간 공물로 바치는 노루가 40이고 꿩이 200이니 숫자를 줄여 주십시오.

넷째는 도망간 대장장이 일을 민가에 덮어씌운 것이고, 다섯째는 악공(樂工)의 차출이고, 여섯째는 보병(步兵)으로 나갈 사람이 없는 것이고, 일곱째는 지방관리 자제를 서울로 올려보내는 기인(其人) 제도의 폐해입니다.

여덟째는 병영에 바치는 사슴, 노루, 소의 가죽 양을 감하여 주십시오.

아홉째는 단양이 군이라고 해서 해미의 목탄, 연풍의 목재, 영춘의 꿀벌상자 등 다른 고을 세금까지 떠맡고 있는데 이를 다 해당 고을로 환원시켜 주십시오.

열째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이름도 모르는 약재를 부담시켜 포목으로 사서 바치고 있으니 이런 괴이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중 웅담, 사향, 복령, 지황 등은 특히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황준량은 이 열 가지 폐단이란 극히 피해가 심한 것만을 말한 것일 뿐 전체적으로 볼 때 10분의 2쯤 되는 것이니 이것조차 개혁하지 못한다면 백성을 소생시킬 수 없다며 다시 눈물로 호소한다.

“아, 영동의 조그마한 고을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까다로운 법령과 번거로운 조항으로 남아 있는 백성에게 부역과 세금을 징수하여 기필코 그 숫자를 채우려 하니 이는 물고기를 끓는 솥에다 기르고 새를 불타는 숲에 깃들이게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난해처럼 긴급하지 않은 공물이나 감면해 주며 생색이나 내고 만다면 비록 감면해 주었다는 말은 있어도 실상은 소생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집도 없이 떠도는 백성이 궁벽한 산골짝에서 원망에 차서 울부짖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며 삼가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황준량의 상소문이 조정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대신들의 논의가 일어났다. 혹자는 10년은 너무 길다고도 했고, 혹자는 다른 고을과 형평성의 문제가 일어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자라고 했는데,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갑론을박 끝에 결단의 날이 다가왔다. 상소한 지 꼭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11년(1557) 5월17일자에는 이때 임금이 하달한 조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10개 조항의 폐단을 진달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어 내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단양의 조세와 부역을 앞으로 10년간 감면한다.”

실로 감격적인 결정이었다.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올바른 한 목민관이 피폐한 한 고을을 이렇게 살려낸 것이다. 훗날 퇴계 이황은 황준량의 행장(行狀: 일생의 기록)을 지으면서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전례 없는 이러한 은전을 얻었겠는가”라고 칭송하였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오늘날 도지사, 시장, 군수는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정치인의 몫으로 되어 요즘 세태를 보면 이 지위를 옛날 원님 사또 벼슬로 생각하거나 정치적 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로 삼는 안타깝고 씁쓸하고 괘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방 수령의 근본은 모름지기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이다. 목민관 황준량의 공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