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정변의 소용돌이/ 이경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29. 12:38
 

문화

노론, 경종에 세자 대리청정 요청했다 피바람 불러

등록 :2015-05-28 19:08

 

노론의 지도자였던 노론사대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이들은 경종 대 세자(훗날 영조) 책봉을 주도하고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신축년의 환국으로 유배되고 다음 해 목호룡의 고변이 일어나자 모두 사약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점진적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김창집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머지는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노론의 지도자였던 노론사대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이들은 경종 대 세자(훗날 영조) 책봉을 주도하고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신축년의 환국으로 유배되고 다음 해 목호룡의 고변이 일어나자 모두 사약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점진적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김창집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머지는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⑤ 정변의 소용돌이
1709년(숙종 35)과 1714년의 논쟁 이후 20여 년은 이렇다 할 논쟁이 없었다. 그 시기는 숙종 말년에서 경종 대를 지나 영조 초반에 걸쳐 있었다. 당시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쟁이 치열했는데, ‘신임환국’(辛壬換局)이 하이라이트였다. 신임환국은 신축년(경종 원년)과 임인년(경종 2)에 일어난 급격한 정변을 이른다. 신임환국의 패배자는 노론이었다. 숙종 후반기부터 주류로 성장하던 노론은 이 사건으로 미증유의 타격을 입었고, 호락논쟁의 당사자들도 직간접으로 휘말렸다.

병신처분(丙申處分)

말년의 숙종은 답답했다. 효종, 현종에 이어 적자(嫡子)로 왕위를 계승한 자신의 권위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유생, 정신적 지도자 산림(山林)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관료가 두루 포진한 붕당 역시 완결체로 성장해 있었다. 비대해진 붕당을 상대하기 위해 그는 극단적인 처방을 종종 감행했다. 정국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환국(換局)이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기도 했고,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중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집권 30년을 넘어서자 새로운 불씨가 자라났다. 노론은 점차 주류가 되어갔고,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생모를 사사한 자신과 그 처분을 지지한 노론에 대해 세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론과 세자의 악연을 어떻게 풀지, 숙종은 출구 찾기가 쉽지 않았다.

노론은 세자의 미래에 의구심을 갖는 숙종의 낌새를 눈치챘다. 그리고 소론에 대한 사상 공세를 강화했다. 1709년 노론의 젊은 유생들은 <예기유편>이란 저서를 비판했다. 그 책은 소론의 지도자였던 최석정의 저술이었다. 1715년에는 <가례원류>란 저서를 두고 논쟁이 불붙었다. 이 문제는 노론과 소론의 정신적 지도자인 송시열과 윤증의 행위 문제로 번졌다. 두 시기 모두 묘하게도 호락논쟁이 발단한 시기와 겹친다. 노론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던 모습은 간데없이, 숙종은 점차 노론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1716년(숙종 42) 숙종은 드디어 승부수를 던졌다. 윤증의 행위를 잘못이라 선언하고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해가 병신년이었으므로 ‘병신처분’이라 부른다. 다음 해에는 김창집, 이이명, 권상하를 삼정승에 임명하였다. 영의정 김창집은 낙론을 형성한 김창협·김창흡 형제의 맏형이었다. 우의정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노론을 대표하는 산림이었다. 학계와 관료, 낙론과 호론의 대표자가 정승으로 임명된 것이다. 권상하는 사직하고 실제로 상경하지는 않았지만, 숙종의 일련의 처분은 노론 선비들에게 이상적인 조처로 깊게 남았다.

숙종의 ‘병신처분’으로 득의양양
역모사건 터지며 궤멸적 타격
‘노론사대신’ 사약 등 70여명 죽어
한원진 등 호론은 귀향으로 몸 피해
서울에 남은 낙론은 거의 와해

경종과 신임환국

경종은 외로웠다. 부왕 숙종의 재위가 46년, 동생 영조의 재위가 52년이었다. 두 왕 사이에 놓인 그의 재위 4년은 마치 희미한 별 같았다. 실존 자체가 논란의 연속이었다. 그의 탄생을 두고 격심한 정쟁이 일어나 서인이 하루아침에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모친인 희빈 장씨의 죽음, 그 이후에도 노론과 소론이 자신을 두고 경쟁하는 것을 보았다. 뿐인가. 숙종이 말년에 노론을 강화하자 그는 세자 자리도 불안하게 느꼈다. 어쨌든 즉위했으나, 부왕에 의해 이미 안배된 노론 정권에서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몸도 약했다.

경종 원년(신축년). 경종에게 후사가 없다는 논의가 일자, 김창집·이건명 등은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삼자고 요청했고, 경종은 순순히 들어주었다. 자신감을 얻은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세자의 대리청정 건이 논의되었다. 현왕 경종의 나이가 33살, 즉위한 지 1년 반을 채 넘기지 않았다. 왕권을 능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한 승부수였다. 식물임금(?) 같았던 경종의 존재감이 유일하게 드러난 순간이 이때였다. 경종은 언제 그랬냐 싶게 과감하게 움직였고 정국은 일변했다. 노론은 왕권을 위협한 세력으로 몰려 영의정 김창집 이하 많은 이들이 유배에 처해졌다. 그리고 정권은 소론에 넘어갔다.

다음 해인 임인년에는 어마어마한 고변(告變) 사건이 터졌다. 목호룡이란 자가 역모를 고발했는데,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실세한 노론 명문가의 일부 자제들이 역모를 꾀했는데 경종을 시해, 독살, 폐위한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담겨 있었다. 이 고변으로 몇 달 동안 국문과 사사가 진행되었다. 주모자들은 물론, 귀양 가 있던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이른바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이 사약을 받았다. 기타 죽임을 당한 이들은 70여명에 이르렀고, 유배를 비롯한 크고 작은 벌을 받은 이들이 15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해 말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연좌된 이들은 또다른 이들을 고발하고 사실이 규명되지도 않는 옥사가 꼬리를 이었다. 복수로 점철된 정쟁의 악순환이었다. 붕당 정치가 막장으로 치달은 사례를 꼽으라 한다면 이 사건보다 더한 장면은 많지 않았다.

낙향하는 호론

호론의 수장 권상하는 연잉군이 세자로 결정된 직후에 세상을 떴다. 이후의 정변을 보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우 권상유는 당시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큰 화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무사하지는 않았다. 종손(從孫) 가운데 권진성이란 인물은 남을 무고한 죄로 죽임을 당했다. 경종 3년에는 권상하의 관작도 추탈되었다.

노론의 든든한 지역 기반이었던 충청도 일대가 새로 집권한 소론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임인년의 옥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경종이 마음을 뉘우치고 노론을 용서하려 한다’는 내용의 가짜 문서가 돌았다. 그 때문에 몇몇 이들은 조사받고 해를 입었으나 결국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훗날의 기록에 의하면 이 위조 문건은 ‘충청도의 호론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소론 쪽에서 위조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세한 일은 알 수가 없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절, 호론의 비중에 비하면 피해는 크지 않았다.

권상하의 뒤를 이은 학자는 한원진이었다. 그는 세자가 책봉되자 선생들 중의 하나로 임명되었다. 어느새 40살에 접어들어 학문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자 사부의 영광을 누리기도 전에 스승의 부고를 들었다. 한원진은 서울과 충청도를 오가며 스승의 장례에 참석하기도 하고 세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신축환국이 터졌다. 그는 세자와 행보를 함께하다가, 임인년의 옥사가 터지자 귀향해버렸다. 호론 선비 대부분의 동선도 한원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에 기반을 둔 낙론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쑥대밭이 된 낙론

초기 낙론을 이끌었던 김창흡은 신축환국으로 맏형 김창집이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근심 중에 사망하였다. 유랑과 은거로 점철되었던 처사 김창흡의 생애도 그렇게 정국에 휘말리며 마감되었다. 김창흡이 죽고 나서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의 우려대로 목호룡의 고변과 임인년의 옥사가 터졌다.

김창흡의 집안만 보더라도 김창집·김제겸 부자와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까지 3대가 죽임을 당했다. 훗날 안동김씨 세도가문이 되었던 이 집안은, 경종에게 독약을 시험했다는 혐의의 당사자여서 더욱 피해가 컸다. 역모 외에, ‘서울 근방의 장원을 불법으로 경영했다’ ‘가짜 돈을 만든 죄인을 비호했다’는 등의 경제비리 죄목까지 더해졌다. 다른 노론 명문가들도 크고 작은 화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피해는 가문에만 그치지 않았다. 낙론 선비들의 초기 산실은 김창협·김창흡 형제가 제자를 길러낸 석실서원이었다. 이 서원에 모셔졌던 김창협의 위패가 거두어졌고, 교육 기능은 중단되었다. 혼란 속에 낙론 선비들의 반목도 생겨났다. 경종비 선의왕후는 어유구의 딸이었다. 경종의 장인인 어유구는 어유봉의 동생이었고, 형제는 김창협·김창흡의 제자였다. 그들은 신축환국 초기부터 경종을 말리긴 했으나 힘이 달렸고, 그들의 소극적 행보를 두고 소론과의 결탁을 의심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신임환국은 초기 낙론을 형성했던 선비와 그들의 가문을 와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를 피해 숨거나 지방으로 내려간 이들 중에는 40대에 접어든 이재(李縡)라는 선비가 있었다. 환국으로 작은아버지 이만성이 죽게 되자, 이재 또한 강원도 인제로 들어갔다. 그는 김창협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었으나 송시열, 김창협의 학문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화를 피한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