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한산사 이어 편지 논쟁, 스승들 개입으로 학파 갈라져 / 이경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8. 08:57

문화

한산사 이어 편지 논쟁, 스승들 개입으로 학파 갈라져

등록 :2015-04-23 20:35수정 :2015-04-24 09:20

 

미발 개념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둘러싼 호락 논쟁은 논쟁 당사자들 견해에 대한 스승들의 평가가 갈리면서 학파가 갈렸다. 권상하(왼쪽)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한 호론 쪽 한원진을 옳다고 판정했고, 김창흡(오른쪽)은 본성이 같다고 한 낙론 쪽 박필주와 어유봉을 지지했다. 이경구 교수 제공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③ 서울 논쟁과 낙론의 출발

호론 권상하-한원진 학맥 = 인간·사물 본성 다르다 = 이이·송시열 학문 지키고 따라 = 동문의식으로 뭉친 지방
낙론 김창협·창흡-박필주·어유봉 학맥 = 인간·사물 본성 같다 = 이이 학설의 약점 보완하려 해 = 개방적인 서울

1709년. 충청도 보령의 한산사에서 이간, 한원진 등이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권상하의 제자들로서 미발, 인물성론 등을 주제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만약 이후에 벌어진 일이 없었다면 이 모임은 그저 그런 논쟁으로 철학사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비슷한 주제의 토론이 몇 년 후 서울에서도 벌어지고 스승들이 개입하자 판이 커졌다.

논쟁은 서울에서도

강문팔학사가 명성을 쌓아갈 무렵, 서울에서도 새로운 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 중에 이현익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였고 관직이라고는 현감 정도를 지냈을 뿐이었다. 다만 33살에 왕자 사부가 되어 19살의 연잉군(훗날 영조)을 가르친 일은 눈에 띈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영조 대에 크게 쓰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떴다.

이현익은 송시열의 서울 지역 제자로서 명성이 높던 김창협의 제자였다. 그러나 권상하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에게도 배움을 아끼지 않았던 성실한 선비였다. 스승 김창협조차 “때로는 그의 생각을 듣고 의견을 바꿀 때가 있었다”고 했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1714년의 어느 날 이현익은 박필주라는 선비의 글을 읽었다. 박필주 역시 김창협의 제자였지만 그다지 친분이 깊지는 않았다. 박필주의 글은 이(理)를 위주로 인간의 정(情)을 해석하는 것이었는데, 이현익은 그의 논리로서는 인간의 칠정(七情) 전체를 해석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이현익은 이내 편지를 보냈고 박필주는 즉시 답서를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1년 넘게 칠정과 미발(未發) 등을 두고 논쟁하였다.

이현익은 다음해에는 김창협의 또다른 제자 어유봉과 편지로 논쟁을 벌였다. 이번에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주제였다. 이현익은 사람과 사물이 생겨난 후에는 본성에 차이가 있다고 보았고, 어유봉은 본성은 모두 같으나 다만 기(氣)에 따른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스승들의 개입과 판정

이현익과 박필주·어유봉의 편지 논쟁은 한산사 논쟁과 다르면서도 같았다. 다른 점은 한산사 모임처럼 집중적으로 토론하는 장면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강 2년여 동안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았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논쟁의 큰 주제는 같았다. 미발 개념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그것이었다. 충청도의 한원진과 서울의 이현익의 논지가 대체로 비슷했고, 충청도의 이간과 서울의 박필주·어유봉의 견해가 비슷했다.

한 가지 같은 점이 또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논쟁에 대해 너나없이 스승에게 질의하였다. 한산사 논쟁 이후 한원진, 이간 등은 자신들의 토론에 대해 스승 권상하의 견해를 여쭈었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견해가 옳다고 판정하였다.

서울 쪽은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이현익, 박필주 등의 스승은 김창협이었다. 그런데 그는 편지 논쟁이 진행되기 6년 전인 1708년에 이미 사망하였다. 따라서 서울 선비들은 김창협의 동생이자 명성이 높았던 김창흡에게 판정을 부탁하였다. 김창흡은 박필주와 어유봉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이현익의 견해가 너무 고원(高遠)하다고 비판하였다.

스승들이 개입하여 판정한 사건은 학파의 기초를 놓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학맥과, 기본 이론이라 할 종지(宗旨)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학맥과 인물성 이론(異論)에 기초한 이론이 호론의 토대였다면, 김창협·김창흡 형제에서 박필주·어유봉 등으로 이어지고 인물성 동론(同論)을 강조한 이론이 낙론의 토대가 되었다.

판정에서 패한(?) 이간과 이현익은 호론과 낙론이란 학파가 공고해질수록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제기가 각 학파의 논리를 정밀하게 다듬는 촉매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왜 다른 결론이 나왔을까?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의 판단과 개인을 둘러싼 관계가 그것이다. 개인의 판단에는 유학의 경전,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저서, 이황과 이이의 견해, 그리고 학설을 취사하는 자신의 선택 등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학파, 지역, 정치 등의 여러 관계 또한 암암리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현실 자체로 뭉뚱그려져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사고와 처했던 상황을 하나하나 쪼개보아야 한다. 이론적 측면에 대해서는 다음 지면에 분석하기로 하고, 먼저 사회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단서는 아마 모임 형태부터 찾을 수 있겠다. 한산사 모임이나, ‘강문팔학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호론 쪽의 동문의식은 뚜렷했다. 그러나 서울은 그렇지 않았다. 서울의 논쟁에서 유대감은 엷었다. 집중적이지 않았을뿐더러 사실 관계도 뚜렷지 않았다. 우리는 편지를 통해 대강을 알 수 있을 따름인데, 편지는 후대에 대개 정리되므로, 편지 왕래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이현익과 박필주의 논쟁은 1714년에 일어났다는 증거가 많지만, 이보다 앞선 1711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지방과 서울의 공부 분위기가 달랐음을 보여준다. 서울의 선비들은 과거 준비를 하거나, 특정한 선생을 찾거나, 때론 다른 신분의 지식인과 어울리는 일이 흔했다. 사회가 분화하고 다양한 조류가 섞이는 서울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일 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학파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권상하의 동선과 학문을 보아도 그렇다. 그는 오랫동안 송시열을 모셨고 황강에서 안정적으로 제자를 길러내는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았다. 또한 학설은 이이, 송시열의 학문을 지키고 따르는 편이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는 ‘여러 선배와 성현의 유훈(遺訓)을 한결같이 준수하고 후학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그 경향은 그가 손을 들어주었던 한원진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김창협·창흡 형제와 남산 조성기

호론이 고수하는 편이었다면 서울은 개방적이었다. 낙론의 시조가 되었던 김창협·창흡 형제의 행보는 권상하와 달랐다. 김창협은 송시열의 제자이긴 했지만 사실 편지를 통한 지도를 주로 받았고, 얼굴을 맞대고 배운 적은 드물었다. 그들이 제자를 양성한 것도 45살 이후 수년 동안에 불과했다.

아우 김창흡의 일생은 더 흥미로웠다. 그는 19살에 오른 금강산을 비롯해 일생 동안 팔도 곳곳을 누볐던 방랑 지식인이었다. 노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5000여 수를 넘는 방대한 한시(漢詩)를 남기기도 했다. 사상 편력도 화려해, 한때 불교와 도교에도 심취했었다. 무엇보다 김창흡은 송시열의 제자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형제에게 강한 영향을 준 인물은 남산에 사는 처사 조성기였다. 조성기는 약관 20살에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는 논문을 저술했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두 대가의 학설을 종합한다는 그의 포부는 선배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한다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성기의 면모는 후대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훗날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허생의 입을 빌려 ‘조성기는 적국(敵國)에 사신 보낼 만한 인재였는데 초야에서 늙어 죽었다’고 아까워했다.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남산 처사 조성기와 김창협 형제는 성리학에서 문학까지 때론 편지로 때론 직접 만나 토론하였다. 그들의 열정적이고 맹렬한 토론은 <숙종실록>에 “학설이 종횡으로 거침이 없고 쏟아지는 말들이 무궁무진하여 몇 폭의 종이를 잇댈 정도였는데도 모두 조리가 있었다”고 휘황하게 소개될 정도였다.

조성기가 이황과 이이를 통합하려 했던 노력은 김창협 형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형제는 이이의 학설에 약점이 있으며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졌다. 더 깊은 영향은 학문하는 자세였다.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학설에 얽매이지 않았던 조성기처럼 형제 또한 자득(自得)을 중시했고 그것이 낙론의 특징이 되었다.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