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한겨레신문 사설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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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8일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유승민 대표를 콕 집어 ‘자기 이익만 챙기는 배신자’라고 낙인찍은 지 2주 만의 일이다. 형식은 자진 사퇴지만, 사실상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정치적으로 숙청한 모양새다. 이렇게 우리 정치는 1970~80년대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며 당을 좌지우지하던 권위주의 시절로 후퇴해 버렸다. 아무리 사회 각 분야에서 퇴행과 반동이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수십년간 조금씩 진전해온 정당민주주의가 한순간에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려질 수 있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은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에게 숙청된 유승민 원내대표

그의 사퇴 회견문을 읽으며 이 나라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를 우리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의 원내대표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쫓아내는 체제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제란 삼권분립과 국회의 행정부 견제라는 큰 기둥 위에서 탄생한 정치체제다. 이걸 부정하는 순간, 대통령제의 기반인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허물어진다. 입법부의 제도적 견제를 받지 않는 국가원수란 곧 중세의 왕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정치사는 대통령의 집권당 지배를 종식하고, 입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절대적 우위를 제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내는 명분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걸 들었다. 그러나 역대 모든 권력자는, 폭군과 독재자들까지도 자기 야심을 관철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을 앞세웠다. 1961년 5·16 쿠데타나 1980년 5·17 쿠데타의 주역들도 ‘국민의 뜻’을 명분으로 내걸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게 입맛에 따라 ‘국민’과 ‘민심’을 언제든 도용할 수 있기에, 권력을 분산하고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국민 뜻을 물을 수 있게 제도화한 장치가 바로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1항은 바로 우리가 이런 제도의 기틀 위에 언제나 서 있어야 함을 적시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걸 무시했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을 내던지고 왕에 버금가는 제왕적 대통령의 패권적 행태만을 추구했다. 그 결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여당 원내대표를 내쫓는 데엔 성공했을지 모르나, 정당민주주의 가치는 처참하게 짓밟혔다. 160명에 이르는 여당 국회의원들을 뜻대로 복종시켰을지는 모르나, 훨씬 더 많은 당원과 국민의 신뢰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찰나의 승리가 남은 임기의 안정적 운영을 보장해주진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하수인’ 자청한 김무성 대표

사태가 이런 식으로 귀결된 데엔 박 대통령만큼이나 김무성 당대표의 책임이 크다. 김무성 대표는 시종일관 기회주의적 처신만 하다가 끝내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유승민 대표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임명직 당대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김 대표는 꼭 1년 전 ‘친박’ 핵심인 서청원 의원을 꺾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그때 그는 “당원과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당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되돌려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요즘 새누리당을 보면, 당원·국민을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대통령 앞에 납작 엎드리는 후진적 정당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도입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박 대통령이 내년 총선의 공천권을 순순히 놓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다.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 말을 잘 듣는 여당 대표’란 평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개척하는 정치인의 반열엔 결코 오를 수 없음을 보여줬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비겁했다. 자신들이 뽑은 원내대표가 대통령 말 한마디로 쫓겨나는 마당인데, 투표는커녕 박수로 통과시킨 게 과연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자세인가. 원희룡 제주지사나 권영진 대구시장은 오히려 ‘유승민 찍어내기’의 부당함을 지적하는데,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은 스스로의 헌법적 권리와 권위를 지키지 못하다니 할 말이 없다. 대통령에게 꼼짝 못하면서도 총선에선 다시 ‘국민의 대표자’를 자임할 테니 그런 자기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최소한의 헌법적 가치와 민주주의 원리를 손쉽게 저버리는 국회의원과, 당대표와, 대통령을 보면서 한국 정치의 앞날이 걱정스러운 건 일부 국민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유승민 대표의 사퇴 선언문을 읽어보면 보수정당에도 한 가닥의 결기와 희망이 있음을 엿볼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