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박 대통령의 원내대표 축출/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13. 08:24

정치정치일반

박 대통령의 ‘힘’ 때문에…의원들 ‘무리한 주문’ 받아들여

등록 :2015-07-12 20:13수정 :2015-07-12 22:01

 

[새누리당‘ 원내대표 축출’ 그 이후] ① 왜 가능했을까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한 지난 8일 인터넷에 두 장의 사진이 나돌았다. 북한의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보안원 두 명에게 끌려나가는 장면, 처형 직전 특별군사재판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었다. 장성택의 얼굴에 유승민 원내대표의 얼굴을 집어넣은 합성사진이었다.

‘숙청’은 “정치단체나 비밀결사의 내부 또는 독재국가 등에서 정책이나 조직의 일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반대파를 처단하거나 제거함”이라는 뜻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 몰아내기를 ‘숙청’ 이외의 다른 말로 부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유승민 숙청’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위헌적 지시가 관철된 이유가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카리스마와 이른바 ‘통치스타일’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나라 헌법이나 정치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결함 때문일까. 정치문화의 문제일까.

박 대통령이 가장 큰 원인
“21세기 다원주의에
걸맞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

의원들은 왜
“박 대통령 여권 지지층에 기반 확고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 막강”

19대 의원들 소신 부족
“18대에 비교하면
비전 가진 의원들 너무 적어”

여론도 헌법 이해 부족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숙청’ 하는건 명백히 헌법 위반

새누리당 의원과 정치학자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나라 헌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21세기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전혀 걸맞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독특한 캐릭터가 가장 큰 원인”이라며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 다른 대통령도 이런 식의 사고는 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정치적 기능을 마비시킨 것을 큰 문제로 꼽았다. 6월25일 국무회의 발언 이전에 상당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사태 수습을 위한 정치가 작동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달리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작년에 황우여-김한길 대표와 회동한 직후 국무회의에서 야당에 맹공을 가한 일이 있다”며 “이번에도 국무회의에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낸 것을 보면 대통령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보좌 시스템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무리한 주문을 받아들인 이유에 주목했다. 그는 “대통령의 ‘힘’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며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고 여권의 핵심 지지층에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영남 지역 의원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대체로 박명호 교수의 진단에 수긍했다. 주류·비주류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영남 지역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몰아 쫓아낸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그러나 대통령과 원내대표가 싸우면 원내대표가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다수인 것을 또 어쩌겠느냐. 정치의 수준이 유권자의 수준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두려움과 의원들의 정치적 소신 부족에서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었다. 한 초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겪어본 의원들은 ‘박근혜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지나치게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직후 이들이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8대와 비교하면 19대에는 중앙정치에 대한 큰 뜻과 비전을 가진 의원들이 너무 적었다”며 “이들은 청와대를 비판하지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비판하지도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다녔다”고 말했다.

헌법의 권력구조와 정치문화 탓은 없는 것일까? 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인 자신만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적 사고,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사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론은 현행 대통령중심제 헌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통령중심제를 시사상식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엄격히 분립시켜 상호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른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한 제도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며, 행정부와 입법부는 뚜렷하게 독립되어 있다.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모든 정책을 수행한다.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의회 다수당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숙청’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같은 원리로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비슷한 대통령중심제 헌법이라고 착각해 입법부와 집권당에 대한 대통령 권력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