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한기택 판사를 떠올리며 “좋은 판사, 좋은 법원이란 무엇인가”를 판사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40대 중반 한창 일할 나이에 떠났기에 뭔가를 성취하기에 좀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될 법도 한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참판사의 전범으로 한기택을 떠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타인의 운명을 재단하는 판사는 재판에서 엄중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재판은 판사의 실력뿐 아니라 전인격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한기택 판사는 하나하나의 재판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법정에서는 신중하게 경청했다. 소액사건 같은 작은 사건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한기택 판사는 늘 다소간 주저하는 자세로 동료 판사들의 의견을 구하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끌어냈다. 그의 재판부에서는 배석판사도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실로 동등한 판사로 관여했다. 정성껏 만든 판결문을 법정에서 정확히 전달하면서, 당사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문을 반복해서 읽어주고 설명했다. 그는 평소 “목숨 걸고 재판한다”는 신조로 살았다. 자신이 맡은 재판에 애정과 혼을 불어넣고, 겸허하고 성심으로 임한 점에서 구도자적 자세로 일관했다.
승진과 보직 고민은 판사 생활 내내 따라다니는 멍에 같은 것이다. 그것에 연연하다 보면 인사권자에게 예속되고, 사법의 관료화가 심화된다. 누구보다 소신과 독립을 지켜야 할 판사가 눈치보다 보면 외풍이 스며들 여지가 생긴다. 이를 어떻게 이겨낼까. 한기택 판사는 썼다.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 나의 삶이 시작된다. 판사로서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잡아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다”라고. 승진이나 보직 같은 ‘그 무엇’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한 판사의 생명은 법정과 기록 속에 있는 다른 무엇, 즉 좋은 재판에 있음을 그는 묵직하게 일깨워준다.
1980년대 후반 그가 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로 지탄받았고, 민주화의 초입에서도 침묵과 타성에 갇혀 있었다. 한기택은 몇몇 소장판사들과 함께 ‘새 대법원 구성에 관한 성명’을 냈다. 그 첫머리가 이렇다. “이제 일천한 법관경력밖에 지니지 못한 우리들이 경륜과 인품을 지닌 선배 법관과 별다른 상의 없이 감히 판결에 의하지 아니한 발언을 하게 됨으로써 혹시 누가 되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질풍노도 시대에 나온 성명서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톤이었는데, 초안자인 그의 성품이 배어 있다고들 한다. 여태껏 법관들이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을 한 바 없음을 자책하면서, 사법부의 신뢰 회복을 위해 “사법부의 수장 등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첫 서명자였다. 이 성명서에 순식간에 수백명의 판사들이 함께했고,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임과 함께 사법민주화의 디딤돌이 되었다.
억울한 시민들이 최후로 호소할 국가기관이 법원이다. 송사에 휘말리는 일만큼 골치 아픈 것도 달리 없다. 그렇기에 좋은 판사를 만난다는 것은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어떤 판사가 좋은 판사일까? 외부의 압력이나 영향에 눈치보지 않고 오직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는 판사.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동료 법관들과 지혜를 모아가는 판사. 재판 당사자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판사. 재판다운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사법제도의 개선에 앞장서는 판사. 이런 판사다운 판사상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 그게 한기택 판사다.
세상이 팍팍해질수록 재판에도 잡다한 압력과 잡음들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현재가 어렵다고 느끼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성찰적 지혜를 얻는 것도 한 방법이다. 법조에서는 김병로 대법원장,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이제 한기택 판사가 마음의 대화상대로 등장한다. 과거의 인물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는 가운데 지혜와 용기를 충전하는 판사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저런 판사에게 재판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그런 판사의 존재를 그토록 갈망하는 세태에서는 더더욱.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연재한인섭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