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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에 이어지는 육영수 암살/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0. 5. 12:26

정치정치일반

홍일이 결혼식 날 난데없는 총소리…그게 대통령 부인일 줄이야

등록 :2015-10-04 15:48수정 :2015-10-05 01:46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6회 긴급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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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15일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발생한 날이자 이희호의 삶에서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통령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된 이날 맏아들 김홍일이 결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희호는 육영수 생전에 몇차례 마주치기는 했지만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사진은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9월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여성 지도자와 함께 청와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로 두 사람이 함께한 유일한 장면인 셈이다. 맨 가운데 이희호, 왼쪽이 육영수, 오른쪽이 김활란(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4년 8월15일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발생한 날이자 이희호의 삶에서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통령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된 이날 맏아들 김홍일이 결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희호는 육영수 생전에 몇차례 마주치기는 했지만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사진은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9월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여성 지도자와 함께 청와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로 두 사람이 함께한 유일한 장면인 셈이다. 맨 가운데 이희호, 왼쪽이 육영수, 오른쪽이 김활란(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 납치 사건의 파장은 오래갔다. 1973년 9월7일 <조선일보> 서울판에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를수록 좋다’는 제하의 사설이 실렸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여서 무척 우울하고 답답하다. 김대중 사건이다. (…) 이 국민의 가슴에 젖어드는 불안은 무슨 까닭이며 왜 죄 없는 착한 국민은 이다지도 가슴을 죄어야 하는가.” 납치 사건이 나고 한 달이 지나서야 나온 첫 사설이었다. “사설을 쓰겠다고 자청한 선우휘 주필이 ‘가을 행락 시즌을 맞이하여’라는 사설을 지역판에 먼저 싣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철수한 새벽에 미리 준비한 사설로 갈아 끼웠다고 해요.” 사설은 핵심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 모호한 표현들의 나열이었지만, 이런 웅얼거림을 내보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10월2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500여명이 교내 4·19탑 아래 모여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 1년 만에 처음으로 벌인 시위다운 시위였다. 학생들은 “김대중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 180명을 연행해 20명을 구속했다. 정권의 보도 불가 판정에 굴복한 <동아일보>는 시위 기사를 도려내고 발행했다.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밤샘농성을 벌이며 항의하자 <동아일보>는 5일 만에야 사건을 1단으로 보도했다.

박정희는 12월3일 이후락의 사표를 수리하고 법무부 장관 신직수를 중앙정보부장에 앉혔다. 그러나 머리를 바꾸었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의 마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폭압정치는 오히려 강도를 더했다. 김대중의 가택연금도 풀리지 않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유신이라는 커다란 감옥에 갇혀 있었고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감옥 안의 또다른 작은 감옥에서 연금이라는 이름의 옥고를 치렀다.

5·16 쿠데타 몇달 뒤 그와 첫 대면
전국여성대회 뒤 청와대 방문했을때
육 여사도 함께 단체사진

청와대 안주인 된 뒤
의원 부인 초청 오찬에서 함께 점심
청와대 안 야당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비명에 가서 몹시 안타까워

그해 12월24일 윤보선·김수환·함석헌·천관우·장준하·계훈제·백기완·법정·김재준·이호철·안병무를 포함한 민주인사 30명이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개헌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2월29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해 “일부 불순분자들이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며 “헌법 개정 100만인 청원 운동을 즉각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박정희의 협박은 먹히지 않았다. 헌법 개정 운동은 각계로 번져 나갔고 시위와 선언이 잇따랐다. 1974년 1월1일에는 서명자가 5만명을 넘어서고 1월8일엔 10만명에 이르렀다. 제1야당인 신민당도 개헌운동에 뛰어들었다.

박정희는 1월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거나 헌법 개정을 주장하기만 해도 군사재판에 넘겨 15년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2호는 비상군사재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박정희의 말이 곧 법인 무법천지의 세상이었다. 이날 이후 박정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급조치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했다. 서명운동의 불길은 긴급조치라는 물벼락을 맞고 사그라졌다. 장준하와 백기완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첫 구속자가 되었다.

2월에는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이 세상을 떠났다. “시아버지는 고향 하의도에서 돌아가셨는데, 박정희 정권은 우리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막았어요.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병을 가지 못해서 남편은 애통해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지켜드리지 못했지요. 남편에게는 그게 한이 되었어요.” 모진 세월이었다.

유신 철폐 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4월3일 서울대·성균관대·이화여대·고려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선언문을 발표해 애국지사 석방과 유신체제 철폐를 요구했다. 당시 정권은 대학가에 프락치를 심어 유신 반대 운동에 가담시킨 뒤 일망타진하는 방식으로 공작을 폈는데, 민청학련도 바로 그런 공작의 제물이 됐다. 4월3일의 일제 궐기는 사전에 탄로 났고, 주동자와 참가자는 전원 연행됐다. 민청학련은 실체가 있는 조직이 아니라 시위 당일 발표한 선언문에 붙인 명칭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날 밤 10시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관련자가 소속된 학교를 폐교할 수 있게 했고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했다.

1974년 8월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는 총탄에 머리를 맞아 그날 저녁 숨졌다. 사진은 총탄이 날아오기 직전, 연단에 앉아 박정희의 경축사를 듣고 있는 육영수의 마지막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8월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는 총탄에 머리를 맞아 그날 저녁 숨졌다. 사진은 총탄이 날아오기 직전, 연단에 앉아 박정희의 경축사를 듣고 있는 육영수의 마지막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앙정보부는 1204명을 조사해 이철·유인태·여정남·나병식·윤한봉·김병곤을 포함해 180명을 구속했다.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종을 받아 정부 전복을 노렸다는 혐의를 씌웠다. 비상군법회의는 14명에게 사형, 13명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를 적발했다는 발표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는 아무런 실체가 없었고 민청학련과도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사건을 부풀리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했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은 비상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재판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자 1974년 7월18일 김상근·이해동을 비롯해 감리교·예수교장로회·기독교장로회 젊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돼 서울기독교회관에서 ‘구속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 정기 기도회’를 열었다. 목요기도회가 시작되자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곧 수백명이 참석하는 큰 모임으로 발전했다. 목요기도회는 이희호의 숨통을 틔워주는 작은 해방구였다. “목요기도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남편은 연금당해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했어요. 거기서 구속자 가족들을 만나 알게 됐지요. 매주 빠지지 않고 나갔어요. 정보요원이 늘 감시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남편이나 자식들이 겪은 고통을 절절하게 증언했어요. 원통한 사연들이어서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들었지요.”

목요기도회에서 만난 구속자 가족들은 그해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를 결성했다. 자식 걱정, 남편 걱정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정권의 탄압을 겪으며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서강대 학생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 시인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이 중심에 섰다. “나는 목요기도회에서 그분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를 자주 불렀지요. 그 노래를 부르며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어요.”

저격사건 배경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재일동포 중 반 박정희 정서 정점
문세광도 남편 구출위에서 활동
납치사건 없었다면 저격 없었을 수도

‘긴급조치 1호’ 서슬 속 시아버지상
장례식 참석조차 막아 한으로 남아
서울기독교회관 목요기도회
숨막히는 상황서 그나마 ‘해방구’
‘어느 민족…’ 찬송가 자주 불러

1974년 8월15일은 유신의 광풍 속에서 이희호의 집안에 화촉의 작은 불꽃이 핀 날이었다. 이날 이희호의 큰아들 홍일이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경희대학교 동문 후배 윤혜라였다. 김홍일은 회고록에서 아내를 만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술회했다. “우리 만남에는 각본을 쓴 작가가 있고 연출가가 있었다. 동생 홍업이 각본을 썼고 연출은 처남인 윤흥렬씨가 맡았다. 두 사람은 학군단(ROTC) 동기(10기)였다. 1974년 봄쯤 두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술 한잔 합시다.’ (…) 술이 서너 잔 돌고 있는데 흥렬이가 갑자기 입구에 들어선 여자를 아는 체하더니 자기 여동생이라고 소개를 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홍일의 장인은 독립운동가 윤경빈이었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윤경빈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장준하와 함께 탈출한 사람이었다. 윤경빈은 일곱 달 동안 대륙을 횡단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거기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경위대장(경호실장)이 돼 해방 뒤 백범과 함께 환국했다.

정부는 객석 현장에서 붙잡힌 재일동포 2세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한 유탄에 육영수가 맞았다고 발표했으나 지금껏 ‘유탄’의 출처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문세광은 내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4개월 뒤인 12월20일 사형당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부는 객석 현장에서 붙잡힌 재일동포 2세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한 유탄에 육영수가 맞았다고 발표했으나 지금껏 ‘유탄’의 출처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문세광은 내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4개월 뒤인 12월20일 사형당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편과 나는 자식들이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누가 우리 집에 딸을 보내줄지, 무사히 취직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탄압받던 시절에 사돈 집안에서 선뜻 결혼을 승낙해주어서 말할 수 없이 고마웠지요. 외동딸을 며느리로 보낸다는 게 큰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결단이었을 거예요.” 윤경빈은 뒷날 어느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사위 될 남자가 인사하러 왔을 때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공군 중위 때 첫인사를 왔는데 건강하고 남자답게 생겨서 집사람도 나도 만족했어요. 그러나 김대중씨가 도쿄에서 납치되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솔직히 말해 김대중씨 장남이라고 해서 처음엔 쇼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적 과오가 있는 분도 아니고 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민주지도자인데,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사돈을 못 맺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윤경빈은 김대중-이희호 집안과 사돈을 맺기로 결심한 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 바깥사돈은 타이어와 의류 제품을 수출하던 회사의 부사장이셨는데, 혼인하기로 결정한 날 사표를 냈어요. 그 회사 사장이 대구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따르던 분이어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해요.”

김홍일-윤혜라의 결혼식은 필동에 있던 이희호의 큰오빠 집에서 치렀다. “남편이 연금당하고 있어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어요. 홍일이도 아버지가 이런 상태인데 혼례를 떠들썩하게 치를 수 없다고 고집했고요. 그래서 필동에서 양가 직계가족만 참석해 식을 올렸지요. 주례는 정일형 박사에게 부탁했고요. 필동 집 주변에는 정보부 요원들과 사복경찰들이 깔려 있었지요. 감시하는 사람들이 하객보다 많았어요.”

이희호가 결혼식을 준비하던 이날 오전 난데없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동에 있다가 촛대를 가지러 동교동 집에 왔던 참이었어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는데 그때 총소리가 들렸어요.”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난 소리였다. 재일동포 청년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했다가 실패한 뒤, 경호실장 박종규와 문세광의 총탄이 어지럽게 날아가던 중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저격 사건이 난 국립극장과 필동 큰오빠 집은 지척이었어요.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결혼식을 예정대로 치렀지요.”

총을 맞은 육영수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저녁 7시에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범인 문세광이 북한과 가까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지령을 받고 도시락에 숨겨 온 권총으로 박정희 저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육영수를 쏘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발표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1974년 8월15일 낮 김대중·이희호의 장남 홍일은 경희대 동문인 윤혜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사돈인 윤경빈(맨 오른쪽)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독립지사이자 생존해 있는 ‘최고령 광복군’으로, 99년부터 2002년까지 광복군 회장을 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교롭게도 1974년 8월15일 낮 김대중·이희호의 장남 홍일은 경희대 동문인 윤혜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사돈인 윤경빈(맨 오른쪽)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독립지사이자 생존해 있는 ‘최고령 광복군’으로, 99년부터 2002년까지 광복군 회장을 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육영수 저격 사건의 배경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납치해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재일동포 2세들 사이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극에 이르러 있었다. 당시 문세광은 ‘김대중 구출 재일한국인대책위원회’ 오사카위원회 사무차장 직책을 맡고 있었고 군중대회에서 연설을 하며 맹렬하게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문세광은 총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8월15일 저격 사건이 나기 전날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의 수사를 중지했고, 그 사실을 일본에 알렸다. 그런 정황 때문에 육영수의 죽음을 불러온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불똥이 튀어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육영수의 친오빠 육인수는 박정희가 육영수의 장례를 치른 직후 “납치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며 비통해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을 때 남편은 매우 놀랐어요. 무사히 다시 일어나기만을 바랐지요. 남편은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어요. 1968년 새해에 청와대 하례식에 남편이 간 적 있었는데, 육영수 여사가 다정하게 맞아주었대요. 내 안부도 물었다고 해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유신정권에게 노골적으로 탄압받던 시절인 1974년 맏아들 김홍일과 외동딸(윤혜라)의 결혼을 선뜻 승낙해준 맏사돈 윤경빈(맨오른쪽) 선생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느꼈다. 사진은 대통령 취임 이후인 1998년 사돈 부부를 청와대로 초대해 함께 한 모습이다. 사진제공 윤혜라씨.
 
김대중과 이희호는 유신정권에게 노골적으로 탄압받던 시절인 1974년 맏아들 김홍일과 외동딸(윤혜라)의 결혼을 선뜻 승낙해준 맏사돈 윤경빈(맨오른쪽) 선생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느꼈다. 사진은 대통령 취임 이후인 1998년 사돈 부부를 청와대로 초대해 함께 한 모습이다. 사진제공 윤혜라씨.  
이희호도 육영수를 몇 차례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두세 번 만났던 것 같아요. 가장 먼저 만난 건 1961년 9월이었어요.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몇 달 뒤였는데, 여성단체협의회에서 주최한 전국여성대회를 마치고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였어요. 여성계 지도자들을 모시고 갔는데 육영수 여사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어요. 그때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지요. 그 뒤에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 안주인이 되고 나서 국회의원 부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을 함께 먹은 적이 있었어요. 1971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하러 전주에 갔을 때는 육 여사를 좀 떨어진 곳에서 보기도 했지요. 육영수 여사는 나보다 세 살 밑이었어요. 내가 이화여전 다닐 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 중에 육 여사와 배화여고를 함께 다닌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를 통해서 육 여사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지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는데, 그렇게 비명에 가서 몹시 안타까웠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