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문재인이 능란하고 노회한 정치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랬다면 요즘처럼 당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도 아닐 것이다. 승부수로 꺼내든 재신임 카드로 오히려 입지가 좁아졌고, ‘김상곤표 혁신안’은 안철수, 김한길, 박지원 등 ‘비주류 연합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다. 주류 안에서조차 문재인이 굳건히 버텨 내년 총선을 진두지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나오는 형편이고, 싸늘한 호남정서도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올해 2월 전당대회에 문재인이 대표로 출마할 때부터 비주류의 흔들기는 익히 예견됐던 일이다. 대표 출마를 반대한 측근들의 주요 근거도 “만신창이가 되어 대선주자 경쟁력도 잃게 될 것”이란 논리였다. 문재인은 그걸 돌파해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대선주자 문재인’도 없다며 출마를 선택했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여기까지 왔지만 문재인은 여전히 흔들린다.
속된 말로 정권이 야당을 졸로 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속출하는 요즘이다. 야당의 허약함이 정권의 무한질주와 궤도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처럼 뚜렷이 보여준 적도 드물다. 야당 탓을 해서 정권에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을 욕하다 지친 이들은 이제 새정치연합을 향해 울분을 쏟아낸다. 야당을 파괴해버리는 게 낫겠다고 서슴없이 얘기한다. 요지부동의 암담한 현실에서 한 가닥 희망을 걸어온 야당마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니 아예 판을 깨뜨리자고 하는 거다.
문재인도 야권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비주류를 탓하며 억울하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포용하고 싸우며 헤쳐나가야 한다. 권력이 순수한 영혼과 사귀는 방식은 본디 잔혹한 법이다. 문재인은 맑은 사람이지만 정치의 비정함을 견딜 강인함과 담대함이 없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흔드니까 흔들리겠지만 흔들리니까 흔드는 측면도 있는 거다.
문재인을 흔드는 비주류도 “문재인만으로 안 되지만 문재인 없이도 안 된다”고 동의한다. 당연한 얘기다. 호남의 지지만으론 어렵지만 호남 지지 없으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야권의 거듭되는 반목과 분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인물은 그래도 문재인밖에 없다. 어쨌거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문재인 아닌가.
위기의 문재인에게 교과서 국정화 국면은 리더십을 복원할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심상정, 천정배와 함께 꾸리기로 한 ‘국정화 저지 연석회의’도 정치 의제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1인시위 사진 속의 문재인은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 지그시 입을 다물고 두 손엔 ‘역사왜곡 교과서 반대!’란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든 채로다. 여의도에선 서명운동을 벌이다 ‘어버이연합’ 사람들의 욕설 세례도 받았다. 정권이 도발한 이념전쟁의 자욱한 포연 속에 문재인이 다시 전선에 선 것이다. 총선 6개월을 앞두고 형성된 전초전 성격의 대치다. 야권이 강인함을 복원해내지 않으면 탈선한 정권도 결코 제 궤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임석규 정치 에디터 sky@hani.co.kr
임석규 정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