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파괴하는 게 낫다는 소리를 듣는 야당/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0. 15. 08:19
 

사설.칼럼칼럼

[편집국에서] 전환점에 선 문재인 / 임석규

등록 :2015-10-14 18:35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이나 역할 같은 것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나가는 일이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하는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를 쓰십시오.”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자는 대통령 당선인 노무현의 요청에 문재인이 했다는 얘기다. 문재인이 민정수석에 내정된 2003년 1월의 일이다. 제1야당의 대표이자 유력 대선주자인 지금이야 수시로 정무적 판단을 할 테니 문재인도 제법 정치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문재인이 능란하고 노회한 정치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랬다면 요즘처럼 당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도 아닐 것이다. 승부수로 꺼내든 재신임 카드로 오히려 입지가 좁아졌고, ‘김상곤표 혁신안’은 안철수, 김한길, 박지원 등 ‘비주류 연합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다. 주류 안에서조차 문재인이 굳건히 버텨 내년 총선을 진두지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나오는 형편이고, 싸늘한 호남정서도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올해 2월 전당대회에 문재인이 대표로 출마할 때부터 비주류의 흔들기는 익히 예견됐던 일이다. 대표 출마를 반대한 측근들의 주요 근거도 “만신창이가 되어 대선주자 경쟁력도 잃게 될 것”이란 논리였다. 문재인은 그걸 돌파해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대선주자 문재인’도 없다며 출마를 선택했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여기까지 왔지만 문재인은 여전히 흔들린다.

속된 말로 정권이 야당을 졸로 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속출하는 요즘이다. 야당의 허약함이 정권의 무한질주와 궤도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처럼 뚜렷이 보여준 적도 드물다. 야당 탓을 해서 정권에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을 욕하다 지친 이들은 이제 새정치연합을 향해 울분을 쏟아낸다. 야당을 파괴해버리는 게 낫겠다고 서슴없이 얘기한다. 요지부동의 암담한 현실에서 한 가닥 희망을 걸어온 야당마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니 아예 판을 깨뜨리자고 하는 거다.

문재인도 야권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비주류를 탓하며 억울하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포용하고 싸우며 헤쳐나가야 한다. 권력이 순수한 영혼과 사귀는 방식은 본디 잔혹한 법이다. 문재인은 맑은 사람이지만 정치의 비정함을 견딜 강인함과 담대함이 없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흔드니까 흔들리겠지만 흔들리니까 흔드는 측면도 있는 거다.

문재인을 흔드는 비주류도 “문재인만으로 안 되지만 문재인 없이도 안 된다”고 동의한다. 당연한 얘기다. 호남의 지지만으론 어렵지만 호남 지지 없으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야권의 거듭되는 반목과 분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인물은 그래도 문재인밖에 없다. 어쨌거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문재인 아닌가.

위기의 문재인에게 교과서 국정화 국면은 리더십을 복원할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심상정, 천정배와 함께 꾸리기로 한 ‘국정화 저지 연석회의’도 정치 의제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임석규 정치 에디터
임석규 정치 에디터
1인시위 사진 속의 문재인은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 지그시 입을 다물고 두 손엔 ‘역사왜곡 교과서 반대!’란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든 채로다. 여의도에선 서명운동을 벌이다 ‘어버이연합’ 사람들의 욕설 세례도 받았다. 정권이 도발한 이념전쟁의 자욱한 포연 속에 문재인이 다시 전선에 선 것이다. 총선 6개월을 앞두고 형성된 전초전 성격의 대치다. 야권이 강인함을 복원해내지 않으면 탈선한 정권도 결코 제 궤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임석규 정치 에디터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