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들어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박정희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야권과 재야는 불복종을 선언했다. 국민투표일인 2월12일 김대중(오른쪽)·이희호(왼쪽) 부부는 아침 7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체현시기도회에 참석해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기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쫓겨나고 한 달이 채 안 된 1975년 4월8일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여덟 명의 상고가 기각됐다. 대법원은 김용원·도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의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날 새벽 6시 사형수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고 18시간 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사형집행이었다.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야만의 사법살인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사형수들은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1974년 10월 인권활동을 하던 목사 조지 오글의 폭로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12월 오글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인혁당 관련 구속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던 중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죽이거나 풀어주거나 정권 마음대로였다. 인혁당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6국장이었던 이용택은 뒷날 “한창 수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일주일에 두 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언론에 밝혔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상고심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창자가 빠져버리는” 고문 들통날까
경찰은 영결식 가던 운구차 빼앗아
벽제 화장터에서 주검을 불태워버렸다
“얼마나 고문을 했으면 저렇게까지…”
이희호는 유족을 껴안고 울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유신헌법 개헌 운동에 연대를 약속한 직후인 75년 8월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해 10월5일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대강당에서 열린 ‘장준하 49재 추모의 밤’에서 김대중·이희호와 함께 참석한 함석헌(맨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다 풀려난 김지하는 1975년 2월17일 <동아일보>에 ‘고행-1974’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투쟁을 하고 있던 때여서 김지하의 글은 지면에 실릴 수 있었다. 이 글에서 김지하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하고 관련자들이 당한 고문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낱낱이 알렸다. 김지하가 전한 고문 내용은 끔찍했다. 사형수 가운데 한 사람인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으로 창자가 다 빠져버리고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희호는 중앙정보부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가한 고문 내용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그때 명동성당에서 신부님들과 천주교인들이 저녁 여섯 시부터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자주 드렸어요. 나도 거기에 매번 참석했지요. 미사가 끝나고 나면 성모 마리아상 앞에 서서 제2부 모임으로 현실 고발을 했는데, 인혁당 사람들이 당한 고문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가 일어나 참을 수 없었어요. 촛불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요.”
박정희 정권은 잔혹한 고문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인혁당 사형수들이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막았다. 사형수들은 마지막날까지 가족 면회를 하지 못했다. 사형수의 부인들은 대법원 사형 확정이 난 다음날 남편을 면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새벽부터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부인들이 접한 것은 남편의 얼굴이 아니라 사형이 벌써 집행됐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유신정권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화장터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몸에 남은 고문 자국을 지우려고 저지른 또 다른 만행이었다. 이희호는 그날 운구차를 지키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날 목요기도회가 있어서 아침에 기도회장으로 갔는데, 인혁당 사형수들이 새벽 잠결에 모두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함세웅 신부가 시무하는 응암동성당에서 영결미사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응암동으로 달려갔지요. 송상진씨의 관을 실은 트럭이 녹번동 로터리에서 발이 묶인 채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어요. 나는 트럭에 올라가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을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경찰은 유족을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운구차를 빼앗았다. 운구차의 시동을 걸지 못하도록 누군가 껌을 씹어 열쇠 구멍을 막아버렸다. 경찰은 운구차를 끌고 가려고 크레인을 동원했다. 미국인 신부 제임스 시노트가 차 앞에 드러눕자 경찰이 발로 차고 개 끌듯 끌어냈다. 이희호는 현장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문정현 신부님도 차를 지키려고 차 밑에 들어가 몸으로 막았는데, 경찰이 차를 끌어내는 바람에 다리가 바퀴에 깔리고 말았어요. 그때 문 신부님이 다리를 다쳐 그 뒤로 내내 지팡이를 짚게 됐지요.” 크레인으로 운구차를 탈취한 경찰은 벽제 화장터로 끌고 가 주검을 불태웠다.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그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그랬던 거예요.” 정권은 인혁당 고문 조작 사실을 알리던 시노트를 4월30일 미국으로 추방했다.
박정희는 ‘긴조 9호’를 발동하고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을 조직했다
민주화의 숨통이 끊기려던 그해 8월
장준하가 김대중을 찾아와
민주세력 단일화를 논의했다
보름 뒤 그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인혁당 사형수 가족들의 수난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됐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쓰고 온갖 수모를 당했다. 유족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었다. 사형수 우홍선의 아내는 1987년에 작성한 호소문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저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한 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후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꾸려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어 2007년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여덟 사람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희호는 청와대에서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족들을 다시 만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된 뒤 유족들을 청와대로 모셔서 만났어요. 그때까지 나는 운구차를 붙들고 함께 울었던 소복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라는 걸 알았어요. 그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의 사형이 확정된 그날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비방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체포·압수·수색할 수 있다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인혁당 사형수들이 끔찍한 고문 끝에 사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4월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는 성토대회가 열렸다. 그날 축산과 4학년 김상진이 등산용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했다. 김상진이 할복 전 읽은 선언문은 비장했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튿날 서울대 농대는 휴교령을 발표했다. 언론은 김상진의 죽음에 침묵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성명을 발표해 김상진의 죽음을 알렸고 신부들은 명동성당에서 김상진 추도 미사를 올렸다. 김상진의 할복자살은 민주화 시위에 불을 붙였지만, 4월30일 그 불을 꺼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월남 패망’을 정권안보의 호기로 활용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한껏 증폭시키는 반공캠페인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비보를 들은 함석헌은 말했다
“저놈들이 두 사람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명을 전격 사형시킨 박정희 정권은 고문 사실을 감추고자 주검마저 빼돌려 곧바로 화장을 시켜 버렸다. 4월9일 낮 서울 녹번동 사거리에서 문정현(왼쪽 둘째) 신부가 시노트 신부와 함께 경찰의 운구차 탈취를 막으려다 부상을 당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삼은 긴급조치 9호는 그전에 발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악랄한 조항을 한데 쓸어모은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을 금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신헌법의 개정·폐기를 청원·선동·보도하는 행위까지 모조리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해 사형시킬 수 있다는 최악의 반민주적 조처였다. 민주화 운동의 숨통을 끊고 뿌리를 뽑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긴급조치 9호 발동은 유신 쿠데타에 이은 또 한 번의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유신정권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4년6개월 동안 긴급조치 9호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했다. 그 기간 동안 800여명이 이 악법에 걸려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5월20일에는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도록 했다. 군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묶어놓고 길들이자는 것이었다. 7월8일에는 사회안전법·민방위기본법·방위세법·교육관계법을 포괄하는 이른바 ‘4대 전시입법’을 발표해 7월16일 새벽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나라 전체가 병영으로 바뀌었다. 정권은 이런 극단적 조처로 유신 반대 투쟁의 불길이 완전히 진압되기를 바랐지만 투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거듭 살아났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열흘이 안 된 5월22일 서울대에서 1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김상진 추도식을 열고 긴급조치 9호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기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에게 면담을 제의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의 제의를 수락했다. 두 사람은 28일 후인 1975년 5월21일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은 면담이 끝난 뒤 “국정 전반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며 당과 나에게 유익한 회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면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민당 대변인이었던 이택돈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김 총재는 특유의 어법으로 ‘요점은 이거야. 여당은 지가 하고, 야당은 나보고 맡으라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래서 ‘김대중씨는 어떻게 하고요?’라고 반문했죠. ‘김대중이는 끝났어’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선명투쟁을 접고 온건한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택돈은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김영삼이 제지하자 신민당 대변인직을 그만두었다.
이해 8월17일 민주투사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준하의 죽음은 동교동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을 당하기 전 7월말 장준하가 직접 동교동으로 김대중을 찾아왔던 터였다. “장준하 선생님이 그때 우리 집에 처음 오셨어요.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오래 했지요.” 장준하는 그해 3월부터 박정희 정권에 일격을 가하려면 민주세력의 단일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야권 지도자들에게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장준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3월31일에는 윤보선·양일동·김대중·김영삼이 모여 4자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세력 단일화 논의는 김영삼이 5월21일 청와대를 다녀온 뒤 투쟁 전선에서 이탈하자 깨지고 말았다. 장준하가 김대중을 직접 방문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장준하 선생님과 남편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었어요. 1971년 대통령선거 때 다른 야당 후보 편에 서서 남편을 공격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남편은 장준하 선생님이 운영하던 <사상계>에 예전부터 글도 쓰고 재정적인 도움도 주었어요.” 장준하는 김대중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남아 있던 앙금을 털어버렸다.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중요한 만큼 앞으로 김대중을 돕겠다는 말도 했다. 이날 두 사람은 등산을 화제로 올렸다. 장준하가 등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다며 그동안 오른 산 이름을 두루 이야기했다. 김대중이 걱정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다녀도 괜찮겠습니까?” “설마 놈들이 날 어떻게 하겠소.” “그래도 혼자서는 절대로 다니지 마십시오. 세상이 너무 험합니다.” 그것이 장준하와 김대중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4월9일 이희호가 운구 트럭 위에서 껴안고 울며 위로했던 사형수 송상진의 부인 김진생이 2012년 9월12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인혁당 망언’에 항의하고자 여의도 당사 앞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과 만나고 보름쯤 지난 뒤 1975년 8월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 등산하러 갔다가 계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검찰은 장준하가 실족사했다고 발표했다. 절벽에서 추락했다는데 장준하의 몸은 골절도 없고 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검찰의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사건이 나고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장준하의 묘를 이장하던 중 유골의 머리 뒤쪽에 지름 5~6㎝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자국이 발견됐다. 단순 추락으로는 생길 수 없는 정교한 함몰이었다. 동교동 비서였던 김형국은 장준하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김대중 선생님이 저더러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지키라 해서 사흘 동안 장준하 선생님 댁에 있었어요. 함석헌·계훈제·백기완 선생님이 함께 계셨지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실족사했다는 약사봉 계곡에 가봤어요. 거기는 산토끼도 다닐 수 없는 험한 곳인데 뭐하러 거기를 가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김대중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니까 ‘중대한 결행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러시면서 꺽꺽 우시더라고요.”
장준하는 본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박정희와 싸우면서 민족주의자로 거듭났다. 7·4 남북공동성명을 지지했던 장준하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1972년 8·9월호에 쓴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이희호는 장준하가 김대중과 손을 잡게 된 것이 박정희 정권에 압박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장준하 선생님이 남편과 만나 화해하고 일을 도모하자 박정희 정권이 두려움을 느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준하가 난데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두 사람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