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에 자신과 여유가 넘쳤다. 19일 아침 최고위원회 공개 발언에서 김무성 대표는 무려 15분 동안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럴 만도 하다. 교과서 파동 이후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서먹했던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가 회복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정두언·김용태 의원 정도가 명확히 반대의 뜻을 밝혔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민주적 행태에 비판의 날을 세우던 이재오 의원도 침묵하고 있다. 평소 성향으로 미루어 반대 의견을 가졌을 것 같은 의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질문을 해도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첫째, 판이 커지면서 여권 대 야권의 진영 대결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반대하면 이적 행위자로 몰릴 수 있다. 둘째, 공천 때문이다. 공천의 두 축인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모처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나중에 어느 칼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집권세력 내부는 지금 ‘박근혜 유일체제’다. 공천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은 잠복해 있지만 정책 사안에서 파열음은 없다. 이런 모습은 4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2011년 8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 무상급식을 주민투표에 부쳤다. 이명박 대통령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오세훈 시장을 지원했다. 결과는 오세훈 시장 사퇴, 10·26 보궐선거, 박원순 시장 당선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은 정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 여권에는 박근혜 전 대표, 황우여 원내대표, 유승민·남경필 최고위원, 정두언·정태근 의원이 있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부터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안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다. ‘여당 속의 야당’이었던 셈이다.
이들이 친이세력을 밀어내고 한나라당 리모델링에 나섰다. 당명과 색깔을 바꾼 새누리당은 2012년 4·11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당내에 대안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년 만에 집권세력 내부 구조가 완전히 달라진 이유가 뭘까. 첫째, 대통령이 다른 사람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회사원 출신이다. 그래도 아랫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권력자의 딸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반대하는 것은 괜찮아도 누군가 자신을 반대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유승민 원내대표 축출 사태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둘째, 의원들도 주눅이 들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2008년 4·9 당선자들은 “내가 잘나서 됐다”고 한 사람이 많았다. 2012년 4·11 때는 “박근혜 위원장 덕분에 됐다”는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지금 대통령 지지율이 새누리당 지지율을 상회한다.
정책 사안에 대해 집권여당이 대통령을 무조건 따라가면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다. 좋은 점은 효율성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에 박근혜 대통령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세종시는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나쁜 점은 대통령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집권세력 전체가 민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세종시 수정안이 관철됐다면 충청 민심의 이반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신뢰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교과서 쟁점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밀고 나가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년 4·13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 출마한 새누리당 후보들은 상당히 고전할 것이다. 여론의 흐름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국민을 계도나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개인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집단을 위해 존재한다는 전체주의 세계관이다. 선친에게 물려받았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이런 전체주의 가치관의 근원은 일본 파시즘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194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도조 히데키가 권력을 휘두르던 파쇼의 시대였다.
국정 교과서 논쟁은 결국 ‘단일화냐 다양성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일화의 뿌리는 전체주의에 닿아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자칭 보수세력이 유독 역사에서는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은 궤변이다.
그래서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각성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끌려 박정희 시대의 전체주의 가치관을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을 합리적 보수의 열린 세상으로 이끌어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대충 묻어갈 수 있는 자유, 비겁할 수 있는 권리가 정치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성한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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