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촛불을 든 시민과 청소년들이 17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1가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막는 국민 촛불대회’에서 정부의 일방 강행을 규탄하는 자유 발언을 듣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시론]
미국 미네소타주 칼턴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필자에게 졸업한 한국·외국 학생들의 사무실 방문이나 이메일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고 있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때문이다. 이들의 질문 요지는 간단하다. 남한이 북한의 역사교육 방식을 따라하기로 작정했냐는 것이다.
태평양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이번 사태를 보는 심정은 딱하고도 답답하다. 같은 대학의 미국 동료 교수들과는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하기조차 민망하다. 21세기에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선거용 도구로 전락할 지경에 처했으니 말이다. 탈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여당의 국정화 강행 방침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논란에 대한 국제 역사학계의 여론의 한자락을 살펴보기 위해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화 몇가지를 나누고 싶다.
최근 하버드대학 역사학과의 몇몇 교수들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교수 한명은 일본 정부가 일본사 교과서를 임의로 고치려고 출판사에 압력을 넣은 사례를 상기시켰다. 필자도 동아시아식민사 수업을 개설하자마자 일본의 신우익 단체로부터 장문의 공문과 책자 등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소포 꾸러미로 필자의 자택으로 배달되었다. 그들이 내게 ‘정중하게’ 요구한 요지는 교안 가운데 공공기억(public memory) 부분을 수정해 달라는 것이다. 사료분석 사례로 종군위안부와 난징대학살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부분을 수정해 달라는 그들의 논지는 이 두 사안이 모두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날조”라는 것이었다. 공개한 적이 없는 필자의 교안과 자택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는 철저하게 무대응 방침을 선택했다. 당시 남경대학살박물관을 포함해 남경 현지 답사를 계획하고 있던 학생은 위 문건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다음으로도 이 단체는 내게 몇 차례 더 이메일을 보내어 위의 요청을 거듭 확인했다. 나는 무시했고, 그 학생은 현지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같은 주제로 논문상까지 받는 훌륭한 졸업논문을 작성했다.
하버드대학 교수들과 계속된 환담 과정에서 또 다른 동료는 북한을 명(明)나라 시대에, 남한을 청(淸)에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의 장성택 처형 사태를 14세기 말 명나라 궁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학살극에, 또 남한 뉴라이트 그룹의 역사 새로쓰기운동을 18세기 초에 이민족 정권으로 정통성 도전에 직면했던 청에 빗댄 것이다. 청나라는 만주족 정복집단과 전향한 하층 성리학자가 공동집필한 이념 책자를 정부 주도로 학인층 전반에 유포하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논의 끝에 이 동료는 남한이 북한보다는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먼저, 명보다는 청이 현대에 3세기 이상 가깝다는 말이었다. 나아가 남-북한 모두 독재자의 자녀들이 권력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북한이 세습을 한 반면, 남한은 경위야 어떻든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친 측면을 강조했다.
그런데 왜 추석이 지나자마자 대한민국 정부가 느닷없이 역사를 새로 쓰겠다는 ‘떼법 활극’을 벌이고 있는가?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속사람은 그대로인 채 몸만 커버린 어린아이가 안에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생존을 위해 산전수전 겪다 보니 어느새 노년이 되었고, 가족 안의 위상은 어른이지만 감성지수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가련한 분들이다. 영화가 그리는 주인공은 식민지와 냉전 질서에 맞물려 압축성장하는 과정을 살아내느라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 우리 사회의 여느 어른들의 모습이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서로 맞지 않는 슬픈 자화상이다. 법적-제도적 장치로서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었으나 자신에게 맞지 않아 틈만나면 벗어던지려한다.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나 일상생활 가운데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영화 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 후반기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도 이런 분들의 활극이 고국 소식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것도 수혜자가 아니라 ‘좌편향’적인 역사학계의 ‘피해자’인양 하면서 말이다. 이들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즉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획일화하려는 시도는 복잡한 역사이론을 들이댈 것도 없이, 국제사회의 일반상식에 비추어 크게 우려할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특수한 심정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이웃 젊은이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내곤 하지만, 현실 속 주인공들은 생뚱맞게도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트집잡아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에게 마구잡이식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밖에서 볼 때, 이런 분들 대다수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어른’일 뿐 아니라, 권력과 재부는 물론, 주요 언론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잔뜩 겁먹은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식민지-냉전 질서가 끝난 거역할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이 한반도에 밀려오는 현실 앞에서 당신들이 살아낸 ‘역사’가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고 있다고 느껴서인가? ‘바른’ 역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라는 전문가집단을 건너뛰어 다음 세대에게 본인들의 “딱한” 처지를 직접 호소하려는 모양새다. 그러나 그들만의 독특한 ‘집단 피해 의식’을 학생들 머리 속에 억지로 복제하려 애쓰다 보니, 주장의 내용과 적용방식에 몰상식과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미국의 역사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면서 학부생들은 물론 대학 순례차 청강을 하게 된 고등학생들 또한 매우 수준높은 역사교육을 받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다. 한가지 예만 들어 보자. 필자의 동아시아냉전사를 수강한 대학교 1학년 학생은 기조발제를 통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에 대한 역사학계의 심도있는 논쟁을 매우 조리있게 소개했다. 베트남계 학생이 아닌 미국 현지 학생이었다. 짧은 시간에 어찌 이처럼 수준 높은 사학사(historiography) 보고를 해냈느냐는 질문에 그 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인솔교사를 따라간 현장학습을 통해 구술사 채록에 참여하면서부터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 학생이 예습학교(Prep School)로 불리는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토론식 수업 준비를 익힌 것으로만 짐작했으나, 수업이 끝난 뒤 나눈 환담을 통해 공립고등학교 출신임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기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수업에서는 거의 모든 학생이 그와 같은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수업에는 한국계 학생은 물론,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기에 더욱 미국 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사교육 현장에서도 공공기억과 문화적 시민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북전쟁이나 베트남전에 대한 해석 문제를 놓고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지만, 연방정부는 물론이고, 주정부가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이러한 여러가지 해석의 갈래를 강압적으로 통일하려는 경우는 없다. 지역교육위원회와 각 공립학교의 교사·학부모 협의회에서 자율적으로 역사교재를 채택한다. 사립학교의 경우 교과서가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훈련받은 학생들이 대학교에 와서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면, 엄밀한 사료강독 훈련 및 현지조사 등을 거쳐 다양한 논문을 작성한다. 이번에 제출된 학생들의 졸업논문 제안서 34편 주제를 살펴 보니 다채롭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모로코로부터 중국 항주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있다. 시기도 고대 로마 물 수급계획부터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주 마써스 빈야드에 남아 있는 펜타곤의 군사시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 분석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삼성의 백혈병 문제에나 비견될만한 민감한 주제를 두고 세계 굴지 모대기업의 내부문서를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제안서는 학생들의 사료수집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학생들은 이미 각자의 주제와 관련한 공문서보관소나 기업인사위원회 내부문서, 또는 현지답사 및 구술채록을 마친 상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통과된 논문은 컬럼비아대학, 존스홉킨스대학 역사학과 등에서 주관하는 학부논문집이나 하버드건축사연구지와 같은 석-박사급 논문집에 막바로 게재된다. 논문의 질만 따지기에 투고자의 나이나 학력에 제한이 없는 것이다.
앞서 미국 공립고등학교 학생이 경험한 미군의 양민학살 분석 사례에서 보듯, 폭력은 현대사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특히, 식민지 지배와 냉전 질서 아래 진행된 개발독재는 반드시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해석의 갈래가 어떠하든, 폭력이라는 핵심 주제를 애써 무시하고 식민사나 냉전사를 기술하면 ‘반쪽 진실’이 된다. 나아가 “그 때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는 식의 논리로 폭력을 희석화하거나, 심지어 “악의 평범성” 논리를 잘못 적용해 이를 정당화하려는 순간, 어거지가 생긴다. 몸만 커버린 채 속사람은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분들이 어거지를 밀어붙이다 보면 점점 더 심한 떼를 쓰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핵심은 ‘좌-우’ 또는 ‘친일-친공’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사이의 충돌이다. 국정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불쌍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이가 한 나라의 권력을 쥔 지도자가 되고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면 잘 타일러서 말려야 할 때다. 자기만의 ‘불쌍한’ 심성을 ‘통합된 사관’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우격다짐으로 주입하는 행위는 시민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로히토나 스탈린, 히틀러를 들먹일 것도 없이, 북한의 국정교과서가 단적인 예다.
윤성주/미국 칼턴 대학 부교수
약력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하버드 대학 석사 및 박사 (중국사 및 동아시아사)
칼턴 대학 조교수 (1999-2006); 칼턴 대학 부교수 (2006-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