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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엉뚱한 답변/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0. 23. 11:21

사설.칼럼칼럼

[아침 햇발] 박근혜 대통령의 엉뚱한 답변 / 박찬수

등록 :2015-10-22 18:39수정 :2015-10-22 18:51

 

2001년 3월7일의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은 우리 외교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 취임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서 햇볕정책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확고한 대북 공조를 이뤘다는 공동발표문 내용과 달리, 기자회견에선 두 정상의 시각차가 그대로 노출됐다. 김 대통령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2015년 10월18일의 한-미 정상회담도 상황은 비슷하다. 북한만을 겨냥한 첫 공동성명을 냈다는 자랑과 별개로, 기자회견에선 한국의 ‘중국경사론’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14년 전과 다른 건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 회견의 핵심은 익히 알려진 대로 오바마 대통령의 중국 관련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이 중국과 좋은 관계를 갖길 바란다. 내가 유일하게 요청한 건, 중국이 국제규범과 법을 준수하는 데 실패하면 한국도 미국처럼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53분간의 기자회견 맨 마지막에 나왔다. 일문일답 과정에서 자연스레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기자회견의 백미는 다른 데 있었다. 오바마 발언이 있기 전에 미국의 기자가 박 대통령에게 물었다. “최근 베이징(전승절 행사)에서 중국, 러시아 지도자와 함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미국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던 겁니까?” 박 대통령 대답은 이랬다. “전승절에 중국, 러시아 지도자와 얘기했는데, 북한 핵이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고 있는가, 반드시 공조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다 그런 부분에 공감했습니다.” 완전히 엉뚱한 답변이었다.

미국 기자의 질문이나 오바마 대통령 발언이나 핵심은 같다. 한-중 관계를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가 그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이 영어 질문을 잘못 이해해서 그런 답변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을 미국이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번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에서 워싱턴의 제1의 관심사는 사실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받았을 때 박 대통령은 ‘드디어 나올 게 나왔구나’라고 반응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날 박 대통령 태도는 달랐다. 이런 질문에 미리 대비하지 않았을뿐더러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듯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박 대통령은 ‘미국은 한-중 관계를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 문제 없다’는 외교 참모들의 말만 믿고 워싱턴에 갔다가 기자회견장에서 뜻밖의 상황에 마주쳤을 것이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다.

한-미 동맹이 지고지순의 선은 아니다. 미국의 불만을 모두 들어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황 인식만은 냉철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 강대국의 세력다툼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키며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다. 현 정권은 그 기본에서 실패하고 있다. “한국이 미·중 양쪽의 러브콜을 받는 건 축복”(윤병세 장관)이란 듣기 좋은 말에만 대통령은 푹 파묻혀 있었다. 더 걱정스러운 건, 외교 실패를 대통령은 실패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했다. 미국의 정확한 기류를 파악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여전히 당당하다. 장관도 문제지만 사달이 났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대통령은 더 문제다. 그런 선장과 일등항해사에게 키를 맡기고 대한민국호는 동아시아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