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5월 시작된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유신 법정’은 김대중을 비롯한 구속자들의 무죄 항변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항소심에서 검찰 구형의 절반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당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으로 확정됐다. 1976년 12월28일 항소심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영어 소통이 자유로운 이희호(맨 오른쪽)가 구속자 가족들을 대표해 외신 기자들에게 판결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월 신민당 전당대회 ‘최악 폭력 사태’
조직폭력배 김태촌파 각목 난입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작품’으로 1976년 5월 전당대회는 폭력의 아수라장이었다. 조직폭력배 김태촌이 전당대회가 열리는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 당사로 쳐들어가 당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한국 야당사상 최악의 전당대회’였다. 김태촌의 배후조종자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인 것으로 알려졌다. 야당의 자중지란에 박정희 정권의 공작이 가세해 혼란의 소용돌이가 더욱 커졌다. 전당대회가 폭력으로 중단되자 당의 두 파는 따로 전당대회를 열었다. 주류는 김영삼을, 비주류는 김원만을 각각 당 대표로 등록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두 사람 모두 적법한 대표가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김영삼의 총재 지위가 1976년 6월9일로 소멸했다. 김영삼은 6월11일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야당에 대한 국민의 신망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신민당은 석 달 뒤 9월15일 다시 전당대회를 열어 1979년 총선 때까지 당을 이끌 최고위원을 선출했다. 주류와 비주류에서 세 명씩 모두 여섯 명의 최고위원이 뽑혔다. 다음날 대표최고위원 경선이 실시됐다. 대의원 767명이 참가한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349표, 이철승이 263표, 정일형이 134표를 얻었다.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은 389표를 얻어 364표를 얻은 김영삼을 제쳤다. 이철승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정일형의 공개 지지였다. 정일형은 김영삼의 잘못된 당 운영을 심판하고 이철승의 비주류에 기회를 주는 것이 당원들의 뜻이라고 보았다. 이철승의 애절한 지원 요청도 정일형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철승은 정일형을 찾아가 당을 선명하게 이끌겠다는 약속도 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된 이철승은 경선에 승리하자마자 ‘중도통합’이라는 자신의 노선으로 돌아갔다. 유신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야당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1977년 2월 미국과 일본을 방문한 이철승은 ‘자유와 안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국의 자유는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레벨(수준)의 문제’라고 발언해 당 안팎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이어 3월에 3·1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온 정일형이 대법원 확정 판결로 의원직을 잃게 되자, 이철승에 대한 신민당 의원들의 실망과 반감은 더욱 커졌다. 박정희는 그해 5월 이철승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회담했다. 이철승 체제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었다. 야당은 유신독재의 종속적 동반자로 주저앉았다. ‘3·1 사건’ 재판은 박정희 뜻대로 착착
‘6888번 김대중 징역·자격정지 각 10년’
대법원 상고이유서 기각…5년형 확정
구속자 가족들 “역사 앞에 무죄” 성명 신민당이 내분으로 망가져 가는 동안 김대중과 3·1 사건 구속자들에 대한 재판은 박정희 정권의 뜻대로 진행됐다. 1976년 8월3일 1심 법정에서 검사는 김대중에게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 다른 피고인들도 징역 10년에서 7년까지 구형받았다. 1심 판결을 앞두고 김대중은 ‘6888’이라는 수번을 달고 법정에 나와 “모든 병의 원인인 1인 장기집권 유신체제를 철폐하라”고 최후진술을 했다. 8월28일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만을 받아들여 “헌법이 인정한 저항권이 대통령 긴급조치를 초월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피고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역사 앞에 무죄임을 증언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1심 재판부는 김대중에게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을 선고했다. 이어 그해 12월29일 항소심 판결에서 김대중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다른 구속자들에게도 비슷한 형량이 선고됐다.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정일형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항일·반공·반독재 투쟁으로 일생을 일관해왔다. 자유민주주의가 국시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회복을 주장했다 하여 재판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항일투쟁을 할 때 일본군 앞잡이는 누구였으며, 내가 반공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였고,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김대중은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나는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면회하러 온 제 안사람이 (신약성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제12장 14절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민주회복을 위해,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또 대통령 이하 집권자들이 민주주의와 양심과 정의에 입각해 이 체제를 시정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두 면을 펼쳐 김대중의 최후진술 전문을 실었다. 남편을 감옥에 둔 이희호는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를 개사해 혼자 조용히 불렀다. “어서 돌아오오. 민주회복 어서 오오. / 주의 부르심 받아 민주회복 외치니 / 부당조치 강권발동 쇠사슬로 묶어도 / 용감하게 싸우고 싸워 필승하리, 민주용사.” 김대중은 1977년 3월1일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3·1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를 움직이고 역사를 형성한 것은 영웅도 권력자도 아니고 바로 무수한 국민의 힘이었습니다. 국민을 경애할 줄 모르고 국민을 얕본 권력자가 하느님과 역사의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3·1 선언 사건은 결코 유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정부의 가장 비민주적인 정치탄압이요 가장 졸렬한 보복행위입니다. 이 재판에서 우리에게 무슨 중형이 내려지건 우리들 피고인의 양심은 무죄입니다. 국민의 가슴속의 정의도 이를 무죄라고 외칠 것입니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정의의 저울은 휘어져 독재의 장식품이 되었다. 1977년 3월22일 김대중은 징역 5년이 확정돼 4월14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교도소였다.
1977년 3월22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 날, 이희호(앞줄 왼쪽)는 2심에서 풀려난 안병무·이해동과 불구속 기소됐던 함석헌·이우정 등과 함께 재판장까지 걸어서 가며 시위를 했고, 이 장면은 ‘뉴욕 타임스’(3월23일치)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매일 영치금 넣으며 옥바라지 ‘정성’
월1회 20분 면회 허용에 편지로 ‘소통’
서로 신앙고백 나누며 ‘신념의 동지’로 김대중이 받은 처우는 최악이었다. 독방에 가두고 교도관들이 돌아가며 24시간 감시를 했다. 좌우에 붙은 방과 맞은편 앞방은 비워놓았다. 다른 수감자들과 대화도 통방도 할 수 없는 격리수용이었다. 면회는 변호사와 직계가족으로 한정됐다. 직계가족 면회는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20분밖에 할 수 없었다. 변호사와 면회할 때는 교도관들이 옆에서 일일이 기록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말끝마다 간섭을 했다.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고 20여일이 지난 5월7일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희호도 밖에서 교도소의 인권유린에 항의했다. 추기경 김수환이 나서서 인도적으로 처우해 달라고 촉구했다. 김대중은 6일 만에 단식을 끝냈다. 이희호는 법전을 들고 행형법(‘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을 공부했다. 남편이 법에 보장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법을 알아야 했다. ‘병상 조회 의뢰 신청서’나 ‘교도소 처우 개선 건의서’ 따위를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1977년 4월14일 김대중이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로 혼자 이감되자 이희호는 곧바로 진주에 숙소를 마련해 옥바라지를 했다. 출감 때까지 부부는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민주화의 신념을 키웠다. 이 편지들은 훗날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1998)와 두 권의 ‘옥중서신’(2009년)으로 묶여 나왔다.
1977년 4월14일 김대중이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로 혼자 이감되자 이희호는 곧바로 진주에 숙소를 마련해 옥바라지를 했다. 출감 때까지 부부는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민주화의 신념을 키웠다. 이 편지들은 훗날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1998)와 두 권의 ‘옥중서신’(2009년)으로 묶여 나왔다.
1976년 ‘3·1 명동성당 사건’으로 시작된 김대중의 옥살이는 혹독한 시련이었으나 이희호는 꿋꿋이 석방운동과 옥바라지를 해냈다. 사진은 1976~77년 양심범가족협의회 회원들과 모여 농성하던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남편의 ‘수인번호 6888’을 가슴에 새긴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이희호(왼쪽)와 중학생인 막내아들 홍걸(오른쪽)이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