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학자들은 패거리를 지어 권력을 등에 업고 권력과 함께 사라졌다/ 이경구 한림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1. 27. 22:05

문화

세상사를 말할 수 없으니, 아아 입이나 다물자

등록 :2015-11-26 19:26수정 :2015-11-26 21:22

 

1759년, 66살의 영조는 15살의 신부를 맞이했다. 위 그림은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친영(親迎) 행렬을 묘사한 반차도(부분). 12명의 가마꾼이 정순왕후의 가마를 멨고 나인, 상궁, 내관, 별감 등이 인도하고 있다.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1759년, 66살의 영조는 15살의 신부를 맞이했다. 위 그림은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친영(親迎) 행렬을 묘사한 반차도(부분). 12명의 가마꾼이 정순왕후의 가마를 멨고 나인, 상궁, 내관, 별감 등이 인도하고 있다.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17) 파국
역사를 보면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버리는 듯한 순간이 있다. 판 자체를 깨버리는 파국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몇 년이 그랬다. 정치가 요동쳤고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다. 굴절의 파장이 얼마나 셌던지, 지금의 인상마저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달라진다. 지식인들은 이 격변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호락논쟁의 양상 또한 크게 달라졌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영조의 두 번째 왕비는 정순왕후이다. 왕실과 혼인한 가문은 명예와 권력, 오욕과 파멸의 갈림길에 종종 직면했는데, 그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안은 노론의 명문이자 호론의 핵심이었다.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진 학맥은 종숙부 김한록으로 이어졌다. 오빠 김구주는 김한록의 제자였고, 문장과 학문의 명성이 자자했다. 영조와의 국혼을 계기로 그녀의 부친과 오빠를 중심으로 남당(南黨)이 형성되어 새로운 척신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정조가 등극하고 척신들을 숙청할 때, 김구주는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정조 통치 내내 정순왕후는 왕대비로서 궁중의 최고 어른이었다. 하지만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며느리 혜경궁, 7살 연하인 정조와는 묘한 긴장을 유지하였다. 정조가 대비를 우대했다지만, 대비가 받은 상처와 소외감이 더 컸다. 노론 의리를 대표한 집안 출신답게 그녀는 ‘의리탕평’을 내세운 정조보다도 더 강경하게 의리를 강조하였다. 정조가 신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동생 은언군을 만났을 때, 백관을 재촉하여 막은 이가 그녀였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사사롭게 사친(私親)을 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나이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수렴청정절목’이 제정되었는데 왕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주(女主), 여군(女君)을 자처하면서 정국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총 480여 차례에 걸친 하교가 내려졌는데 그녀가 내린 처분은 정적들에게는 가혹하였다. 먼저 정조의 측근이었던 서유린 형제, 김이익, 심낙수 등이 귀양갔다. 정조의 본의를 왜곡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유린이 김원행의 제자였듯이 이들은 대개 낙론-시파 계열이었다.

심환지의 초상. 벽파 중에서도 강경파로 소설, 영화 등에서 정조의 정적으로 자주 등장했다. 정순왕후 수렴청정 때 영의정으로서 신유박해를 주도해 오명을 남겼다. 경기도박물관
심환지의 초상. 벽파 중에서도 강경파로 소설, 영화 등에서 정조의 정적으로 자주 등장했다. 정순왕후 수렴청정 때 영의정으로서 신유박해를 주도해 오명을 남겼다. 경기도박물관
그러나 아직까지는 정권이 바뀔 때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은 이듬해인 1801년에 일어났다. 음력 정월에 정순왕후가 사학을 엄금하도록 하교하고 영의정 심환지 등이 적극 동조하자 옥사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신유박해’로 잘 알려진 이 탄압으로 수백 명에 달하는 천주교도가 순교하였다.

박해의 확대는 사상 탄압 이면에 정치적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처와 며느리가 서학을 믿은 사실이 드러나자 이들은 물론 은언군까지 사사되었다. 완전히 잔멸해버린 이 집안에서 은언군의 손자 원범이 간신히 혈통을 잇고 철종으로 등극한 것은 나중 일이다.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도 사사되었다. 죄목은 ‘강화도의 죄수(은언군)와 통하고 사학(邪學)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누명이었다. 세간에선 정순왕후 집안과 혜경궁 집안의 해묵은 대립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노론 명문 호론 핵심 집안 출신
‘여군’ 정순왕후 하교만 480여번
수렴청정 때 신유박해 피바람
공포 조장…지식인은 자기검열
호론의 악수 탓에 민심도 떠나

 

반동의 여파

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는 이단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학(正學) 대 사학(邪學)’의 구도이다. 단순한 이분법을 내세운 정순왕후와 벽파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소론과 남인 일부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희생물은 영조, 정조 연간에 그나마 일었던 자유스러운 분위기 자체였다. 정조가 유학을 바로잡으면 스스로 없어질 것이라며 온건하게 대했던 서학 공부와 천주교 신앙, 잡문과 소설의 유행, 청과의 적극적인 교류 분위기 등이 된서리를 맞았다.

가장 피해를 입은 이들은 천주교를 믿은 이들. 정파는 대개 남인이었다. 대대적인 박해 속에 이가환, 권철신, 정약종 등이 사사되었고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를 떠났다. 천주교를 신봉했던 노론, 소론, 중인, 서얼 일부도 희생되었다.

새로운 문체를 선도하며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들은 서울의 도시화가 빚어낸 문화적 활력을 기반으로 개성과 감성에 충실한 문학을 전개했었다. 정조 대 문체반정 등으로 고초를 겪었었는데, 이 때 다시 들추어져 더욱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강이천·김건순 등은 사사되었고, 김려는 재차 유배를 갔다.

낙론의 한 줄기로 갈라져 나와 청에 대해 인식 전환을 촉구한 북학 그룹 역시 활기를 잃었다. 박제가는 1801년에 정순왕후와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보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리고 3년 후에 풀려나 1805년에 사망했다. 유득공은 정조가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 1807년에 죽었다. 이들의 스승 격인 박지원도 활동을 삼갔는데, 말년에는 울화가 쌓이고 교유도 별로 없다가 1805년에 생을 마감했다.

이들 부류에는 속하지 않지만 윤행임 같은 특이한 사례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호론을 따랐고 자신 또한 호론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조의 총애를 받고 시파로 활동했으며, 결국 홍낙임 사건 등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모난 돌들은 모두 정을 맞았고, 권력에 거슬리는 이들은 어떻게든 연루되어 사라졌다. 공포는 은밀한 영역까지 침투했다. 내부에서 자라난 두려움은 자기 검열을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번졌다. 검열의 강도를 지금 밝히기는 어려우나, 단편적인 사실들은 가끔 드러난다. 홍대용의 일부 글에서 ‘서양 설을 참고했다’ 대목이 빠졌으며, 박제가의 저술에서 ‘서양’이 들어간 단어나, ‘서양인을 초빙하자’는 민감한 대목이 삭제되기도 했다. ‘붓 끝에 혀가 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발하고 생기 넘치는 글을 썼던 이옥은, 강이천·김려 등 친구들의 불행 앞에서 ‘세상사를 말할 수 없으니, 아아 입이나 다물자’고 한탄하였다. 정신에 대한 통제가 불러온 불관용은 이렇게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호론의 악수(惡手)

정조 때에 숨죽이던 정순왕후의 일족은 대폭 기용되었다. 김한록의 맏아들 김관주는 우의정이 되었고, 둘째 김일주는 경연관으로 초빙되었다. 김구주의 아들 김노충도 중용되었다. 이들은 호론의 지도자들을 추숭하는 데 앞장섰다. 김한록의 스승이었던 한원진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또 다른 스승이었던 윤봉구에게도 시호가 내려졌다.

호론-벽파로 이어지는 그룹은 탕평 시기의 공조를 끝내고 ‘순수한 의리’를 내세운 이들의 집권을 실현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최대 장점을 내주고 얻은 불안한 거래였다. 이들의 자산은 노론의 강경한 노선을 선명하게 내세운 데 있었다. 그 주장은 ‘맑고 꼿꼿한 의리’를 자임하는 유생이나 일부 관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척신에 기대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어쩌면 그들을 척신으로 전환하여 청류의 지지를 얻어내려 한 영조의 각본에 말렸는지도 몰랐다.

결국 선택이 문제였다. 권력과의 결탁은, 그들이 말하는 의리의 속내가 이해타산이었음을 드러냈다. 특히 순조 초반의 무리한 탄압은 사학을 빙자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로 비추어졌고 마침내 인심이 떠났다. 권력으로 권위를 높였던 이들의 영광 또한 오욕으로 끝을 맺었다. 무리한 반동을 조성한 이들은 집권 3년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쉽사리 숙청되었다. 오직 공정으로 승부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 결과였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그렇지만 호론만이 그 비난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까. 그들의 변화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권력과 은밀하게 호응하기는 낙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척신보다는 국왕(정조)을 선택했기에 비난의 강도가 덜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재간택하고 세상을 떴다. 김조순 집안은 낙론의 최고 명문인 안동 김씨였다. 훗날 순조비 순원왕후가 된 김조순의 딸은 왕조 사상 전무후무한 2차례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호론-벽파는 영조 후반의 선택이 되었고, 낙론-시파는 정조 최후의 선택이 된 셈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