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이건창, 참 보수주의자의 통곡/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2. 21:09

사설.칼럼칼럼

이건창, 참 보수주의자의 통곡

등록 :2015-12-01 19:2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영재는 조선 과거 사상 최연소(15살)로 급제했다. 하지만 참됨만을 따랐던 탓에 벼슬은 언제나 유배로 끝났다. 말년에 고종이 최후통첩을 했다. ‘벼슬이냐, 아니면 유배냐.’ 그는 주저 않고 유배를 택했다. 가장 혹독하다는 절해안치를 자청해 고군산열도로 갔다.

이들은 철두철미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부정부패를 발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개화파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영재의 통탄이 들리는 듯하다. 저의 영달을 위해 나라와 양심과 신념을 파는 자들이 보수주의를 자처하고 있으니….

1996년에야 복원된 강화도 사기리의 영재 이건창 생가는 낮고 좁고 단조롭다. 어깨높이의 담장은 띠를 얹었고, 역시 초가지붕의 살림채는 두 평 남짓 대청에 사랑방과 안방이 기역 자로 붙어 있다. 사랑방은 반듯한 1평 남짓이고, 안방은 그런 게 두 개 잇대어 있다. 구한말 조부는 이조판서, 본인은 참판을 지낸 명문가 종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매천 황현 글씨의 ‘명미당’ 편액을 보아도, 뒤란의 ‘정경’ 지위에 오른 선대의 묘를 보아도, 실망스럽다. 생가 오른편 문학비에 이르러서야 생각이 바뀐다. 한국의 문학인이 망라된 한국문학비건립동우회가 1997년 7월 건립한 것이다.

시비 뒷면의 약전은 이렇다. “맑고 고운 시문으로 구한말 사단을 빛낸 문장가요 시인이시며 양명학을 가학으로 받들고 고궁을 가헌으로 지킨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이며 … 대쪽 같은 기개와 신념으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전통시대 관아의 모범이셨다. …” 창강 김택영이 여한9대가로 꼽았고, 민영규 전 연세대 교수가 강화학파의 마지막 종장으로 평가했던 영재. 그제야 오로지 맑고 밝다는 택호가 다시 눈에 들어오고, 생가의 가난은 주인장의 드높은 자존과 곧은 정신으로 다가왔다.

가묘 중엔 조부 이시원의 묘소가 있다. 조부는 1866년 병인양요 때 동생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프랑스 군대에 강화읍성이 함락됐을 때 관리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 치욕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사기리 집 대청에 세 형제가 앉았다. 셋째 희원은 남은 가족을 돌보도록 했고, 첫째와 둘째는 치사량의 간수를 마셨다. 장손 건창은 그렇게 저승으로 떠나는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조부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말했다. “질의 참됨만이 네가 갈 길이다. 결과의 대소고하는 따질 일이 아니다.”

영재는 그해 조선 과거 사상 최연소(15살)로 급제했다. 너무 어려 4년 뒤에야 벼슬에 나섰다. 하지만 참됨만을 따랐던 탓에 벼슬은 언제나 유배로 끝났다. 말년엔 내리는 벼슬을 모두 고사하자 고종이 최후통첩을 했다. ‘벼슬이냐, 아니면 유배냐.’ 그는 주저 않고 유배를 택했다. 가장 혹독하다는 절해안치를 자청해 고군산열도로 갔다. 그런 사생관은 조부의 영향도 컸지만 그 바탕엔 가학으로 내려온 조선 양명학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

하곡 정제두는 숙종 말 한양을 떠나 강화도에 정착했다. 당시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 아래서 양명학은 집권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혔다. 앞서 허균, 박제가, 유수원, 이수광 등이 양명학을 받아들였지만,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밝힌 이는 하곡이 유일했다. 그가 강화로 이주할 때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뿌리 뽑힌 소론계열의 이광명, 신대우 등이 하곡의 뒤를 따랐다. 영재는 이광명의 종손이요, 이광명은 원교 이광사의 종형.

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라 하여, 주체성을 강조했다. 마음 밖에 사물이 없고 마음 밖에 이치가 없다는 것을 종지로 삼았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 본성과 합리적 이성을 갖추고 태어난 평등하면서 존귀한 존재였다. 반면 성리학은 사물의 본성이 이치라 하였고, 그 이치는 공맹의 경전과 주자의 해석으로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배우고 따르기만 하면 됐다. 특히 주자는 <대학>의 친민(親民)을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한다)으로 바꿔, 사대부 중심의 계급질서를 합리화하려 했다. 이에 비해 양명학은 경전 본래의 친민(백성과 가까이 하여 그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같이한다)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백성을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보았다. 여기에 백성이 가장 중하고, 둘째는 사직이며 군왕은 가볍다는 <맹자>의 내용까지 더했으니, 성리학의 입장에선 사문난적이었다.

하곡과 그 제자들은 더 나아가 동기의 순수함과 실천의 지극함을 강조했다. 앎은 함의 시작이며 함은 앎의 완성이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하곡의 학풍을 이어받은 강화학의 후예들이, 민족의 비극 앞에서 대부분 장엄한 최후를 선택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영재의 문장을 흠모했던 매천 황현은 경술국치를 당하던 해 자결했다. 아우 경재 이건승, 그리고 하곡의 7대손 기당 정원하 전 참판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자결을 시도했다. 가족의 저지로 실패하자 경술국치의 해 문원 홍승헌 전 참판, 수파 안효제 등과 함께 만주로 항일투쟁의 길을 떠났다. 뜻은 비장했지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들은 관조차 마련 못 하는 처절한 궁핍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수파는 1912년, 문원은 1914년, 경재는 1924년, 기당은 1926년 세상을 떠났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보재 이상설은 1888년 영재가 전남 보성으로 유배를 떠날 때 성문 앞에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제자였다. 그는 만주와 극동지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7년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들과 세교를 맺었던 이석영, 이회영 형제, 그리고 이동녕도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해방 1년 전, 지리산 천은사 입구 월곡 저수지에 뛰어든 매천의 동생 석전 황원의 죽음은 강화학파 장렬한 산화 행렬의 대단원이었다.

거명된 이름만으로도 알아차렸겠지만, 이들은 철두철미 보수주의자였다. 갑오년 혁명을 일으킨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을 주장하며 타협과 협상을 반대했다. 개화를 막기 위해 버텼고, 갑오경장을 거부했으며, 단발령에 저항했다. 개화파들을 두고 이 나라를 도박판의 판돈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이들은 농민봉기 이전에 그 원인이 되었던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부정부패를 발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화를 반대한 것은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는 개화가 곧 망국으로 이어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고, 외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개화파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영재에게 ‘문장은 시대를 위해 써야 하고, 시는 현실의 문제를 위하여 써야’(중국 백거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권력자들의 죄상을 성토하는 데 추상같았고, 그의 시는 약자의 고통을 뼈에 사무치게 드러냈다. “… 남편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다가/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수확한 추석날/ … (그 아내가) 유복자 안고 죽은 남편을 향해 오열하다가,/ 기절한 지 오래지 않아,/ 돌연히 아전들이 사립문을 부수며,/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

1878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들의 패악질을 눈으로 보고 쓴 장시 ‘전가추석’의 일부다. 수탈을 피해 산중으로 숨어든 화전민에게 닥친 재앙을 전하는 ‘협촌기사’는 가슴을 후벼 판다. “이 산중에 호랑이도 없고/ 근방에 산적도 없거늘/ … 관속배 팔을 걷어붙이고/ 노인을 치고 부인네 욕보이고/ 해괴하기 말로 다 못하겠소/ … 놀란 아기 반쯤 사색이요/ 움츠린 개 숨을 헐떡헐떡/ 다시 챙겨봐야 무엇하랴/ 빈 방구들에 해진 삿자리 남았구나….” 이웃집에 살았지만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짚신장이의 죽음 앞에서, 매장할 땅을 내어주고 쓴 ‘유수묘지명’의 명문은 그의 인간존중 정신과 문장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백성들은 오곡이 풍성한 것을 보배로 여기고/ 열매는 거두어 먹고 짚은 버렸네./ 유씨 노인은 이것으로써 늙을 때까지 마쳤으니/ 살아서는 신을 삼았고 죽어서는 거적에 싸여 갔네.”

그는 1893년 보성 유배지에선 이렇게 자책했다. “…나는 누구이기에 앉아서 안일을 누리는가.” 하루 세끼 얻어먹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건평리 바다를 등지고 동남의 진강산을 바라보는 자리에 영재 묘가 있다. 진강산 서쪽 기슭엔 하곡 묘가 있다. 영재는 간곡하게 하곡을 바라보고, 하곡은 하일리 해 지는 바다를 응시할 따름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것일진대.”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그럼에도 영재의 통탄이 들리는 듯하다. 오로지 저의 영달을 위해 나라도 팔고, 양심도 팔고, 신념도 파는 자들이 지금 보수주의를 자처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있으니…. 아직도 빛은 어둠에 가려져 있는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