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소설가 김영하 인터뷰/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9. 13:53

문화문화일반

나의 정치는 개나리언덕에서 피어났다

등록 :2016-03-18 20:04수정 :2016-03-18 20:07

 

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소설가 김영하
“후보 몇 명 갈아치운다고 뭐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할 권리, 그것도 투표할 권리만큼 소중한 권리다. 나는 그 권리를 행사할 작정이다. 그리고 영화나 한 편 볼 작정이다. 아주 재밌는 걸로.”(2000년 3월1일 ‘선거는 왜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나’ 원문 중에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이 도발적인 투표거부 발언이 담긴 신문 칼럼을 쓴 사람은 소설가 김영하(당시 32살)였다. 그러나 그의 원고는 일간지에 원문 그대로 실리지 못했다. 그의 칼럼을 게재한 문화일보 쪽이 원고가 너무 냉소적이라며 임의로 결론을 바꾼 것이다. 김영하는 즉각 항의했지만 그의 원문 게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지난해 <시사저널>이 뽑은 차세대 리더 100인 중 문학계 1위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지만, 시국에 대한 발언이나 글쓰기를 좀처럼 한 적 없던 김영하가 달라졌다. 지난 2월 그는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장하나 후원회장’이라는 타이틀로 선거운동 지원에 나섰다.

그는 평소 장하나 의원과 면식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도 아니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장하나 의원의 후원회장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김영하는 “20년 가까이 투표도 안 하던 정치 냉담자가 국회의원의 후원회장이 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라고 자문한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지난 8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Hu:)’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소설을 쓰는 사람이냐’고?

김영하는 젊은 나이에 문단의 평가와 대중적 인기 모두를 거머쥐었다. 1995년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한 이후 그의 문학인생은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문학동네 작가상(1996), 현대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4), 동인문학상(2004), 황순원문학상(2004), 만해문학상(2007), 이상문학상(2012), 김유정문학상(2015)을 연이어 수상했고, 그의 작품은 미국·프랑스·독일·일본·이탈리아·네덜란드·터키 등 1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영화와 연극,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뉴욕 타임스> 인터내셔널판과 <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고, 라디오 게스트와 팟캐스트 진행자, 강연회 인기 연사로도 명성이 높다.

-솔직히 김영하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개학 전날 밀린 일기 쓰듯이 열심히 쌓아놓고 읽고 있는데, 작품의 성격을 뭐라고 한마디로 특징짓기가 참 힘들어요. 흡입력이 강해서 빨려 들어가듯이 읽기는 합니다만….

“해외에 가면 ‘어떤 소설을 쓰냐?’고들 물어보는데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없는 소설을 쓴다’고 얼버무려요.”

-작가마다 떠오르는 특유의 색깔 같은 것이 있는데, 김영하 작가의 색깔은 뭔지 하나로 뭉뚱그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재밌긴 한데 정리가 잘 안된다고. 우리가 장르소설 같은 거를 볼 때는 어떤 법칙, 예측가능성 같은 것들이 있는데 저한텐 그런 게 없어서….”

-아, 그거로군요. 김영하 작품의 특징, ‘예측 가능하지 않음!’

“하하하, 그런가요. 현실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하고, 순수문학 같기도 하고 장르문학 같기도 하고. 어떤 경계에 서 있어서 파악하기가 좀…. 저도 왜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쓰다 보니 그렇게 가는 거지, 작정하고 그렇게 쓰는 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그가 읽은 책의 총체’라고 쓰신 글을 봤어요. 요즘 어떤 책을 읽으세요?

“엘리자베스 워런의 <싸울 기회>라는 책인데, 하버드대학의 파산법 전문가로 미국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죠. 금융위기 때 무지막지한 금융권의 압류로 많은 주택들이 경매로 넘어갔는데 거기 맞서서 금융권 규제법안을 통과시킨 여성이에요.”

-소설가라고 소설만 읽는 건 아니군요.

“김훈 선생님은 매뉴얼 같은 걸 많이 읽는다고 하세요. ‘선박건조법’ 같은 책도 보고.(웃음) 소설을 쓰려면 다양한 자료들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란 소설을 쓸 때는 폭주청소년에 관한 심포지엄에 갔었어요. 도감을 볼 때도 있고, 룸살롱 마담이 쓴 자서전, 조폭 출신의 증언이나 판례 같은 것도 읽어요.”

20년 가까이 투표도 안하던
정치 냉담자가 국회의원 후원회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라는
그의 자문에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지금 상황이 너무 엄중해서
개인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상황 방치하면 전체주의 옵니다
전체주의는 예술의 적입니다”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신문이나 뉴스도 열심히 보시겠군요.

“그럼요. 사람들은 급하게 기사 제목만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기사 하나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보도 꼼꼼히 챙겨봐요. 예를 들면 최근에 경남 고성인가요? 영아학대 사건이 있었잖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건이 벌어진 건 용인의 대형아파트예요. 거기 서너 가구가 살아요. 어떻게 그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들 관계도 대학 동창에, 학습지 교사와 학부모였다고 하죠. 왜 이 사람은 고성이 시가이고 직장은 천안인데 용인에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용인에 중대형 평형들이 미분양이 많이 났었잖아요. 거기 서너 가구가 방 하나씩 차지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심리적 과정이 있었을까?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 학대에 가담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같이 살던 사람이에요. 엄마가 굉장히 취약한 상태였고 거기서 가장 약자인 아이가 학대당한 거죠. 갈등과 분노가 가장 약한 데서 터지잖아요. 이건 다 가설이지만.”

-전혀 생각 못한 지점이군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물고기 지느러미만 보고 그 안에 물고기들이 어떻게 지나다니고 있는지 그려내는 것 같아요.

“그냥 기사로 뽑아봤을 땐 엄마는 ‘죽일 년’이고 ‘그 옆에 사람들은 뭐했대? 어우, 독한 사람들!’ 하고 끝나는 거죠. 소설은 그런 것들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에요.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는 일이 소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얼마 전 필리버스터 방송도 보셨나요?

“다른 나라에서는 ‘말이 안 되는’ 필리버스터를 많이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말이 되는’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절대로 뻘 소리를 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압력을 느끼는 것 같은데 실제로 이상적인 의회라면 뻘 소리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쓸모 있는 말, 가치 있고 실용적인 말만 들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의회주의는 효율성에 반대되는 제도입니다. 대통령이 책상을 땅땅 치면서 ‘왜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 법안이 빨리 통과되지 않도록 의회가 존재하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쟁점적인 법안을 다룰 때는, 사회적인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반대 의견이 있으면 쓸만한 소리든 쓸모없는 소리든 끝까지 듣고, 그러라고 의회가 있는 거죠.”

-장하나 의원 후원회장을 맡았단 보도를 처음 봤을 때 사실 별 감흥이 없었어요. 소설가가 정치적 지지를 표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그런데 김영하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궁금해졌어요. 이런 사람이 웬일이지?(웃음)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정치나 서사, 엄숙주의를 극도로 혐오해온 사람이?

“많이 바뀐 거죠. 저도 웬만한 상황이라면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상황이 워낙 엄중해서 개인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전체주의가 오니까요. 전체주의야말로 예술의 적입니다. 예술가들은 진보일 수도, 보수일 수도 있고 엉뚱한 거를 믿을 수도 있죠. 유에프오(UFO)를 믿을 수도 있고 극단적 환경주의자가 될 수도 있어요. 전체주의는 다른 모든 ‘~주의’를 압살하는 거잖아요. 최근에 연극계를 비롯해서 문화예술 분야에 사실상의 검열제도가 부활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그게 결국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것….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그가 잠시 고개를 숙여 차를 마셨다. 면전에서 듣는 그의 목소리가,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읽어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문장처럼 귓가에서 반복해 맴도는 것 같았다.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소설가 김영하씨,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에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설가 김영하씨,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에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89년 설인종 폭행치사사건의 충격

김영하를 만든 시간들
김영하를 만든 시간들
김영하는 1968년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서울에서 성장했다. 1986년 연세대 경영대에 입학한 그는 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과 경영대 동기다.

-이한열하고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나요?

“경영학과가 100명쯤 됐는데 반이 달라서 과에서 만날 일은 별로 없었어요. 근데 둘 다 동아리를 했어요. 그 친구는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만화사랑동호회’, 전 4층에 있는 ‘국악연구회’.”

-국악연구회를 했다고요? 의외인데요. 무슨 기타동호회라면 모를까.(웃음)

“기타도 배우고 싶었지만 배우려면 기타를 사야 하잖아요. 국악연구회는 악기를 전부 준대요. 그래서 가입했어요. 같은 날 가입한 친구가 우석훈(경제학자, <88만원 세대> 공저자)인데 둘이 회장, 총무 하고 열심히 했어요. 전 대금을 하고 석훈이는 해금 잘해요.”

-운동권이었나요?

“국악연구회가 운동권 동아리는 아니었어요. 탈춤, 농악 하는 애들이 운동권이지. 이한열이 다치고 사경을 헤맬 때 세브란스병원에서 철야하고, 장례식 때 걸개그림 들고 운구대열의 앞 열에 섰지만, 그땐 누구나 그렇게 싸우는 상황이었으니까 운동권이라고 할 순 없어요. 본격적으로 운동권이 된 건 대학 3학년 때부터.”

-고학년 되면 하다가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네요.

“4학년 때 동아리 연합회에서 총무부장을 했어요. 그해가 89년이죠. 임수경씨 북한 가고 그럴 때. 국악연구회도 운동권 동아리로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후배들한테 좀 미안해요. 선배들 뜻대로 후배들을 끌고 간 거니까. 그땐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4학년 이후 점차 운동권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긴 했어요. 어느 날 아침 나가보니 애들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전날 밤, 프락치(대학생을 가장한 정보요원)를 잡았다는 거예요. 근데 죽었대요. 마침 연고전을 할 때라 고대 학생들도 같이 있었는데 밤새 취조를 한 거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게 89년 설인종 폭행치사사건이에요.”

당시 동양공전을 다니던 설인종이 이한열이 있던 만화사랑동호회에 연대생을 사칭하며 가입했고 그가 가짜 학생임이 밝혀지면서 학생들은 격분했다.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팽배한 때였다.

-충격이 컸겠군요.

“제가 진짜로 충격을 받은 건 그 다음이에요. 학생들이 그 일을 놓고 회의를 하는데, ‘이게 우리 모두에게 미칠 후과에 대해서 논의를 하자’는 거예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럴 문제가 아니잖아요. 실제로 프락치도 있었고 그런 것에 피해망상을 가질 수 있죠. 하지만 모든 걸 사회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중에 한두 명이라도 그만하자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집단논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엄숙하고 비장하며 남성적인 집단주의 대신, 그가 자유분방하고 탈규범적인 개인주의의 가치를 중시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문학은 그에게,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군대를 미루기 위한’ 방편일 뿐, 경영학에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학원 때부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석사과정을 용케 마치셨네요.

“그때 선택한 전공이 ‘조직행동론’이었는데 그걸 가르친 분이 민중당 후보로 출마했던 오세철 교수였어요. 제 석사논문이 <언론기업의 비정규 노동에 관한 연구>(1993)인데 아마 ‘비정규 노동’이란 단어를 논문에 쓴 게 제가 처음일 거예요.”

-굉장히 앞서갔군요.

“숙련공의 작업을 표준화시켜서 비숙련공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로 바꾸고, 인간을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만들어버린 게 90년대 초반입니다. 결국 지금은 젊은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 되었지요.”

-대학원 마치고 입대하셨지요?

“학부 졸업할 즈음엔 순진한 생각으로 우리나라가 몇 년 안에 통일이 될 줄 알았어요.(웃음) 남북이 10만 군축설, 평화회담 이런 거 얘기하고 그럴 때였거든요. 근데 군축은 개뿔…. 쉽게 통일은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그냥 간 거죠.”

26살에 군대 가서 28살에 제대하고 바로 등단했다. 석사논문을 쓰는 동안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 아파트 경비원, 해고 위기의 식자공들, 헌병대 수사과 방위병으로 일하면서 접한 군 수감자들의 다양한 사연은 김영하 소설의 자양분이 되었다.

금기와 사회통념, 경직된 체제의
틀을 깨고 불온하고 쓸모없는
상상과 개인주의의 보루에서
현실주의 멀리하던 습관이 깨졌다
작년 여름, 연희동 개나리언덕에서

이삿짐 챙겨오다 맞닥뜨린 포클레인
그 앞에 드러누운 산동네 주민들
한바탕 난리굿 치러낸 뒤에
공사장 앞마당서 독자와의 만남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반성하다

정치 환멸 담은 문화비평지 <오늘예감>

-4학년 이후 학생운동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했지만, 대학원 들어가서 선택한 연구 주제나 관심 분야를 보면 여전히 운동권의 자기장 안에서 움직인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치운동 영역에서 결정적으로 멀어진 건 언제입니까?

“방위병 생활할 무렵인데, 그 당시 피시(PC)통신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었어요. ‘바른통신을 위한 모임’이라고, 이름도 아주 촌스러운 동호회였는데 거기서 알게 된 친구들과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오늘예감>이라고….”

-아! <오늘예감>을 만드셨다고요? 문화비평저널?

“네. 그때 만난 멤버들은 아주 펑키했어요. 지금 봐도 상상하기 어려운 특집들을 많이 기획했죠. 나중에 제 소설 제목이 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란 타이틀로 특집을 하기도 했어요. 거기 실린 글들이 이런 거예요. ‘환각의 자유’, 내가 집에서 환각을 보는 건 자유다. 광선총을 쏘든 용과 싸우든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양당 시스템에서 이거 아니면 저거를 고르라는 건 웃기는 거다. ‘일하지 않을 권리’, 노동은 자본가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수단일 뿐이다. 뭐 이런 거….”

-당시 사회변혁이론과는 굉장히 다른 담론이군요.

“프랑스에서도 68혁명이 실패한 후에 급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 대거 미술, 소설 쪽으로 가거든요. 이전 운동권이 담아내지 못했던 여러 흐름을 담아내면서 중구난방으로 모인 굉장히 힙(Hip)한 잡지였죠.”

-그런 생각이 소설에 담긴 거로군요.

“그렇죠. 제 초기 소설을 보면 굉장히 이상하거든요. 아주 폭력적이고, 트렁크에 들어가서 섹스하다 죽고…. 사회가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많잖아요. 제가 소설을 쓸 때 느낀 자유가 그런 거예요. 모든 게 허용되는 공간, 그게 제겐 소설이었던 거죠.”

금기와 사회통념, 경직된 체제의 완강한 틀을 깨고 맘껏 불온하고 ‘쓸모없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개인주의의 보루, 그것이 김영하에겐 문학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현실정치를 멀리했고 사람들과 깊이 교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엄호했다. 그 오랜 습관이 깨진 건, 지난해 여름 서울 연희동의 궁동산 기슭으로 집터를 잡고 나서부터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의리! 제가 김보성 매니저입니다”

조용한 집필실을 갖고 싶어 서울 연희동 산꼭대기 궁동산 기슭에 터를 잡았다. 지난해 봄, 집 짓는 걸 보려고 올라왔을 때 ‘개나리언덕살리기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이 찾아와 “투쟁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수십년째 주민들의 뒷동산이 되고 산책로가 되어온 궁동산 언덕 1500여평을 헐고 고급빌라를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인허가 과정에 석연찮은 점들이 많으니 그걸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라셨어요?

“첨엔 솔직히 귀찮았어요. ‘나, 소설가인데…’ 했죠. 개나리언덕도 잘 모르겠고…. 대충 조언이나 하고 들어드리는 척만 해야지 생각했어요.”

두 달 뒤, 그가 부산에서 이삿짐을 챙겨가지고 오던 날 사달이 났다. 개발업자가 이사트럭을 포클레인으로 막아서며, 자기네 공사구역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뭐라고 얘기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 같은 산동네 주민들이 몰려나와 그의 편을 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지팡이 들고 싸우고, 그는 포클레인 앞에 드러눕고, 아우성치고 붙들고 늘어지고 일으켜주면서 한바탕 ‘난리굿’을 치러냈다.

-아주 격렬한 신입 환영회였네요.(웃음)

“거기가 허름한 산동네고 6·25 때부터 살아온 주민도 많아요. 동네가 작아서 40~50명밖에 안 되는데, 처음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됐어요. 할머니들은 무시로 찾아오시고, 할아버지 네 분은 항상 양 갈래 골목 입구에 앉아 계세요. 거길 피해서 다닐 방법이 없어요. 매번 ‘아이고, 어디 갔다 오나?’ 묻고.(웃음) 재밌는 분들이 많아요. 하루는 체격 건장한 남자가 절 찾아왔는데 조폭인가 했어요. 알고 보니 이 사건을 처음 감사원에 제보한 주민이래요. 자기가 쓴 서류를 내미는데, 맞춤법도 틀리고 엉망이더라고요. ‘무슨 일 하시냐?’니까 ‘(주먹 쥐며) 의~리! 제가 김보성 매니저입니다’ 그러는 거예요. 이 사람이 교육청의 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거길 찾아갔는데 아무도 안 만나주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아는 유일한 사람, 김보성을 데리고 갔었대요.(웃음)”

주민들이 어렵게 정보공개를 청구해 자료를 차곡차곡 모으고 반년 가까이 사방을 뛰어다녀도 진전이 없었다. 공사는 강행되었고, 급기야 김영하의 집 앞마당까지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그의 집 담장과 살구나무, 감나무가 포클레인에 뿌리 뽑혔다. 김영하는 페이스북에 억울한 사연을 전하면서 다음날인 9월4일부터 5일간 집 앞 공사장에서 ‘독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열겠다고 했다. 닷새간 매일 10시부터 5시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진 그의 독자들이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러, 혹은 자기 하소연을 하러 찾아왔다.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겠어요.

“보통은 독자와의 만남을 하면 이름 묻고 사인해주는 정도잖아요. 강연을 가도 제가 말하고 독자들은 듣는 거죠. 개나리언덕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5일 동안, 아주 좋았어요. 설악산 케이블카 투쟁에 좌절한 분들, 세월호에 마음 다치신 분들, 왕따 피해자들, 고시원·원룸에 사는 대학생들…. 세상에 ‘합법을 가장한 폭력’에 당하는 억울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내 책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알게 되었고, 내가 그동안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는 거에 대해서 반성했어요. <오늘예감>의 펑키하고 쿨한 태도? 그게 시효가 다 되었는데 내가 모르고 살았구나!”

-개나리언덕에 와서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셨나 봐요. 미국에서 4년, 부산에서 3년…. 이전까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아니었나요?

“한때 노마드(유목민)가 멋지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근데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보고 굉장히 느낀 바가 많아요. 우리는 어떻게 사회 성원이 되는가? ‘장소’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그 장소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 성원이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주노동자한테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 꺼져’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성원권을 박탈당하는 겁니다. 흑인들, 여성들, 동성애자들 모두 마찬가지죠. 적절한 장소라는 게 꼭 지역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직장도 장소거든요. 함께 일하는 회사가 마을의 역할을 하니까. 그래서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는 사회적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이 아니므니다’예요. 그들은 비장소라 할 수 있는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살고 있는 거죠. 그들에게 성원권을 부여하기 위해선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연결’

-이번 총선에서는 투표하실 건가요? ‘후보 몇 명 갈아치운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정치’는 여전한데요.

“세상이 달라지든 안 달라지든 그냥 제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개입할 건 해야겠구나.”

-총선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어요. 다시 정치환멸로 이어지진 않을까요?

“총선이 다가 아니죠. 이번 개나리언덕 일을 겪으면서 넓은 의미의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떤 장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면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것. 그게 굉장히 느리고 더뎌 보일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정치를 바꾸는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작은 거 하나라도 바꿔 나가고 그걸 자기 정치인한테 강제하고 그 과정을 선순환으로 만드는 것이요. 김보성 매니저가 처음에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이게 해결될 거라고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잖아요?(웃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사람 사이의 ‘연결’인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을 이어준 ‘연결’의 힘으로 궁동산 개나리언덕 공사는 중단되었다. 굴착기에 파헤쳐진 공사장은 여전히 허허벌판이지만, 그 흙더미 어딘가에서 지금 여린 개나리 새싹 하나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나리는 벌써 궁동산 주민들 가슴에 먼저 와서 노랗게 움트고 있다. 개나리언덕에서 쓰일 김영하의 다음 작품이 몹시 궁금하다.

녹취 김성희(한국외대 언론정보학)

이진순
이진순
이진순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