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소설가 김훈이 말하는 아버지 김광주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7. 21:27

문화문화일반

“아버지 김광주, 그분께 저항이란 방랑·파탄·절망…”

등록 :2016-03-16 18:55수정 :2016-03-16 22:00

 

소설가 김훈. 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소설가 김훈. 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부친 심포지엄 참석한 소설가 김훈

언론인이자 한국 첫 무협지 쓰기도
대중적 인기 불구 문단 조명 못 받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중요 지식인” 평
김훈 “야만의 시대에 태어난 아버지
개인적 체험에서 아나키즘 나왔다”
“제 아버지는 억압과 야만의 시대에 태어나 살다 가셨습니다. 저항하기에는 악과 야만의 힘이 너무 컸죠. 그분에게 저항이란 방랑, 파탄, 절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물려준 것은 두 가지, 살인적 가난과 억압적인 정치구조였습니다.”

15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창룡대로 수원화성박물관 영상실. 소설가 김훈(68)이 단상에 올랐다. 경기르네상스포럼과 수원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수원 출신의 소설가 김광주의 삶과 문학’ 심포지엄의 마지막 발표자로서였다.

김훈의 부친 김광주(1910~1973)는 경향신문 문화부장 및 편집부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한국 최초의 무협지 <정협지>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김광주와 김훈 부자는 기자이자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셈인데, 이날 ‘김광주 문학의 재조명-고독한 경계인의 대중적 글쓰기’라는 발표를 한 국문학자 조성면 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은 이와 관련해 “작가 김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김광주를 연구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김광주는 화성행궁 근처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교)를 입학 및 졸업했으며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5학년까지 다닌 뒤 자퇴했다. 1929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리는 한편 상하이를 배경 삼은 단편소설들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7년 상하이가 일본에 함락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하이를 탈출한 뒤 1945년 해방까지 아마도 중국 동북부를 떠돌다가 귀국했다. 1947~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했으며 1961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한 <정협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뒤 <삼국지><수호지><요재지이>같은 중국 고전을 번역하거나 신문 연재소설을 쓰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런 만큼 본격문학 쪽의 관심과 평가에서는 멀어졌다. 이날 심포지엄 이전까지 김광주를 다룬 학술행사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이날 토론자로 참가한 국문학자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김광주는 그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작가이자 지식인”이라며 “단지 한반도 남쪽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식·문화 공동체에서 김광주가 지닌 역할을 면밀히 연구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이 ‘김광주의 생애와 활동’을, 김명섭 강남대 교수가 ‘중국 상하이에서의 김광주의 활동과 아나키즘’을 발표했으며 김종대 중앙대 교수와 박환 수원대 교수도 토론자로 나왔다.

마지막 발표자로 단상에 오른 김훈은 “(아버지 김광주에 대해) 되도록이면 아들이 아니라 한 객관자로서, 객관화시켜서 얘기해 보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아버지는 나라가 망한 1910년에 태어났고 나는 나라를 다시 세운 1948년에 태어났다. 이 두 개의 숫자가 우리 부자의 생애에 어떤 운명적 좌표처럼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1973년에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의 업이었던 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전해에 유신이 선포되고 언론은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업을 비극적으로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부패한 정치권력과 일상화된 국가폭력에 넌더리를 내며 살다 가셨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아나키즘은 어떤 이념이나 사유의 틀을 갖춘 게 아니라 개인적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아버지는 상하이와 평양과 서울과 부산 어디에도 발 붙이기 어려웠고 희망의 비전을 세울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6·25 전쟁 때 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잔류했는데, 9·28 수복 뒤부터 강한 반공의 필치를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면 아마도 적 치하에서 매우 떳떳치 못한 시간을 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했던 거죠.”

김훈은 가난 극복이 최우선 과제였던 자신의 청년기와 오늘날 한국 청년을 비교하는 것으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66년에 우리의 국민소득은 120달러로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가난을 해결하고 밥이 넘쳐 흐르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와 억압과 차별과 모순과 죄악을 저질렀고 그것이 이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또 수많은 청년들의 피와 목숨을 바쳐서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을 시스템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이죠. 우리 아버지 세대와 나의 세대가 역사와 시대에 바쳤던 의미가 퇴색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수원/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