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김일성에게서 중장 계급장과 함께 새로운 이름 하나를 받는다. 남도부(南到釜). 남파 이후 남도부 부대는 고립무원이었다. 1954년 1월21일 대구에서 체포돼 이듬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는 눈가리개도 사양하고, 끝까지 총구를 응시했다고 한다.
결국 하산했다. 1953년 10월 초였다. 전쟁 전야 남파돼 입산한 게 1950년 6월24일이었으니 3년4개월여 만이었다.
경남 창녕 대지면 석지리 창녕 성씨 고가 행랑채에 숨어들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강원도 양양에서 전함을 타고 동지 766명과 울진 임원진에 상륙해 백두대간에 오른 이래 단 한 번도 들판을 밟지 못하고 겨울 눈보라, 여름 비바람을 맞으며 산중에서 풍찬노숙해온 세월에 대한 기록이었다.
1950년 7월15일 경북 신불산 배냇골에 도착했을 때 대원은 130여명으로 줄었다. 하산시엔 28명뿐이었다. 중국 팔로군 출신의 간호장교 지춘란, 남도부의 연락병이자 훗날 김정일의 처남이 되었던 차진철(성일기), 서울법대 중퇴생 추일 등.
손바닥만한 노트를 빼곡이 채운 보고서가 완성된 건 1953년 10월10일이었다. 서명을 했다. 제4지구당, 부위원장 대리, 제3지대장 남도부. 한자 하(河)와 영문 이니셜 JS(준수)를 합성해 사인을 했다. 그의 본명은 하준수였다. 한 줄 더 추가했다. “이 서류의 보관자에 대해서는 당의 영광스러운 배려가 계실 것을 건의함.”
남도부는 노트를 신문지로 돌돌 말아, 원호증, 신분증명서 그리고 몽당숟가락과 함께 갈색 유리병에 넣었다. 그리고 은신했던 행랑채 부엌 바닥을 1미터쯤 파고 묻었다.
그가 기록한 3년4개월은 남도부란 이름 아래 산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일제의 징집을 거부한 하준수가 산으로 숨어든 때로부터 시작하면 10년이 넘는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천석꾼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하준수는 진주중학교 3년 때 일본인 교사를 두들겨 패고 퇴학당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43년 일제의 학병 징집을 피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함양으로 돌아왔다.
순사들이 그를 잡기 위해 수시로 그의 집을 찾아왔다. 부친(하종택)은 지역 유지였지만 아들을 보호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1945년 3월 함양 서북쪽 괘관산(1341m)으로 피신했다. 당시 함양 일원엔 학병 거부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많이 피신했다. 지리산 칠선계곡은 그 중심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학병 거부자 73명과 함께 항일투쟁 결사체 보광당을 결성했다. ‘널리 빛을 비추자!’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전일본 가라테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가라테 고수였다. 게다가 일본인 교사를 두들겨 팰 정도로 담력이 컸다. 향리에서 그는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보광당은 주재소를 습격해 총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벌였다.
해방 후 하산했다. 곧 ‘건군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군수와 경찰서장을 선출하는 것을 도왔다.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이를 인정하자 하준수는 건준에 합류한다. 그러나 곧 미군정과 대립한다. 자치경찰이 구속한 일제 순사들을 석방하라는 미군정 부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인 이민종이 추천해 하준수는 이승만의 경호대장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이승만의 행태에 질린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선 경찰로 변신한 일제 순사들이 그를 공산주의로 몰아 체포하려 했다. 그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입당 요청이나, 남조선노동당 입당을 모두 거부했으니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쫓겨 1946년 여름 다시 덕유산으로 입산한다. 그곳에서 몽양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1947년 7월19일이었다. 그는 남로당에 입당, 함양 군당 부위원장이 된다.
경찰이나 우익청년단과의 충돌은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경찰서와 지서, 우익단체를 습격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2월7일 ‘구국투쟁’, 5월7일 ‘천왕봉 무장봉기’를 벌였다. 당시 남로당은 군당별로 50~100명가량의 야산대를 꾸렸지만, 그의 부대는 남로당 야산대와 별개로 활동했다. 하지만 5·10 총선 투표율은 93%에 이르렀고, 8월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는 ‘월북’한다.
북에서 하준수는 강동정치학원 특별전술연구반 군사교관으로 부임했다. 이현상도 이 학원 훈련생이었다. 이듬해 강동학원 출신들은 3개의 병단으로 나뉘어 남파된다. 그는 김달삼 사령관 아래 부사령관으로 제3병단 300명을 이끌고 1949년 8월4일 경북 영일에 도착했다. ‘동해부대’로 알려진 이 부대는 한때 600여명으로 커졌지만 국군 3사단에 밀려 1950년 4월3일 퇴각했다.
2개월여 뒤 그는 김일성에게서 중장 계급장과 함께 새로운 이름 하나를 받는다. 남도부(南到釜). ‘남단의 부산을 장악하라.’ 그건 그가 지휘할 7군단의 작전명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군단을 이끌고 울진으로 침투하시오. … (대구와 부산의 길목인) 신불산을 거점으로 하여, 후방에서 오는 기차를 전복하고, 군수물자를 막으시오. … 10일 후 우리는 대구에서 만나 함께 부산으로 진격합시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었다.
6월24일 7병단은 양양에서 전함에 올랐다. 군단이라고 하지만 1, 3병단의 소수 생존자와 중국 팔로군 출신 조선족 의용군 등 766명에 불과했다. 부대는 25일 새벽 임원진에 상륙한 뒤 7월1일 영덕 칠보산 전투와 포항 유격전을 거쳐 7월15일 백두대간 최남단 신불산의 배냇골에 도착한다.
남파 이후 남도부 부대는 고립무원이었다. 북으로부터 단 한 차례도 인력이나 무기를 보급받지 못했다. 통신도 단절됐다. 9월14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북의 인민군이 퇴각했다. 이후 남도부는 연락대를 3차례나 보내 지시를 기다렸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1952년 8월, 북에서 첫 문서가 도착했다. 1951년 8월31일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94호 결정서’였다.
부대원들은 퇴각 명령을 기대했다.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950년 말부터 3차례에 걸쳐 국군의 대토벌작전이 펼쳐졌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보급투쟁에 나갔던 부대원들이 하나둘 희생됐다. 그러나 94호 결정서는 현지 사수였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협상 과정에서 북쪽은 빨치산의 송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협정 체결 직후인 7월30일 북에선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최고 간부들이 숙청됐다. 남부군의 이현상도 부하들에 의해 숙청됐다. 남도부는 다행히 그를 숙청한 부하들이 없어 무사했다.
휴전 소식은 그래도 대원들을 꿈에 부풀게 했다. “포로교환이 있게 되면 꿈에도 그리던 북으로 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제 산에서 풀려나고 대지를 활보하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성일기)
노동당 결정서 111호가 도착했다. 도심으로 침투해 지구당을 재건하고 지하공작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대원들의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남은 인원은 37명. 남도부는 이들을 4개 조로 분산해 대구, 부산 등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자신은 마지막으로 성일기와 함께 하산했다.
3년여 만에 생면부지의 도시로 내려온 빨치산들은 금방 체포됐다. 성일기는 12월27일 자택에서, 유응재는 1월16일, 이원량은 1월19일 대구 시내에서, 지춘란은 1월20일 팔공산 아지트에서, 남도부는 1월21일 리어카 행상 행세를 하다가 동인동에서 체포됐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1954년 10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사형 당시 입회했던 한 수사관에 따르면, 그는 눈가리개도 사양하고, 끝까지 총구를 응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서 주인공 하준규는 은빛 강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이병주와 하준수는 친구였다.
하준수는 짧은 대구 시절 일본으로 밀항을 계획했다고 한다. 북으로 돌아갈 수도, 남에 투항할 수도 없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에게 조국은 없었다.
대기자 chankb@hani.co.kr
[곽병찬의 향원익청] ‘조국은 없다, 산하만 있을 뿐’
등록 :2016-06-21 18:07수정 :2016-06-21 20:02
하준수는 진주중학교 3년 때 일본인 교사를 두들겨 패고 퇴학당했다.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고향 함양으로 돌아왔다.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다른 학병 거부자 73명과 함께 항일투쟁 결사체 보광당을 결성했다. ‘널리 빛을 비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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