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북핵 위기’ 촉발
7월 영국서 돌아와 일산 칩거
김대중 ‘일괄타결 해법’ 제시
독·러·미 돌며 싱크탱크 구상
94년 1월 아태평화재단 출범
“영등포 땅 팔아 재원 마련”
임동원 차관 ‘삼고초려’ 영입
“디제이 ‘식견’에 두려움마저”
94년 5월 워싱턴 프레스클럽 연설
김대중 제안대로 카터 ‘평양특사’로
6월15일 김일성 만나 핵동결 합의
“영변폭격 1시간 전 클린턴에 전화”
제5부 광장의 시련 7회 아태재단
1993년 7월 이희호와 김대중이 영국에서 돌아올 무렵 대통령 김영삼의 인기는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김영삼은 그해 2월 취임식에서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영삼은 3월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조건 없이 북한에 송환했다. 남북관계 개선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김영삼은 취임 사흘째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밀어붙였다. 3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김진영을 경질했다. 이 일을 신호탄으로 삼아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제거했다. 8월에는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검은돈의 금고인 가명계좌가 발붙일 곳을 잃었다. 김영삼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80%를 넘나들었다. 호남 지역에서도 김영삼의 개혁에 대한 지지율은 85%에 이르렀다.
김영삼의 개혁 행보는 취임 뒤 1년이 안 돼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복병은 외교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북한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 개발 의혹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소련 해체 이후 어려움에 빠진 북한 경제가 그대로 무너질 것이라는 말들이 돌았다. 남과 북은 서로 강경책을 내놓으며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대통령 취임식 때의 훈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영국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김대중은 모든 관심을 남북문제에 쏟아부었다. “남편은 귀국하고 일주일쯤 지난 뒤에 경기도 일산에 아파트를 세냈어요. 주중에는 주로 거기에 머물면서 통일문제 연구에 힘을 쏟았지요.” 8월13일 ‘도쿄 납치 생환 20돌 기념식’에서 김대중은 북한 핵 문제를 푸는 방안으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일괄타결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은 핵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이 남편이 제시한 방안이었지요.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9월21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독일·러시아·미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남편은 평화재단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여러 나라의 명망 있는 인사들과 만나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고 평화재단 건립 협조도 얻어냈지요.” 김대중은 독일의 나우만재단, 러시아의 고르바초프재단, 미국의 카터재단·브루킹스연구소를 방문해 국제 협력 조직을 구축했다. “세 나라를 방문하고 나서 남편은 평화재단을 세계적인 재단으로 키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지요.”
그 무렵 이희호와 김대중은 문화현장도 자주 찾았다. “한국영화를 많이 봤어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도 보고 <그대 안의 블루> <그 섬에 가고 싶다> <휘몰이>도 보았고요. 연극 <사랑을 찾아서>, 가극 <금강>, 창작 판소리 <밥>,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도 보았지요.” 김대중은 <서편제>를 본 뒤 제작진에게 소감을 얘기했다. “영화 속 한은 원한도 절망도 아니고 민중이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편제>의 한을 김대중의 한과 연결해 설명하는 신문 칼럼이 여러 편 나왔다. <서편제>의 여주인공 오정해는 김대중·이희호 부부와 각별한 사이가 됐다. “1997년 오정해씨가 우리를 찾아와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어요. 고향이 목포여서 남편을 더 가깝게 느꼈나 봐요. 남편이 주례석에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주었지요. 그 뒤로도 오정해씨는 우리 집에 자주 왔어요.” 오정해는 김대중을 “내 인생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1994년 1월18일 통일운동가 늦봄 문익환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신대 장례식장에서 남편이 많이 울었어요. 문익환 목사님과 남편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도 함께 싸웠고, 1980년 내란음모 사건 때도 같이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했잖아요. 건강하셨는데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 몰랐어요. 문 목사님과 생각이 다를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분을 늘 존경했지요.” 김대중은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아 영결식에서 조사를 했다. “문 목사는 민족의 분단을 자신의 허리가 잘린 고통으로 생각하셨던 이 시대의 가장 순수한 민족정신의 상징이었습니다.” 2월에는 저항시인 김남주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김남주의 빈소를 찾아가 조문했다.
1994년 1월27일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출범했다. “내 이름으로 영등포 근처에 땅이 있었어요. 돈이 궁할 때마다 그걸 팔려고 했는데 김대중 집 땅이라고 해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땅을 팔아 재단 설립 자금으로 썼지요.” 아태평화재단은 한반도 평화통일, 아시아의 민주화, 세계평화의 실현을 3대 목표로 내걸었다. “아태재단 이사장을 맡은 뒤 남편은 ‘햇볕정책’을 입안했지요.” 김대중은 1994년 가을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초청 연설에서 햇볕정책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태양정책(햇볕정책)을 적용한 곳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강풍정책만을 적용한 데에서는 전체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김대중은 아태재단에서 통일전문가 임동원을 만났다. 육군 소장 출신인 임동원은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와 통일원 차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남북의 화해·불가침·교류협력에 관한 역사적 합의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끌어낸, 통일정책의 주역이었다. “남편은 임동원씨의 경험과 능력을 탐냈어요. 그래서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모시려고 정동채 비서실장을 보냈는데, 그쪽에서 계속 사양했어요. 정동채 실장이 세 번째 찾아갔을 때에야 마음을 열어서 1995년 1월에 우리 집에서 만났지요.”
임동원은 회고록에서 김대중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날의 첫 만남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그의 예리한 분석력과 판단력, 그리고 명쾌한 해결책에 큰 감명을 받았다. 어느 전문가보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데 놀라는 한편,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또한 그의 확고한 통일철학과 원대한 비전, 그리고 논리 정연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 이런 분이 지난 대선에서 당선되었다면 지금쯤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이루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임동원은 아태재단 사무총장직을 받아들였다. “남편과 임동원 총장은 통일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호텔에 투숙해 밤이 새도록 토론하기도 했고요.” 그런 토론 끝에 완성된 것이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을 뼈대로 하는 ‘3단계 통일론’이었다.
남북관계는 1994년에 들어와 북한 핵 문제로 악화일로를 달렸다. 3월19일 제8차 남북 특사 교환 실무접촉에서 북한 쪽 단장 박영수는 남한 쪽 대표 송영대에게 초강경 발언을 했다. “서울은 여기에서 멀지 않소.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오. 송 선생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오.” 북한 대표단은 이 말을 던지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언론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크게 키워 보도했다. 4월15일 김영삼 정부는 남북특사 교환을 포기했다. 남북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1994년 5월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은 5월12일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했다.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일괄타결을 다시 역설했다. “북한과 미국은 두 가지씩 서로 양보해야 한다. 북한은 핵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남쪽의 안보를 보장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 외교를 통해 경제협력에 나서고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해 북한의 안보를 보장해야 한다.” 김대중은 이 연설에서 김일성과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을 평양에 보낼 것을 제안했다. “남편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날 남편은 카터 대통령에게 전화해 미리 양해를 구했지요. 특사로 제안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느냐고요. 카터 대통령이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어요. 남편의 연설은 그해 내셔널 프레스 클럽 ‘베스트 스피치’로 뽑혔지요.”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제안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으나, 미국은 카터를 특사로 파견하기로 했다. 카터는 한 달 뒤 김일성을 만나러 방북했다.
그사이 한반도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북한은 핵 문제 일괄타결에 실패하자 미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영변의 핵 연료봉 추출을 강행했다. 미국 국방부는 ‘영변 핵 시설 정밀 타격’ 시나리오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영변 공격은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컸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터지면 90일 안에 미군 5만2000명, 한국군 49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전쟁 개시 12시간 안에 북한이 박격포 5000발을 발사해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전쟁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덮었다. 6월16일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과 주한 미국 대사 제임스 레이니는 극비리에 만나 주한미군 가족·군무원의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이니는 한국에 와 있던 딸과 손자·손녀에게 “사흘 안으로 서울을 떠나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터가 북한 주석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6월15일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카터는 김일성과 면담하고 ‘미국이 북한 핵공격의 위협을 제거한다면 북한은 핵 개발을 동결하겠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 순간 미국에서는 대통령 빌 클린턴이 북한 핵 시설 공격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는 그때의 상황을 뒤에 이렇게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이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시간을 앞두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중단하고 미국과 협상하겠다는 것이었다. 1시간 차이로 역사가 바뀌었다.”
카터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은 이 제안을 수용했다. 6월18일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온 카터는 김영삼을 만나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방북을 마치고 온 카터 대통령이 우리를 만나러 왔어요. 북한에 갈 때에도 우리를 먼저 만나고 싶어 했는데, 정부의 반응이 좋지 않아 제임스 레이니 대사가 대신 우리 집에 왔지요. 남편은 ‘김일성 주석이 초청을 했다면 반드시 선물을 준비했을 것이니 안심하고 다녀와도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지요.”
카터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대결 국면이 대화 국면으로 급속히 바뀌었다. 남북정상회담이 7월25일 평양에서 열리는 것으로 확정됐다. 김영삼은 정상회담에 대비해 연일 참모들과 회의했다. 김일성도 정상회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김영삼 일행이 묵을 묘향산 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정상회담을 16일 앞둔 7월9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중앙방송이 이날 정오 김일성의 죽음을 알렸다. 김일성은 7월7일 저녁 심장발작을 일으켜 이튿날 새벽 2시에 숨을 거두었다. 북한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다가 34시간 만에야 밝혔다.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북한 전역이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김일성의 죽음은 김대중에게도 충격이었다. “남편은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서 몹시 허망해했어요. 감옥에 있을 때도 마음속으로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북통일 문제를 놓고 장기를 두듯이 수없이 대화를 했대요. 우리 민족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데 끝내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지요. 김 주석도 남편을 한번 만나 이야기해볼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요. 그런 평가 때문에 남편이 피해를 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언젠가 북한과 잘 통하는 일본 의원을 통해 ‘제발 그런 발언 좀 하지 말아 달라’는 편지까지 써서 보내기도 했어요.”
남한에서는 김일성의 죽음으로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생각이 번졌다. 대화 국면은 한순간에 다시 대결 국면으로 돌아갔다. 7월11일 민주당 의원 이부영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혹 정부가 조문 의사를 표명할 용의는 없는가?”라고 질문했다. 보수언론은 “6·25를 일으킨 전쟁범죄자에게 조문할 수 있느냐”며 이부영의 발언을 맹공격했다. ‘조문 파동’이 시작됐다. 김영삼 정부는 어떤 형식의 조의 표명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돈 오버도퍼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북한 전체가 슬픔 속에 빠져 있던 이 시기에 김영삼 정부가 보여준 행동과 발언들은 북한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김영삼은 그해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은 끝났다”며 ‘갑작스런 통일의 대비’를 이야기했다. 북한붕괴론이었다.
북한은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으로 현안을 해결하는 쪽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북한과 미국은 10월21일 제네바에서 외교부 제1부부장 강석주와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 갈루치를 수석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을 열었다. 두 나라는 북한의 핵 동결과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북한 경수로 건설 지원, 북-미 관계개선에 합의했다. ‘제네바 합의’였다.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한다는 것이 이 합의의 핵심이었다. 남북관계 악화로 한국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하고 경수로 지원 비용의 70%를 내는 짐만 떠안았다. 김영삼 정부의 외교 실패였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세운 김대중은 노태우 정부 시절 통일부 차관을 지낸 임동원을 95년 1월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햇볕정책’ 입안에 매진했다. 사진은 95년 4·19 때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아태재단 사무총장 임동원(왼쪽 둘째) 등과 수유리 묘지를 참배하는 모습이다. 임동원 전 장관 제공
1993년 7월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이희호와 김대중은 영화 가극 등 문화현장을 찾아 모처럼 일반인의 일상을 즐겼다. 사진은 94년 국립극장에서 명창 안숙선(맨 가운데)의 판소리 공연을 보러 갔을 때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4년 5월12일 김대중이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일괄타결 방안과 특사 파견’ 등 1차 북핵위기의 돌파구를 여는 명연설을 했다. 이에 따라 평양에 간 카터 전 미 대통령은 6월15일 김일성과 ‘핵동결 합의’에 성공해 미국의 대북공습을 막았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