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13일 김대중은 내외문제연구회 모임에서 신당 창당 구상과 함께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사진은 7월20일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사무실에서 열린 신당 창당 주비위 입주식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하여’ 축배를 외치는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4년 김대중은 싱가포르 총리를 지낸 리콴유와 지상 논쟁을 벌였다. 리콴유는 능란한 외교술로 싱가포르를 키운 사람이자 장기집권으로 독재 권력을 세운 사람이었다. 리콴유-김대중 논쟁은 미국의 권위 있는 국제관계 학술지 <포린 어페어스>에서 벌어졌다. 리콴유는 1994년 3·4월호에서 ‘문화는 운명이다’라는 주제로 편집장과 대담했다. 이 대담에서 리콴유는 이렇게 밝혔다. “문화는 운명적인 것이다. 서구의 시스템인 민주주의를 무분별하게 아시아에 강요해선 안 된다. 유교적 가치에 입각한 싱가포르 모델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 아시아 나라들의 개발독재를 합리화하는 주장이었다. “남편은 리콴유의 대담을 읽고 <포린 어페어스>에 이의를 제기했어요. 그랬더니 그쪽에서 반론을 해 달라고 해서 장문의 글을 써서 보냈지요.” 김대중의 반론은 ‘문화가 운명인가’라는 제목으로 <포린 어페어스> 1994년 11·12월호에 실렸다.
김대중은 이 논문에서 아시아의 민주주의 뿌리에 주목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들과의 계약에 의지하여 지도자들이 통치권의 위임을 받는데, 통치를 잘하지 못할 경우 이 통치권이 철회될 수 있다는 것이 로크의 이론이다. (…) 2000년 앞서 중국 철학자 맹자는 비슷한 사상을 설파한 바 있다.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왕을 권좌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다. 맹자는 심지어 옳지 않은 왕을 죽이는 것까지도 허락했다. 폭군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맹자는 왕이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잃게 되면 백성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으며, 백성이 첫째이고 국가(사직)가 둘째이며 그다음이 왕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한국의 동학사상도 논거로 내보였다. “한국의 토착신앙인 동학은 더 나아가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했으며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동학정신은 1894년에 봉건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착취에 대항하여 거의 50만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봉기하는 데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유교와 동학의 가르침보다 민주주의에 더 근본적인 사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시아에도 서구에 못지않은 심오한 민주주의 철학의 전통이 있음이 확실하다. 아시아의 풍부한 민주주의적 철학과 전통은 전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다.”
김대중의 반론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엔 리콴유 총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서구 학자들도 적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민주주의 철학과 전통이 아시아에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서양이 한발 앞서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논문은 미국 정치학 교재 <문화와 민주주의>에 리콴유의 대담과 함께 실려서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쓰기도 했대요.” 후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뒤 취임 첫해에 방한한 독일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김대중의 그 논문을 인용해 청와대에서 답사를 했다. “김 대통령께서는 1994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민주주의 준비 단계가 아시아에도 있었고 유럽과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저는 이 논문을 모든 사람이 필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아시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가 아직도 있는 이때에 이 논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1994년 10월29일 12·12 군사반란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지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12·12 사태가 군사반란 사건임이 명백하다”면서도 “피의자들을 기소할 경우 군론 분열과 국가안정 저해가 우려되는데다 피의자들이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기여한 면이 있는 점들을 인정해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를 포함해 관련자 전원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1995년 4월 김대중 도쿄 납치 사건 22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이희호(왼쪽)는 서산공립학교 시절 담임교사였던 일본인 소노다 선생(가운데)과 재회했다. 사진은 96년 6월 은사 부부를 한국에 초청해 동창생들과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1월 민자당 대표 김종필이 토사구팽을 당했다. 1990년 김영삼과 3당 합당을 결행한 김종필은 1992년 김영삼을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세우는 데 공을 들였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지극정성으로 김영삼을 받들었으나 수모만 당하다가 끝내 쫓겨났다. 김영삼은 김종필이 당을 나가도 아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2월9일 김종필은 민자당 탈당과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어 3월30일에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총재가 됐다. 창당대회장은 김영삼 정부 성토장이었다. 자민련은 강령으로 내각제 개헌을 채택했다.
1995년 4월 이희호와 김대중은 일본을 방문했다. 1973년 도쿄 납치 사건 이후 22년 만의 방문이었다. “우리가 영국에 체류하던 시절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김대중 일대기’를 제작해 방영했잖아요. 그 일대기가 반향을 일으켜 마이니치신문사에서 내가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어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어요.” 일본 방문 중에 이희호는 <엔에이치케이> 라디오방송과 인터뷰했다. “인터뷰 끝에 초등학교 때 나를 가르친 일본인 여자 선생님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연락이 왔어요. 마침 선생님의 아들이 그 방송을 들었던 모양이에요.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댁을 찾아가 선생님을 만났지요. 결혼해서 성이 야마구치에서 소노다로 바뀌었는데, 그때 벌써 80대 할머니였어요. 60년 만의 해후였지요.”
1995년 5월19일 대통령 김영삼이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든 한국통신 노동조합을 향해 강경 발언을 했다. “한국통신 노조가 정부의 통신정책에 반대투쟁을 전개하며 불법적인 행위를 계속해 정부 통신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다.” 노조 간부들에게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한국통신 노조는 거세게 반발했다. 노조 지도부는 검거를 피해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했다. 정부는 6월6일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력을 투입해 농성 중인 간부들을 모두 체포해 구속했다.
명동성당과 조계사, 재야민주세력은 김영삼 정부의 폭력 탄압을 규탄했다. 추기경 김수환은 6월11일 미사에서 “정부가 한국통신 노사분규 해결을 중재하고 있는 교회를 무시하고 힘을 선택한 것에 놀라움과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경찰력 투입을 비판했다. 신부·수녀·신도들이 “군사독재정권 시절과 다를 바 없다”며 연일 규탄집회를 열었다. 조계사 스님들도 “성스러운 사찰에 공권력을 투입해 한국통신 노동자들을 연행한 것은 명백한 종교탄압이자 노동운동 탄압”이라며 책임자를 엄벌하라고 촉구했다. 이희호와 김대중도 놀랐다. “김영삼 정부가 그 전부터 계속 보수화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노동자들을 적으로 대하는 것이었어요. 남편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지요.” 김영삼 정부는 독단적 국정운영을 계속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에 대한 견제와 감시도 풀지 않았다. 경찰·안기부·청와대가 연계된 ‘김대중 전담부서’가 있다는 사실이 그해 월간 <신동아> 10월호에 폭로됐다. 김대중 전담 부서는 김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동향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 “문민정부에서도 남편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계속됐어요. 남편의 책을 내려는 출판사에 압력을 넣기도 하고, 남편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려던 것도 막았고요.” 뒷날 안기부가 비밀도청 조직 ‘미림팀’을 꾸려 1994년부터 1997년 사이에 국내 주요 인사 636명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남 편중 인사는 김영삼 정부에서도 계속됐다. 1994년 12월 정부 개각에서 장관급과 차관급 48명 가운데 호남 출신은 장관 1명, 차관 2명뿐이었다. 호남 차별에 대한 비판이 일자 김영삼 정부는 어린 시절에 전남 장성에서 산 적 있는 외무부 장관 공로명과 남편의 고향이 전북 익산인 정무2장관 김장숙을 호남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경찰·검찰·군·정부투자기관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대구·경북에서 부산·경남으로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뿐이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지지율이 80%를 넘었던 호남에서는 실망감이 급속히 퍼졌다. 1995년 1월 광주지역 여론조사에서 ‘호남지역 낙후가 문민정부에서 개선됐느냐’는 질문에 ‘달라진 것 없다’(80.8%)거나 ‘오히려 악화했다’(12.7%)는 의견이 93.5%에 이르렀다. “남편은 6월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강연을 할 때마다 지역등권론을 이야기했지요.”
김대중은 5월26일 국민대 행정대학원 강연에서 “특정 지역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나머지 지역을 소외시키고 박해하는 것이 지역패권주의”라며 “지역이기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각 지역이 서로 수평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한다면 수직적 상하관계에 있던 때보다 진보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5월30일 인천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초청 강연에선 “등권주의란 특정 지역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똑같이 나눠 갖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그동안 독점해온 권력을 내놓기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자당은 당직자를 총동원해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을 지역할거주의라고 공격했다.
1995년 6월27일 4대 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광역의회의원·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회의원)가 동시에 치러졌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 악재가 발생해 판세가 썩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기택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가 남편에게 지원유세를 해달라고 요청해왔지요.” 민주당의 악재는 5월13일 민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를 뽑는 대의원대회에서 불거졌다. 이기택의 지원을 받은 장경우 후보 쪽이 돈봉투를 살포했다는 주장이 나와 개표가 중단되는 파행을 겪었다. 장경우와 맞붙은 안동선은 후보를 사퇴했지만, 돈봉투 사건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남편은 그때 경기도지사 후보는 이종찬씨, 서울시장 후보는 조순씨로 할 경우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기택 대표가 장경우씨를 고집했어요. 돈봉투 문제가 나오자 이기택 대표는 남편을 찾아와 ‘만약 장경우 후보가 떨어지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면서 장 후보를 지원해달라고 했어요.” 김대중은 정당연설회 연설원으로 등록하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원연설을 했다.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고 쓰인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꼈다.
1994년 리콴유와 ‘민주주의 논쟁’
김대중 반론·대담 미 대학 교재로
95년 도쿄납치 22년만에 일본 방문
‘NHK’ 인터뷰 듣고 초등 은사 상봉
문민정부도 ‘김대중 전담부서’ 감시
“출판사 압력·영화 제작도 방해했죠”
95년 6·27지방선거 ‘김대중 바람’ 확인
7월13일 민주의원 51명 ‘정치재개’ 요청
“민주주의·통일 평생 소원 이루고 싶다”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은 ‘김대중 바람’의 위력을 입증해 정계복귀의 토대가 됐다. 6월15일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경기도 안양에서 첫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27일 지방선거는 여당의 참패와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자당은 광역 시·도 15곳 가운데 5곳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특히 서울에서 민자당 후보 정원식은 무소속 후보 박찬종에게도 밀려 3위로 주저앉았다.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석권했다. 민주당은 서울을 비롯해 광주·전남·전북을 차지했다. 말썽이 났던 경기도에서는 민주당 후보 장경우가 민자당 후보 이인제에게 패배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민자당은 230곳 가운데 71석을 차지하는 데 머물렀다. 서울에서는 25곳 가운데 2곳만 민자당이 승리했고, 나머지 23곳은 모두 민주당이 차지했다. 선거 막판에 민자당은 ‘김대중 비판’에 당력을 쏟아부었다. 민자당 대변인들이 하루 4~5번씩 김대중 비판 논평을 내고 민자당 당보를 김대중 비판으로 채워 100만부나 뿌리기도 했다. 민자당의 김대중 비판은 ‘김대중 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이틀 뒤인 6월29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 서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지상 5층, 지하 4층 건물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이 사고로 502명이 죽고 937명이 다쳤다. 김영삼 정부는 ‘사고공화국’이란 말을 들었다. 그 시절 유난히 대형 사고가 많았다. 1993년 3월에는 구포열차 탈선 사건으로 78명이 숨졌다. 그해 7월에는 아시아나항공기가 추락해 66명이 숨졌다. 10월에는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4년 10월에는 성수대교가 붕괴해 32명의 사망자가 났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하기 두 달 전에는 대구 지하철공사장이 폭발해 101명이 숨졌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김영삼은 사과했다. ‘사과공화국’이란 말이 붙었다.
1995년 7월13일 정계 복귀 발표에 앞서 김대중은 12일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민주당 중진들과 신당 창당 방안을 놓고 밤새 논쟁하며 검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7월13일 민주당 의원 51명이 결의해 김대중에게 정치 재개를 요청했다. 지방선거에서 민심을 확인한 김대중은 정치에 복귀하기로 결심했다. 이희호는 남편의 정치 재개에 반대했다. “남편이 정계은퇴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대통령이 돼서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정말로 간절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 하니까, 그런 남편의 마음을 아니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정치를 다시 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대했어요. 국민과 한 약속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남편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과 미국 닉슨 대통령 예를 들었어요. 드골 대통령이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프랑스 번영을 가져왔잖아요. 닉슨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하자 은퇴했다가 복귀해 1968년에 대통령이 됐고요. 나는 남편의 간절한 소망을 결국 이해하고 받아들였지요.”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정계복귀가 평생의 꿈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내가 정계복귀를 결심한 근본적인 이유는 평생 품었던 꿈을 실현해보고 싶다는 데 있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국가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 내 평생소원 두 가지 중에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다. 열심히 일해서 국민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내게는 오랜 세월 갈고닦은 정책들이 있었고 아직 열정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구하기로 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