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9월5일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됨으로써 2년9개월 만의 정계복귀를 공식화했다. 사진은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 속에 창당대회장인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5부 광장의 시련 9회 국민회의 창당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김대중 총재 ‘정계복귀’ 비판 여론
“거짓말쟁이 비난은 지나치다 생각”
10월 박계동 ‘노태우 비자금’ 폭로
김대중 ‘14대 대선자금 20억’ 고백
“안 받으면 노대통령과 적 된다고…”
김영삼은 쓰고 남아 1천억대 예치
97년 5월 국민회의 15대 대선후보로
“정치보복 않겠다…김영삼 돕겠다”
김대중 후보 수락 연설 통해 ‘약속’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김대중 총재 ‘정계복귀’ 비판 여론
“거짓말쟁이 비난은 지나치다 생각”
10월 박계동 ‘노태우 비자금’ 폭로
김대중 ‘14대 대선자금 20억’ 고백
“안 받으면 노대통령과 적 된다고…”
김영삼은 쓰고 남아 1천억대 예치
97년 5월 국민회의 15대 대선후보로
“정치보복 않겠다…김영삼 돕겠다”
김대중 후보 수락 연설 통해 ‘약속’
김대중은 1995년 7월18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정계은퇴 이후 2년 7개월 만의 복귀였다. 7월22일 신당에 참여하는 의원 65명이 의원총회를 열었다. 신당은 각계의 명망 있는 인물 250명을 영입했다. 1995년 9월5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당원 1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은 총재로 선출됐다. 조세형·이종찬·정대철·김영배·김근태·박상규·신낙균·유재건이 부총재로 뽑혔다. 김대중은 정치의 중심으로 다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정계복귀를 비판했어요. 마음이 편치 않았지요. 민주당을 탈당해 새 당을 만드는 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여당에서 남편을 두고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는데,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어요. ‘삼선개헌은 하지 않겠다’, ‘국민에게 더는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헌법을 고쳐 3선을 하고 나중에는 헌법을 아예 부정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너그러웠던 사람들이 남편의 정계복귀만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1995년 7월18일 5·18 관련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 공안1부는 전두환·노태우를 포함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당시 일련의 조처는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기존 통치 질서를 대체하고 새로운 헌법 질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됐다는 점에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1995년 10월19일 민주당 의원 박계동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에 차명으로 분산·예치돼 있다고 폭로하고 차명계좌 이름과 계좌번호까지 밝혔다. 노태우·전두환을 비호해온 김영삼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불똥은 김대중에게도 튀었다. 10월20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김대중은 “199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은 바 있다”고 고백했다. 김대중은 또 “당시 노태우씨가 김영삼 후보에게 수천억원을 제공했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 “14대 대통령 선거 때였는데 남편은 처음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주는 돈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김중권 정무수석이 ‘이걸 안 받으면 현직 대통령을 적으로 삼는 것인데, 그런 상태로 어떻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느냐’고 하면서 다른 후보들도 다 받았으니 받으시는 게 좋겠다고 해서 받았다고 해요. 받은 돈은 대통령선거 자금으로 썼어요. 남편은 노태우 대통령의 돈을 받은 건 잘못이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사과했지요.” 민자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돈을 더 받았다며 ‘20억+알파’ 설을 거론했다. 김대중은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은 20억원 말고 없다”며 “노태우씨가 이 점을 분명히 밝혀주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노태우는 11월16일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야당에서는 김영삼 대선자금 수사를 촉구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김영삼은 11월24일 5·17쿠데타 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 지시를 내렸다. 검찰은 몇 달 전 태도를 바꿔 11월30일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수사를 재개했다. 검찰은 군형법상 반란수괴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받아 12월3일 전두환을 구속했다. 12월19일 여야 3당은 5·18특별법 단일안에 합의하고 정기국회 마지막날에 통과시켰다.
1995년 12월15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했다. “일산에 2층짜리 집을 지었어요. 서울에 있는 것이 너무 번잡하기도 하고, 동교동 집이 늘 감시와 도청에 시달렸거든요.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이사했지요. 동교동 집을 떠나는 게 아쉬웠는데 큰아들 홍일이가 동교동 집으로 들어왔어요. 일산으로 이사해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겨서 기뻤지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아침이면 자주 산책을 했다. “일산에 호수가 있잖아요. 아침마다 호수공원을 산책하고, 또 집 앞에 작은 정발산이 있는데 그 산에도 자주 올라갔지요.”
1996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당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민자당은 1995년 12월6일 김영삼이 주창한 ‘세계화’를 완성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민자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12월15일 김영삼은 서울대 총장 이수성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이어 1996년 1월16일 박찬종을 신한국당에 영입했다. 1월22일에는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이 신한국당에 들어갔다. 이회창은 문민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을 지내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됐으나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1994년 4월22일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으로 이회창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랐다. 이회창에 이어 2월13일에는 이홍구가 신한국당에 들어가 선거대책위 고문을 맡았다. 신한국당은 대통령을 꿈꾸는 ‘9룡’의 각축장이 됐다.
3월21일 청와대 제1부속실장 장학로의 비리가 폭로됐다. 검찰은 37억원의 부정축재 혐의로 장학로를 구속했다. 장학로 구속으로 김영삼 정권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4·11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1996년 4월 5일과 6일 북한이 난데없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북쪽 지역에 500여명의 북한군을 진입시켜 무력시위를 벌이고 박격포 진지를 구축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4월8일치에 “총선을 앞두고 하락하던 한국 집권여당의 지지도가 북한의 비무장지대 병력투입으로 유권자들이 안보위기를 느끼면서 반등하고 있다”고 전했다.
4월11일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회의는 지역구 66석, 전국구 13석을 합쳐 79석을 얻었다.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했다.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남아 있던 민주당은 15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민주당 공동대표 김원기, 상임고문 이기택을 포함해 당 지도부가 모두 낙선했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지역구 121석을 포함해 139석을 차지했다. 서울에서 신한국당은 47석 가운데 27석을 얻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선거 결과에 실망했다. “100석은 얻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는데 그보다 못한 결과가 나왔잖아요. 선거를 앞두고 판문점 무력시위가 일어나 타격을 받았고, 야권이 갈라진 것도 영향을 주었지요.” 서울을 포함해 곳곳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58곳에서 3000표 이하로 당락이 갈렸다. 신한국당은 무소속 당선자들을 끌어들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4·11총선 당시 김영삼은 1992년 대선 자금으로 쓰고 남은 1197억원을 안기부 계좌에 예치했다가 신한국당에 지원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1996년 8월에는 ‘한총련 사태’가 일어났다. 8월13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2만명이 연세대에서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벌였다. 경찰은 헬리콥터까지 투입해 집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학생들을 검거했다. 학생들은 연세대 건물을 점거한 뒤 격렬히 저항했으나 8월20일 경찰에 진압됐다. 경찰은 5848명을 연행해 462명을 구속하고 334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10월9일 국민회의 의원 추미애는 국정감사에서 “경찰이 여학생들을 연행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저질렀다”며 “성적으로 피해를 당한 여학생들의 진술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추미애는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1996년 10월11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회원국 가입을 승인했다. 그해 12월12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의 29번째 회원국이 됐다. 앞서 1995년 수출이 1000억달러를 돌파하고 국민 1인당 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외형의 화려함과 달리 한국 경제의 내실은 허약했다. 1994년부터 1996년 사이 총외채가 520억달러에서 1080억달러로 폭증했다. 경상수지 적자도 같은 기간에 38억달러에서 230억달러로 늘었다.
1996년 끝자락에 김영삼 정부의 파국을 알리는 일이 일어났다.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 의원 154명이 안기부법·노동법 개정안을 7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여야가 합의해 1993년 고무찬양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을 박탈했는데, 신한국당은 3년 만에 이 조항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거센 후폭풍이 뒤따랐다. 국민회의는 “고무찬양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을 안기부에 주는 것은 대통령선거에 악용하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노동법 개정안은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제·변형근로제 도입, 파업기간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대체근로 허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갔다.
김대중과 김종필은 여당의 날치기 처리를 ‘김영삼 쿠데타’로 규정하고 강력한 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성탄절 다음날 새벽 우리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아픔과 충격을 겪어야 했다”며 “문민정부의 조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비판했다. 23일이나 계속된 총파업 투쟁으로 김영삼 정권은 무릎을 꿇었다. 노동관계법은 도로 개정됐다. 김영삼 정권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1997년 1월23일 ‘한보사태’가 터졌다. 재계 서열 14위인 한보그룹의 부도는 경제에 막대한 충격을 가했다. 권력이 개입한 거대한 금융부정 비리가 드러났다. 한보그룹의 부실대출 규모는 5조7000억원에 이르렀다. ‘건국 이래 최대 금융부정 사건’이었다.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가 1월31일 공금횡령·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고 여야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이 사건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김영삼은 2월25일 “자식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1997년 4월7일 한보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그 무렵 김현철의 방송사 인사 개입을 입증하는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됐다. 5월17일 김현철은 알선수재·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한보사태가 정치와 경제를 뒤흔들던 1997년 2월12일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이 측근 김덕홍과 함께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황장엽은 필리핀을 경유해 4월20일 서울에 도착했다. 황장엽 망명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풍’의 소재로 활용됐다. 4월22일 <조선일보>는 황장엽이 작성한 <조선 문제>라는 문건의 내용을 보도했다. 이 문건에서 황장엽은 북한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화학무기·로켓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남한에 대한 공작을 통해 학생소요를 조종해왔다고 주장했다. 황장엽은 “북한의 경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체의 경제협력을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5월에 들어와 여야는 대통령 후보 선출을 본격화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5월19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대통령 선출 대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정대철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당 총재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김상현을 큰 표차로 이겼다. 김대중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전두환·노태우씨가 사죄하면 용서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를 무사히 마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 후보 선출 대회에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딸 송가니씨가 참석했어요. 주한 외교사절들도 많이 왔고요. 그때 송가니씨가 남편에게 만델라 대통령이 찼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었지요. 2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쓰던 시계였어요. 남편은 답례로 미국 망명 시절에 들고 다니던 낡은 밤색 서류가방을 주었지요. 만델라가 흑인 해방 투쟁을 하며 오랜 세월 고난을 겪은 데 대해 남편은 동질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 몇 년 전에 만델라 대통령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번역하기도 했고요. 만델라가 70대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도 남편에게 용기를 주었지요.”
6월24일에는 김종필이 자민련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대세론에 맞서 경기도지사 이인제가 신한국당 안 민주계의 대항마로 나섰다. 7월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은 60%의 지지율로 이인제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8월20일에는 서울시장 조순이 민주당에 입당해 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조순은 8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당 총재로 추대됐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본격화하자 또다시 ‘북풍’이 불었다. 1997년 8월15일 천도교 교령을 지낸 오익제가 월북했다. 오익제는 평양으로 가기 전 미국에서 쓴 ‘나의 독백’이라는 글에서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북한으로 갈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오익제는 평통자문위원과 국민회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 여당은 오익제가 국민회의 고문이라는 사실만 문제 삼아 국민회의를 공격했다.
며칠 뒤인 8월20일에는 ‘이석현 명함 파동’이 벌어졌다. 국민회의 의원 이석현이 외국인용으로 만든 명함에 ‘남조선’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걸 ‘용공’으로 몰고 간 사건이었다. 이석현 명함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쓸 수 있도록 일곱 나라 말로 인쇄돼 있었다. 이석현은 “한자권 공산국 사람들은 남조선이라고 해야 잘 알기 때문에 남조선을 괄호 안에 부기했으며, 이 명함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쓸 때 ‘남조선’을 지우고 썼다”고 해명했다. 신한국당은 이 사건을 국민회의 공격의 호재로 삼았다.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이석현은 8월29일 눈물을 머금고 국민회의를 탈당했다. 후에 ‘이석현 명함 파동’은 안기부가 개입해 일으킨 것이었음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96년 12월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신한국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가 야권연대의 거센 저항에 밀려 철회했다. 사진은 97년 1월18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노동법 안기부법 원천무효 서명운동 발대식’에서 국민회의 김대중(오른쪽)·자민련 김종필(가운데) 총재가 함께 ‘날치기법 철회 요구’를 외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김대중은 네번째 도전인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자금 폭로, 북풍 등 안팎의 시련에 맞서야 했다. 사진은 1월5일 72살 생일을 맞아 자택 인근 서울 서교동 성당에서 이희호·김홍일(앞줄 맨 왼쪽)·측근들과 미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10월 김대중은 정계복귀 한달 만에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사진은 10월29일 중국 방문에서 귀국한 김대중이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4대 대선자금 수수’에 대해 사과와 해명을 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