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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영화 카르텔 랜드 / 영화평론가 허문영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16. 11:58

사설.칼럼칼럼

[크리틱] 미렐레스와 이스트우드 / 허문영

등록 :2016-07-15 17:42수정 :2016-07-15 19:25

 

허문영
영화평론가

올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건 <카르텔 랜드>라는 다큐멘터리였다. 극장 개봉 하지 않았으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사적인 취향 탓이겠지만, 적어도 올해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 만큼 마음을 빼앗겼다.

중심인물은 멕시코의 외과의사 미렐레스다. 키 크고 마른 초로의 이 사내는 지역 자경단(Autodefensas)의 우두머리다. 부패하고 무능한 공권력을 비웃으며 주민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마약조직에 맞서 무장 자경단이 조직되었고, 조직의 수장으로 추대된 이 느긋하고 강인한 노의사는 놀라운 강단과 리더십으로 마약조직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자경단의 영향력은 멕시코 전역으로 확대되며 미렐레스는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이런 영웅을 세상이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 정부는 자경단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이것이 거부당하자 자경단의 지방군 편입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미렐레스는 “부패한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지만, 타협안 앞에 자경단 지도부는 분열한다. 게다가 비대해진 자경단에 카르텔 조직원이 침투해 주민을 약탈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민심은 자경단을 조금씩 떠나간다.

믿기 힘들지만 이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차마 밝힐 수 없는 결말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나 <카운슬러> 같은 극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훨씬 쓰라리다. 나는 무엇보다 미렐레스라는 인물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할리우드 캐릭터로만 알고 있던 자경단 영웅이 허구의 캐릭터도 신화화된 과거의 인물도 아닌, 바로 오늘의 세계에서 숨 쉬고 피 흘리며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할리우드에는 미국 개척시대에서 비롯된 자경주의(vigilantism) 전통이 있다. 옛 서부극에서부터 오늘의 슈퍼히어로영화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는 서부 사나이로 대표되는 자경단 영웅을 쉼 없이 찬미하고 탐구해왔다. 영화의 결말에 자경단 영웅은 대개 사라진다. 법보다 힘을, 질서보다는 자유를 믿는 그는 마을의 구원자이자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가 악을 향해 쏜 총알은 결국 그 자신에게 돌아온다. 자경단 영웅의 이 비극적 면모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현실의 영웅 미렐레스의 마지막도 다르지 않다. 부패한 정부, 사악한 마약조직, 배신자 동지들 때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초법적인 폭력의 행사자인 그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총을 빼앗기고 사라질 운명이다. 이건 슬프지만 불가피한 결말이다. 그 불가피를 견디면서 문명과 질서가 조금씩 나아간다. 자경단 영웅의 서사는 그 불가피의 상처를 응시하고 어루만진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불가피를 부당하다고 믿는다면? 순진하고도 위험한 생각이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배타와 고립의 노선을 뽐낼 때, 그는 현대의 자경단 영웅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경단 영웅은 법과 질서의 세계에 진입해선 안 된다. 심지어 그는 미렐레스와 같은 진짜 영웅도 아니다.

트럼프의 이름을 만날 때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알려진 대로 보수파이고 오래된 공화당 지지자다. 나는 그의 자경주의적인 영화를 깊이 좋아하며 그의 정치적 선택도 존중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바심이 난다. 그는 이미 지난해 “트럼프나 벤 카슨이 오바마보다 낫다”고 발언한 바 있다. 만일 그가 트럼프를 공식 지지하고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스트우드에 대한 오래된 애정을 이제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