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잠수사 김관홍씨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수장시키려 할 때 그 진실을 건져올리는 데 제 삶을 던졌다. 그는 아이들을 다 거두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 더러운 시대에 살아남아 있다는 치욕에 고통스러워했다. 그 역시 죽음으로 그 치욕을 씻으려 했다.
일몰의 풍경은 시간의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천천히 물들던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는 온통 붉게 타오르는가 싶더니 돌연 암전한다. 물드는 건 오래여도 소멸은 순간이다. 빛과 어둠, 충만과 소멸 사이엔 오로지 한순간만 있다.
그런 반전은 통상 허망스럽기만 하지만 일몰의 풍경은 반대로 충만과 평온으로 이끈다. 남김없이 태워버린 장렬한 산화에 동화되는 탓도 있겠지만, ‘태양은 다시 뜬다’는 자명한 진실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자살 혹은 자결을 패배로 치부하지만, 세상엔 그런 일몰과도 같은 장엄한 죽음도 있다.
대종교 나철 대종사는 1916년 음력 8월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숨을 멈춰(폐식) 조천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일제는 특히 1915년 10월 발표한 종교 규칙을 통해, 유독 대종교에 대해서만 포교활동을 금지했다. 대종교가 일깨우는 민족 정체성이 우려됐던 것이다. 나철은 온갖 모멸을 감수하면서 총독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조롱과 겁박만 받았다. 그는 교도에게 남긴 유서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치욕을 잊지 말라”, “널리 세상을 구하라.”
최남선은 <조선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죽음을 ‘육신제’라고 규정했다. 조국의 해방과 구국의 운동에 불을 지피기 위해 민족의 제단에 제 몸을 봉헌했다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쇠퇴해가던 민족전선은 치열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제자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산파역이었던 예관 신규식은 추도만장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 쇠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이을 자 끊이지 않으리”라고 추모했다. 그는 저술 <한국혼>에서 그의 죽음 앞에서 불퇴전의 ‘혈전주의’를 촉구했다. “치욕을 알게 되면 피로써 죽엄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할 것이다. 치욕을 잊어버린 자는 피가 없는 것이다. … 오호! 동포들이여! 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철이 조천하고 5년 뒤인 1921년 음력 8월27일, 백포 서일 종사는 북만주 밀산의 당벽진 숲속에서 스승의 절명시를 읊조리며 숨을 멈췄다. “나라 땅은 유리 쪽으로 부서지고 티끌 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아득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나철은 일찍이 서일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서일은 독립 혈전에 헌신하겠다며 고사했다. 서일은 1911년 초보적인 무장독립투쟁 단체 중광단을 조직하고, 이를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했으며, 김좌진 지청천 등을 받아들여 정규군 체제의 북로군정서로 발전시켰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말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규군 2만여명에 맞서 대승을 거뒀다. 북만주 일대의 다른 무장독립 부대들은 서일을 중심으로 연합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만주 일대의 한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 ‘경신참변’에서 10월부터 11월까지 공식 집계된 희생만 한인 3600여명이 학살당하고, 가옥 3200여채와 학교 41곳이 전소됐다.
서일로서는 이런 일본군 정예의 광란에 맞설 수 없었다. 그는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10여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식량난 속에서 3천여 병력을 지탱할 순 없었다. 그는 부대를 우호적인 러시아 적군 점령 지역인 시베리아 자유시로 이동시켰다. 자신은 밀산 당벽진에 남아 경제적인 토대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적군은 강제로 한인 독립부대를 무장해제하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적군과 그 추종파들이 학살했다. ‘자유시 참변’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독립군 수백명이 사살당하고 수천명이 체포되거나 실종됐다. 북로군정서는 남은 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1921년 6월 당벽진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불과 1개월여 만에 다시 마적떼의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 장병 대부분이 죽고 마을도 쑥대밭이 되었다. 모두가 서일을 믿고 따르던 동지들이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는 숲속 풀밭에 누워 돌베개를 베고는 스승의 뒤를 따랐다.
1940년 11월10일 한 사람이 두 스승의 뒤를 따랐다.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였으며 한글 규범 정리와 한글 보급에 한평생을 온전히 바친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 신명균이었다. 그는 말없이 갔지만, 죽기 전날 그를 만난 후배 작가 홍구는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제국주의 야만적 정치는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한 노예화를 목적으로 언어와 성명을 박탈하였다. 그때 선생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전에도 자결을 시도했었다. 1938년 2월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하고, 간판을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교체했다. 외래어표기법 통일과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하는 상황에서, 타협을 해서라도 작업을 완성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사정은 이해했지만, 신명균은 그 치욕을 참을 수 없었다. 또 누군가는 역사 앞에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월엔 그가 17년간 가꾸어온 조선교육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했다. 고학생에게 무료로 기숙사를 제공하고, 노동자 농민 계몽활동과 문맹 퇴치를 위해 전국 순회강연이나, 노동야학 혹은 농민학원에서 쓸 교과서를 편찬해 지원하던 단체였다.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들어가 자결하려 했다. 다행히 집주인에게 발견됐다.
1940년으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광란은 더욱 그악스러워졌다. 창씨개명도 이때 강제됐다.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학교에서 한글 학습이 금지된 터에 이름도 한글로 못 쓰다니, 신명균으로선 달리 피할 길이 없었다.
그는 1911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을 만나 민족의식과 한글에 눈을 떴다. 최현배 권덕규 김두봉 이병기 장지영 등이 동기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해 맞춤법과 한자음 표기의 규범을 정리했다. 1929년 결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고,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등과 조선어학회를 발족시키면서 철자법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문법>과 <조선어철자법>도 저술했다. 1936~37년엔 소설가 김태준과 함께 시조 및 가사를 포함한 <조선문학전집 1~6권>을 발간했다. 그는 어문 독립투쟁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이였다.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 동맹휴교투쟁을 주도했던 이관술은 이렇게 회고했다. “맹휴투쟁을 이해해주고 협력해준 사람은 저 민족적 치욕이던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양심적 민족주의자 신명균씨 단 한 사람이었다.”(<반제투쟁의 회고>에서)
그는 청년 시절 대종교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대종교는 그에게 이런 사생관을 갖게 했다. 죽음은 돌아감, 곧 귀천(歸天)이다. 하느님의 분신으로 세상에 나와 하늘의 본성을 올바로 닦고 지켜, 다시 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고 죽음이다.
어떤 공동체건 자살을 금기시한다. 특히 종교는 죄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다시 뜨는 태양처럼 사람들 가슴에서 부활한다. 시대의 어둠이 깊어지면 살아나고 또 살아나,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나아갈 길을 비춰준다.
“꿈을 꾸면 내가 애들하고 숨바꼭질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이들을 찾고, 아이들은 나를 찾고. 왜 내가 그런 꿈을 꿔야 하는 거죠?” 한 달 전 잠수사 김관홍씨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침몰한 세월호에서 아이들의 주검 25구를 수습했다.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수장시키려 할 때 그는 그 진실을 건져올리는 데 제 삶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다 거두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 더러운 시대에 살아남아 있다는 치욕에 고통스러워했다. 그 역시 죽음으로 그 치욕을 씻으려 했다. 대기자 chankb@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