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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당선되어 기쁘면서도 허탈했죠 / 이희호 평전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28. 21:36

정치정치일반

“죽을 고비 이겨낸 대통령 당선 기쁘면서도 허탈했죠”

등록 :2016-07-28 13:57수정 :2016-07-28 14:24

 

1997년 12월18일 김대중은 1% 차 박빙의 승리로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계 입문 43년, 71년 출마 이래 4수 만에, 죽음을 불사한 투쟁 끝에 헌정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사진은 12월19일 새벽 일산 자택 앞에서 밤을 새운 지지자들이 ‘김대중 당선 호외’ 배달에 환호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18일 김대중은 1% 차 박빙의 승리로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계 입문 43년, 71년 출마 이래 4수 만에, 죽음을 불사한 투쟁 끝에 헌정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사진은 12월19일 새벽 일산 자택 앞에서 밤을 새운 지지자들이 ‘김대중 당선 호외’ 배달에 환호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 평전] 67회 제6부 청와대 시간-1회 대통령 당선

1997년 12월17일 마지막 대선 유세
“40년 ‘준비된 대통령’ 기회를” 호소

시동생 대의씨 “죽음 알리지 말라” 유언
투표한 뒤에야 빈소 달려가 오열

12월18일 출구조사 예측대로 ‘1%차 승리’
일산 자택앞 밤새 축하의 함성
“평화적 정권교체 새역사 이뤘다”

가장 먼저 ‘은인’ 이태영에 ‘당선인사’
“치매로 못 알아봐 억장 무너져”

12월19일 빌 클린턴 축하 전화
“국제통화기금 합의이행부터” 압박
이튿날 경제부총리 “나라 금고 비었다”
김대중 ‘금모으기 운동’으로 위기 돌파
외환위기 충격 속에 1997년 12월14일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김대중은 국민에게 호소했다. “불행히도 저는 대통령에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국민이 저를 이때 쓰시려고 뽑아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당선되면 1년6개월 안에 아이엠에프 체제를 벗어나겠다”고 약속했다. 김대중의 선거구호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1997년 12월17일 선거운동 마지막날 김대중은 서울 명동 상업은행 앞에서 마지막 유세를 했다. “저에게는 40년 동안 갈고닦은 지혜와 경륜이 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도,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될 준비를 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대통령이 될 준비를 저만큼 한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꼭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1997년 12월17일 15대 대선 선거운동 마지막날 김대중의 동생 대의씨는 “형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운명했다. 유족들은 언론을 피해 빈소까지 삼성의료원으로 옮겼고 김대중과 이희호는 이튿날 투표를 한 뒤에야 문상을 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17일 15대 대선 선거운동 마지막날 김대중의 동생 대의씨는 “형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운명했다. 유족들은 언론을 피해 빈소까지 삼성의료원으로 옮겼고 김대중과 이희호는 이튿날 투표를 한 뒤에야 문상을 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날 밤 김대중의 동생 김대의가 세상을 떠났다. 김대의는 “형님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니 선거가 끝날 때까지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남편이 여론조사에서 박빙으로 앞서고 있었어요. 마지막날 오후에 시동생이 운명했어요. 남편의 건강 문제가 선거 쟁점이어서 시동생의 죽음조차도 알릴 수 없었지요. 언론에서 눈치를 채고 병원에 확인을 요구하니까 동서는 시동생을 한양대병원에서 삼성의료원으로 옮기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투표가 마감된 뒤에야 빈소를 찾았지요.” 김대중은 동생 영정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시동생들이 남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막내 시동생(김대현)은 남편을 경호하는 일을 맡았다가 5·17 쿠데타 때 잡혀가 고초를 겪고 1년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요.”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오후 6시 투표 마감과 동시에 <문화방송>과 한국갤럽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방송사 출구조사를 보니 남편이 1% 차로 승리할 거라고 나왔어요. 너무 차이가 작아 안심이 되지 않았어요. 개표 초판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섰는데 10시가 넘어가자 순위가 뒤집히더니 12시쯤 남편의 승리가 확실해졌고 새벽 1시쯤에 사실상 확정이 됐어요.” 최종 결과는 80.7% 투표율에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 39만표 차이의 승리였다.

1997년 12월19일 대통령 당선 첫날 김대중과 이희호는 맨먼저 수유리 4.19묘지를 참배했다. 70년대부터 고난을 함께 겪어온 민가협 어머니들이 묘지 입구에 나와 누구보다 뜨겁게 당선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19일 대통령 당선 첫날 김대중과 이희호는 맨먼저 수유리 4.19묘지를 참배했다. 70년대부터 고난을 함께 겪어온 민가협 어머니들이 묘지 입구에 나와 누구보다 뜨겁게 당선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의 일산 집 안팎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남편과 나는 당직자들과 함께 집에서 개표 상황을 보았지요.” 집 밖으로 몰려든 시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했다.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침이슬’ ‘선구자’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창문으로 내다보며 손을 흔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지요.”

헌정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간 평화적·수평적 정권교체였다. 김대중은 1954년 정치에 입문하고 43년 만에,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 도전한 뒤로 26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친 승리였다. 불공정과 반칙이 난무하는 적대적 환경을 뚫고 이룬 승리여서 감격은 더 컸다. “그 세월이 참 길고도 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운 좋게 얻은 승리가 아니라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며 이룬 승리였잖아요.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한 심정이었어요. 당선이 확정된 뒤 남편은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 계속 함성과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정치학자 최장집은 15대 대선에 관해 쓴 글에서 국가권력의 영향력, 재벌의 자금력, 거대 보수언론의 여론 주도력으로 무장한 정·재·관·언의 4자 연합에 맞서 야당이 승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마치 풍차에 도전하는 돈키호테를 연상시킬 정도”의 모험이었다고 했다.

새벽에 일어난 이희호와 김대중은 큰아들 홍일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에게 축하드린다는 전화였어요. 홍일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가슴이 아팠지요. 중앙정보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에 말도 자유롭지 못했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고맙고 미안했지요.” 집 밖에는 밤을 새운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김대중은 이희호와 뜰 앞에 서서 대통령 당선자로서 국민에게 첫인사를 했다.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이제 이 나라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어려웠던 시절에 힘을 주었던 은인들을 떠올렸다. “정일형·이태영 두 분이 가장 먼저 생각났어요. 우리에게는 후견인 같은 분들이었고, 우리가 힘들 때 같이 걱정해주시고 우리를 일으켜주시던 분들이었어요. 정일형 박사님이 돌아가셔서 혼자 계시는 이태영 선생님을 어서 뵙고 싶었지요. 남편이 대통령이 됐다고 말씀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이희호는 서울 봉원동의 이태영 집으로 향했다. “당선이 확정된 직후에 청와대 경호팀이 우리에게 왔어요. 오랜 세월 정보기관의 미행과 감시만 받다가 갑자기 경호를 받게 되니 어색하고 낯설었어요.”

1997년 12월 대선 직후 이희호는 남편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고자 부부의 평생 후견인 이태영 박사를 방문했다. 하지만 치매로 알아보지 못한 이태영은 1년 뒤 별세했다. 사진은 71년 대선 때 법복까지 벗고 김대중 유세 지원을 나온 이태영(오른쪽)과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 대선 직후 이희호는 남편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고자 부부의 평생 후견인 이태영 박사를 방문했다. 하지만 치매로 알아보지 못한 이태영은 1년 뒤 별세했다. 사진은 71년 대선 때 법복까지 벗고 김대중 유세 지원을 나온 이태영(오른쪽)과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태영은 병환으로 누워 있었다. “선생님, 바라시던 대로 대통령이 됐어요.” “뭐라고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이희호는 이태영을 일으켜 앉히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태영은 이희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댁은 누구시오?” 이태영은 이희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어요. 그렇게 단정하던 선생님이 치매를 앓고 계셨어요.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까 동행한 박영숙씨와 이종옥씨가 온갖 방법으로 선생님의 정신을 깨우려고 했는데 다 허사였어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지요. 여성, 약자의 인권을 위해 한평생 노력하셨던 분인데 치매로 무너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댁을 나서면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이태영은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이 늘 ‘김대중 같은 사람을 대통령 못 시키는 것은 우리 국민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요.”

미국·일본·중국·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머리기사로 알렸다. <뉴욕 타임스>는 “전 국민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비전과 리더십을 갖춘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국민들에게 행운”이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에 견줄 위대한 정치적 사건”이라고 평했다. 독일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동방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냉전 종식의 반석을 놓았듯이 많은 한국인은 김대중 당선자가 남북한 화해의 길을 발견해 동아시아 냉전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보도했다.

12월19일 오전 9시 김대중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통령 당선자로서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다시는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입니다. 앞으로는 시장경제에 적응해서 세계적인 경쟁을 이겨내는 기업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경제의 목적은 국민의 행복입니다. 서민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여 우리 경제가 민주적 시장경제로 발전해나가는 시대를 열겠습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아침에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오후에 수유리 4·19묘지를 참배했다. “4·19묘지를 참배하고 나오는데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민가협·유가협 어머니들을 만났지요. 민주화 투쟁 중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우리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고요.”

12월19일 새벽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김대중에게 전화를 했다. “민주주의와 정치 진보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김대중 당선자께서 위대한 승리를 한 데 대해 축하와 존경을 보냅니다.” 클린턴은 당선 축하 인사를 한 뒤 곧바로 국제통화기금(IMF) 합의사항 이행을 촉구했다. “남편은 당선이 되면 한적한 곳에서 차근차근 국정 구상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모두들 남편만 찾았지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쌓인 피로를 풀 틈도 없었어요. 청와대에 들어갈 때까지 하루도 쉬지 못했지요.”

19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 당선의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김대중은 텅빈 국고와 국가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회의 당사로 찾아온 데이비드 립튼(맨왼쪽) 미국 재무차관과 스티븐 보스워스(가운데) 주한 미대사와 국제통화기금 관련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19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 당선의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김대중은 텅빈 국고와 국가부도 위기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회의 당사로 찾아온 데이비드 립튼(맨왼쪽) 미국 재무차관과 스티븐 보스워스(가운데) 주한 미대사와 국제통화기금 관련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12월20일 오전 김대중은 경제부총리 임창열의 보고를 받았다. 외환 보유고는 12월18일 현재 38억7000만달러였다. 나라의 금고가 사실상 텅 비어 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돈마저 하루에 4억~5억달러씩 줄어들고 있었다. “남편은 나라 금고 사정이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탄식했지요.” 임창열은 “외채와 외환 관리를 소홀히 하고 환율 방어에만 매달린 것이 위기를 키웠다”고 보고했다. 구제금융이 들어오지 않으면 연말에 71억달러의 국가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그날 김대중은 대통령 김영삼과 만나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6가지 항목’에 합의했다. 12인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설치됐다.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은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가 맡았어요. 남편은 김용환 부총재의 능력을 신임하고 있었지요.”

김대중은 김영삼과 만난 자리에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을 요청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2·12, 5·18 주범으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 형을 각각 선고받고 복역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22일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정치보복을 반대한다고 밝혔어요.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도 가해자들을 용서하겠다고 했고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사면·복권은 남편의 신념을 실천한 것이었어요. 나는 그이들이 저지른 죄는 나쁘지만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경제는 악화일로를 질주했다. 부도 기업 수가 전해보다 열 배나 늘어 1997년 한 해 동안 1만7000곳에 이르렀다. 1996년 말 12.6%이던 이자율은 1997년 12월23일에는 31.1%까지 뛰었다. 환율은 1996년 말 1달러에 844원이던 것이 1997년 말에는 1965원까지 갔다. 1인당 국민소득은 곤두박질치더니 이듬해 6700달러까지 떨어졌다.

12월22일 미국 재무부 차관 일행이 한국에 왔다. 미국은 ‘아이엠에프 합의’ 외에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을 요구했다. “남편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2년 동안 유예하겠다고 선거기간 중에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깨면 노동계가 반발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국가부도를 막으려고 어쩔 수 없이 수용했지요.” 크리스마스 직전에 국제통화기금의 100억달러 긴급지원 통보가 왔다. 눈앞에 닥친 부도 위기를 넘겼다.

12월25일 김대중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국민회의 부총재 이종찬이 위원장을 맡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에서 각각 12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남편은 김중권씨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했어요.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사람을 비서실장으로 들이는 걸 보고 모두들 놀랐지요. 탕평인사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결정이었어요.”

대통령 당선자로서 김대중은 외국에서 온 중요 인사들을 집에서 만났다. “남편은 외국 손님들을 일산 집으로 초대했어요. 아침·점심·저녁 식사 약속이 빼곡하게 차 있었어요.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IBRD) 총재,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 같은 이들이 우리 집으로 왔어요. 남편과 나는 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지요.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요.”

1998년 초 외채는 1500억달러에 이르렀다. 3월 말 안에 갚아야 할 빚이 251억달러였다.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다. 1월12일 시민, 소비자, 농민, 종교단체 인사들이 중심이 돼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발대식을 열었다. 추기경 김수환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함께 참석한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가 “십자가를 내놓아도 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몸도 바쳤는데 나라를 살리는 일에 십자가를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대답했다. 발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금반지·금목걸이를 내고 그 대신 통장이나 ‘3년 만기 국채’ 위탁증서를 받았다.

1997년 12월19일 대통령 당선 첫날부터 ‘텅 빈 국고’를 채워야 하는 경제위기에 직면한 김대중은 금 모으기 운동을 제안해 전국민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이희호도 99년 1월15일 농협농앙회 본부에서 비둘기모임 회원들과 함께 김홍일 돌반지 등 금붙이를 기탁하며 운동에 앞장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19일 대통령 당선 첫날부터 ‘텅 빈 국고’를 채워야 하는 경제위기에 직면한 김대중은 금 모으기 운동을 제안해 전국민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이희호도 99년 1월15일 농협농앙회 본부에서 비둘기모임 회원들과 함께 김홍일 돌반지 등 금붙이를 기탁하며 운동에 앞장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금 모으기 운동’은 남편이 1997년 말에 소비자보호단체 간부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처음 제안했던 거였어요. ‘우리나라가 연간 60억달러의 금을 수입하는데 상당 부분이 금고에 쌓여 있으니 금 모으기 운동을 해서 내다 팔면 달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거든요. 3년 정도 뒤에 이자를 더해 금값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면 될 것이라고 방법도 이야기했고요.”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자 참여 열풍이 불었다. “우리 부부도 집에 있던 금붙이를 다 모아서 내놨지요. 홍걸이 돌반지도 있었어요.” 3월까지 전국에서 350만명이 참여했다. 모인 금은 226톤에 이르렀다. 시세로 21억5000만달러어치였다.

“그때 정말로 많은 국민들이 나섰어요.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내놓고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내놓기도 했고요. 그때 일본에 살던 재일동포들이 특히 많이 참여했어요. 조국이 어려우니 돕자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모은 금은 곧바로 달러로 바뀌었다. 1998년 2월 수출이 21%나 늘어나 무역흑자가 32억달러에 이르렀다. 그중 금 수출액이 10억5000만달러였다. “남편은 금 모으기 운동을 보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외국에서도 한국을 다시 보고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어요. 결국 아이엠에프에서 빌린 돈을 예정보다 3년 앞당겨서 3년 반 만에 다 갚았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