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15대 대통령 취임식장에 이희호는 남편 김대중과 나란히 섰다. 40여년 수많은 죽을 고비와 고난을 뚫고 맞은 영광의 무대였으나 당장 국가부도 위기를 넘겨야 하는 중압감에 부부는 크게 한번 웃을 수도 없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평전] 68회 제6부 청와대 시간 2회 - 국민의 정부
외환위기가 불러온 경제 혹한이 온 나라를 덮쳤다. 김대중은 1998년 1월13일 4대 재벌 회장들을 만났다.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중소기업 협력 강화, 지배주주·경영진의 책임성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5개항에 합의했다. 김대중은 재벌 총수의 사재 출연도 요구했다. 이날 한국노총이, 이튿날에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남편은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적 합의 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노동자·사용자·정부가 함께하는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었지요.” 김대중은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교직원노조를 1999년 7월부터 합법화하기로 약속했다. 공무원직장협의회도 1999년 1월부터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실업 대책 재원도 5조원으로 늘렸다.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이희호는 청와대를 방문했다. “1997년 말에 김영삼 대통령 부부 초청으로 청와대 만찬에 갔어요. 부부 동반으로 한자리에 앉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손명순 여사는 그 전에 국회의원 부인 모임에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대화를 한 적은 없었어요. 2월 중순에 다시 청와대에 갔을 때 손명순 여사가 청와대 관저 내부를 보여주었어요. 나라가 어려운 때여서 관저 내부를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입주했지요.” 2월22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가족을 모두 불러 저녁 식사를 했다. “남편이 아들들에게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지요. 김영삼 대통령 아들이 소통령 소리를 들어서 민심이 떠났잖아요. 나는 ‘아버지가 국정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조용히 살자’고 얘기했지요.” 2월24일에는 김대중의 비서 출신 정치인들이 임명직 공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998년 2월25일 ‘국민의 정부’로 이름 붙인 새 정부가 출범했다.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김대중은 취임사에서 국난을 맞은 상황을 침통하게 설명했다.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잘못은 지도층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파탄의 책임은 장래를 위해서도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합니다.”
김대중은 취임사에서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아 정보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꿈도 밝혔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습니다.” 김대중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김대중은 한나라당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늘의 난국은 다수당인 야당의 협력이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십시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김종필 총리 인준안 거부 당론을 재확인했다. “한나라당이 김종필 총리 인준을 6개월이나 해주지 않았어요. 대통령 선거로 국민이 공동정부를 승인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야당이 인정을 해주지 않아 참 안타까웠지요. 정부를 운영해야 하니까 남편은 김종필 총리서리 체제를 출범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취임식이 열린 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축하 리셉션이 열렸다. 전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필리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전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다케시타 노보루, 전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미국 팝가수 마이클 잭슨이 참석했다. “우리는 리셉션을 끝낸 뒤 밤 9시쯤 관저로 갔어요. 안방이 너무 커서 부담스러웠어요.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고요. 역대 대통령이 머물던 방이라 여러 생각이 났어요. 남편과 함께 고생하던 시절, 교도소에 면회하러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지요.”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는 일이 시급했다. 청와대에 들어간 김대중과 이희호는 호칭부터 바꾸었다. “남편은 ‘각하’라는 말 대신 ‘대통령님’으로 부르라고 했어요. 나도 ‘영부인’ 대신 ‘여사’로 불러 달라고 했지요. 영부인이라는 건 ‘대통령 부인’이라는 뜻인데 대통령 부인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고, 또 나이가 들었으니까 여사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했지요.” 호칭 변경과 함께 청와대와 정부의 권위주의 문화도 바뀌었다. “경호실장 직급을 차관급으로 낮췄어요. 또 총무수석비서관 직급도 비서관으로 한 단계 낮춰, 동교동 시절부터 집안 살림을 맡았던 박금옥씨를 임명했지요. 알뜰하기가 이를 데 없었어요.”
김대중은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을 걸지 말라고 지시했다. “휘호를 써서 현판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어요. 예외적으로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을 때 이종찬 원장의 부탁으로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을 써주었어요. 남편은 검찰과 정보기관의 피해를 많이 봤잖아요. 그래서 검찰과 안기부가 민주인사를 탄압하던 과거의 잘못을 씻고 제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지요.” 청와대도 시민에게 개방했다. “청와대 문을 열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했어요. 우리가 청와대에 있던 5년 동안 127만명이 찾았다고 해요.”
대통령 부인의 일정과 활동을 관리하는 제2부속실의 살림은 궁색했다. “제2부속실에는 별도 예산이 한 푼도 없었어요. 고아원에라도 가려면 총무비서관실에서 돈을 타다 써야 했어요. 제2부속실 실비로 나오는 게 한 달에 100만원이었는데, 그중에 30만원은 운전기사 보조에 쓰고 20만원은 9급 대졸 직원 월급이 너무 적어 거기에 주었어요. 50만원으로 제2부속실에 오는 손님들 차 대접을 했지요. 첫해 추석을 맞아서 장관·차관·비서관 이런 분들에게 추석 선물을 하는데, 값이 싼 곶감을 보냈어요. 그런데 곶감이 곰팡이가 슨 것이어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아이엠에프 한파’가 몰아치던 때라 청와대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맸다. “4월에 런던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가 열렸어요. 취임 뒤 첫 국제회의였어요. 대통령 특별기를 타고 갔는데, 모든 걸 다 줄였어요. 기내에서 마시던 프랑스제 포도주도 국산으로 바꾸고, 기내식 식단도 줄이고요. 승무원도 18명에서 12명으로 줄였어요. 수행원들도 2인1실을 사용해 숙박료를 아꼈지요.” 관저 생활에도 경제 한파가 스며들었다. “관저 생활비로 한 달에 200만원이 나왔어요. 청와대에 살면 산해진미를 먹는 줄 알았는데, 동교동에 살 때보다 못했어요. 음식이 입맛에 맞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나중에 퇴임할 때 6억원을 남겨서 넘겨주었어요. 박금옥 비서관이 마른 수건 짜듯이 돈을 아꼈지요.”
이희호는 제2부속실 인사를 할 때 지역과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제2부속실 직원이 네댓 명 됐는데 호남 출신이 1년 동안 한 명도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니까 내가 기독교인이지만 종교를 따지지도 않았고요.” 이희호는 청와대에 들어간 뒤 교회 예배를 2주에 한 번으로 줄였다. “늘 다니던 창천교회로 가려면 경호인원이 따라붙어요. 나 개인의 신앙생활 때문에 경호원이 여러 사람 동원되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주민이나 교인들에게 불편을 줄까 염려가 되기도 했고요. 아예 안 갈 수는 없고, 그래서 2주에 한 번으로 줄였지요.”
1998년 4월26일 이희호는 청와대 관저에서 사고를 당했다. 고관절 골절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모처럼 쉬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집무실로 갔어요. 책상에 앉으려는 순간 바퀴 달린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어요. 지독히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사람을 부르는데도 관저가 넓어서 대답이 없는 거예요. 20분쯤 그대로 있었지요. 한참 뒤에 부속실 남자 직원이 달려와 경복궁 옆 육군지구병원으로 옮겼어요. 오른쪽 고관절이 골절이었어요. 그날 밤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을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는데, 그 뒤로도 한 달 가까이 고생을 했어요. 남편이 나더러 ‘어떻게 오른쪽 고관절까지 나를 따라서 다치냐’고 농담을 했지요. 5월5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어요. 다행히 내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어서 남편이 미국에 갈 때 동행할 수 있었지요.”
1998년 6월4일 지방자치제 선거가 열렸다.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회의는 광역자치단체장선거에서 서울·경기를 포함해 6곳을 차지했다. 자민련은 인천을 비롯해 4곳에서 승리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6곳을 차지했다. 또 전국 기초자치단체장 232곳 중 국민회의는 84곳, 자민련은 29곳, 한나라당은 74곳에서 당선자를 냈다. 무소속 당선자는 44명이었다. 서울·경기·인천의 수도권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압승을 거두어 공동정부에 힘이 실렸다.
6월6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첫 미국 국빈방문이라 남편은 준비를 많이 했어요. 15차례가 넘는 연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편은 주요 연설을 모두 영어로 준비했어요. 영어 발음이 좋은 비서관에게 부탁해 연설을 녹음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테이프를 듣고 따라했지요.” 6월9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클린턴은 환영사에서 김대중을 바웬사·하벨·만델라와 함께 ‘자유의 영웅’으로 내세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의 개척자이고 용기 있는 생존자이며 세계를 위해 더 좋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동반자입니다.”
김대중과 클린턴은 65분 동안 단독정상회담을 했다. 김대중은 클린턴에게 30분 동안 ‘햇볕정책’을 설명했다. “햇볕정책은 따지고 보면 미국의 성공에서 배운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은 극단적인 냉전제제를 유지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기경쟁뿐이었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데탕트 정책으로 바꿨고 경제협력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15년 정도 지나 소련이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외부에서 총 한방 쏘지 않았지만 붕괴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인류 역사에 일찍이 없었습니다.” 김대중은 미국이 중국과 베트남에도 화해정책을 펴 개방으로 이끌었음을 강조했다. “반면에 쿠바는 40년 동안 봉쇄하며 압박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만일 쿠바와 국교를 수립했다면 쿠바는 이미 개방했을 것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를 대할 때 군사적 힘으로 도발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방을 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 햇볕정책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통해 이미 검증을 마친 것입니다.”
클린턴은 김대중의 주장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남편의 설명을 듣고 ‘김대중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고 답했다고 해요. 클린턴 대통령의 말은 우리나라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북정책을 주도하게 됐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발언이었지요. 남편은 한-미 관계가 대등해지고 자주외교의 새 장이 열렸다고 기뻐했어요. 대통령들끼리도 궁합이 맞는 사람,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남편과 클린턴은 서로 잘 맞았어요.”
그날 저녁 클린턴 주최로 국빈만찬이 열렸다. 만찬장에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벌인 해프닝이 화제가 됐다. “백남준씨 부부도 만찬에 초청받아 참석했는데, 그이가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있었어요.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려고 일어서다가 멜빵에 멘 바지가 흘러내렸어요. 속옷을 안 입고 있어서 사람들이 놀라고….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을 풍자하려고 계획적으로 그런 것 같았어요. 모두들 웃고 야단이었지요.”
6월11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날을 ‘김대중의 날’로 선포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망명생활을 할 때 우리를 뜨겁게 지지해준 곳이었어요. 자유롭고 진보적인 도시지요. 남편은 스탠퍼드대학과 실리콘밸리를 방문해서 한국을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했지요. 벤처기업들한테 한국에 투자하라고 호소도 하고요.” 6월12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로스앤젤레스도 방문했다.
“엘에이 다저스의 박찬호 선수가 리셉션에 왔어요. 박찬호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니까 우리 국민들이 아주 좋아했잖아요. 프로골퍼 박세리 선수도 그 시절에 국민 스타였고요. 박찬호 선수는 그 뒤로 우리와 가까워졌어요. 퇴임 뒤에도 동교동에 찾아왔고, 한번은 약혼녀와 함께 오기도 했지요.”
로스앤젤레스 방문 때 이희호는 두 다리가 없는 한국인 입양아 애덤 킹(한국명 오인호)을 만났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입양아 80여명과 함께 아침을 먹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두 다리에 의족을 한 아이가 있었어요. 네 살 때 입양된 애덤 킹이라는 아이였는데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요. 한국에 갈 수 있느냐고요.” 이희호는 애덤 킹에게 한국을 방문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했는데, 경비가 문제였어요. 애덤 가족만 초청할 수도 없고요. 그 행사에 참여했던 장애 아이들과 가족을 합치면 40명도 넘어요. 청와대에서는 그 많은 경비를 댈 여력이 없다고 해요. 걱정만 하고 있는데 아시아나항공 박성용 명예회장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런 좋은 일이라면 우리가 돕겠다’고 나서서 비행기 표를 얻을 수 있었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98년 4월26일 이희호는 청와대 관저에서 의자에 앉으려다 넘어져 고관절 골절상을 당해 한달간 치료를 받았다. 김대중은 “부상도 따라하느냐”고 농담했다. 사진은 5월5일 어린이날 행사 때 휠체어를 탄 이희호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6일 김대중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방문길에 올랐다. 사진은 6월9일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이희호와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오른쪽)이 나란히 서서 한·미 정상의 연설을 듣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10일 미국을 국빈방문한 김대중·이희호 대통령 부부를 위해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만찬에 초대받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하의 실종’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풍자해 화제를 모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 이희호는 미국 국빈방문 때 로스앤젤레스 교민환영회에서 만난 의족소년 애덤 킹을 비롯한 한인 장애 입양아들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약속했다. 2001년 4월6일 아시아나항공의 후원으로 한국에 온 애덤 킹과 청와대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