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이철희 의원의 북유럽 탐방기
올여름, 북유럽이 대세다. 지난달 여야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따뜻한 미래를 위한 정치기획’(정치기획)이 스웨덴·덴마크를 다녀온 데 이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성평등 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다.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곧 조선산업 구조조정 사례를 공부하기 위해 스웨덴을 찾을 예정이고,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핀란드와 스웨덴을 방문해 방사성 폐기물 처리 프로그램을 견학할 계획이다. 방문 목적은 모두 다르지만, 북유럽이 이들을 불러모으는 이유는 그곳의 삶에서 한국의 난제를 풀 수 있는 혜안을 발견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일 것이다. 지난달 21~30일 스웨덴과 덴마크를 둘러보고 온 ‘정치기획’의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복지국가 견학기’를 보내왔다.
스웨덴 서비스통신노조(SEKO)를 방문한 모습.
스톡홀름에서 설레는 맘을 가라앉히고 복지국가에 대한 오랜 열망 때문이었을까, 가슴이 무척 설렜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에 내리면서 대학 새내기 때 읽었던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떠올렸다. 스웨덴이 만들어낸 사회, 그것이 아무리 멋진 복지국가라고 해도 결코 우상으로 대하진 않으리라. 들뜨지도 삐딱하지도 않은 이성으로 이 사회를 보고 판단하리라. 열흘 동안 강병원·금태섭·기동민·박용진(이상 더민주)·이양수(새누리) 의원과 스웨덴·덴마크를 둘러본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밝고 온화하고,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행복은 뭔가를 이루거나 얻었을 때 느끼는 성취로서 행복이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자신이 자기 삶의 통제권을 행사함으로써 느끼는 안정으로서의 행복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도는 바이커에게도, 거리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는 스모커의 얼굴에도 그런 행복이 있었다. 오죽하면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의 칼스버그 광고판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써놓았으랴. 물론, ‘행복국가’에 사는 그들에게도 걱정은 적지 않았다. 현지에서 만난 관료나 노동조합 활동가, 학자 등 대부분이 그들이 풀어가야 할 여러 숙제에 대해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은 이것이다. ‘복지국가를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곧 유토피아는 아니라는 핑계로 복지국가를 배척하는 것도 잘못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보통사람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먹고살 걱정 안 해도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성공했는가.’
“국가는 모든 국민을 위한 좋은 집이 돼야 한다”
스웨던 노·사·정이 합의한 복지국가 협약 우리가 찾은 스웨덴의 휴양지 살트셰바덴은 복지국가 건설의 이정표가 새겨진 곳이다. 살트셰바덴 협약은 1938년 12월에 노동조합총연맹(LO)과 스웨덴사용자연합(SAF) 간에 체결된 것으로, 당시 사민당(SAP)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성사됐다. 이 협약 때문에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빈곤국가이던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변화했다. 1860~1930년대까지 먹고살기 힘들어 스웨덴을 떠난 이민자가 150만명. 1900년대 초 인구가 450만 정도였다고 하니 인구의 3분의 1이 떠난 셈이다.(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3등칸에도 스웨덴 이민자 400여명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살트셰바덴 협약을 이끌어냈고, ‘국가는 모든 국민을 위한 좋은 집이 되어야 한다’며 복지국가를 주창했던 페르 알빈 한손(1885~1945년) 총리의 리더십에 대해 토론했다. 스톡홀름에선 스웨덴 복지국가를 현대화했다는 평가를 듣는 올로프 팔메(1927~1986년) 전 총리의 묘소를 찾았다. 올해는 팔메가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진 지 꼭 30년.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누리며 나이를 먹어 쇠약해졌을 때도 삶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목적과 연대의 목적은 모두 사회의 자원을 활용하며 구성원이 그들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팔메의 원대한 이상을 되새겼다. 팔메의 꿈은 솔렌투나라는 도시의 요양원에서 만난 한 ‘할머니 직원’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간호사로 일했고, 이제는 요양원의 매니저로서 노인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밝고 편안한 미소가 가득했다. 살이 포동포동 찐 닭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햇살 좋은 요양원 마당에 서서 그는 자상한 외할머니처럼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세상을 떠나는 노인들에게 가능한 한 더 많이 베풀려고 애쓰는 그들의 ‘사회적 사랑’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스웨덴 말뫼에 있는 세계해사대학 문성혁 교수(맨 오른쪽 얼굴 가린 이)가 말뫼의 도크가 있던 자리에서 당시 조선소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조선소 폐쇄된 ‘말뫼의 눈물’ 닦은 건 정치 리더십 이번 탐방에서 말뫼는 조선·해양산업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눈앞에 둔 한국의 정치인들이 꼭 찾아가봐야 할 곳이었다. 지난 6월 20대 국회 개원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스웨덴 말뫼의 세계적인 조선업체 코쿰스가 문을 닫으면서 골리앗 크레인이라 불리던 핵심 설비를 단돈 1달러에 넘긴 ‘말뫼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말뫼의 조선소가 폐쇄된 것은 1986년. 현지에서 만난 국제해사대학(WMU) 문성혁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니, 한국 등 후발주자들의 등장으로 코쿰조선소가 경쟁력을 잃어 한동안 정부가 회사를 인수해 운영하다 문을 닫았을 때만 해도 도시 재생을 위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말뫼시와 노동자들이 조선소 폐쇄를 처절하게 반대하는 건 당연했다. 말뫼의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리더십이다. 우선 중앙정부는 조선산업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폐쇄를 결정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사민당 정부로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으로는 1994년에 등장한 사민당 소속 일마르 레팔루 시장이다. 레팔루는 이후 2013년까지 19년간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말뫼 살리기에 나섰다. 지식환경도시로 바꾸기 위해 정보기술(IT) 산업을 유치하기로 하고, 낮은 임대료로 그들을 유혹했다. 말뫼와 덴마크의 수도를 잇는 외레순 다리를 건설해 말뫼-코펜하겐을 하나의 대도시로 묶어냈다. 코펜하겐-말뫼 통합 항만당국(CMP)의 설립으로 두 도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할 수 있게 됐다. 말뫼는 북유럽에서 완성자동차의 물류거점으로, 코펜하겐은 크루즈선 중심 항만으로 역할분담을 해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1998년 말뫼대학교의 설립도 도시 활성화에 도움을 주었다. 조선소 터에 지어진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터닝 토르소’는 말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박 대통령이 보여줄 것은 남탓과 시간끌기가 아니라 과감한 결단과 도시 재생의 담대한 비전이 아닐까.
덴마크 장애인복지협회를 방문한 모습.
대화·타협·합의…그들이 복지국가를 만든 방법 23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스웨덴 모델의 기틀을 잡은 타게 엘란데르(1901~1985년) 총리는 매주 목요일 만찬을 열어 재계와 노조 인사들을 초대하는 ‘목요클럽’을 운영했고, 매년 여름휴가철엔 여름별장인 하르프순드에서 정계·재계·노동계 인사들을 초청해 국정 전반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하르프순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스톡홀름의 하가성(城)으로 정당의 대표들을 오게 해 정치적 동의를 구하는 ‘하가의 협상’(Haga deal)을 펼쳤다. 덴마크의 사회민주당 등 진보세력 역시 1901년 이래 115년 동안 단 한 번도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적이 없으면서도 공감과 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어냈다. 복지국가는 혁명이나 운동이 아니라 정치로 이뤄졌고, 그것도 타협의 정치로 만들어졌다.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면 폭넓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정책을 찾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뭉칠 수 있는 단단한 동맹을 형성해야 하며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지상과제이다. 북유럽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흔히 ‘작은 보폭의 정치’라고 표현한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지은이 니크 브란달은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도 어렵지만 작은 보폭, 즉 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뤄내는 유능한 정치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초선 의원 여섯 명이 스웨덴·덴마크 방문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