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현관 건물인 프로필레아에서 바라본 프닉스 언덕. 프닉스 언덕은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개혁 뒤 아테네의 민회가 열리던 곳이다. 유재원 교수 제공
아크로폴리스의 현관 건물인 프로필레아에서 반대편 언덕을 바라보면 프닉스 언덕이 보인다. 이곳은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개혁을 한 다음해인 기원전 507년부터 아테네의 민회가 열리던 곳이다. 그전까지 민회는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는 아고라에서 열렸다. 바로 이 언덕에서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테이데스, 페리클레스,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아테네의 출중한 정치가들이 민중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또 아테네의 영광이 운을 다해가던 기원전 4세기에는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비방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탄생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소인 이 프닉스 언덕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아, 입장료조차 받지 않는 외면받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언덕을 가득 채운 민중 때문에 숨이 막혀 ‘프닉스’(숨 막힘)라 불린 이 언덕에 지금은 텅 빈 바위들과 연단으로 쓰이던 인공계단만 쓸쓸히 남아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6000명에서 1만3000명을 수용하기 위해 반원형 목조 테라스를 만들기도 했지만 기원전 1세기 들어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민회 장소를 옮기면서 버림받게 됐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이 언덕은 치유의 신인 ‘제우스 히프시스토스’의 성소로 변질되어 기복 신앙의 장소로 전락했다.
해 질 무렵 이곳에 서서 석양에 물드는 아크로폴리스의 모습을 바라보면 예술은 길고 정치는 짧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이 아크로폴리스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프닉스 언덕을 더욱 덧없게 만든다.
그리스 아테네 ?프닉스 언덕의 연단 모습. 한때 언덕을 가득 채운 민중 때문에 숨이 막혀 ‘프닉스’(숨 막힘)라고 불린 이 언덕에 지금은 텅 빈 바위들과 연단으로 쓰이던 인공계단만 쓸쓸히 남아 있다. 유재원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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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의 인물됨
민주파의 지도자 에피알테스가 암살당하고 귀족파의 지도자 키몬이 도편추방을 당한 기원전 461년부터 페리클레스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 기원전 429년까지의 32년을 흔히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페리클레스는 몇 년을 제외하고 매해 장군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특히, 그의 최대 정적이던 보수파의 우두머리 투키디데스(역사가 투키디데스와는 다른 인물)가 도편추방당한 기원전 442년부터는 14년 동안이나 연속으로 장군으로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최고의 권력자 자리인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최고 사령관)로 뽑혀 거의 전권을 휘두르며 아테네를 그리스 세계의 최고 국가로 이끌었다. 이런 페리클레스를 보고 당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말로는 민주정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군주”라고 평했다.
페리클레스의 집안은 아테네 최고 명문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가 출신으로 기원전 479년에 미칼레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궤멸시킨 크산티포스 장군이었고, 제1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는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귀족파의 우두머리 밀티아데스에 맞서 민주파를 이끈 정치가였다. 또 그의 어머니는 아테네의 귀족 가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집안인 알크마이온 집안 출신으로 기원전 506년에 민주화를 이끌던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사자 새끼를 낳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한다. 이런 훌륭한 집안 배경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95년에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 때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아홉 살이던 기원전 484년에는 아버지 크산티포스가 도편추방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15~16살에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졌다. 이런 경험이 그를 어려서부터 신중하게 말을 하고 행동하도록 만든 것 같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는 젊어서부터 시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귀족 출신 부자인데다 그의 친구들까지 모두 귀족 출신이었기에 혹시 도편추방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더구나 생김새부터 목소리와 말투까지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너무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더욱 그런 위험이 크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젊어서는 정치를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정치를 시작했을 때는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아버지 크산티포스처럼 수가 적은 귀족 부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다수인 가난한 민중 편에 섰다.
페리클레스가 처음으로 민중 앞에 나선 것은 23살 때인 기원전 472년이다. 그해에 그는 아이스킬로스의 연극 <페르시아인들> 공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코레고스(choregos)를 맡았다. 34살 때인 기원전 463년엔 장군으로 처음 선출되었다. 그해에 에피알테스를 비롯한 민주파가 키몬을 뇌물수수죄로 고발했을 때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회계보고서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민주파를 대변하는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가 암살당하자 페리클레스는 민주파의 지도자로 정치판 한가운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민주파의 지도자가 된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1년 귀족파의 지도자이자 자신의 최대 정적인 키몬을 도편추방하는 데 성공하고 아테네의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했다.
권력을 얻은 후에도 페리클레스는 항상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우선, 그는 권력이 있는 친구의 저녁 식사 초대에 가지 않았다. 대중 앞에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나서고 보통은 자신의 친구들을 시켜 연설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연설에 천재적이어서 그가 연설할 때는 천둥 번개와 같은 웅변을 했다고 한다. 그는 연설에 철학과 과학적 지식을 많이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책을 남기지는 않았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그의 연설 몇 개가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스 아테네 프닉스 언덕 모형도. 프닉스 언덕은 민주주의 탄생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소지만, 지금은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유재원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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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의 정책들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내놓은 법안은 극장 관람 비용을 국가가 지출하여 모든 시민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런 조처로 이제는 가난한 시민들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그다음으로 기원전 454년에 델로스 섬에 있던 델로스 동맹의 공동 자금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옮기는 조처를 취했다. 그런 거금을 언제 약탈당할지 모르는 섬에 놓아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에게해는 아테네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구실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보다는 동맹 기금을 아테네에 가져와서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과연 이 일이 있고 난 직후, 페리클레스는 재판에 동원된 배심원들에게 2오볼로스씩 수당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당시 하루 임금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페리클레스가 이런 조처를 한 것은 부자인 키몬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키몬은 부자였기에 공공 의무를 거창하게 수행하고 자신이 속한 데모스 사람들에게 인심을 많이 썼다. 그의 데모스 시민 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식량을 얻어 갈 수 있었고, 그의 밭에 울타리를 치지 않아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과일을 따 갈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니었기에 시민에게 자신들의 것인 공금에서 일당을 지급하여 키몬의 부에 대항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금에서 일당을 지급하는 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찾아가게 하려는 배려라고 주장했다. 공직 수행에 따른 일당 지급 제도는 나중에 아르콘과 의원들에게까지 확장된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선동정치가 클레오폰은 민회에 참석하는 시민에게 일당을 주는 민회 수당을 덧붙였다.
페리클레스가 취한 또다른 정책은 아테네의 최고 행정직인 9명의 아르콘 선출에 관한 것이다. 솔론의 개혁 때 아르콘은 말을 키울 수 있는 경제력 이상을 가진 상위 두 계층에만 허용된다는 제한을 두었다. 그 후 기원전 487년부터 아르콘을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귀족에게 유리한 선거 대신 그렇지 않은 시민에게도 기회가 돌아가는 추첨으로 뽑는 개혁을 했지만, 재산 정도에 따른 차별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힘을 인식한 아래 두 계층의 시민은 이런 차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아레이오스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민회로 넘긴 기원전 462년에는 하류 두 계층의 시민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가난한 시민들의 이런 끈질긴 정치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아니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페리클레스는 결국 기원전 455년, 아르콘으로 뽑힐 수 있는 재산 자격을 낮춰 세 번째 계층인 제우기타이도 아르콘에 뽑힐 수 있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재산을 과장해서 신고하는 일을 눈감아 주는 방식으로 최하층에게도 아르콘 자리가 허용되었다. 이로써 ‘법 앞에서의 평등’(isonomia), ‘발언의 평등’(isegoria)에 이어 ‘권력에서의 평등’(isokratia)까지 이루어지면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 이제 국가의 모든 면에서 일반 시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끝으로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1년 아테네 시민권을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나중에 페리클레스는 이 법 때문에 자신이 밀레토스 출신 아내 아스파시아에게서 얻은 아들이 아테네 시민권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민회에서 눈물로 호소해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법적 개혁과 함께 가난한 시민을 위해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60척의 순시선을 만들어 아테네 청년들로 하여금 일정한 수입과 기술 습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또 트라케 반도의 식민지에 1000여명, 반란을 진압한 낙소스에 500명, 안드로스 섬에 250명을 이주시키는 등 해외에 식민도시를 세워 가난한 시민들이 가서 살게 했다. 국내적으로는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세우는 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었다. 그가 이런 정책을 추진한 까닭은 도시에 거주하는 개혁 성향의, 민주적 성향의 하위 계층도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폴리스의 정치 제도와 정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민주적 제도의 확장과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 이후 아테네 함대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하위 계층 시민을 아테네의 손대지 않은 자원이자 아테네 군사적 우위의 결정적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사업으로 돈을 푸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은 강직하고 근검한 사람도 생활방식이 해이해지게 만드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특히, 귀족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개혁을 대중의 견해와 바람에 영합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선동정치가들의 출현으로 급격히 몰락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키몬의 손을 들어주는 듯 보인다. 민중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개개인에게는 좋지만 국가에는 해가 될 수도 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